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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인과 사랑을-5화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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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뒤 이오네는 아직도 에드워드와 핸드백과 서류 가방을 들고 넓고 화려한 스위트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난 오직 진실만을 원하오” 알렉시오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최대한 침착하게 해명을 요구했다.

이오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아름다운 그의 얼굴과 긴장의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책을 느끼고 시선을 거두었다. 양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힘겨운 진실을 털어놓는단 말인가? 그녀가 그렇게까지 이기적이고 솔직하지 못했다는 걸 알면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을 텐데. 그의 정직과 신뢰에 계속해서 비양심적인 거짓말과 속임수로 보답한 그녀를 경멸할 텐데. 고개를 들어 타는 듯한 금빛 눈과 다시 마주쳤을 때에야 알렉시오가 완전히 넌더리를 내며 거부한다면 자신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두 번째로 충격적인 자신의 본심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윙윙 울리는 침묵 속에서 알렉시오는 기운을 돋우는  숨을 들이쉬었다. “코트를 벗지 그러오?”  “그....”

“난 당신 남편이오” 알렉시오는 앞으로 나서며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는 곰인형과 핸드백을 빼앗아 옆으로 던졌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정숙해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면 내게 보여 주지 못할 것도 없잖소?”

이오네는 갸름하고 노련한 손이 코트 단추를 간단히 처리하는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알렉시오가 떠나는 게 가장 두렵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의 정신없는 상념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쌍둥이 언니와 자유를 찾는 것보다 알렉시오가 더 중요해졌다는 깨달음에 너무나 당혹스러워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언제는 매춘 소녀 같다더니요”

“내가 많이 봐준 거지” 알렉시오는 코트를 벗긴 뒤 물러서서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눈길로 유유히 훑어보았다.

알렉시오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게 바라보자 이오네는 발가 벗겨진 것처럼 지독한 자의식이 드는 걸 깨닫고 더욱 긴장했다. 오만한 시선이 부푼 젖가슴에 닿자 바르르 떨리는 뱃속에서 나비가 파작거리는 듯했다. 그는 배꼽티 밑으로 드러나 매끈한 배와 날씬하게 뻗은 다리를 더욱 강조해 주는 타이트한 미니 스커트를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느닷없긴 해도 맹렬한 욕망이 밀려와 온몸이 팽팽하게 고동치는 가운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로 힘겹게 시선을 올렸다.

은밀히 더듬는 눈길로 곤혹스럽게도 몸이 달아오른 이오네는 경매에 붙여진 노예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을 쉬기도 힘들고 심장은 비정상적으로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휘둥그레진 눈을 그에게서 떼거나 골반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열기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런 옷차림에 침묵은 어울리지 않지” 알렉시오가 매정하리 만치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첫날밤을 앞둔 신부가 낯선 남자에게서 금지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돌아다닌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어디로, 왜 가려고 했던 거요?

이미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걸 알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 알렉시오는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사자처럼 방안을 어슬렁거리며 그 말을 되뇌더니 오만한 머리를 치켜들고 완고한 눈길로 노려보며 고함쳤다. “무슨 대답이 그렇소? 오늘 아침에 결혼해 놓고.... 이 저녁에 비상 계단을 몰래 빠져나가 밤거리 여자처럼 천박한 옷차림으로 공항까지 달려가 놓고는! 정신과 치료가 절실하든지,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든지, 이유가 있을 게 아니오!”

“런던으로 갈 생각이었어요”

알렉시오는 예상했던 대답에 얼어붙었고, 뻔한 사실을 자신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걸 알고 놀랐다. 억센 턱을 단단히 조였다. 커다란 비행기가 착륙하는 걸 구경하러 달려갔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당신이 공항으로 갔다는 걸 티포가 어떻게 아는 거요? 그가 따지듯이 물었다.

이오네의 표정이 흔들렸다. “ 티포가 지금 여기.... 파리에 있다고요?”

알렉시오는 그녀가 아연실색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 사내의 이름만 듣고도 질겁하는 걸 아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일이라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덜컥 걱정이 되는 걸 인정하자니 화만 더 날 뿐이었다.

“여기엔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요...” 그들에게 먼저 발견되어 아버지한테 끌려가 받았을 처벌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바짝 마른 속에서는 힘없느 웃음만 빠져 나왔다.

“당신을 내 아내라고 선언했지만 결혼 서약을 한지 몇 시간도 안돼 날 두고 떠난 여자는 내 아내라고 할 수 없지” 알렉시오는 내뱉듯이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더라도 당신이 누굴 만날 생각이었는지는 나도 알 권리가 있소!”

“만나요?” 이오네는 그의 단호한 첫 번째 선언을 아직 처리하지 못한 상태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당연히 이런 아내는 원치 않을 것이다. 어떤 남자라도 충절과 체면과 정직성을 지니지 못한 아내는 원치 않을 테니까. 뭘 기대했단 말인가? 그녀는 배수진을 쳤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공허한 충격을 삼킬 듯 엄습해 왔다. 아직은 자유라고 자신을 일깨워 보려고 했다. 열여덟 살 때처럼 순진하지도 않았다. 신문에 날 만큼 소란을 피우겠다고 협박하며 싸울 각오를 한다면 경호원들도 강제로 끌로 갈 순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진실!” 알렉시오는 터질 듯한 좌절감에 소리를 질렀다. “ 난 진실을 알고 싶단 말이오. 런던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요?”

“내가... 내가 그곳에 가는 걸 아는 사람조차 없어요” 이오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야니스까지도?” 알렉시오는 처음 들었던 우려가 잔뜩 배인 깊게 울리는 소리로 채근했다.

“야니스요?” 이오네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이제 와서 내가 왜 야니스를 만나겠어요?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

침묵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우유처럼 걸려 있었다.

알렉시오는 그래도 의심을 떨칠 수 없어 씨근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지 않았는가. 놀랍도록 도발적인 다른 모습을 볼 때마다 더욱 화가 치밀었다. <앞으로 이오네 때문에 놀랄 일이 있을 걸세> 미노스가 빈정거리듯 경고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오네는 정말 그랬다. 하지만 알렉시오는 어떤 여자도 자신을 놀리게 놔둘 수가 없었다.

“다른 남자가 있는 게 아니라면 왜 런던으로 가려 했소?” 완벽해. 움직이는 인형 같아. 그는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놀랄 만큼 아름다운 눈과 섬세하지만 흠잡을 데 없이 날씬한 다리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순진하게 호소하는 듯한 커다란 초록 빛 눈까지 모든 남자들의 환상이었다. 결혼 첫날밤에 달아난 신부는 그의 환상이 아니라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물론 다른 남자는 없어요!” 이오네는 그런 의심을 한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자신이 알렉시오처럼 키스할 줄 아는 남자 친구를 원했던 걸 떠올리곤 더욱 깊은 충격에 빠졌다. 남자들이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고 이 남자나 저 남자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듯이. 둘의 결혼이나 자신이 한 정절 서약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듯이.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 것만큼 자신이 한 남자만 원하는 것도 아니고, 대담하게 관심을 깨뜨리고 인물도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우치고 있었다. 적어도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에게 영영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렇지 못했다.

“더이상 할 말이 없소” 누군가 부추겨 도망치도록 만든 건 아니라는 걸 믿고 싶어도 그녀가 한 짓을 눈감아 주거나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으므로 무섭게 굳은 얼굴로 험악학 노려보았다. “교회에 도착하기 전부터 우리 결혼을 의심해 본 게 틀림없는 것 같군. 그런 사실을 그때 고백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우리 둘 다 창피한 꼴은 면할 수 있었는데 그랬소”

그녀는 금방이라도 통렬한 회한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목안에 걸린 응어리를 꾹 삼켰다. 완고하게 자신을 지키고 그를 몹시 나쁘게 생각하는 데만 전념하여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속여 온 것이다. 일단 탑승구 안으로 들어가면 큰 소동 없이 빠져 나오기는 힘들 걸 알고 그곳에서 기다리지 않앗던 것이다. 불안감과 싸우며 사실은 알렉시오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걸 자신에게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느라고 결단을 못 내린 채 안절부절못했던 것이다. 멍청한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린애가 아니라 어른이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당현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었다.

“자유롭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오네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설명했다. “난 자유로운 적이 없었어요. 당신 집을 나서던 오늘까지 평생 나 혼자 어딜 가본 적이 없어요”

알렉시오는 팽팽하게 긴장한 몸을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사랑스런 초록빛 눈과 길게 휘어진 속눈썹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자 길고 짙은 숙눈썹이 뺨에 닿을 듯했다.

“당신이 최악의 일을 할 줄 알고... 겁에 질렸어요” 이오네는 숨가쁘게 호소하듯 털어놓았다. “ 하지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어요”

알렉시오는 겁에 질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둔감하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섬세한 꽃이라서 달아났을 거라서 처음 생각이 정확하게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맹렬한 분노가 급속히 빠져나가는 동안 그의 관심은 온통 촉촉하게 싱그러운 핑크빛 입술로 향했다. 에메랄드 같은 눈과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말로 자신의 환심을 샀던 여자는 없었다고 확신하는 동안에도 온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내게 한 번 더...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을까요?” 이오네는 그렇게 애원하는 자신의 비굴함에 넌더리가 났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속삭이듯 물었다. 자신이 그리스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린 거였다. 타협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일단 그녀를 버리고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알렉시오는 새로운 경호원들을 열 명쯤 고용하여 항상 지켜줘야 가능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덫으로 잡아놓는 것이다. 그런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와 결혼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비상 계단으로 탈출하여 공항까지 도망치는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민감하고 연약하고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여자였다. 게다가 에드워드를 그렇게 끌고 다니지 말라고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진짜 다이아몬드가 박힌 별난 구두를 신고 다니고 잡지판매대 앞에서 지폐 뭉치를 내보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말할 필요조차 없을 듯했다.

“알렉시오?”

“생각해 보겠소” 알렉시오는 잠긴 목소리로 교만하게 대답했다.

이오네는 그의 인색한 대답에 당황하여 얼굴이 빨래졌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오” 알렉시오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번뜩이는 금빛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철이 들려면 아직 멀었소. 그러니 다시 생각하도록 날 설득해 보시오”

그녀는 교묘한 대답에 화가 났지만 부드러운 입술을 꼭 다물고 참으며 성난 눈을 얼른 내리깔았다. 그에게 대들고 싶어지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싸워 본 적도 없는데. 하지만 좀더 미묘한 반항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날카롭게 울렸지만 그가 바로 꺼버렸다. 그녀는 팽팽한 침묵에 목덜미가 따끔거리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침묵이 싫소. 토라지는 것도 싫고” 알렉시오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리 와요”

이오네도 그게 싫었다. 사실은 명령받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도 알렉시오가 기대에 찬 짙은 금빛 눈으로 바라보자 기개와 자존심이 쑥 들아가 버린 듯했다. 방금 일어난 일 때문에 마음이 몹시 어지러운 탓이었다. 어떻게 그가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어떤남자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자신을 책방하며 기를 쓰는데도 발길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게 그를 향한 강한 열망이 치욕의 깃발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당연히 난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소” 알렉시오는 저음으로 고백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날 피하는 아내하곤 살 수 없으니 떠나도록 해요”

이오네는 얼굴이 빨개졌다. “ 난 피하지 않아요!”

알렉시오는 잔인한 미소를 지어 그녀의 맥박을 마구 뛰게 만들었다. “ 내 신부가 처녀일 필요는 없소. 한 번은 그런 경험이 좋았을지 모르지. 그리스 남자가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있겠소? 하지만 난 그런 것 없이도 살 수 있고 당신을 나 자신보다 하찮게 여기지도 않소. 결혼 생활은 첫날밤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법이니까”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무슨 얘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질문할 여력도 없었다. 아버지의 주특기인 교묘한 말솜씨에 말려들까봐 두렵기도 하고.

“처음 봤을때... 정말 처음 봤을 때 당신은 내 방에 리넨 시트를 갈아 주러 들어왔지” 알렉시오는 그녀를 끌어당겨서 뜨겁게 음미하는 눈길로 훑어보았다. “ 난 그때 벌써 당신을 갖고 싶었소. 아주 건강해 보였소. 한마디로 걸어다니는 유혹이었지. 제복 같아 보이는 투박한 드레스를 벗겨내고 침대에 쓰러뜨린 뒤....”

이오네는 얼굴을 붉히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얘기를 들었다. “설마요... 날 쳐다보는 것 같지도 않던데...”

“침대를 정리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지. 그래, 가키스 집안의 딸이 침대 시트나 갈다니, 그게 뭐였소?” 알렉시오는 몸을 숙여 오늘 들어 두 번째로 그녀를 들어 안았다.

“모르겠어요” 안절부절못하는 긴장감 때문에 갑자기 말이 빠르게 쏟아져 나오면서 가슴은 특급 열차처럼 빠르게 뛰었다. “ 하녀를 불렀어야 했는데 안 그랬어요.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고...”

알렉시오가 오만한 검은 머리를 숙였다. 그가 혀끝으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핥는 동안 밤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숨이 목에 걸리는 듯했다. “사진에서 당신을 알아보곤 화가 났지만 호기심이 생기더군”

그가 옆방 침실로 들어가 큰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가 구두 한 짝을 벗겨 들고 있는 동안 그녀는 반대편으로 황급히 빠져나가 어색하게 욕실로 뒷걸음쳤다. “또 문은 걸어 잠그고 창문으로 나가 비상 계단을 찾지 말라고 주의를 주더라고 이해하리라 믿소” 알렉시오가 일일이 열거하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구두굽에 빽빽이 박혀 있는 보석들이 전등 불빛을 박아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런건 누가 사줬소?”

“코스마스 오빠가요” 오빠 얘기에 그녀의 예쁜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전부 다이아몬드요?” 알렉시오가 물었다.

그의 신부는 가키스 가문의 딸답게 돈이라면 별 감흥을 못 느끼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거에요”

“이런 부를 과시하고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오. 저속하기도 하고” 알렉시오는 언짢게 지적했다.

이오네는 굳은 표정으로 나머지 한 짝을 마저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며 쏘아붙였다. “아빠 말씀처럼 당신은 속물이에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알렉시오는 펼친 손가락 사이에 수은을 가둬 두려고 하는 남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쾌한 구두를 떨어뜨렸다. “이오네...”

“우리 할아버지도 부자도,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다고 해서 우릴 깔보고 있잖아요. 그런 저속한 구두가 신고 싶다면 난 신을 거에요!”

<앞으로 이오네 때문에 놀랄 일이 있을 걸세> 알렉시오는 신음이 나오는 걸 참고 그 말을 떠올랐다.

이오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거울 속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가 가키스 집안을 저속한 취향을 지닌 천박한 이물들이라고 보다면 그녀의 진짜 가족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경악할까? 쌍둥이 사생아를 낳은 어머니를? 정치가로 존경받다가 부정부패로 파멸한 아버지를? 록스타와 시칠리아 대부호에게 열광한 언니를? 그래, 지금 잃어버린 언니를 찾는 것과 알렉시오와의 결혼 사이에서 선택하는 거야.

“이오네?”

이오네는 다시 문간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데 그랬어요”

작은 얼음 여왕 같기느 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 알렉시오는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지금 옷을 벗을까요?” 이오네는 최대한 냉담하게 보이려고 애쓰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알렉시오는 입술을 뗐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아니오. 그냥 침대에 들어 결혼한지 50년은 돼서 그런 일을 조금도 즐기지 않는 부부처럼 행동하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소”

이오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다 얼굴이 빨개져 억눌린 소리를 내며 다시 문을 쾅 닫고 욕실로 들어갔다. 알렉시오는 빗장 걸리는 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욕실 창문을 미리 점검하는 건데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엇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며 모든 게 왜 저렇게 복잡한지 답답했다. 나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 자신의 문제인가? 어떻게 욕실 밖으로 구슬려낸다?

이오네는 굴욕적으로 거부당했다는 데 상처를 받고 마음이 심란해졌다. 게다가 딱히 할 일이 없어 욕조에 물을 틀었다. 뺨을 타고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쩌자고 첫눈에 반했다는 연속극 대사 같은 말에 귀를 기울였단 말인가? 그렇게 끌렸다면서 왜 가만히 있었냐고 묻지도 못하다니. 남자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곧잘 했다.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만큼 그녀를 바보로 본 게 틀림없었다. 날 갖고 싶었다고? 꽤나 그랬겠군! 석 달 전 그날 밤 공단 시트에서는 못 자겠다는 말 외엔 한 마디도 안 했으면서.

게다가 무슨 권리로 처녀가 아니라고 단정짓는 거지? 어떻게 감히 그런식으로 모욕할 수 있는 거야? 그는 여러 여자와 쉽게 잤는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유감스러운 마지막 상념이 이오네의 감정을 더 동요시켰다. 이제 남편인데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녀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옷을 벗겠다는 말에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남자를 사랑할 순 없었다.

이오네는 큼직한 목욕 타월을 두르고 빗장을 푼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안에 아무도 없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알렉시오가 벌써 싫증을 낸 걸까? 그래서 날 호텔에 버려 둔 채 떠나 버렸나? 내가 한 대로 돌려준 건가?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방안을 가로질러 거실로 쫓아갔다.

알렉시오는 몇 군데 전화를 걸어 통화한 다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식탁에 우아하게 기대고 있던 자세를 펴며 그녀를 향해 미소지어 보였다. 이오네는 안도감에 무릎이 딱 부딪쳤다. 한 손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서서 얼굴을 붉혔다.

“ 그, 그럼 난 침대에 들게요” 숨가쁜 소리로 말했다.

“ 좋은 생각이오” 알렉시오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짐짓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딱 한번 그녀의 예쁜 얼굴에 모든 생각이 드러났다. 우둔하지도, 그리스 여자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지극히 그리스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신부였다. 그가 없는 걸 보자마자 복수를 의심한 것이다. 그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어떤 남자도 믿어 본 적이 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오네는 수건을 떨어뜨린 뒤 침대로 올라가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늘한 시트 사이로 들어갔다. 여자하고 자는 일이라면 도가 튼 남자이리라. 키스 솜씨가 기가 막혔으니까. 하지만 키스와 섹스는 아주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좋은 척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연기가 필요한지, 과연 그가 사실과 연기를 구분해낼지 궁금했다. 그는 분명 아주 여유있게 그녀를 안을 것이다.

이오네는 시간을 확인했다. 10분이 지나 있었다. 침대에 들어올 마음이 없는 걸까?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엇다. 배려할 줄 모르는 거야. 근사해 보이지만 둔해 빠진 남자였다. 솔직하게 싫다고 거부하는 거였는데. 첫날밤이건 말건 이렇게 빨리 안고 싶어하는 건 봉건적인 사고 방식이라고 쏘아붙였어야 했는데!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첫 데이트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을까? 두 사람이 데이트할 기회라도 있었더라면 싶었다. 그랬더라면 반 년 뒤에도 그는 계속 기다려야 할 걸!

알렉시오는 침실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다. 그는 방금 자신이 내린 결정이 흐뭇했다. 어쩌면 침실에서 약간 자제하는 것이 신부의 신뢰와 감사를 얻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아버지가 옳았다. 알렉시오는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는 여자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사실 그 충격적인 경험이 아직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소공포증이 있으면서 2층 높이의 비상 계단을 내려갔다는 사실이 마음을 괴롭혔다.

알렉시오의 거뭇하게 잘생긴 얼굴을 보는 순간 팽팽하게 긴장한 몸에 어쩔 수 없는 전율이 가볍게 흘렀다. 번뜩이는 짙은 금빛 눈을 바라보자니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려고 들어왔소” 알렉시오가 입을 열었다.

“뭐, 뭐라고요?” 그녀는 더듬거렸다.

“난 다른 방에 가서 자겠소, 시간도 늦었고 무척 피곤할 테니까” 알렉시오는 유리처럼 매끄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오네는 가슴께에 시트를 움켜잡은 채 초록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건 우리 결혼 첫날밤인데...”

알렉시오는 표정 많은 갈색 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우린 평생을 함께 보낼 거요. 침대를 같이 쓰는 건  결혼 생활의 일부일 뿐이지”

일부일 뿐이아고? 첫날밤인데 그녀와 사랑을 나눌 생각이 없다니! 한량이라고 소문난 남자에게 이렇듯 무심한 대접을 받다니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엄청난 굴욕감을 이기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니, 한 방을 쓰고 싶지도 않다니.

“난 기다릴 준비가 돼 있소” 알렉시오가 목쉰 소리로 말을 맺었다.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아주 희미한 인식마저 영영 묻혀 버리고 나자 이오네는 격정에 휩쓸린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를 영원히 기다려야 할 거예요!” 상처받은 목소리로 외쳤다.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이에요!”

“모욕? 내가 어떻게 모욕했단 말이오?” 알렉시오는 언성을 높이며 따졌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잠겼지만 분노와 상처가 그녀를 통째로 잡아먹을 듯했다. “매춘부처럼 입었다고 나를 비난했잖아요. 다음엔 처녀가 아니라고 하더니, 마지막으론...”

“비상 계단 근처엔 가지 않는 건데 그랬소” 그녀가 부족한 숨을 들이수느라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알렉시오가 한결 간은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오네는 흐느끼는 소리로 다시 그를 책망했다. “날 원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잖아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소? 내가 당신을 배려해 준 대가가 이거요?” 알렉시오는 크게 양보하고 희생했다고 믿었던 것이 정면으로 되돌아오자 격해지기 쉬운 성질이 폭발해 그대로 되받아쳤다. “내뜻대로 했다면 그 욕실문을 부수고 당신을 욕조에서 끌어내 1시간 전에 이미 당신을 녹초를 만들었을 거요!”

이오네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렉시오는 뒤늦게야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긴 손가락으로 숱 많은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꽉 다문 이 사이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욕구 불만으로 생긴 덧없는 환상일 뿐이지 물론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진 않소”

그녀는 꼼짝도 않고 새로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해 보다 보드라운 입술을 딱 벌렸다. 배려했다고? 남자들하고는 연결 지을 수 없는 말이나 능력이었다. 남자들은 항상 자기가 먼저였다. 그녀가 사랑했고, 그렇게 잘해 줬던 오빠마저도 동생을 위해 자기가 불편해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그녀가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여 다른 데서 자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녀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그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그에게 날개와 후광을 달아줄 정도로 그가 다시 보였다. 그녀는 어찔한 감사의 미소를 계속 보내다 마침내 얼굴을 활짝 폈다. “나야 물론 당신이 남길 바라죠... 당신은 내 남편이니까”

알렉시오는 그녀의 기막힌 미소에 사로잡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같은 방향으로 향하던 그들의 입술이 서로 부딪쳐 격정적으로 얽혔다. 그는 욕망에 불타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보듬고 거친 숨을 몰아쉬다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갔다. 그가 몇 번이고 갈구하듯 맹렬하게 입술을 빼앗자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전율했다. 그녀는 스타일 좋은 그의 머리를 감싸 쥐고 탄력 있는 검은 머리 속으로 손끝을 밀어 넣고 그를 꼭 붙들었다.

몸 안에서 탐욕스러운 불길이 일어나 온몸을 핥는 듯했다. 그의 혀가 헤집고 들어와 그 불길을 더 지펴 놓았다. 그가 그녀를 베개로 쓰러뜨려 무거운 체중으로 누르는 동안 그녀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젖가슴이 저릿하게 고동치는 걸 느끼며 등을 젖혔다.

“내가 옷을 너무 많이 입었군” 알렉시오는 잠긴 소리로 말하며 재킷을 벗기 위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지만 아름다운 젖가슴을 보고는 다시 집중력을 잃었다.

이오네는 그제야 시트가 밀려 내려간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잡아당겼지만 남자의 힘찬 허벅지에 눌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 말아요.... 당신은 완벽하니까” 알렉시오는 목쉰 소리로 말하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그 오만한 머리를 숙였다.

작은 흐느낌이 입술을 벌려놓으면서 무지근한 통증이 온몸을 관통해 감미롭게 녹아 내린 여체의 중심부로 모였다. 가슴이 마구 뛰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드는데 말려 올라간 까만 속눈썹 밑으로 놀라운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욕망이 들불처럼 솟구쳤다. 온몸이 미친 듯이 달아올랐다. 그에게서 한 치도 떨어져 나올 의지가 없었고 그를 향한 맹렬한 반응이 두려워질 정도였다.

“천천히 할 거요”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연약한 턱을 어루만지며 깊게 울리는 육감적인 목소리로 선언했다. “제대로 해낼거요”

알렉시오는 침대에서 사뿐히 내려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오네는 바싹 타는 입으로 그가 셔츠 단추를 끌러 검은 털이 V자 모양으로 무성히 나 있는 구릿빛 가슴을 드러내는 걸 지켜보았다. 짙은 색 사각 팬티를 남기고 흘러내린 맞춤 바지가 그의 발치에 멈췄다. 그녀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 다시 꿈틀거리며 깨어나는 긴장과 싸워야 했다. 넓은 어깨에서 털이 부숭부숭한 길고 힘찬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단단하고 군살 없는 근육질 몸매가 아주 남자답고 장대했다. 사각 팬티가 밑으로 내겨갔다. 알렉시오는 그녀가 한 발 늦게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붉히는 걸 보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내가 당신을 원한다는 걸 확실히 알았겠군” 알렉시오는 그렇게 놀리며 매트리스 위로 체중을 실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달아오른 얼굴에 숨결을 간질이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끝을 밀어 넣었다.

“그래요” 이오네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 그가 손바닥으로 팽팽히 일어선 젖가슴을 쓸자 길게 숨 넘어가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떨구었다.

“이 부분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는군” 그는 감상 어린 신음을 내뱉고는 부푼 젖가슴을 쓰다듬으며 달콤한 고문을 더해갔다.

이오네는 전율하는 몸을 비틀어 그에게 더 가까이 밀어붙이며 신음하다 그의 머리카락 속에 양손을 집어넣고 그의 입술을 다시 끌어당겼다. 이오네는 자신의 폭발적인 반응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팽팽하게 당긴 가냘픈 몸이 온통 적색 경보 상태에 들어갔다. 그의 혀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허벅지 사이로 고동치는 갈망을 점점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욕망으로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을 강렬하게 지켜보며 몸을 움지였다. 이어 그녀의 허벅지를 들어올리고 부풀어 오른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뒤 잠긴 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드럽게 할거요...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부드러운 입구로 파고드는 뜨거운 남성이 옴짝달싹 못할 감각적인 충격으로 다가오더니 이윽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조금씩 뜨겁게 압박해 왔다. 그녀는 그의 침입이 안겨주는 기분 좋은 느낌에 놀라 잔뜩 긴장했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찌를 듯한 통증에 억눌린 신음을 토하다 마침내 그가 깊숙이 들어섰을 때는 반동적으로 그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그 미친 듯한 흥분이 다시 온몸을 감전시키고 지배하여 깊게 전해지는 쾌감에 무릎을 꿇자 그가 오직 감각만이 지배하는 아뜩한 절정으로 저항력 없는 그녀를 끌고 갔다. 강렬하고 달콤한 황홀경이 온몸을 가르며 폭발적인 환희의 폭포를 이루어 그녀를 수만 조각으로 산산이 쪼개 놓았다.

그가 전율을 하며 눈을 감자 그녀는 경탄의 눈물을 흩뿌리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정말 엄청났소...” 알렉시오는 헝클어진 머리를 들어 밤처럼 어두운 눈으로 내려다보다 그녀가 기력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희미한 자주색 그늘을 발견했다. 그는 육감적인 입술에 숨을 멎게 만드는 미소를 머금고 좀더 편안하게 둘의 자세를 바꾸곤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좀 자 둬요. 새벽이 다 됐으니까”

정작 곯아떨어진 건 그였다. 그녀는 온몸을 파고드는 낯설게 붕 뜨는 행복감에 젖어 넋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엉덩이에 되는데로 시트를 감고 남의 자리까지 차지하며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전혀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갈구하던 자유는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한없이 강렬한 열망에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를 비약적으로 신뢰하며 알렉시오는 아버지처럼 무심하게 대하지 않을 거라고 흔쾌이 믿어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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