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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가져오너라" 미노스 가키스는 에어컨이 잘 돌아가는 시원한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오네를 향해 준엄하게 명령했다.
이오네는 알렉시오가 아버지의 거친 말투에 당황하여 놀란 걸 알아채곤 얼굴을 붉혔다. 알렉시오 앞에서 함부로 취급당한다는 사실이 평소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 이순간 가장 중요한 게 뭔지 기억해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창피함을 억누르고 고개를 높이 치켜들며 가냘픈 어깨를 젖혔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대화에 열중하느라 알아채지 못하길 바라며 날씬한 엉덩이가 미묘하면서도 유혹적으로 흔들리도록 작고 느린 걸음으로 긴 대리석 복도를 걸어갔다.
이오네는 경험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 앞에서 이런 미묘한 방법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고 있었다 . 아버지의 손님 접대를 할 때마다 불어들이는 요염한 금발 미녀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할 기회가 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걸 신만은 알 것이다. 그건 여자들이 수영장 주변에서 일광욕하는 걸 종종 보았고, 음탕한 남자 손님들을 유혹하기 위해 교태를 부리는 것도 지켜보았다. 어쩔 수 없는 혐오감에 보드라운 입술을 팽팽히 조였다.
집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복도를 걸어가는 이오네를 지켜보던 알렉시오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기 싫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날렵한 검은 눈썹이 도드라지도록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나긋나긋하면서도 느릿한 걸음걸이는 여성스러운 엉덩이로, 늘씬하게 뻗은 다리 위로 살랑살랑 올라가는 스커트 자락으로 시선을 이끌었다. 우아한 무희 같은 움직임 속에는 알렉시오의 아랫도리를 놀랍도록 무지근하게 만드는 불순한 뭔가가 있었다.
이내 시야를 벗어난 이오네는 품위가 떨어지는 연기를 하느라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온몸을 떨며 차가운 복도벽에 쓰리지듯 기댔다. 그러나 알렉시오의 관심을 끌어 그녀가 이 결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믿음을 줘야 했다. 그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마음을 바꿀 테고, 그렇게 되면 천하의 미노스라 해도 강제로 결혼시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로선 이 섬을 벗어나는 희망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거였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렇긴 해도 난생 처음, 그것도 아버지 앞에서 남자의 관심을 끌려니 숫기 없는 그녀로선 대담한 치밀함이 이만저만 요구되는 게 아니었다.
이오네는 알렉시오가 사람의 기력을 빼놓는 남자라는 사실을 잊으려고 부단히 애써 왔다는 걸 불편학 인정하면 미리 준비해 놓은 커피 쟁반을 찾아들었다. 그를 만나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흔들렸다. 불현듯 짧았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몇 달 전 그날 밤, 차라리 가정부로 오해받은 게 다행이었다. 당황하는 손님 앞에서 아버지에게 하녀 취급이나 당하는 건 굴욕적이기 때문이었다. 막연한 생각이지만 그날 알렉시오는 화가 솟구치는 바람에 분별력이 좀 떨어졌던 모양이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짙은 눈엔 자부심이 가득했고 공격적인 턱선은 무쇠처럼 단단했다. 아버지가 재미 삼아 그에게 어떤 시험을 했을지 안 봐도 훤했다.
그런데도 알렉시오를 처음 보는 순간 놀라서 입이 안 떨어지는 여학생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잡지에서 거뭇하게 잘생긴 얼굴을 보긴 했어도 언제나 지독하게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언제라도 폭발할 듯 활기에 넘쳐 생생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남자에 대해서는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고모가 가장 세련되었다고 믿는 비단 시트를 갈아 달라고 불렀을 때도 굳이 그녀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 저택에는 일꾼들이 24시간 대기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그녀가 직접 리넨 시트를 가지러 갔다. 다시 돌아갔을 때 그는 그녀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긴장감을 발산하여 발코니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좀도둑처럼 양심에 찔리면서도 끌리는 감정을 물리칠 수 없어 그를 계속 훔쳐보았다. 동작이 굼떠서 시트를 다시 정리하는 데 영원 같은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그토록 늑장을 부리며 꾸물대는데도 그는 무심해 보였다. 딱 한 번 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이오네는 시선을 집중시키는 그 금빛눈에 포로가 되었고, 자신의 입안이 타는 것처럼 느꼈었다. 잠시 후 그는 방안엔 자기 혼자뿐이라는 듯 휙 돌아서 발코니로 나가더니 그녀가 다시 방을 나갈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이오네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기억에서 빠져 나왔다. 쟁반을 들고 큰 객실로 들어선 그녀는 아버지가 덩굴로 뒤덮인 그늘진 로지아(한쪽만 벽이 있는 복도)로 나가 왕 같은 자태로 앉아 있는 걸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렉시오는 날렵하고 힘찬 체구를 절벽 가장자리에 세워진 옹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 있었다. 고소공포증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쟁반 손잡이를 꽉 움켜잡으며 시야에서 절벽 아래 전경을 지웠다. 로지아로 나갈 때면 늘 속이 울렁거리며 아찔한 공포가 느껴졌으므로 미리 방지해 보려는 거였다. 알렉시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주시하다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 이리줘요”
이오네는 그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대화를 중단했다는 사실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촘촘한 검은 속눈썹 사이로 광채를 발하는 짙은 금빛 눈과 마주치자 심장이 쿵 소리를 내는 듯했다. 그는 그녀가 죽을 힘을 다해 붙들고 있는 손을 떼어낸 뒤 쟁반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 석조 테이블 우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넋 나간 눈길을 내리뜬 채 커피를 따르기 위해 벽 쪽에 가까이 붙어서 조금씩 테이블 쪽으로 나아갔다.
“ 고소공포증이 있으시군” 알렉시오가 중얼거렸다.
미노스 가키스가 냉담하게 말했다. “저걸 빨리 극복해야 할 텐데”
이오네는 자기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자 아버지가 화났다는 걸 알아채고 재빨리 말했다. “어리석은 일이죠. 그런 일에 무너지면 안되는데”
알렉시오는 그녀를 주시했다. 두려움을 이기려고 용감하게 노력하는 건 사실이지만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고 들고 있는 커피포트는 조금씩 흔들렸다. 그런데도 그녀의 아버지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알렉시오는 돌연 집주인이 저 미소를 거두도록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서는 아찔한 급경사 위로 거꾸로 매달아 놓고 싶은 원시적인 충동을 느꼈다. 그를 뒤흔들어 놓는 충동이었다.
이오네는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했다. 두 사람이 사업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알렉시오에게 초점을 맞추고 고소공포증을 드러내다니 얼마나 형편없는 인상을 줬을까 싶어 자신을 질책했다. 한때 스릴 있는 스포츠를 즐기기로 유명했던 남자인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가까이에서 보니 속눈썹 하나는 기가 막혔다. 단단히 각진 옆얼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까만 곡선을 바라보느라 잠시 집중력을 잃을 정도였다.
알렉시오가 반짝이는 짙은 금빛 눈으로 흘끗 돌아보자 온몸이 확 달아올랐다. 게다가 숨까지 목에 걸리자 이를 악물고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부끄럽고 분개한 마음에 얼굴을 붉히며 그의 거친 남성미를 향한 본능적인 반응을 통제해 보려고 했다.
불행했던 어머니의 전철을 밟아 욕망이 이성을 지배하게 놔둘 순 없었다. 그가 근사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석 달 전 그날 밤 어리석게도 마음이 움직이는 걸 알아채고 나약한 자신을 경멸했다.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 같은 한량은 그녀가 원하는 미래의 삶에 등장하지 않았다. 어떤 남자도 그녀를 비탄에 빠뜨릴 순 없었다. 어떤 남자도 그녀를 지배할 수 없었다. 이오네는 그런 야심을 품은 채 웅크린 몸을 살짝 펴고 앉아 날씬한 다리를 움직여 스커트 자락을 좀더 치켜올렸다.
그녀의 움직임을 내내 의식하고 있던 알렉시오는 그녀가 무릎 위로 맨살을 살짝 드러내어 자신을 자극적인 여자로 표현하려는 걸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또한 그녀의 도발적인 동작들이 전부 어디서 보고 흉내내는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아무래도 이 결혼에 흥미가 없는 걸까? 아니면 저런 모습으로 날 흥분시키려는 걸까? 어느 쪽이든 그는 이미 저 평온한 성모마리아 얼굴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았다.
이오네는 금발을 뒤로 젖히고 속눈썹을 내리뜨더니 혀끝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아랫입술을 축였다. 알렉시오는 까만 속눈썹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눈을 가린 채 도톰하고 유혹적인 입술을 촉촉하게 적시는 뾰족한 핑크빛 혀끝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재미있다는 생각은 물러가 고 욕망에 몸이 조여 오자 화가 치밀었다. 저 여자가 왜 날 약 올리는 거지?
미노스 가키스는 너무 지쳤는지 굼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난 일이 있어서, 알렉시오. 이오네가 자넬 대접할 걸세. 이따 저녁을 들면서 결혼식 준비를 의논하도록 하지.”
이오네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결혼식 준비를 의논한다면 둘의 결혼이 벌써 확정됐다는 말이었다. 알렉시오가 이 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동의했다면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였다. 알렉시오의 입장에서 그녀의 진정한 가치는 가키스라는 가문과 지참금이지 외모나 개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분해서 얼굴이 벌개졌다. 자신이 본질적으로 하찮은 존재라는 쓰라림을 다시 한번 맛보았지만 그를 유혹하려고 시작한 연기를 갑자기 중단하는 것도 어리석을 듯했다.
“ 안으로 들어가겠소?” 알렉시오가 지극히 남자답게 단호히 말했다.
로지아에 앉아 있는 게 형벌만큼 고통스럽지만 않았어도 싫다고 했을 것이다. 게다가 앉아서 올려다 보니 그가 하염없이 커 보이는 통에 위협을 느끼자 이오네는 유치하다 싶게 적의를 품고는 그를 딸라 일어섰다.
알렉시오는 뒤로 물러서서 이오네를 안으로 들여보낸 뒤 적갈색 타일 위로 그녀가 육감적으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다가 돌연 발근하는 의심이 들었다. 병적으로 방탕한 외동딸이 집안 망신을 시키기 전에 빨리 시집보내려고 하는 건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가키스의 수십억 재산은 명예를 훼손시킬 소문을 막기 위한 비용인 셈이지만, 아무리 낙천적인 남자도 그런 치욕을 영원히 숨길 수 있다고 믿진 않을 것이다. 이오네가 수줍음이 많으며 차림새도 유행에 뒤지고 과보호 속에서 자랐다는 얘기만 반복해서 늘어놓는 것도 그를 납득시키기 위한 책략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집안을 웃음거리로 만들지도 모를 여자와 속아서 결혼하는 건 아닐까?
“ 결혼식 준비를 의논해 보자고 하신 건 당신 아버님이 좀 서두르신 거요” 알렉시오는 벨벳처럼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 뭐라고 결론짓기 전에 당신을 만나 얘기해 봐야겠다고 아버님께 말씀드렸소”
이오네는 그를 계속 설득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초조한 긴장감이 살아나자 다시 경직되었다. “ 짐작해야 했는데. 아빠는... 아빠는 좀 성급하시거든요. 쉽게 결정하시는 면이 있죠”
“ 누군들 안 그렇겠소?” 알렉시오가 그녀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고 밝은 햇살을 벗어나 넓은 객실로 이끌자 이오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그의 손길이, 가까이 있는 그의 존재가 의식되었다. 마치 그의 손이 원피스를 태우고 팽팽한 살 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 하지만 당신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군. 당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소”
공포와 유사한 뭔가가 그녀를 뒤흔들고 지나갔다. 저게 무슨 소리지? 호기심을 자극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일까? 그의 관심을 끌려는 시도가 공허한 허위일 뿐이라는 걸 의심하고 있다는 뜻일까?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을까? 수십 명의 여자와 자본 남자인데 어떻게 그녀 자신을 잠자리에서 화끈한 여자로 믿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을까?
“ 절 모르실 테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동안 이오네는 침착하지 못한 손길로 원피스를 쓸어 내리며 엄중하게 지적했다. “ 하지만 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될 수 있어요”
충동적인 선언으로 인해 착 내려앉은 침묵이 전기톱처럼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놀라운 단언에 허를 찔린 알렉시오는 얼굴을 찡그리고 가늘게 뜬 짙은 금빛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 당신이 나한테 뭘 원하는지 아직 몰라서요.” 이오네는 온몸을 감싸고 있는 지독한 두려움 속에서 기운을 끌어 모아 말했다. 자신의 어리석은 연기 때문에 그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하면 그녀로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역정을 들을 뿐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이 렉소스 섬에서 산송장처럼 지낼 터였다.
“ 내가 당신한테 뭘 원하느냐고?” 알렉시오는 그녀가 눈을 내리뜨기 전에 커다란 녹색 눈에 언뜻 공포가 스치고 긴장한 나머지 옴쭉도 못하는 걸 보며 얼이 빠져 반문했다.
“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하거는요” 이오네가 다시 말했다. “ 우리가 결혼하면 내가 당신 생활에 간섭하지 말아주길 바랄 수도 있겠죠. 좋아요. 간섭하지 않을게요. 그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에여. 난 무척 실리적인 사람이거든요. 무척 조용하기도 하고요. 내가 곁에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할 거에여. 뭘 좋아하는지 알려 주면 모든 게 당신이 기대한 대로 될 거에요”
알렉시오의 안에서 성난 동정심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저런 주장을 하도록 만든 아버지에 대해서는 분노가, 그를 위해 저렇게까지 자신을 낮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겐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 난 딱 한가지만 알았으면 좋겠소. 내 아내가 되고 싶소?”
이오네는 눈을 내리뜨고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예상해야 했지만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아닌 그녀로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속눈썹을 들어 강렬히 묻고 있는 짙은 금빛 눈을 보는 순간, 숨이 목을 간질이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듯했다. 젖가슴이 단단히 곤두서고 골반 속으로 열기가 뻗치자 낭패감이 밀려들었다. 그런데도 거뭇하게 매력적인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이오네... 당신 아버님이 강인한 성품을 지니신 건 알고 있소. 혹시라도 강요에 못 이겨 이 결혼을...”
“ 아니에요!” 이오네는 이 얘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제야 깨닫고 재빨리 부인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히 외쳤다.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 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소” 알렉시오는 식구들 앞에서만 원칙으로 삼고 있는 솔직한 태도로 대답한 뒤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당신이 보내는 신호가 혼란스럽거든”
이오네는 그의 아름다운 눈에 매료되어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온건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이세상 무엇보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알렉시오는 이렇게 감동적인 선언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멋진 광대뼈에 검붉은 홍조를 드리웠다. “ 어째서 그렇소?” 사실은 충분한 대답이었지만 마치 그녀가 한 말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물었다.
“ 기숙학교 사물함에 당신 사진을 꽂아 두곤 했어요” 그런 말을 억지로 꺼내면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 모든 여학생들이 하나씩 갖고 있었는데 당신은 내 거였어요”
알렉시오는 여학생이 홀딱 반한 상대였다는 말에 처음엔 어리벙벙하다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런 카리스마가 묻어나 이오네의 무릎에서 힘을 빼놓는 미소였다.
됐어. 이오네는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그가 넘어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어른이 된 후로 자신을 숭배하고 경외하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산 그로서는 아부에 익숙할 터였다. 실제로 열다섯 살 때 그를 흠모한 여학생은 그녀의 같은 반 친구였다. 그녀 자신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은 어리석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여 사물함에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꽂아 두었다.
“ 천천히 시작해야 할 것 같군” 알렉시오는 재미있다는 듯 허스키한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시오는 그녀에게 품었던 의문이 모두 풀리자 로지아에서 잠시 도덕성을 의심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그런 보호 속에서 살았으니 저렇게 순진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훗날 그녀가 이 순간을 되돌아본다면 서투른 선언을 듣고 있었던 그를 미워할지도 몰랐다. 그 자신은 그녀에게 뭘 줄 수 있단 말인가? 물질적인 면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은 그 잠재적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벌써 정해 둔 게 있었지만.
“ 당신이 상속받을 재산은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우리는 내 수입으로 사는 게 좋을 거라고 믿소” 알렉시오는 주저 없이 말했다.
문득 이오네는 남자에게 묶여 첩으로 살 생각을 안 한게 이렇게 다행일 수 없다 싶었다. 그는 전형적인 그리스 남자였고, 의존적인 아내를 원했다. 남자인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감히 그녀에게 그 말에 동의하라고 제안하는 것일까? 입장을 바꿔 그녀가 같은 제안을 한다면 어떤 남자가 동의할까? 돈이라면 이미 충분하고, 게다가 어머니와 오빠에게 상당한 유산까지 물려받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이 문제라면 임신할 가능성조차 없기 때문에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 이오네... 당신으로선 무척 힘든 결정이겠지만 그 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봤으면 좋겠소” 알렉시오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생각해 볼게요” 이오네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크리스토우라키스 식의 가난하지만아기자기한 결혼 생활인가? 그녀가 가키스 혈통을 타고났으며 진심으로 그의 아내가 될 마음이 있었다면 모든 협상은 결렬됐으리라. 그녀의 입양 가정에 막대한 부가 안겨 준 거라곤 불행밖에 없기 때문에 그녀에게 돈은 아무런 지배력도 없었다.
그의 억센 턱이 단단히 조이고 짙은 금빛 눈이 도전적으로 번득였다. “ 당신 아버지는 실망하시겠지만 난 우리 결혼에 그 분이 끼여들도록 놔두지 않을 거요. 당신은 그 점도 받아들여야 할 거요”
“ 물론이죠” 하지만 그가 공격적으로 의견을 밝히는 바람에 이오네는 하마터면 탈출 계획과 관련해 안도의 한숨을 내쉴뻔했다. 방금 알렉시오가 한 말은 대난투극을 불러올 일이었다. 미노스 가키스가 다정한 아버지는 못되어도 자존심 하나는 누구 못지 않아 딸이 궁궐보다 못한 곳에서 사는 걸 보면 크게 격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재빨리 자신을 일깨웠다. 알렉시오하고의 관계가 결혼식 이후까지 이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 게다가 알렉시오는 본질적으로 결혼보다는 사업 계약에 맞는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 당신 의견을 들어야겠소” 아무런 생각도 드러내지 않는 가냘픈 조각상처럼 서 있는 그녀를 보자 알렉시오는 짜증이 났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죠. 언제부터 무감각한 요구에 의견이 필요했는데요? 속으로 그의 말에 솔직하게 대답한 이오네는 말려 올라간 갈색 속눈썹으로 초록색 눈을 가리고서 자신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매력적인 그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난 당신이 한 말에 모두 동의하는 걸요”
“ 당신도 내게 요구하는 게 있어야 하오” 알렉시오가 그녀에게 통고했다.
“ 신혼 여행은 파리로 갔으면 좋겠어요” 그의 대답에 아주 많은 것이 달려 있었으므로 이오네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 거기에도 집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카리브 해에도 아름다운 별장을 갖고 있지”
그런 사소한 문제 갖고도 자기 주장을 펼치려 드는 남자군. 이오네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만 하려는 것은 무자비하고 성공한 남자들의 근본적인 결점이었다. 좋든 싫든 그는 파리로 갈 것이다. 그녀가 그를 남겨 두고 떠날 수 있는 도시로 데려가야 할 테니까. 멀리 떨어진 카리브 해에서 재빨리 사라지는 건 그녀에게 너무 벅찬 도전이었다.
알렉시오는 그녀의 침묵에서 적대적인 불꽃을 감지하고 다소 놀랐다. “항해도 할 수 있을 거요”
“ 난 뱃멀미를 해요” 이오네는 더 안 좋은 제안을 듣게 되자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힘없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파리. 크리스탈과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곳인데. 그런 생각에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이오네가 열망하는 눈길로 올려다보자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거부하는 건 이기적인 짓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럼 파리로 합시다....”
그때까지 보여 준 적이 없던 미소가 놀랍도록 환하게 그녀의 얼굴을 밝혔다. 그는 반짝이는 초록빛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그녀가 가까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아랫도리가 무지근해지는 것을 깨닫게 되자 좋아하는 도시의 기억을 새롭게 바꾸는 것도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제가 화랑을 보여 드릴게요” 이제 가장 우려했던 일이 해결된 터라 이오네는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알렉시오는 따라가는 대신 느닷없이 그녀를 붙잡아 끌어당기더니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능숙하게 손을 올려놓았다. “ 우선....”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이오네의 머릿속에서 비명이 울렸다. 서로 접촉하는 건 절대로 허용하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장님까지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방어적인 신호를 내보내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뻣뻣해졌다.
“ 긴장할 것 없소” 알렉시오는 이오네의 경직된 등을 진동시키는 굵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어붙을 때마다 저 장벽을 뚫고 들어가 방어막을 공략하여 아름다운 초록빛 눈이 그에게 빠져들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가 그에게 매달려 갈망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글거리는 금빛 눈을 바라보자니 그녀는 현기증이 나고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손이 안 닿는 곳으로 벗어날 요량이었지만 어느새 숨을 죽이느라 여념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남자답게 단단한 근육에 바짝 안기고 싶어하는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게 더 혼란스러웠다. 언제나 자신을 구해 주었던 엄한 통제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알렉시오...” 부드럽게 회유하는 듯한, 그녀 자신이 듣기에도 낯선 목소리였다.
그가 목안 깊숙이 음울한 웃음을 흘리며 넓고 감각적인 입술을 내려 혀끝으로 꼭 다물린 그녀의 입술을 비틀어 벌리더니 혀를 밀어 넣어 촉촉하고 보드라운 입안을 헤집고 다녔다. 그녀는 터질 듯 관능적인 감각에 옴짝달싹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살갗에 불을 당기는 듯한 강력한 감촉에 가냘픈 몸이 팽팽하게 당겼다 풀렸다를 반복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눌린 젖가슴이 팽팽히 죄면서 가벼운 통증과 함께 몸이 저렸다.
알렉시오는 오만한 머리를 들고 생소한 성취감에 젖어 꿈꾸듯 몽롱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내가 처음이오?”
이오네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과 한껏 흥분한 자신에게 놀라 어안이 벙벙하여 우물거리는 소리로 반문했다. “ 당신이 처음 키스한 남자냐고요? 아뇨....”
알렉시오는 그녀의 손을 갑자기 놓았다. 이 여자가 누굴 갖고 놀 셈인가? 그가 가르쳐주기 전까지 키스하는 법도 몰랐으면서! 하지만 그녀는 꿈꾸는 듯한 눈빛이 흐려지더니 곧 안색을 잃었다. 사실은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휙 돌아서는 걸 보고 그는 즉시 가장 그럴 듯한 이유를 짐작했다.
“ 누구였소? ” 알렉시오는 돌연히 솟구치는 분노에 순간적으로 반발심을 일으키며 따지듯이 물었다.
이오네는 바보 같은 고백을 해놓고 얼굴이 하애져서는 곧바로 자신의 실언을 후회했다. 괴로운 기억이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가운데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녀가 야니스 얘기를 꺼냈다는 걸 알면 아버지가 격분하시리라. 알렉시오가 화내는 건 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선자였다. 여자들에게 순결을 설교하면서 어느새 창녀들을 끼고 위안을 구했다.
“ 어부의 아들이었어요. 2년이나 지난 얘기예요. 그가 키스했어요. 그뿐이에요. ”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알렉시오는 갸름하고 힘찬 손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키스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정말 측은한 고백이라서 잠시 그런 짓을 강요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당치 않게 화가 솟구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문득 그녀를 다시 보니 이제 병색이 느껴질 만큼 안색이 창백해져서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다. 뭔가 더 있다는 걸 깨닫자 나머지 얘기도 끌어내고 싶은 충동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저렇듯 창백해지는 걸로 보아 어부의 아들이 그녀의 인생에서 중대한 사건이었음을 알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