7
경호원들이 마련해 준 리무진이 오후 늦게 런던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이오네는 생기에 넘쳐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런던에 와보는 것이었다. 어머니 덕분에 두 가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지만 아만다 가키스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대 사용했던 영어는 오빠가 죽고 난 뒤로 좀 약해진 편이었다. 그녀는 런던해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업가에게 자신의 영어 실력을 시험해 봤다. 남자는 말이 많은 편이었는데 그녀가 자기 나라 말을 약간, 그것도 매력적인 억양을 섞어 말한다고 하며 자신감을 북돋워 주었다.
이오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의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파리 집에서 찾아낸 열쇠를 사용할까 하다가 고용인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 우선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곤 막 열쇠를 꽂으려는데 문이 활짝 열렸다.
윤기 나는 밤색 머리카락이 소담스러워 보이고 맵시 나는 검정색 정장으로 늘씬한 몸매를 더욱 강조한 미녀가 미소를 머금고 밖을 내다보다 이오네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깜짝 놀랐지만 알렉시오 밑에서 일하는 여직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복도로 들어섰다. “저는 이오네 크리스토우라키스예요”
“파스칼 포르티에예요” 늘씬한 프랑스 여자가 저절로 닫히도록 문에서 손을 뗐다.
“우리 그이 밑에서 일하는 분인가요?” 이오네는 거실로 앞장서서 들어가 약간 실망스럽게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호텔이라고 해도 될 만큼 너무 개성이 없었던 것이다. 알렉시오는 분명히 회사 아파트라고 했지만 저렇게 다른 사람이 있으니 둘만의 오붓한 저녁 식사는 다 글렀다 싶어 크게 낙담했다. 뜻밖의 손님이 대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알아채고 이오네는 묻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뇨, 전 알렉시오의 직원이 아니에요” 파스칼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국적인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게 볼화장을 한 매력적인 얼굴이 굳어 있었다. “알렉시오가 당신이 여기 오는 걸 알고 있나요?”
“아뇨” 이 여자가 왜 화가 난 듯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지 의아해하며 이오네 역시 긴장했다. “여기에 묶고 계신가 보죠?”
상대 여자가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걸친 어깨를 으쓱하더니 희미하게 악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애인보다는 아내에게 우선권이 있을 테니 제가 짐을 싸야죠”
이오네는 첫마디 이후로는 듣지 못했다. 터질 듯한 충격의 여파가 온몸을 뒤흔들고 살갗을 서늘하게 했다. 애인? 고막 속에서 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상대 여자의 말이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다 순식간에 속이 울렁거리면서 모든게 제자리를 찾았다. 런던 아파트는 그녀에게 맞지 않을 것이며 너무 바빠서 함께 할 시간이 없을 거라고 한 알렉시오의 듣기 좋은 변명이. 그렇게 뻔한 일을 알아내치 못하다니 얼마나 어리석고 눈이 멀었단 말인가!
알렉시오는 그녀를 데리고 런던에 오기 싫었던 것이다. 그녀와 떨어진 36시간 동안 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사방에서 벽이 무너지고 마룻바닥이 발 밑으로 꺼지는 듯했다. 오그라드는 가슴을 안고 억지로 좀더 주의를 기울여 파스칼을 쳐다보았다. 크리스탈 덴비 스타일의 자신만만한 다갈색 미녀였다. 정확하게 알렉시오의 취향이었다. 그래, 어떻게 한순간이라도 작고 연약한 금발의 아내가 그런 남자에게 계속 매력적으로 보일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단 말인가?
이오네는 오직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말 없이 아파트를 나왔다. 가슴 사이에 땀방울이 맺혀 굴러내렸다. 알렉시오의 정부와 만난 충격으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둘로 갈라진 것은 그녀의 머리였다. 한편으로는 저 프랑스 여자가 알렉시오의 아파트에 있는 다른 이유를 맹목벅으로 알아내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알렉시오가 오늘밤 이곳에서 다른 여자의 품에 안겨 아내를 배신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알렉시오가 충실하진 않을 거라는 아버지의 경고가 있지 않았던가?
경호원들이 1층 프런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지하 주차장으로 호위해 갔다. 이오네는 이런 상황에서 시댁 식구들이 그녀가 어떻게 처신하길 바라는지 잘 알았다. 파리로 돌아가 런던에는 오지도 않았던 것처럼,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길 바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이중잣대에 맞추어 살도록 키워졌다. 여자는 얌전한 평판을 유지해야 하는 반면 남자는 몰래 조심하는 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배워 왔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도 남편의 부정을 최대한 모른 척했다. 하지만 달아나려고 하는 그런 순교자적인 정신은 이오네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채 벌써부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둘의 결혼이 애정 관계보다는 사업적 거래에 가깝다는 사실을 잊기로 했던 거지? 여성 편력이 심한 알렉시오의 나쁜 평판을 언제부터 생각하지 않은 거지? 사랑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사랑이 그녀를 비현실적인 기대로 채워 놓고 수치심과 괴로움에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실수를 인정하고 나약한 마음을 접은 다음 알렉시오에게 남편의 부정을 눈감아 주지 않을 거라고 분명히 해둘 때였다. 그래서 차안의 전화기를 집어들고 운전기사에게 알렉시오의 사무실로 가자고 명령했다.
“아뇨, 알리지 마세요” 이오네는 크리스토우라키스 사가 들어서 있는 고상한 건물의 사장 전용 층에서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하는 접수요원을 만류했다. “놀래주고 싶어서요. 그이 방이 어디죠?”
옆에 따라 붙어 5분 뒤에 아주 중요한 회의가 시작될 거라고 걱정스럽게 사과하는 충실한 비서의 말을 외면하고 이오네는 문을 세게 밀어 열었다. 그런 다음 뻣뻣이 등을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고 그 문에 기대섰다.
알렉시오는 통화 중이었다. 뒤로 높은 창문을 토해 들어온 햇빛이 숱 많은 검은 머리와 놀랄 만큼 아름다운 얼굴 윤곽과 움푹 들어간 멋진 안면 골격을 거쳐 허락도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온 인물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 비범한 눈을 매혹적인 금빛으로 물들어 놓았다.
그가 사뿐히 힘찬 동작으로 벌떡 일어서며 놀란 소리로 외쳤다. “이오네?”
막상 알렉시오를 보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이성과 감정 사이에 급히 세워 둔 초연한 태도가 무너졌다. 심장이 꽉 죈 목 밑에서 쿵쿵 울려 호흡이 곤란해졌다. 숨을 멎게 만드는 미소가 육감적인 입가에 떠올라 그 생생한 남성적 매력을 풍기는 갸름한 구릿빛 얼굴을 황홀한 카리스마로 환하게 밝혀 놓았다. 누가 봐도 아내가 불시에 런던에 온 것을 반긴다고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미소가 그녀를 교란시켰다. 하지만 반응을 감추는 저런능력은 그가 얼마나 저속하고 비열하고 교활한 인간인가를 강조해 줄 뿐이었다.
이오네의 속에서 더욱 격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안 그래도 팽팽히 당겨 있는 등을 더욱 곧추세우고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하지만 그를 증오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 결혼이 끝났다는 얘기를 해주려고 왔어요”
알렉시오는 이내 미소를 거두고 멍한 얼굴로 한결 같은 금빛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지금 뭐라고 했소?”
“우리 변호사들이 별거에 필요한 법적 조치를 취할 거예요” 이오네는 그렇게 공표하고 경직된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을 다시 보고 싶지도 않고 이 결정을 다시 생각해 보는 일도 없을 거예요”
“내 장담하는데... 당신은 이 문제를 오늘을 넘기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거요” 알렉시오는 엄청난 분노가 깃들은 눈을 번뜩이며 조용하고 나직하게 받아넘겼다. “그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 결혼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 거요!”
이오네는 안면 근육이 너무 팽팽히 당겨 마스크를 쓰고 있는 느낌이었고 말을 하려고 벌린 입술에도 핏기라곤 없었다. “아파트에서 당신 정부를 만났어요”
사태가 파악되자 알렉시오의 크고 힘찬 체구가 팽팽해지면서 억센 골격의 얼굴이 굳어지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내게 정부는 없소. 파스칼은 옛 여자 친구일 뿐이오. 아직 아파트 열쇠를 갖고 잇어서 오늘 아침 런던에 도착했다고 연락해 왔더군. 오늘밤 거기 묵어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저녁 먹으러 오라는 초대는 거절했소”
문 앞에 나타난 사람이 알렉시오가 아니라 이오네인 것을 발견하고 파스칼이 미소를 거두던 모습이 떠오르자 이오네의 입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날카로운 목소리르 내려고 애쓰며 엄중히 따졌다.
“당신은 내 아내니까 날 믿어 줘야 한다고 보오” 알렉시오가 버럭 화를 냈다. “비서르 시켜 오늘밤 내가 묵을 호텔을 예약해 뒀단 말이오”
“물론 현장을 들키지 않은 한 당신은 발뺌을 할 테죠” 이오네는 그가 아내의 의심을 비난으로 몰아붙일 속셈인 것에 분개하여 비난하듯 반박했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여전히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난 부정한 남편하곤 살지 않을....”
“내 말을 한 마디라도 들었소?” 알렉시오는 금빛 눈을 희미하게 번득이고 강한 턱을 공격적으로 치켜들며 윽박질렀다. “안 들은 것 같군. 이 사무실로 들어서기 전부터 내가 잘못했다고 판단했으니까. 내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여자에 관한 한 당신 평판을 알고 있으니까요” 이오네는 힘들게 얻은 평정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욱신거리는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목을 뒤로 젖혔다. “이런 결혼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거짓말과 속임수를 참고 살진 않을...”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당신은 아무 데도 못 갈 거요!” 알렉시오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고함을 질렀다.
“날 때리거나 협박해 봐야 소용없을 거예요!” 이오네는 자기 주장을 고수해야겠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숨막힌 소리로 외쳤다.
“당신을 때린다고?” 알렉시오는 그녀가 마치 자기 발 밑에 있는 땅을 폭발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핏기가 빠져나간 구릿빛 얼굴로 반은 겁에 질리고 반은 반항적으로 팽팽히 당겨 있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내가 때릴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오?”
괴로운 나머지 자신이 뭘 폭로했는지 깨달은 순간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아버지에게 맞았군....” 알렉시오는 그런 의심을 품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잠시 뒤 그렇게 말했다. “모든 남자들이 그런 줄 알고 있소? 난 평생 여자를 때려 본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어떻게 내가 당신을 해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소?”
이오네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덜덜 떨었다. 그는 마치 그녀에게 맞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새로 알게 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그의 한결 같은 시선엔 어떻게 그까지 그런 학대를 할 거라고 믿을 수 있었냐는 무뚝뚝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언제나 알렉시오 곁에선 안심할 수 있었고 그런 면에선 아버지와 다르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부끄럽고 당혹스러워 휙 돌아섰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녀는 고르지 못한 소리로 작게 말을 꺼냈다. “아빠에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리지 말아야 할 거예요. 그보다 못한 일로도 사람들을 수없이 파멸시킨 분이니까”
알렉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아 그녀가 이겨내려고 애쓰는 엄청난 혼란을 가중시켰다. 협박하거나 그녀의 공간을 크게 침입하려는 의도는 없는, 따뜻하게 안심시키는 포옹이었다. 그에게 기대 날렵한 근육질의 몸에서 나오는 힘과 열기를 다시 한 번 느껴 보고 싶은 엄청난 충동이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떠나기 전에 한번만 더.
“다시는 당신 아버지에게 맞는 일이 없을 거요” 알렉시오는 거친 소리로 장담했다. “내가 약속하겠소. 당신을 렉소스로 돌려보내지 않을 거요. 다시는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일이 없을 거요. 이제부터 당신은 안전할 거요”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 고통의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순간 알렉시오에게서 몸을 떼는 게 지금까지 그 어떤 일보다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나쁜 짓을 했어. 그녀는 괴롭게 자신을 일깨웠다. 그렇게 나쁘진 않을지 몰라도 신뢰할 수 없는 부정한 남편하고 살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고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게 그녀의 의무였다. 이 결혼을 유지한다면 미노스 가키스가 어머니의 인생을 파멸시켰던 것처럼 그도 그녀의 인생을 똑같이 만들 터였다.
“난 그 이상이 필요해요” 이오네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 뒤 나약해지는 마음을 떨치기 위해 온힘을 다해 보호가 돼주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돌아서서 다시 그를 대면했다. “당신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것이요”
알렉시오는 날이 선 짙은 금빛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난 당신에게 부정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어쩌면 정말로 굳게 믿고 있는지도 몰라. 이오네는 비참하게 그런 결론을 내렸다. 도발적인 파스칼의 매력에 굴복하기 전에 들켰기 때문에 죄책감에 자신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지도. 하지만 이제 너무 늦었다. 앞으로도 유혹을 받으면 그런 일은 숱하게 벌어지리라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그가 유난히 잘생긴 남자라는 사실과 함께 무자비한 권력과 엄청난 재산이 많은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터였다.
“멋진 신혼 여행이었어요” 이오네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솔직히 말했다. “ 하지만 당신 같은 남자와 사는 것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말은 악의 없는 진심이에요. 다른 여자의 무덤에 마음을 묻어 버린 남자와는...”
“이오네...” 알렉시오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말을 잘랐다.
“조건 없이 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없다면 차라리 혼자 살겠어요. 지금까지 그보다 못했어도 받아들이고 살았지만 더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괴롭게 나직한 소리로 맹세했다. “난 내 인생을 살 자격이 있고 미스티 언니를 찾을 거예요”
“당신 언니를 찾는 건 도와줄 수 있지만 날 떠나 사는 건 도와줄 수 없소” 알렉시오는 팽팽한 얼굴로 그녀가 움켜잡고 있는 손을 꼭 쥐었다. “ 이건 미친 짓이오. 당신은 내가 한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고 무척 동요돼 있는 것 같소”
이오네는 목에 걸린 뭉클한 응어리를 삼켰다. 알렉시오 곁을 떠나는 것이 사지 중 하나를 끊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잡힌 손을 빼는데 예고 없이 문이 열리자 알렉시오가 감정이 실린 낙담한 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장에 아랍 스타일의 머리 장식을 두른 덩치 큰 사내가 조바심 나게 기다리는 모습으로 문간에 서 있었다.
“각하...” 사업적인 태도로 돌아간 알렉시오가 성큼성큼 걸어가 남자를 맞았다.
아랍어로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알렉시오가 빙그르르 돌아서 그녀를 끌어당기고 자기 아내라고 소개했다. 나이든 사내는 윙윙 울리는 이오네의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기나긴 이름을 가진 아랍 토후였다. 알렉시오의 비서가 곧 도착할 거라고 알려 주려 했던 그 귀빈이 틀림없었다. 이오네는 뻣뻣한 입술에 억지로 공손한 미소를 머금었다.
토후의 일행이 뒤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알렉시오가 옆방으로 난 문을 열자 선의의 방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둘 다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오네는 그 방으로 갔다. “20분만 기다려요” 알렉시오가 격앙된 저음으로 말하고 자꾸 피하려 드는 그녀의 눈에서 동의를 구했다.
그가 다짐을 받지 않고는 떠나지 않을 것처럼 망설이고 있어 이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가 거뭇한 얼굴에서 긴장을 풀더니 그녀를 혼자 남겨 두고 문을 닫았다. 이오네는 기운을 돋구는 숨을 들이쉰 뒤 곧장 복도로 난 문을 향해 걸어가 알렉시오의 사무실을 나섰다. 이 편이 쉬워. 그녀는 바짝 뒤따라오는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서며 자신에게 말했다. 불쾌한 언쟁이나 기세와 확신을 잃게 만들지도 모를 질질 끄는 감정 소모전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알렉시오라면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원한다면 그는 파스칼 같은 여자들을 모두 상대하고 크리스탈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할 수도 있지만 그녀 또한 자기 인생을 살 터였다.
그녀는 경호원에게 택시를 부르고 리무진에서 여행 가방을 꺼내 달라고 부탁했다.
택시가 도착했을 때 알렉시오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라고 고용한 남자들에게 동행하거나 따라오지 말라고 통고했다. 그런다음 택시기사에게 노퍽행 열차를 탈 수 있는 역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지금 언니를 찾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를 밟고 있었고, 이것은 옛날부터 수도 없이 꿈꾸어 오던 여행이었다. 그러나 이제 옳은 일을 주장하고 이 여행을 떠날 자유를 찾았는데도 목이 메어 오고 알렉시오를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현실에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실제로 그 없이 살아간다는 생각이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거대한 바위와 같은 충격으로 다가와 강해져야 하며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자위해 봐야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9시가 지나서야 이오네는 지친 몸으로 기차에서 내려 시골역에서 자신을 태워 갈 또 다른 택시를 기다렸다.
마침내 5년여 전 이오네에게 편지르 보냈을 때 언니가 살았던 집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와 있었다. 택시기사가 포세츠는 이 지방의 명소라고 알려 주었다. 경사가 가파른 지붕과 다락창이 멀리서 보면 인형의 집처럼 예스런 매력을 더해 주는 높고 좁다란 건물이었다. 답장을 하거나 간직할 수도 없었던 그 편지 생각이 나자 이오네는 목이 잠겼다. 그렇게 연락도 안 했는데 언니가 용서해 줄까? 그리고 미스티를 알거나 기억할 인물이 아직도 포세츠에 살고 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 지역 호텔에 묵을 생각이기 때문에 택시기사에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 이오네는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몹시 긴장이 되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체격 좋은 중년부인이 문간에 나타났다.
“밤늦게 시간에 실례인 줄 압니다만 미스터 갈턴이라는 아가씨의 행방을 찾고 있는데요” 이오네는 정확히 설명했다. “아마 5년 전쯤에 여기서 살았던 걸로 압니다”
여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여기 안 사는데, 미스티는 작년에 결혼했어요”
“결혼을 해요?” 이오네는 적잖이 놀란 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요, 레오네 안드라치하고. 성공한 사업가인데 지금은 코너라는 아들까지 낳았죠. 미스티의 수양어머니인 버디 피어스 부인은 아직 여기 사시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외출하고 안 계시네요”
충격과 흥분으로 이오네의 심장이 몹시 빠르게 뛰었다. “미스티 양의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잠시 마음놓고 얘기해 주던 부인은 좀더 구체적인 부탁을 하자 당황하는 듯했다. “글쎄요, 난 그런 걸 알려줄 입장이 못되는데. 미스티하고 연락하려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오네는 긴장된 숨을 들이쉬었다. “제 생각에... 그러니까 제가 알기로는 제 쌍둥이 언니거든요. 저는 입양됐지만 언니는 수양 가정에 들어갔죠. 오랫동안 언니를 찾고 싶었어요”
부인이 이오네를 멍하게 바라보는 긴박한 몇 초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럴수가. 들어와서 우리 올케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좀 기다릴래요?”
“말씀은 고맙지만 온종일 차를 탔더니 몹시 피곤하네요” 이오네는 이제 중년 부인의 얼굴에 넘쳐나는 호기심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미스티 언니의 전화번호나 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몇 분 뒤 이오네는 탈지면처럼 힘이 다 빠져나간 무릎을 움직여 다시 택시로 돌아갔다. 드디어, 드디어 전화번호를 손에 넣었다! 언니가 여기서 2백 마일쯤 떨어진 스코틀랜드의 저택에 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그 어떤 것도 태어나자마자 헤어졌던 쌍둥이 언니와 마침내 연락할 수 있다는 기쁨에는 미치지 못했다. 실제로 전화기를 들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순진하게 동생의 도움과 충고가 필요할 거라고 믿었던 모험을 좋아하는 언니가 행복하게 결혼하여 아기 엄마까지 돼 있다니 아버지가 언니의 생활에 대해 거짓말을 한 듯했다. 언니를 오해했던 게 창피했고 그런 사실을 드러내 기분을 해치는 일이 없었던게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확실하게 자리 잡은 언니의 처지와 굴욕적이게도 신혼 여행에서 끝난 자신의 결혼을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오네는 벨스톤 호텔에 체크인하며 스위트룸을 요구했다. 운치 있는 거실에 혼자 남자마자 허기가 밀려와 현기증이 일었으므로 식사부터 주문했다. 그런 다음 전화기와 아주 중요한 숫자가 적혀 있는 쪽지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전화를 걸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평생 처음으로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건데.
마음 한편에 남은 알렉시오를 몰아낼 수 있는 행동을 포기한 이오네는 정이 멀어진 남편이 바로 이 순간에 무얼 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에게 다시 자유를 주지 않았던가? 그가 자유롭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 아침부터 이오네 자신이 그와 함께 하고 싶었던 낭만적인 저녁을 파스칼과 즐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국 그로서는 잃을 게 없었다.
게다가 그녀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통째로 집어삼킬 듯한 지독한 불안감에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마구 떨렸다. 그녀는 단단히 결심한 듯 그가 준 반지들을 모두 빼내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식사가 도착하기 전에 간단히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에 방을 가로질러 갔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봐. 샤워를 하는 동안 또 다른 목소리가 불쑥 물었다. 알렉시오가 한 말이 사실일 수도 있잖아? 뻔뻔스러운 옛 여자 친구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 그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관계를 지속시켜 볼 작정으로 아파트를 제 집처럼 점령하고 있는지? 이오네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생각이 부끄러워 신음이 나왔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닥친 위험을 외면하고 그게 아무리 있을 성싶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변명이든 곧이곧대로 믿는 아내가 될 여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알렉시오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그의 본성을 알았으니 그 사랑도 완전히 사멸하겠지? 그런데 인생이 왜 이렇게 잔인한 걸까? 왜 야니스가 그렇게 멋진 사람이었을 때는 그를 훌륭하게 여기고 존경할 뿐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오가 나타났을 때는 그의 결점을 전부 보고도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고!
가벼운 실크 실내복의 허리를 동여매고 있는데 낮게 접근해 오는 요란한 헬기 소리가 들렸다. 이오네는 흠칫 놀라 창가로 다가갔다. 틀림없이 크리스토우라키스 사를 상징하는 색깔로 꾸민 헬기가 불이 환한 호텔의 정원 위로 스치듯 날다가 안보이는 곳에 내려앉는 걸 보고 놀라서 숨이 멎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