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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다가온 이오네의 결혼식날, 고상한 금색 종이로 포장된 상자가 그녀 앞으로 도착했다.
“ 알렉시오의 결혼 선물이구나 ” 칼리오페가 조바심 난 얼굴로 조카를 바라보았다. “ 어디, 어서 열어 봐!”
이오네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두려운 눈길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결혼식을 치른 지 몇 시간 만에 버리고 달아날 신랑한테 선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 쪽에서는 줄만한 게 아무것도 없고 선물 교환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둘의 결혼은 교회에서 마무리될 냉혹한 거래에 불과했다. 알렉시오는 왜 둘의 관계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여는 거지?
고모가 안달이 나서 직접 상자를 열고 타원형 가죽 상자를 꺼냈다. 이오네는 얼른 빼앗아 들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정교한 다이아몬드가 물방울 모양으로 박힌 섬세한 에메랄드 목걸이였다. 정말 아름답지만 의미는 없는 거야. 그녀는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속으로 되뇌었다. 알렉시오는 단순히 의무감에서 선물을 한 것뿐이었다.
칼리오페가 얼굴을 찡그렸다. “ 달랑 보석 케이스 하나 넣었을 뿐인데 상자가 왜 이렇게 크대?”
이오네는 상자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박엽지의 끝부분을 보고 그 얇은 종이를 펼쳤다. 두 번째 선물을 보는 순가 놀라서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매 회사의 상표가 붙어 있는 곰인형을 마지못해 꺼내들었다. 백 년 가까이 된 아주 진귀한 인형으로 놀랄 만큼 표정이 풍부했다. 긴장한 두 눈이 촉촉이 젖어 왔다. 코스마스 오빠가 봤으면 좋아했겠네.
“ 그걸로도 모자라서 하나 더 보태 준다니?” 칼리오페가 놀라면서도 실망스럽다는 듯 외쳤다. “ 네 신랑은 네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나 보지?”
이오네의 오빠는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곰인형을 사다 주었다. 그 하나하나에 사랑하응 오빠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담겨 있어 어떤 것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네가 첫날밤에 알렉시오 대신 이 인형을 안고 잠자리에 들면 고소하겠다!” 칼리오페는 재미있다는 듯이 저속하게 말했다. “ 하지만 영리하고 매력적인 친구라니까.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감동시키는지 알고 있단 말이야. 이 결혼이 네 아버지가 준비한 사업적 거래에 불과하다는 걸 누가 믿겠니?”
이오네는 알렉시오와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재빨리 평정을 되찾으려고 애쓰며 곰인형을 한 쪽으로 밀어 놓았다. 고모의 마지막 독설이 준비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아직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한 상태로 거울을 들여다보면 짧은 레이스 면사포를 뒤로 잡아당겨 제자리에 오게 했다. 처음에는 웨딩드레스도 고모한테 골라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고모가 주름 장신과 나비 매듭이 주렁주렁 달리고 페티코트까지 들어가 무거운 드레스를 입혀서 식장에 들여보낼 생각인 것을 알고 마음을 바꿨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서 꼴불견이 될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고른 것은 반소매에다 깃을 둥글고 심플해서 작은 키가 커 보이는, 몸매가 날씬하고 우아하게 돋보이는 드레스였다. 그래도 이 결혼식은 가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웠고 곰인형 선물은 알렉시오가 과연 평판이 안 좋을 만한 인물임을 입증해 주는 증거에 불과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한량 치고 매력 없는 남자가 있던가?
1시간 뒤 30여 년 전 아버지가 오빠가 태어난 기념으로 세운 견고한 교회 밖에 리무진이 섰을 때 이오네는 더 이상 낙천적일 수 없었다. 먼 친척뻘이 되는 3명의 신부 들러리들은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 그 10대 소녀들이 이 결혼식에 앞서 축하 의식이 생략된 걸 보고 놀라서 호들갑을 떨자 칼리오페가 사납게 꾸짖어 침묵시켰다. 보통 그리스에서 결혼식을 앞둔1주일은 신부와 결혼 준비를 돕는 사람들이 맘껏 즐기는 떠들썩한 파티가 계속되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미노스 가키스는 여동생이 저택에 여자 손님들을 잔뜩 불러들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이오네는 안도했지만 고모는 실망이 몹시 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렉시오는 오만한 검은 머리에 햇살을 가득 받은 채 그녀에게 줄 부케를 들고 교회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입이 바싹 말랐다. 그가 지킬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전통이었고 흠잡을 데 없이 근사한 짙은 정장 차림의 그는 정말 멋져 보였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짙은 금빛 눈이 노골적으로 감상하듯 그녀를 훑었다.
“ 5분 동안 세고 있었소” 두 사람의 축복을 비는 섬사람들의 왁자한 소리 밑으로 알렉시오가 그녀를 놀렸다. 그는 예리한 눈길로 그녀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며 사람들로 북적대는 교회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색다른 경험이 그녀를 이렇듯 초조하게 만든 건가 싶었다.
이오네에겐 아주 어린 시절에 예배 드리던 기억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알렉시오의 신랑 들러리는 페드로스라는 친구였다. 그는 이런 행사에 어울리게 사뭇 엄숙한 태도로 자기 임무를 수행했다. 결혼식은 기다란 예복을 입은 나이 든 성직자가 십자가를 그어 반지 교환을 축복하고 둘의 약혼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신랑 신부는 불을 밝힌 촛대를 들었고 알렉시오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오네는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렌지꽃 화관을 쓰고 사제의 축복을 받았다. 시대를 초월한 주례사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인생이 안겨 줄 모든 것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로 포도주를 한 모금씩 교대로 마실 때 알렉시오가 그녀의 손을 꼭 감싸쥐어 불안하게 들고 있는 술잔을 고정시켰다. 이오네는 이제 죽은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신랑 신부가 성경이 놓여 있는 낮은 탁자를 둥글게 에워싸자 하객들이 두 사람에게 장미꽃잎과 쌀을 뿌렸다. 화관이 벗겨지고 둘이 부부가 됐음이 선포되었다.
“ 난 당신이 기절하는 줄 알았소.” 결연히 인파를 헤치고 그녀를 교회 밖으로 데려나가 대기 중인 리무진으로 곧장 향하는 동안 알렉시오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 괜찮소?”
“ 괘, 괜찮아요” 이오네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을 거의 집어삼킬 듯했던 불안감을 지워내려 애쓰며 더듬거렸다. 이제 끝난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녀는 무릎 위로 손을 깍지 끼고 운전기사가 빨리 집으로 데려다 주기만을 기다렸다. 알렉시오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적을수록 기분이 더 나아질 것 같았다.
“ 무척 아름답소” 알렉시오가 칭찬했다.
“ 고마워요” 이오네는 억눌린 소리로 대답했다.
“ 결혼식 전에 우리 가족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게 유감이오” 알렉시오가 애석해했다. “ 당신 아버지는 늘 그렇게 손님 초대하는 걸 싫어하시오?”
“ 그런신 것 같아요” 그녀의 아버지는 예의란 것 자체를 싫어했고 크리스토우라키스 집안에서 유일하게 관심 있는 인물은 알렉시오뿐이기 때문에 사돈댁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다는 데 대해 조금도 켕기는 게 없을 터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려고 했지만 머지 않아 그의 가족들이 그보다 더 황당한 일을 겪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들의 아들을 두고 달아나는 사태를.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내려앉고 뱃속이 뭉쳤다.
집에 도착하자 알렉시오의 부모님과 여동생들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하지만 이오네는 그들과 눈을 맞출 수도 없었고 그들의 다정한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신호를 보냈으므로 실례한다는 말을 우물거린 뒤 서둘러 쫓아갔을 뿐이었다.
미노스 가키스는 딸을 냉감하게 응시했다. “ 교회에서 한번도 안 웃더구나.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여기서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도록 해라”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런 위협에도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힘이 솟는 듯했다. 그러나 뻣뻣한 등으로 팔이 올라오더니 알렉시오가 굵은 음성으로 유리처럼 매끈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 왔다. “ 하지만 저는 인내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한바탕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 자네한테 인내심이 필요할 거야. 앞으로 이오네 때문에 놀랄 일이 있을 걸세”
이오네는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두자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가 자리를 뜨자 알렉시오가 더욱 힘을 주어 그녀의 연약한 몸을 잡고 찡그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 아버지는 왜 항상 당신에게 화를 내는 거요? 두 사람 사이를 그렇게 갈라놓는 게 뭐요?”
“ 우린 그저 별로 가까운 적이 없었을 뿐이에요” 이오네는 그런 질문을 받은 게 괴롭고 창피해서 거북하게 우물거렸다. 잠시 봤을 뿐인데도 알렉시오는 가족들하고 깊은 애정을 나누는 듯 보였던 것이다.
금발 머리를 아래오 떨구고 피하는 태도를 보며 알렉시오의 눈빛이 굳어졌다. 미노스가 이오네 때문에 놀랄 일이 있을 거라고 예견한 이유가 뭘까? 내 신부가 죄지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뭘까? 어부의 아들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비밀 관계과 부녀 사이를 갈라놓은 원인이었으리라. 그녀는 왜 2년이나 지난 일을 아직도 꿈에서 볼까?
어쨌든 알렉시오는 벌써 자신의 보호 본능과 너그러운 마음이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가키스 가문의 딸이었다. 이렇게 내성적인 여자가 미노스를 무시할 수 있는 배짱을 지녔을 리 만무했다. 그렇긴 해도 이오네는 결혼식 내내 마치 화형대에 모닥불일 피어오르는 걸 지켜보고 있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처럼 행동했다.
그 뒤에 이어진 피로연에서 많은 축하 연설이 있었다. 그 다음엔 유명 가수의 긴 공연이 이어져 신랑 신부 사이에 대화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때는 이오네까지도 알렉시오의 냉담한 태도를 알아차릴 정도였다. 그녀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둘이 부딪치는 일을 최소한으로 유지시켜 줬기에 지금으로선 편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만족스럽지 않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안하게 그를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명할 길ㄹ 없는 절박한 충동을 물리칠 수 없었다.
“ 목걸이를 받고 아직 고맙다고 인사도 못했어요....곰인형도” 이오네는 작은 소리로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 인사는 필요 없소.” 알렉시오가 느릿하게 말했다.
“ 난 당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생각도 못했어요”
이오네는 어쩌자고 이렇게 의미 없는 대화를 시작했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 당신을 가졌잖소, 안 그렇소?” 알렉시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긴장이 역력한 연약한 얼굴로 초록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하며 바라보는 모습이 그를 흔들어 놓았다. 찌를 듯한 낭패감이 들면서 그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되겠다던 이오네의 말이 떠올랐다. 단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고 아버지가 집에만 가둬 놓고 키우는 바람에 아는 사람 하나 없어서일 뿐이었다. 교회에서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책망할 게 아니라 안심시켜 주는 게 중요했다.
알렉시오는 그녀의 팽팽한 손을 꼭 감싸주었다. “ 오늘은 특별한 날이오. 맘껏 즐깁시다” 잠긴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름다운 금빛 눈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숨이 목에 걸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자신의 손을 휘감고 있는 따뜻하고 카다란 손만 의식되었고 그가 냉담한 태도를 거뒀다는 게 크게 안심될 뿐이었다. 안도감이 너무 커서 잠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알렉시오는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고 두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고 바르르 떨리는 미소가 예쁜 핑크빛 입술에 떠오르는 걸 보고 아주 대단한 마술사가 된 기분이었다. 드디어 신부가 신랑을 바라보듯 그녀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드라운 입술을 살짝 벌리고 보일락말락하게 좀더 다가서자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준 뒤 광대뼈 위로 드리운 연한 금발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살짝 잡아당겨 분위기를 바꿨다.
“나중에” 그가 목쉰 소리로 기약했다.
잠시 후 신랑 들러리인 페드로스가 끼여들었다. 그는 이오네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댄스 플로어로 이끌었다. 그녀가 쭈뼛거리며 알렉시오 쪽을 돌아보는 동안 페드로스가 그녀 주위로 2개의 원을 그리며 하객들을 둘러서게 했다. 유능한 페드로스가 밴드의 신호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자 전통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원을 이룬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이오네는 알렉시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과 생소하게 샘솟는 유쾌한 기분을 한껏 느꼈다.
알렉시오가 음악에 맞춰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났다. 볼수록 갈망을 일으키는 멋진 남자야. 그녀는 갸름하고 힘찬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무력하게 인정했다. 사실 그는 볼 때마다 더 근사한 듯했고 어색하게 행동하는 그녀에게도 좀더 관대해진 듯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도 없고 잔뜩 긴장해 있는 이유를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양심에 찔러 다시 평정을 잃을 것 같자 그녀는 얼른 그런 기분을 떨치고 알렉시오를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하객들이 원무를 마쳤을 때 알렉시오가 그녀를 안고 춤을 추었다. 칼리오페가 바닥에 접시를 내던져 깨뜨리자 상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따라했다. 알렉시오는 그런 야단법석에 움찔하다 고상한 어머니가 별수 없이 칼리오페를 따라하며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걸 언뜻 보았다. “ 무척 전통적이군”
접시를 내던져 깨뜨리는 건 행복한 결혼이 계속되는 걸 의미했으므로 이오네는 상기된 얼굴을 그의 넓은 어깨 쪽으로 돌렸다.
“ 사람들이 다른 일에 몰두해 있을 때...” 알렉시오가 한 손으로 결연히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 네?” 이오네는 이글거리는 금빛 눈을 올려다보다 입이 바싹 마르자 긴장했다. 돌연 열광적인 함성과 접시 깨뜨리는 소리가 의식에서 멀어지면 서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만 귓가에 들렸다.
“ 내 신부에게 키스하고 싶거든” 알렉시오가 넓은 무도회장의 기둥 뒤로 그녀를 교묘히 돌려 세웠다.
이오네는 그가 다가오기도 전에 벌써 흥분했다. 그가 다가와 단단한 석조 기둥에 등이 닿자 강렬한 열망이 그녀를 휘감았다. 본능적으로 등이 젖혀지고 고개가 뒤로 떨어졌다.
“ 내 신부도 나와 키스하고 싶어하니까” 알렉시오는 강렬한 만족을 감추지 못하고 음미하듯 말한 뒤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절박하게 덮어 숨을 앗아가고 정신을 아뜩하게 만들었다.
민감한 입안으로 혀가 들어오자 이오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바짝 매달려 온몸을 떨었다. 골반 속으로 열기가 너울거리고 그로 인해 욕망이 솟구치자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밀어붙여 크고 힘찬 몸을 무의식적으로 더 접촉하려 들었다. 그녀의 머리가 기둥 쪽으로 떨어질 만큼 맹렬히 입술을 요구하던 그가 돌연 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쥐더니 강력하게 깨어난 자신의 아랫도리에 접촉시켰다. 다듬어지지 않은 근육의 힘과 촉감, 그녀 자신의 욕망에 답하는 폭발할 듯한 감정에 고무돼 모든 감각이 노래를 불렀다.
알렉시오가 거친 말을 내뱉으며 갑자기 몸을 뗐을 때 아주 잠시 그의 단단한 광대뼈 위로 검붉은 홍조가 번지고 이글거리는 금빛 눈이 그녀를 향햐 너울거렸다. 알렉시오는 주먹으로 돌기둥을 치고 싶을 만큼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왜소하고 청순한 신부를 기둥에 붙들어 놓고 바로 이 자리에서 그녀를 갖고 싶다는 듯 노골적인 표현을 하다니 영락없이 미숙한 짓이었다. 하지만 보드라운 그녀의 입술이 수줍게 유혹하듯 벌어지는 걸 보고 강렬한 욕구를 이기지 못했다.
“ 미안하오” 그는 무뚝뚝하게 사과했다. “ 내가 지금 아프게 했소?”
이오네는 너무 부끄러워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는데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떨어져 나간 것은 어쩌면 공개된 장소에서 그녀가 음탕하게 부추기는 걸 보고 놀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원래 유혹에 약하니까 여자들이 자제해야 하는데. 이오네는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고 수치스러워했다. 순수한 욕망에 사로잡혀 열망한 것이었다.
“ 실례할게요...” 그녀는 굴욕감 때문에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한 뒤 그대로 달아났다.
알렉시오는 여자 앞에서 늘 자신만만해하던 남자로서 화를 가누지 못해 돌기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리곤 멍든 관절을 구부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바로 옆에 서 계신 게 보였다.
산데르 크리스토우라키스는 딱하다는 듯 표정 많은 양손을 펼치고 얼굴을 찡그렸다. “ 참견하는 게 아닌 줄 아는데.....”
그럼 하지 마세요. 알렉시오는 말없이 이를 갈았다.
“이오네는 네가 즐겨 만나는 부류의 여자가 아니라 수줍음 많은 아이야” 산데르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 배려해서 대하도록 해"
이오네는 평소에 도피처로 애용하는 서재로 향했지만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살짝 열린 문 밖에서 멈춰 섰다.
“ 이오네는 너무 생기가 없다니까. 불쌍한 알렉시오 오빠!” 젊은 여자가 한탄하는 목소리였다. “ 이 결혼은 비극이야. 오빠는 크리스탈 이후로 다시는 사랑에 빠질 생각이 없을 테지만 이오네가 싫증나고 한심해져서 결국은 정부를 두고 말걸”
“ 네 오빠를 아니까 하는 말인데 그것도 한 병이 아닐 걸!” 친구가 낄낄거렸다. “ 오늘 결혼식에서도 네 오빠의 옛 애인을 적어도 넷은 봤다는 걸 알고 있니?”
처음 말한 아가씨는 알렉시오의 여동생 델피아였고 다른 아가씨는 친구인 듯했다. 고모가 알렉시오의 막내 여동생 안부를 묻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열다섯 살짜리 여동생은 그와 바로 아래 여동생이 10대 태어난 늦둥이였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델피아는 버릇없는 응석받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오네는 버릇없는 응석받이는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너무 생기가 없다고? 신부인 내가 남 앞에 대대적으로 선보인 날에 평소처럼 대담하지 못한 외모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지. 그녀는 씁쓸하게 속으로 답했다. 그러나 난생 처음으로 오늘밤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집을 나서면 그럴 친구도 없지만, 가장 친한 친구마저도 그녀를 이오네 가키스로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델피아가 뭐라고 했지? 애송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이오네는 기분이 상해 냉소적으로 비난했다. 알렉시오와 함께 산다면 그는 틀림없이 좀더 흥미로운 여자를 찾아 눈을 돌릴 테고 그녀는 그런 부정을 눈감아 주며 그가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이는 것을 감지덕지해야 하리라. 그가 조심하는 한, 그녀와 이혼해서 가정을 깨지 않는 한, 알렉시오가 그녀를 배신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아직은 매우 남성 중심적인 사회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의도를 모른 척하던 모습을 지켜보며 자라지 않았던가?
지난 1시간 동안 어떻게 된 거지? 돌이켜보니 심약하게 어리석었던 행동이 아찔했다. 알렉시오가 손만 잡았는데도 그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고 , 마치 그녀를 빛내 주기 위해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남자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기꺼이 응할 마음이 있는 창녀처럼 어둑한 곳에서 돌기둥에 밀어붙여진 채 욕망에 몸을 떨 만큼 멍청하기도 했다. 그녀는 얼른 그 장면을 떨쳐 버렸다. 천하에 다시 없을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더라도 그가 사랑해 준다면 둘의 결혼 생활은 어떨까? 물리쳐야 할 생각이 스르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알렉시오 같은 남자가 사랑에 대해 뭘 알겠는가?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발바닥 아래 엎어지는 남자인데.
크리스탈 덴비는 알렉시오와 같은 방법으로 그를 갖고 놀다 결국 약혼반지를 얻어낸 섹시하고 도발적인 바람둥이였다. 만일 크리스탈이 살았다면 그가 정말 결혼까지 했을까? 알렉시오도 어쩔 수 없는 그리스 남자이기 때문에 결혼은 숫처녀와 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는 자기 신부가 낯설기만 한 남편을 기다리며 부부 침대에 누워 있기를 바랄 것이고. 섬세한 남자? 곰인형 하나 던져 준 뒤 덮치려는 속셈이겠지. 쇠를 두른 콘크리트처럼 섬세하기도 하지.
피로연은 새벽까지 이어질 테지만 이오네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떴다. 칼리오페가 정장으로 고른 녹색 드레스와 재킷이 준비돼 있는 걸 보고 웨딩드레스를 벗은 뒤 갈아입었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장 뒤편에 치워 둔 작은 서류 가방을 꺼내는데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녀는 방을 막 나서려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침대에 던져 놓은 곰인형을 흘끗 돌아보았다. 알렉시오가 준 에드워드였다. 상표에 적힌 이름으로 보아 영국 인형인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자격이 있지 않을까? 그녀는 입술을 자근거리며 나머지 곰인형들을 둘러보다 침대로 다가가 서류 가방을 열고 에드워드를 쑤셔 넣었다.
알렉시오는 중앙 계단을 내려오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디자인은 구식이지만 색상은 그녀의 엷은 살결을 돋보이게 해주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우아한 그녀의 몸매를 감출 수 없는 차림이었다. 무지근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온몸이 단단히 조여들자 불쑥 짜증이 났다. 그녀 때문인가? 아니면 어떤 여자에게도 느껴 보지 못했던, 이제 그녀가 온전히 그의 것이라는 빙충맞은 생각 때문인가? 그녀는 지금까지 만났던 어느 여자보다도 온몸을 흥분시킨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쇼핑할 생각에 빨리 파리로 가고 싶었다. 넓고 육감적인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자신이나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여자들이 당연히 여겨 왔던 많은 것들을 통해 그녀가 발견할 순진한 기쁨이 벌써부터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녀를 맞으려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지만 신부의 고모와 아버지, 그리고 떠들썩한 하객들이 먼저 그녀를 에워쌌다.
20분 뒤 두 사람은 공항으로 가는 헬기에 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이오네가 팽팽한 옆얼굴을 알렉시오 쪽을 돌렸다. “ 조종사더러 떠나기 전에 이 섬 상공을 돌아 달라고 부탁해 주겠어요?”
“ 당신이 원한다면” 알렉시오는 약간 놀랐다. 이오네가 아버지와 고모에게는 집안 일꾼보다 나을 게 없는 존재라는 걸 확신할 만큼 오늘 하루 충분히 목격했던 터라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섬을 떠날 줄 알았던 것이다. 그 자신이 너무 냉소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가족들을 사랑할 텐데.
조종사가 렉소스 상공을 도는 동안 이오네는 집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 더 이상 갇혀 지낼 감옥이 아니다 보니 다시 집으로 생각할 수 있었고, 잊다시피 하고 살았던 최근 몇 년 동안의 좋은기억들이 떠올랐다. 모든 걸 두고 떠나는 거였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아버지가 용서치 않으리라. 알렉시오를 사위로 ?으니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 당신이 파리의 내 집을 맘에 들어해야 할 텐데” 공항에 도착하여 전용 제트기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알렉시오가 말했다. “ 독특한 곳이거든”
“ 잡지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신경이 이렇게 곤두서 있지만 않았어도 알렉시오가 선택한 표현에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잡지 기사에서 크리스탈 덴비는 거대한 입술 모양의 주홍색 러브 쇼파에 앉아 있었다. 요란한 자줏빛 벽지를 배경으로 발치에는 짐승 모피가, 양쪽으로는 길게 솟은 아프리카 원주민 형상의 도금 촛대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정말 잊지 못할 만큼 도발적인 여자의 이미지였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알렉시오는 옛 약혼녀가 우아한 17세기 저택을 천박하고 요란한 사창가처럼 꾸며 놓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
“ 늘 이렇게 말이 없소?” 제트기가 이륙하자 알렉시오가 물었다.
이오네는 짐짓 하품을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 미안해요. 좀 졸려서요”
몇 분 뒤 그녀는 잠 속으로 빠져든 듯 보였다. 알렉시오는 그녀를 다시 흔들어 깨우고 싶은 옹졸한 충동이 이는 걸 꾹 참았다. 그녀에게 고된 하루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잊을 뻔했다. 그가 살짝만 건드려도 꽁무니를 빼고 그 예쁜 눈을 그와 맞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반응을 받아 마땅할지 몰라도 세상 무엇보다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로 사람을 감동시켰던 신부가 마음을 바꿨는지 서먹서먹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30년을 사는 동안 여자의 관심을 끌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던 알렉시오는 이런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파리 저택 앞에 도착해 리무진에서 내리는 그녀의 안색이 너무 창백하고 긴장돼 있어 갑자기 움직이다가 유리처럼 깨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기분은 괜찮소?” 알렉시오는 그녀의 입에서 두렵다는 말이 나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도 놀랐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병이기 때문이었다. 그걸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병.
“조, 좋아요...” 이오네는 팽팽한 손가락으로 작은 서류 가방을 꽉 움켜쥐고 여학생처럼 더듬거렸다.
알렉시오는 심호흡을 한 뒤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녀는 마치 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놀라서 비명을 지르더니 그제야 긴장한 초록빛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을 안고 문지방을 넘을 거요”
“왜, 왜 이러는데요?” 이오네는 체크 무늬 리본이 삐죽 나온 서류 가방을 꽉 움켜잡고 놀란 소리로 물었다. 에드워드의 리본이었다. 그 많은 곰인형 중에 그가 준 선물을 가져온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지금 그것은 아주 반가운 발견이었다.
“ 영국 풍습이거든. 당신 어머니는 영국분이잖소” 알렉시오가 조용힐 설명했다.
영국이라는 말만으로도 이오네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생모와 양모 둘 다 영국인일지 몰라도 이오네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로 오늘밤에 런던으로 달아날 계획뿐이었다. 그녀가 수시로 변하는 안색으로 시선을 감추는 동안 알렉시오가 의아한 눈길로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는 넓은 복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아름다운 백합으로 장식되 웅장한 아르데코 스타일의 테이블이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식사 준비를 해놨을 거요” 알렉시오는 비슷한 스타일로 꾸며 놓은 식당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오네는 음식 얘기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렸다. 적어도 2시간 30분 안에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 했다.
“좀 씻었으면 해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엄중히 말했다.
알렉시오가 그녀를 위층으로 데려가 널따란 침실로 안내했다. 흐릿한 금색과 녹색, 그리고 고전적인 가구들로 꾸며진 방은 지금까지 이 집에서 본 것들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크리스탈이 죽은 뒤 그가 완전히 바꿔 놓은 거였다.
“난 나가 있겠소” 그러나 알렉시오는 나가지 않고 망설이다 예고도 없이 그녀가 움켜쥐고 있는 두 손을 잡아 작은 서류 가방을 놓치게 만들었다. “ 날 쳐다봐요...” 그리곤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좀 낫군”
번뜩이는 짙은 금빛 눈을 바라보자니 이오네는 입이 마르고 온몸이 떨렸다. 감정이 들끊기 시작하여 겨우 보여 주고 있는 평온한 모습을 금방이라도 허물어 놓을 것 같았다. 그가 한쪽 손을 놓고 가는 금발을 이마 뒤로 넘겨주었다. 긴 갈색 손이 놀라도록 부드러웠다. 그의 손길이 닿자 찌를 듯 떨리는 자각이 엄습해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미 익숙해진 그의 체취가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향기로운 로션 냄새가 은은히 섞인 남자답게 강렬한 체취였다.
그녀는 더 원했다. 이렇게 서서 부르르 떨며 전혀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그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성과 경계심과 자기 보호 본능과 반대로 알렉시오를 원했던 것이다. 젖가슴이 팽팽해지고 몸 속 깊은 곳에서 열망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가 이미 이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길로 느릿하고 깊은 입맞춤은 달콤한 감각의 향연 같았다. 입안을 헤집는 혀끝이 참을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다른 부분은 전혀 접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드러운 여체에 단단한 근육질의 몸을 밀착시키고 싶은 갈망을 더욱 부추겨 놓았다. 육감적인 입술이 미묘하게 움직일 때마다 그녀를 찢어 놓고 있는 열망이 점점 더해 갔기에 목 안 깊은 곳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층에서 보겠소” 알렉시오는 팽팽하게 당긴 얼굴로 그녀를 놓아준 뒤 물러서서 이글거니는 금빛 눈으로 열에 달뜬 그녀의 얼굴을 음미하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가 양 어깨뼈가 단단한 벽에 부딪히자 그대로 기대어 비티고 섰다. 그가 가지 말았으면, 여기 남아 있었으면 싶었다. 날렵하고 견고한 이목구비에 매료되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눈과 조각 같은 광대뼈 위로 빛과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구릿빛 얼굴 곳곳에 힘과 자제력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에게서 눈을 떼는데 실제로 몸이 아플 지경이었고 그녀가 가진 모든 의지력이 총동원되었다. 난 이보다는 나은 결혼을 할 자격이 있어. 그녀는 자신과 열띤 논쟁을 벌였다. 여기 남는다면, 나약하고 위험하게 마음이 재촉하는 대로 따른다면,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를 사랑하고 말 것이다. 결국 자기 인생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가겠단 꿈음 물거품이 되고 말것이다.
그녀는 알렉시오처럼 세련되고 욕망이 불타는 남자에게 순진하게 잘 속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남자 경험이 없어서일 뿐이었다. 야니스하고 ?픈 연애를 했지만 남자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문제는 사람을 달뜨게 하는 육체적 호기심이 돌발된 것이고 혈관 속에 호르몬이 너무 많은 것에 지나지 않는지고 몰랐다.
이오네는 다시 결의를 다지고 이 저택에서 가장 쉬운 탈출구를 찾아 몰래 방을 빠져나갔다. 신경을 옭아대는 위층 답사를 마친 뒤 실망만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가 그제야 욕실 창문에서 저 아래 골목길로 나 있는 비상 계단을 발견했다. 그녀는 욕실문을 걸어 잠그고 서류 가방속에 넣어온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미리 준비해 둔 쪽지를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렉시오나 가정부가 식사 준비가 다 됐다고 부르러 오기 전까지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급하게 움직였다.
창문을 열어 젖힌 뒤 혼비백산할 정도로 섬뜩하게 가파른 경사를 애써 외면하고 발을 내딛는 동안 심장이 말 그대로 입안까지 튀어 올라올 지격이었다. 다를 대롱거리다 마침내 발 디딜 곳을 찾았다. 축축한 손바닥으로 난간을 더듬기 시작했다. 무서워서 뻣뻣한 몸으로 밑을 내려다보지 않은 채 다음 층계참을 조금씩 더듬어 가며 금속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굳은 땅에 내려서서 잠시 비틀거리다 비록 다리는 아직 후들거리고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속이 울렁거렸지만 억지로 줄달음을 쳤다.
알렉시오가 막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이오네의 경호대장인 티포가 복도로 나오더니 그를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미노스는 24시간 지켜주지 않으면 이오네가 위험에 처할 거라고 강력히 우겼다. 알렉시오는 장인이 최근에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고 털어놓기 전까지는 이런 일에 경호원을 넷씩이나 붙이다니 좀 심했다고 생각했다. 그 노인에게 적이 많다는 걸 잘 아는 까닭에 자신의 신부까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혼 여행 중에는 개인 섬에 있는 자기 아버지보다 외부의 접근이 쉬울 테니까.
“어디로 가는 건가?” 알렉시오는 경호원들은 나서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한 자신의 명령이 벌써부터 무시되고 있는데 화가 났다. 그가 있는 이 집에서 이오네가 무슨 일을 당한단 말인가?
“2층 창문의 경보장치가 울렸습니다!” 땅딸막한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외친 뒤 벌써 무전기를 들고 나머지 대원들에게 알리고 있있다.
알렉시오는 몹시 불길한 표정으로 두 걸음 만에 꼭대기 층계참에 도달해 이오네가 잠들어 있을 거라고 믿는 침실로 향했다. 욕실문이 닫혀 있는 걸 발견하고 둘의 사생활이 침해당하고 경호원들의 말소리가 높아 가는 데 격분하여 세차게 두드렸다. 이오네가 옷을 벗고 있는데 저 멍청한 녀석이 방으로 뛰어 들어온 건지도 몰랐다.
“제가 문을 부수겠습니다” 티포가 제안했다.
“이오네?” 알렉시오는 경호원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문을 두드리다 아내가 목욕하다 잠든 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넓은 어깨로 견고한 문을 밀치고 자물쇠를 비틀어 열었다.
“아가씨께서 달아났습니다” 알렉시오를 따라붙은 티포가 열린 창문과 바닥에 널린 옷가지들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알렉시오는 작은 소리로 되물었다.
“공항으로 가실 겁니다. 저희들이 모시고 오죠” 옆에 있는 사내가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떴다.
알렉시오는 잠시 믿을 수 없는 충격에 빠졌지만 가만히 넋놓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방방마다 돌아다니며 찾아보고 혹시 아래층 다른 거실에 있을지도 몰라 난간 너머로 이오네의 이름을 불러 보기도 했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불가사의한 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누군가 비상계단을 타고 올라롸 그녀를 납치해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위협적인 장면들이 폭격처럼 쏟아지자 진저리를 치며 다시 욕실을 살펴보기 위해 달려갔다.
이번엔 거울 한 쪽 귀퉁이에 박혀 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문간에서도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여기 있을 수 없어요.
- 이오네
몸값을 요구하는 쪽지가 아니었다. 이오네가 직접 쓴 것이었다. 알렉시오는 종이를 빤히 노려보며 아주 작은 암시라도 있을지 모를 그 한 문장에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했다. 정확히 5초 뒤 그는 다시 복도에 내려가 있었다. 티포가 쏜살같이 현관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알렉시오가 물었다.
“이번 일은 저희들에게 맡겨 두십시오. 가키스 사장님께서 전화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있었다면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신부가 신랑을 버리고 떠났다니.... 왜? 그녀의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내내 이오네는 신경이 몹시 곤두서 있었는데 그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괴로웠던 게 분명했다.
티포가 헛기침을 했다. “가키스 사장님은 따님을 직접 돌보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저희가 아가씨를 섬으로 데려왔으면 하십니다”
맹렬한 분노가 팽팽히 당겨 있는 알렉시오의 온몸을 힘차게 가르고 지나갔다. “내 아내는 크리스토우라키스 집안 사람이니 내가 돌볼 걸세!”
잠시 후 알렉시오는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티포와 깡패 부하들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하기 위해 알고 있는 지름길을 다 동원했다. 아직 결혼서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이오네가 그를 떠날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운전을 자동 조종 장치로 돌려놓았다. 겁을 먹은 거야. 뭘 겁내는 거지? 나? 그에게서 달아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목안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헛돌았다.
그가 예상한 것처럼 이오네가 온전하게 순결한 신부는 아니라서 신랑이 그걸 발견하고 호되게 비난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그녀가 들려준 어부 아들의 얘기를 곰곰 떠올려 보는 동안 알렉시오의 굳은 옆얼굴에 험악한 그늘이 졌다. 순결을 잃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큰 듯했다.
그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실망한 건 사실이지만 유일한 해결책이 신랑을 버리고 달아나는 거라고 여길 만큼 이오네가 큰 부담을 느꼈다는 게 어이없을 뿐이었다. 순간 성난 아버지가 휘두르는 주먹에 이오네가 움츠러들던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랑의 반응이 두려워 도망칠 수 있었다. 그가 그녀의 아버지와 다르다는 걸 이오네가 어떻게 알겠는가?
공항까지 와서 비행기표를 샀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더해 가는 참담한 기분과 불안감이 이오네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런던행 비행기가 지연되고 있긴 하지만 더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탑승구 안으로 들어가 기다릴 수도 있는데 그녀는 아직 그 마지막 단계를 취할 수가 없었다. 공항까지만 가면 인파 속에 묻혀 익명이 보장될 줄 알았는데, 다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듯한 분위기에 위협을 느꼈다. 단지 그녀가 이상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신경을 몹시 곤두세운 채 괴로워하는 것이 눈에 띄어 저 여자가 왜 저러나 의아해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별일 아니야. 자신을 안심시켰다. 이제 곧 영국에 도착할 것이다. 미스티 언니를 찾아낼 시간이 훨씬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을 그려봐도 생각했던 것만큼 위안이 되지 못했다.
알렉시오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알렉시오가 어떻게 느낄까? 지금쯤이면 그녀가 달아났다는 걸 알아냈을 텐데. 그녀가 왜 사라졌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기분 나빠할까? 분명 자존심은 다치겠지. 그녀의 잠적이 크리스토우라키스 집안에 안겨 줄 불명예와 수치를 감당할 만큼 남에게 못할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사람이 처음 만난 날을 저주할 것이다.
알렉시오는 사명을 띤 남자처럼 큰 걸음으로 공항을 가로질렀다. 비행일정표를 확인해 보니 2시간 뒤에 그리스행 비행기가 출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오네가 노발대발해 있을 아버지한테 돌아갈까?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디로 갈까? 결혼식 때 보니 친구도 없던데. 그러다 어머니가 영국인이 아니냐고 장난스럽게 일깨워 줬을 때 그녀가 당황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영국이야. 친척이라고 남아 있을 테니까. 런던행 비행기는 1시간 뒤에 이륙할 예정이지만 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는 다소 느긋하게 숨을 내쉬었다.
알렉시오는 아내를 알아보기 전에 곰인형 에드워드를 발견했다. 그가 있는 쪽을 등지고 선 아가씨가 에드워드일지도 모를 곰인형을 꼭 끌어안고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10대 소녀처럼. 알렉시오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눈부신 백금색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오네? 그럴 수 있을까? 입는라고 숨 꽤나 참았을 것 같은 순바닥만한 체크 무늬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배가 다 드러나는 핑크색 배꼽티와 굽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천박한 구두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이오네? 알렉시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그대로 멍하니 서있다가 반경 50미터 안에 있는 남자 치고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남자가 없다는 걸 알아채고 정신이 들었다. 아주 섹시하지만 철저히 이오네답게 잡지진열대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가는 게 보였다. 성모마리아 같은 얼굴이 화장으로 돋보였다. 정말 굉장해. 속으로 감탄사가 나오자 알렉시오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는 아내가 달랑 잡지 한권을사기 위해 고액권 지폐를 한웅큼 끄집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자 판매원이 그 동화 속 공주에게 넋을 잃고 있다가 어떤 지폐를 내야 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줍음이 많은 아이야. 산데르는 그렇게 표현했다.
이오네는 조그만 핸드백에 나머지 지폐들을 다시 쑤셔 넣고 판매대에서 돌아서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알렉시오를 발견하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는지 상상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는 불과 6미터 앞에 굳은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번뜩이는 금빛 눈과 마주치기도 전에 그녀는 가슴이 조이고 호흡이 곤란해졌다.
“여, 여긴 웬일이에요?” 그녀는 바보같이 더듬거렸다.
“당신은 내 아내요” 알렉시오는 썩 고르지 않은 거친 저음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는 세 마디 말로 이오네가 인정하지 않으려고 사실상 별짓을 다했던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순식간에 그녀는 오늘이 시작되던 순간과 엄숙하고 아름다웠던 교회 예식이 행해지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처음으로 오늘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잠재 의식에서 슬금슬금 빠져 나와 그녀를 덮쳤다. 그와 결혼한 것이다.
사실은 그보다 더한 일을 했다고 양심이 말해 주고 있었다. 어서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알렉시오를 납득시키는 짓까지 했으니. 간단히 말해 진지한 그를 기만했고 솔직한 그에게 구실을 붙여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언제나 도덕성만큼은 자부심을 가졌던 이오네는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돌아보고는 무너져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렉시오는 할 말이 많았지만 붐비는 공항이 감정을 표출하기엔 적당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 만큼은 자제력이 남아 있었다. 맹렬한 분노가 다른 것들을 다 밀어냈기 때문에 그게 무슨 감정들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팔목을 꽉 움겨잡았다. “당신의 변명부터 들은뒤에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내리겠소”
“알렉시오.... 난....”
“둘만 있는 곳으로 가기 전에 한 마디도 말아요” 알렉시오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깊게 울리는 소리로 이를 갈며 말했다.
알렉시오는 그녀의 빈약한 옷차림에 지나가던 남자가 넋 나간 눈길을 던지는 걸 보고 그 불쾌한 사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재킷을 벗어 가려 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갔다.
이오네는 알렉시오가 진열돼 있는 코트를 휙 걷어 신용카드와 함께 계산대에 던지는 동안 나무 조각상처럼 멀거니 서 있었다. 충격을 받은 거였다. 저 남자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나는 왜 그가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걸까? 그는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 준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죄책감보다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면서 받아들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알렉시오는 도난 방지용 꼬리표를 뗀 코트를 받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오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판매원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창피해서 마지못해 옷소매에 팔을 끼워 넣었다. 코트가 너무 길어 발목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그러나 알렉시오는 행여 앞자락이 벌어질까 허리를 숙여 마지막 단추까지 모두 채웠다.
“왜요?” 이오네는 그제야 어리둥절한 소리로 물었다.
“우리 가문의 성을 쓰는 동안은 당신을 매춘 소녀처럼 돌아다니게 놔둘 수 없어서 그렇소!” 알렉시오가 다듬어지지 않은 저음의 그리스어로 대답했다.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희미한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다른 남자들이 못 보게 가녀린 몸을 빈틈없이 다 가렸다는 게 너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곧 발끈 화가 치밀어 창백한 얼굴이 벌개졌다. 매춘소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그녀의 옷차림은 분명 요즘 가장 유행하는 패션이었다. 그가 심술을 부리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봤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떠오르자 그 역시 아버지만큼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로서는 10초 이상 생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알렉시오가 자신의 남편임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충격이 두뇌세포를 마비시킨 듯 했다.
알렉시오는 공항 호텔에 들어가 얘기를 나눠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어떤 고백을 하더라고 흥분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미 머릿속에서는 지금까지보다 더 그를 격분시키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가 완전히 속아넘어간 걸까? 그녀가 아직도 그 어부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단 말인가? 뇌쇄적인 옷차림을 하고 그와 결혼한 내성적이고 얌전한 신부와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공항에 있는 그녀를 발견한 마당에 달리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야니스란 녀석하고 만나기로 하고 달아난 걸까? 그녀에게 이 결혼은 두 사람을 갈라놓는 난폭한 아버지에게서 달아나는 긴급 피난책에 불과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