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 인과 사랑을-3화 (3/10)

3

“가서 그림이나 봅시다” 알렉시오는 거친 저음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는 여자들이 이렇듯 휘청거리며 품에서 빠져나가 다른 남자 생각을 하는 데 익숙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 그 자신의 분노가 당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오네는 떨고 있었다. “ 제가 한 말을 우리 아버지한테 전하지 말아주세요”

알렉시오는 턱을 뻣뻣이 조이고 성난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 물론이오”

이오네는 초현대식 화랑으로 그를 안내했지만 속은 아직도 요동치고 있었다. 야니스는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녀를 미행한 아버지의 부하들이 야니스가 흠씬 두들겨 맞는 장면을 억지로 지켜보게 만들기 전까지 둘의 관계는 유쾌하고 순수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가족은 이 섬을 떠났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그가 치른 대가를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신랑이 될 남자에게 다른 남자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건 아니라고 고백하다니 더욱 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는 지금 그녀의 순결을 의심하고 있었다. 억만장자의 투기 대상이 아니라 적어도 그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박물관에 걸려 있어야 할 웅장한 그림을 바라보는 그의 강건한 구릿빛 옆 얼굴이 아직도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 아버지처럼 그 역시 신부가 다른 남자의 손이 닿지 않은 여자이길 바라는 현대판 원시인이었다. 그동안 뿌리고 다닌 숱안 염문에 관해 물어보면 그 자신도 싫을 텐데. 하지만 그가 한때 천박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탈 덴비 같은 여자와 결혼하려 했다니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대단한 미인이었지. 이오네는 씁쓸하게 인정했다. 그런 여자들이 못생긴 여자보다 아주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처럼 남자를 지배하는 기분이 정말 괜찮을 거라는 쓸쓸한 동경이 들었다.

“ 아까 그렇게 물어봐서 미안하오” 알렉시오가 갑자기 휙 돌아서서는 한결같이 어두운 눈으로 갸름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정이 격앙된 저음으로 사과했다. “ 당신 과거를 물어볼 자격이 없는데 그랬소”

이오네는 그의 사과를 받고 놀랐지만 이내 그가 야니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자신을 유인한다는 걸 알아챘다. 화가 솟구치며 반항심이 꿈틀거렸다. 그라면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 말해 주고 싶으냐고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는 데 적잖은 힘이 들었다. 대신 말없이 알아들었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 이걸 가져왔소....” 그가 세련된 맞춤 정장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 우리 집안의 약혼반지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괜찮소. 당신이 직접 골라도 되니까. 우리 어머니조차도 너무 유행에 뒤진 걸로 고르셨다는 걸 솔직히 털어놓겠소.”

이오네는 갑자기 허둥거리며 화랑의 불빛을 받아 영롱한 빛을 발산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려다 보았다. 집안의 약혼반지.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 그의 동기가 어떻건 그는 이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데 그녀 자신은 안 그렇다는 게 양심에 찔렸다. “ 참 예쁘네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감탄하고는 본심이 들킬까 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렉시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자신 있게 약속했다. “ 아직 사랑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힘닿는 만큼 최선을 다하겠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오네는 이를 악물었다. 일어나지 않을 법한 약속을 어떻게 지키는지 알아볼 만큼 그의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도 다른 여자들처럼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언젠가는 깊은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때까지 많은 남자 친구들을 사귀어 볼 생각이었다.

알렉시오처럼 키스할 줄 아는 남자 친구라면 아주 괜찮은 출발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오랜 경험이 그렇게 열띤 반응을 불러일으킨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호르몬 때문에 그토록 넋을 잃었던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에게 보인 반응에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 이오네...” 알렉시오는 이오네의 무표정하면서도 평온하게 꿈꾸는 듯한 눈길을 바라보며 그녀의 관심을 다시 빼앗아간 게 뭘까 헤아려 보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 알렉시오, 잘 있었어요? 이오네가 즉시 나한테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랬네” 교태를 부리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화랑 입구 쪽에서 들려 왓다.

이오네는 마른 얼굴 가득 환영의 미소를 머금고 알렉시오 쪽으로 다가오는 칼리오페를 보는 순간 얼른 상념에서 빠져나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알렉시오의 마음을 끌리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좋아하는 고모가 알아서 감당해내고도 남을 테니까. 그 뒤로도 1시간 가까이 그의 집안 사람들에 대해 시시콜콜 수다스럽게 물어오는 칼리오페를 견디는 동안 알렉시오는 아주 완벽한 매너와 함께 인내심과 관용을 보여 주었다.

“ 넌 저렇게 좋은 집안 남자를 남편으로 맞을 자격이 없어” 저녁 식사 전에 옷을 갈아입으러 걸어가는 동안 칼리오페가 분개한 눈길로 조카를 쏘아보았다. “ 알렉시오가 네 처지를 알아 버리면 아무리 설득해도 너같이 비천한 여자하곤 결혼하려 들지 않을걸!”

고모의 독설을 듣자 이오네는 처음으로 울적한 동정심이 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칼리오페 고모의 사랑 얘기를 들려 주시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20년 전에 오빠 회사의 간부 사원과 사랑에 빠졌지만 미노스 가키스가 격분하여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칼리오페는 오빠의 결정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여 50대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아직 미혼으로 신세 한탄이나 하며 살았다.

그래도 고모는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잖아. 옷장을 뒤져 이번에도 눈에 띄지 않는 색상의 드레스를 고르는 동안 이오네는 몸서리를 치며 그런 결론을 내렸다. 코스마스 오빠는 운이 나쁜 편이었다. 전용 비행기가 추락한 날 밤 오빠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느라 집중력이 흩어져 버리는 통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코스마스는 그녀보다 더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코스마스는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두뇌에 어머니의 감수성까지 지닌 남자였다. 지금도 너무나 보고 싶었다. 이오네는 오빠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며 코스마스가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이루지 못했던 일을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속임수를 써서라도 꼭 해내고야 말 거라고 다짐했다. 오빠처럼 자신의 모든 게 꺾이기 전에 탈출할 것이다.

성대한 저녁 식사였다. 에피타이저가 들어왔을 때 미노스 가키스는 다음달에 해외 출장을 가기 때문에 결혼식은 두 주 안에 올려야 할 거라고 말했다. 이오네가 흠칫 놀라 알렉시오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갸름하고 힘찬 얼굴이 긴장되지도 않았다. 사실은 무겁게 내리뜬 짙은 금빛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통에 얼굴이 화끈거렸으므로 재빨리 시선을 돌려야 했다.

“ 결혼식은 물론 이 섬에서 치를 걸세” 미노스는 반쯤 미소 띤 얼굴로 알렉시오의 눈치를 보았다. “ 내 생각엔 자네와 이오네가 여기서 살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그 순간 충격이 이오네의 온몸을 덮쳐 버려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 이오네가 여기서 살면 자네가 해외 출장 중일 때도 고모가 있으니까 적적하지 않을 테고, 계속해서 완벽한 보호를 받을 수도 있고 말이야”

“ 안 돼요 .... 안 돼요!” 이오네는 처음부터 계획된 일일 거라고 확신이 들자 질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고모가 당황하여 식탁 밑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는 동안, 미노스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제트 추진을 단 스팀 롤러처럼 응징의 주먹을 쳐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딸에게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냐?”

이오네는 백짓장 같은 얼굴로 주먹이 날아오길 묵묵히 기다리다가 식탁 맞은편에서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소리에 흠칫했다.

“ 따님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날엔 제가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알렉시오는 집주인보다 더 공격적으로 외쳤다.

한순간 지금까지 가키스 집안에 찾아들었던 어떤 침묵보다 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미노스 가키스에게 저런 식으로 대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태 앞에서 사나운 얼굴이 마비된 채 백발이 돼 가는 큰 머리가 도전자를 향해 서서히 돌아갔다. 이오네는 알렉시오가 맞기 전에 식탁 맞은편으로 몸을 날려 저 어리석은 폭군의 커다란 입을 식탁보로 틀어막고 싶었다. 저 남자가 돌아 버린 게 아닐까? 정작 필요할 때 그렇게 잘난 머리를 뭘 하는 거야? 미노스는 사업상 알렉시오가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그런 모욕을 감수하느니 그를 이 섬에서 내쫓아 파멸시키고 말터였다.

미노스가 노기 띤 어두운 눈으로 젊은 남자를 노려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젠 저애가 자네 여자라 이거군, 응?”

“ 예” 갸름하고 힘찬 얼굴이 뻣뻣하게 굳은 채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미노스 가키스는 여자들이 움찔할 정도로 갑자기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대단한 녀석이라는 듯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이오네는 덜덜 떨리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는 걸 느꼈다. 경찰을 부르리라. 아버지의 부하들이 알렉시오를 해치면 이번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경찰을 불러 아버지를 신고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아버지는 맘에 든다는 눈길로 알렉시오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녀는 입을 딱 벌릴 뿐이었다. “ 자네도 나와 다르지 않군. 자기 건 남이 손대지 못하게 지키려는 게 말이야. 좋아.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입 다물고 있도록 해!”

이오네는 그들 모두를 향해 폭발할 뻔 했던 난폭한 위협과 수치심에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 눈을 꼭 감았다. 남자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렉시오는 캐는 듯한 눈길로 이오네를 훑어보며 자신이 엉뚱하게 과민 반응을 보인 건지 자문해 보았다. 그가 참견한 걸 그녀가 고마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가 딸을 때리려는 줄 알았지만 노인이 허공에 대고 성난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라는 게 더 그럴듯했다. 맞는 게 두려웠다면 이오네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근거로 미노스가 폭력을 휘두를 거란 의심을 했을까? 게다가 죽음을 앞두고 병마와 싸우는 사람인데. 알렉시오는 그런 행동을 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 몸이 좀 안 좋아서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오네는 숨막힌 소리로 우물거렸다.

“ 그래, 가보거라” 아버지가 싫은 내색을 감추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 너 때문에 입맛이 다 달아났으니까!”

이오네는 젤리처럼 느껴지는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쿵 울렸고 용기는 전부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알렉시오는 이 저택에서 살겠다고 순순히 동의할까?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로선 무척 편리한 조건일 테니까. 완전한 자유를 얻는데다 아내가 친정 식구들하고 있으니 오랫동안 출장을 떠나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연 신혼여행이나 갈 수 있을까? 알렉시오 자신도 파리라면 심드렁할테고, 아버지도 신혼여행은 사업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낭비라고 그를 설득할 게 뻔했다. 이오네는 눈물에 젖어 경련이 이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침실문을 열었다. 그리곤 곧장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꿈이었던가!

계획을 세우는 일이라면 아버지가 그녀보다 한 수 앞서는 건 당연한데도 그런 가능성을 예견하지 못했다니 한탄만 절로 나왔다.

열여덟 살 생일을 맞은 지 몇 달 되지 않아 쌍둥이 언니의 편지를 받은 뒤로 이오네의 우편물을 일일이 검열을 받았다. 미스티 언니가 만나고 싶어했지만 이오네의 아버지는 사회복지국에서 동의도 없이 입양 기록을 공개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 결국 이오네는 그 편지에 답장할 수 없었다. 다만 언니가 시칠리아 대부호의 정부라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아버지가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얘기해 주어서 알 뿐 그녀가 직접 읽은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애타게 만나고 싶어하는 언니가 창녀라고만 알려 주었다.

그 후로 이오네는 아버지의 의도대로 진저리를 치며 물러나는 대신 필사적으로 쌍둥이 언니를 찾아내 도와주고자 했다. 그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 다른 생활을 그려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미스티 언니는 그녀의 초점이자 유일한 목표였다. 이제 그 목표가 점점 멀어져 가는 현실 속에서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스트레스도 심하고 감정을 혹사당한 하루였던 탓에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오랜 기억들이 오늘 하루의 혼란한 사건들과 뒤섞이는 바람에 밤새 뒤척여야 했다.

집주인이 자리를 뜨자마자 알렉시오는 즉시 이오네를 찾아 나섰다.

그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되겠다던 예비 신부의 놀라운 제안이 더 이상 놀랍지 않았다. 저렇게 난폭한 아버지 밑에서 20년 넘게 살다 보면 아무리 강인한 사람도 기가 꺾이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결혼해서도 렉소스 섬에서 살라는 말에 질겁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오네가 자기만의 집을 갖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했고,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를 구경하고 지금까지 주어지지 않았던 자유를 누리고 싶어하는 것은 더더욱 당연했다. 하지만 이오네는 한가지 사실을 알아야 했다. 표정 많은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는 미노스 가키스의 고용인이 아니며 그 노인에게 위협 당할 인물도 아니라는 것을.

미노스가 회복되기는커녕 점점 악화된다는 걸 알려 줘야 할까? 수술 일정이 잡혀 있지만 생명이 연장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사실을? 미노스는 여동생이나 딸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슨 권리로 끼어든단 말인가? 하지만 입을 다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녀가 이오네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는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리다가 널따란 거실로 성큼 들어섰다. 눈길 닿는 곳마다 말랑말랑한 인형들이 보이는 게 잠시 장난감 가게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선반에도, 카펫에도, 둥근 테이블 위에도 크고 작은 곰인형 천지였다. 어떤 건 폭신폭신하게 털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었다. 인형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주 낡고 털이 완전히 빠진 끔찍한 모습을 가리지는 못했다. 둥글게 빛나는 작은 눈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통에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알렉시오는 신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이 곰들끼리 여행을 떠나겠다고 나서지 말아야 할텐데.

침실문도 열려 있고 전등도 켜진 상태였지만 그의 주의를 끈 건 나직하게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는 문지방을 성큼 넘어섰다. 11시도 안 됐는데 이오네는 벌써 잠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여자들이 기대대로 나온 적이 있었던가? 마음이 어지러워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자기를 두고 아버지와 예비 신랑 사이에 주먹다짐이 오갈 뻔한 일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잠 속에 빠져 있다니!

그녀가 자세를 바꾸는 바람에 둥글게 말려 있던 밝은 금발머리가 풀려서 베개 위로 펼쳐지자 알렉시오는 좀더 은밀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정말 아름다운 머리채였다. 그리고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낮에 본 패션 감각은 그녀가 태어나기 30년 전쯤에서 멈춰 버린 듯했지만, 지금은 부드러운 곡선에 착 달라붙어 맨살을 드러내다시피 한 복숭아빛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어쩌면 곰인형 하나 정도는 참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느라 상기된 얼굴이 그를 향하자 그때서야 흰 살결에 나있는 눈물 자국과 아직도 가냘픈 얼굴에 묻어 있는 긴장을 보았다.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 앞뒤로 움직이는 동안 안절부절 못하는 손은 리넨 시트를 거며주었고, 살짝 벌어진 보드라운 입술에선 두려움의 탄식이 길게 새어나왔다.

꿈속에서 이오네는 해변에서 두 팔을 꽉 붙들린 채 야니스가 견디고 있는 매질을 지켜보았다. 둘 다 함정에 빠진 것이지만 순전히 그녀의 책임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만이 그렇게 잔인한 형벌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만이 부하들을 시켜 그녀의 반항심이 만들어 낸 유린의 현장을 지켜보게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말릴 힘이 없었다. 다만 야니스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 계속 당하지 말고 그냥 쓰러져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듣고 달려오리란 희망에, 그것만이 저 잔인한 구타를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마침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눈을 떴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에 침대로 그림자를 드리운 크고 거뭇한 남자가 들어왔다.

얼어붙은 상태에서 풀려난 알렉시오는 힘차고 유연한 동작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강인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 악몽을 꿨을 뿐이오”

연약한 몸으로 여전히 몸서리를 치던 이오네가 뒤로 몸을 홱 빼더니 아니라는 듯 괴롭게 숨막힌 소리를 토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여. 야니스가 심하게 맞았단 말이에요!”

거부당하는 데 익숙지 않은 알렉시오는 이내 경직했고 다른 남자의 이름이 나오자 갸름하고 힘찬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 어떻게 된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알아야겠기에 물었다.

그러나 이오네는 악몽에서 깨어난  직후의 혼란한 상태에서 빠져 나와 울음을 참는 동안에도 알렉시오가 이 방에서 뭘 하고 있는지 의아해하며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정말 오랜만에 그날 오후의 일을 꿈에서 보았다. 괴로운 일들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걸 어린 나이에 배웠던 것이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흐트러진 베개로 다시 몸을 던지고 옆으로 휙 돌아눕는 동안 아이의 머리처럼 반짝이는 연한 금발이 일그러진 옆얼굴을 가렸다.

“ 무슨 일이오?” 부들부들 떨리는 흐느낌이 다시 그녀를 긴장시키자 알렉시오는 가냘픈 등에 손을 얹어 달래며 다시 한번 물었다.

“ 야니스를 몰래 만났다고 아빠가 사람을 시켜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를 흠씬 두들겨 팼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그자들은 주먹질을 하면서 웃기까지 했어요.”

알렉시오는 깜짝 놀라 숨을 몰아쉬었다.

이오네가 몸을 틀어 상기된 얼굴에서 윤기 나는 금발을 걷어 내자 의외로 험악한 초록빛 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날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뻔했다고요”

알렉시오는 지금 듣고 있는 말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좀더 원초적인 본능이 그런 불쾌감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녀의 밝은 눈과 도톰한 입술과 헝클어진 머리는 순수한 관능 그 자체였다. 가는 끈이 가냘픈 어깨에 걸쳐져 있고, 한 줌도 안 되는 고운 실크가 유혹적으로 봉긋 솟은 젖가슴을 뚜렷이 느끼게 해주었다. 욕망이 가벼운 통증처럼 몰려와 아드레날린처럼 온 몸을 관통하자 근육들이 절박하게 단단해지고 있었다.

“ 그리스 아버지들에겐 딸의 정절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거예요?” 이오네가 몰아붙였다.

“ 안 할거요. 그리고 그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가키스 집안의 딸이 어부의 아들과 무슨 미래가 있겠소?” 알렉시오는 지극히 냉정하게 물었다.

“야니스는 의대 졸업반이었고 우린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어요” 이오네가 변명하듯 말했다.

어부의 아들에 관한 얘기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알렉시오는 난폭한 남자처럼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그가 아닌 다른 생각은 하지 않도록 강렬하게 각인시키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무거운 침묵이 두텁게 내려앉았다.

이오네는 새까만 속눈썹 때문에 더욱 이글거려 보이는 금빛눈을 바라보다가 그 눈이 불꽃을 내뿜자 온몸의 힘줄이 팽팽히 당겼다. 입이 마르고 몸 안에 새가 갇힌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몸이 그녀를 배신했다. 젖가슴이 단단해지고 저리면서 무지근했다. 열기가 기세 좋게 온몸을 울리며 퍼져나가 팽팽하게 당겨진 허벅지 사이에 불을 지펴 놓았다.

그가 몸을 숙이더니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갸름하고 긴 갈색 손을 밀어 넣고 뺨을 보듬었다. 그녀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가빠오는 상태에서 거뭇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오만하게 솟아오른 콧날, 나른한 눈빛, 거칠거칠한 수염이 강조해 주는 공격적인 턱선, 매력적으로 두툼한 입술. 은밀한 부분이 작렬하는 아스팔트 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리고 심장의 고동은 점점 더 강렬하게 요동치는 듯했다.

“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소” 알렉시오가 잠긴 목소리로 나무랐다. “ 당신과 얘기를 나누려고 왔소. 이 시간에 벌써 잠자리에 든 줄은 몰랐지”

이오네는 손을 내밀어 그의 이마에 드리운 숱 많은 검은 머리를 손끝으로 스치듯 조심스럽게 쓸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 갈망하고 있다는 게 놀랍고 두려웠지만, 그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고 그를 끌어당겨 저 육감적인 입술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다. 그가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기대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 지금 당신을 만지면 이 방을 나가지 못할 테니 첫날밤까지는 기다려야겠지”

비스듬히 경사진 그녀의 광대뼈 위로 안타까워하는 홍조가 퍼졌다. 그녀가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유혹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자존심도 상하고 혼란스러웠다. “ 난.... ”

“ 쉿” 그가 그녀의 몸과 마음을 얻기라고 한 듯 금빛 눈을 반짝이며 심장을 멎게 만드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 당신도 나만큼 열망해서 열광이지만 기다림은 언제나 기쁨을 배가시켜 주거든”

알렉시오가 큰 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걸 보고 이오네는 잠시 호흡과 이성을 잃을 만큼 강한 분노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어떻게 감히 내가 실연 당한 바람둥이처럼 자기에게 몸을 던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순간적을 키스 받고 싶은 충동이 조금 일어난 걸 가지고 어떻게 잠자리로 유혹했다고 받아 들이는 거지?

알렉시오는 유유히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결혼이라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혼자 미소를 지었다. 이오네가 아버지에게 저 정도로 구속되어 살았다면 관대한 남편하고의 결혼 생활은 상대적으로 빛날 수도 있었다.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물구나무서기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크게 오해한 게 아니라면 그만큼이나 화끈한 신부를 얻는 축복을 받을 듯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욕망을 억제하자니 힘들기는 해도 둘의 첫날밤이 그 고통을 보상해 주고도 남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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