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 인과 사랑을-1화 (1/10)

그리스인과 사랑을 / 린 그레이엄(Q-138)

달아난 신부!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아가씨 중 하나인 이오네는 자유를 원했다.

아버지가 그리스의 대부호 알렉시오와의 결혼을

명했을 때 그녀는 결혼 첫날밤에 몰래 잠적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어느새 알렉시오의 매력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는데....

1

"너도 곧 결혼해야 할 텐데" 산데르 크리스토우라키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 이오네 가키스는 어떠냐?"

알렉시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얘기가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중매결혼이라는 말에

아버지 앞에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리라. 그러나 최근 2년 동안 알렉시오는 일에 파묻혀 있거나 지독한 상실감 속에서 살았다.

공허한 마음은 달래 보려고 자유분방하게 여자를 사귀기도 했지만 기적 같은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깊이 없는 애정 행각은

오히려 입맛만 씁쓸하게 만들 뿐이었다.

"미노스 가키스가 우리 집안에 자기 딸을 보내겠다고 청혼해 오다니 우리로선 영광이지" 산데르는 아들의 반응을 살피며 집요하게

말을 이었다. " 네 사업적 통찰력을 높이 사는 양반인데 건강이 안 좋은가 보더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위가 필요한 거지"

젊은 사람들끼리 만나 연애하다 결혼하는 것보다는 집안끼리 중매로 맺어지는 결혼이 최고임을 내비치는 아버지의 말에 알렉시오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세계 최고의 부자가 관심을 좀 보였다고 해서 평소에는 빈틈 하나 없던 아버지가 탐탁찮은 사실을 어쩌면 저렇게 간과할 수 있을까 놀랍기도 했다. " 미노스 가키스가 얼마나 사악하고 흉악한 악당인지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 그렇긴 하다만 이오네만큼은 참하게 잘 키웠어" 산데르는 그런 결혼만이 흥청망청한 생활로 신문에 가십거리나 제공하여 제 어미의 가슴을 찢어 놓는 아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 그 아이라면 너도 행복해질수 있을게다"

가슴에 통증이 일면서 알렉시오의 갸름하고 힘찬 얼굴이 경직되고 반짝이는 눈을 어두워졌다. 여자를 만나 행복해진다는 건 더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 목숨보다 사랑했던 크리스탈은 이제 저 세상 사람이 되고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로선 아들의 죽은 약혼자에 대해 터놓고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스인답게 보수적인 부모님은 크리스탈을 외아들의 신붓감으로 내켜하지 않았다. 너무나 자유분방하다는 평판과 기복이 심한 과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알렉시오가 그녀의 손에 약혼반지를 끼워 주었을 때,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고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몇 달 동안 부모님과 의절까지 해야 했다. 크리스탈이 죽고 나서야 그런 불화가 나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가 가족을 물리칠 기력도 없을 만큼 막막한 절망감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그런 그가 손대는 사업마다 순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선박 사업을 현상유지는데 급급했을 뿐인데, 알렉시오는 벤처 캐피털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들어 신중한 아버지라면 꺼렸을 모험을 감행한 덕분에 지금은 아버지보다 큰 부자가 되었다. 최근 몇달동안 그가 이룩한 막대한 이익 덕분에 억만장자 대부호인 미노스 가키스의 사위 후보에 올라섰다는 게 아니러니였다.

" 전 가키스의 딸을 만나 본적도 없는데요" 알렉시오가 무심하게 말했다.

" 만나 봤던데" 산데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즉시 반박했다.  " 미노스가 그러는데, 네가 렉소스에서 하룻밤 묵을 때 그 아이를 만나 봤다더구나"

이번엔 알렉시오가 인상을 쓸 차례였다. 인상이라면 그가 더 험악했다. 몇달 전 그의 요트가 렉소스 섬 연안에서 거친 파도를 만남 곤경에 처했을 때 정박 허가를 얻기 위해 무선 연락을 취한 적이 있었다. 가키스는 반갑잖은 손님들로부터 자기 섬을 지키기 위해 거친 깡패들을 고용하기로 악명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부딪쳐 본 결과는 영 딴판이었다. 은둔해 사는 대부호는 반갑게 맞이하면서 후한 대접을 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로테스크하고 섬뜩한 저녁이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궁궐 같은 대저택에 미모의 창녀들을 모아 작은 하렘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알레시오는 그날 밤의 연회를 마무리 짓는 의미에서 그들 중 한 명을 고르라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그 넌더리나는 노인네의 비위를 맞추려고 갖은 아양을 떠는 여자들이 역겨울 뿐이었다. 물론 그 섬으 나와서도 미노스의 엽기적인 행각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소문을 퍼뜨려서 안 그래도 무자비한 미노스 가키스를 격분시키는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날이 번창하는 사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알렉시오가 바보는 아니었다.

설마 그 여자들 중에 이오네 가키스가 끼여 있었던 건 아니겠지? 아버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노스 가키스가 호감 가는 면이라곤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정신 나간 노인네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날 밤 다른 여자를 만난 기억은 없었다. 손님이 창녀와 자지 않으려 했다고 집주인이 재미있어 하는 걸 보고 언짢아하는 동안 그를 방으로 안내해 준 가정부를 제외하곤.

" 네 기억을 되살려 줘야겠구나" 산데르 크리스토우라키스는 지금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는 사진 없이도 아들이 기억해 내길 바랐던 듯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며 조용히 말했다.

알렉시오는 사진을 보자마자 알아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다시 한 번 빤히 들여다 보았다. 옆얼굴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렇게 잘 나온 건 아니지만 순종적으로 다소곳이 숙인 고개하며 수수하게 뒤로 묶은 연한 빛깔의 머리, 연약한 생김새가 그대로 떠올랐다.

" 전 가정부인 줄 알았어요!" 알렉시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털어놓았다. " 그 집 딸이 아니라 꼭 가정부처럼 행동했거든요! 가키스가 손가락을 퉁기자 저 여자가 나타났는데, 마치 하인 대하듯 말하더라고요. 저 소심한 아가씨가 이오네 가키스라고요?"

"미노스가 그러는데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아이라더구나."

"생기도 없고 내성적이겠죠."  알렉시오는 무자비하게 내뱉듯이 말했지만 조각 같은 광대뼈 위로 어렴풋이 홍조를 드리우고 휙 돌아섰다. 기분이 엉망인 밤이었지만 그녀의 꾸밈없는 매력을 무심히 넘겼던 것 아니었다.

그녀를 너무도 생생히 기억했다. 섬세한 이목구비, 그리스 여자치고는 놀랄 만큼 하얀 혈색과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초록빛 눈. 집주인이 좋아하는 요염하고 인공적인 무희들과는 다르게 농간을 부릴 줄 모르는 순수 미인이었다. 게다가 말없이 예의를 갖춘 그녀의 태도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알렉시오 자신의 타고난 매너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 내가 알기로 이오네는 그 섬을 벗어난 적이 없는가 보더라. 아버지가 집안 여자들이 밖으로 나도는 꼴을 못 보는 인물이거든" 산데르는 단지 친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하려고 아무 부담 없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아내와 두 딸을 둔 자신이 정말 대단하다는 듯 말했다.

" 언젠가는 저도 정략 결혼을 생각하게 되겠죠."  알렉시오는 이오네 가키스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밝혔어야 했다고 언짢아하는라 굳어 버린 입으로 인정했다. " 하지만 가키스의 별난 딸과 결혼할 마음은 없습니다. 적어도 제 아내는 성깔이 있는 여자였으면 하거든요"

"성깔이 없는 게 큰 미덕일 수도 있지" 산데르는 아들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좀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 그리고 이오네의 부족한 점을 탓하기 전에 여자에게 뭘 줘야 하는지 너 자신에게 물어보도록 해라"

"어떤 면에서요?" 알레시오가 아주 냉담하게 물었다.

"네가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네 곁엔 돈을 노리는 여자들만 몰려들 거다" 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이 경고했다.

"요즘 네가 한량처럼 돌아다닌다는 소문 때문에 내 친구들이 어떤지 아니? 행여나 널 만날까 봐 딸들을 단속시키고 있어"

"하지만 전 신념이 굳은 여자나 야심에 찬 출세주의자를 찾는 건 아닌데요. 그러니 다들 잘 생각하셨네요" 알렉시오는 거만한 말투로 경멸하듯 대답했다.

산데르 크리스토우라키스는 깊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사실 알렉시오가 가키스 사의 거대한 조직망에 동참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두 회사가 손을 잡으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고려해 보라고 최대한 설득했던 것이다. 또한 신부 쪽에서 별달리 요구하는 게 없는 실용적인 결혼이라면 알렉시오가 혹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아가씨와 결혼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익을 얻을지 명백히 설명했더라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 딱 잘라 거절하면 미노스가 기분 나빠할 텐데" 산데르가 침울하게 지적했다. " 너를 만나 청혼 얘기를 해봤으면 하더라. 한번 만나 본다고 손해볼 건 없잖니?"

알렉시오는 그의 경쟁 회사에서 봤다면 가벼이 넘기지 않을 준엄한 눈길로 아버지를 응시했지만, 준비가 됐든 안됐든 렉소스의 기억을 떠올린 이상 이미 관심이 생긴 상태였다. " 생각해 보죠"

이오네는 잔뜩 긴장한 비취빛 눈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점검했다. 아버의 정식 호출은 극히 드물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밝은 금발은 하얀 얼굴 뒤로 모아 바싹 묶었고, 짙은 청색 원피스는 날씬한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 디자인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사람들 속에 묻히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아버지는 딸이 그렇게 보여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수수하고 나서지도 않고 성적 매력도 없어야 한다고. 시대에 뒤진 발상이고 교육을 제대로 받은 부자답지 않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봉건적인 왕국인 자신의 섬에 대해 바깥세상에서 참견할 이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미노스 가키스는 집안에서 절대 신으로 군림했다. 순식간에 난폭하게 돌변하는 불같은 폭군인 그에게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인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오네는 아버지 앞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예절을 아주 어렸을 때 이미 터득했고 , 아버지가 흥분했을 때는 말 한 마디도 조심하고 자중해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버지의 주먹에 맞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었고, 어머니 아만다 가키스가 딸만은 같은 대접을 받지 않도록 온몸으로 막아내며 애를 섰지만 그녀 역시 잔인한 아버지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노크가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움찔해서 돌아보니 칼리오페 고모가 초췌한 얼굴로 잔뜩 찡그리고 서 있었다.

" 넌 어떻게 된 애가 허구한 날 거울만 들여다보니?"  칼리오페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 그렇게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우습게 말이야. 우리 가키스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미인 소리라도 들었을 텐데"

이오네는 고모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데다 신경질적이고 인색해 보이는 얼굴이라 아무리 마음 좋은 사람도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가키스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이오네 지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공연히 고모가 아버지에게 쫓아가 조카가 무례하게 굴더라도 불만을 늘어놓을 빌미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절대로 상대방의 수에 말려들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아버지가 정해 놓은 집안 규칙을 독실하게 지키면서 그런 규칙을 어기는 일이 생기면 얼른 쫓아가 일러바치는 걸 꽤나 만족스러워했다. 게다가 이오네의 어머니를 싫어한 것 이상으로 이오네도 못마땅해했다. 미노스가 아내로 삼은 온순한 영국인 신부는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지만 그들이 입양한 딸 이오네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오네는 말대답도 안하고 고모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년 전 온몸에 발길질을 당해 울부짖으며 아테네 공항에서 끌려온 날 이후로 이오네의 맑은 눈 속에 엿보인 금욕적인 무언의 결의는 칼리오페로 하여금 꿈쩍도 않는 제물을 하릴없이 물어대는 성난 모기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 아버지가 너한테 들려줄 흥미로운 소식이 있으신가 보더라" 칼리오페가 퉁명스럽게 전했다.

고모와 보조를 맞춰 침실을 지나 응접실로 향하던 이오네의 발길이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느려졌다. " 무슨 소식인지 기대되네요"

" 넌 아주 배은망덕한 딸인데 어떻게 그러시나 몰라" 칼리오페는 몹시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 넌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말이야!"

무슨 대접을 받는다는 거지? 고모가 분노를 감추지 못하자 호기심이 만큼이나 더해 가는 불안감 때문에 속만 더 조일 뿐이었다. 그녀는 아버지 앞에서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차없이 막아 버리는 데서 심술궂은 쾌감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긴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그녀를 왜 입양했는지 기꺼이 알려 주었다.

아만다 가키스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 코스마스를 낳았지만 그 뒤로 7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둘째 아들이 절실했던 미노스 가키스는 아이를 입양하면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던 여자들이 다시 임신한다더라는 얘기를 떠올렸다. 일단 아이를 얻은 터라 더이상 초조해하지 않고 긴장을 풀기 때문에 임신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논리였는데, 그 시절만 해도 민간에 널려 알려진 비법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오네를 입양하고도 여전히 임신하지 못했다. 양녀를 임신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녀에 사랑을 베풀 이유가 없었다. 그녀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할 만한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고모는 아버지의 집무실 앞에 이오네를 세워놓고 돌아가 버렸다. 대리석 복도에 서서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걸 이오네만큼 칼리오페도 잘 알았다. 이오네는 바짝 긴장한 채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멋지게 펼쳐진 만의 전경에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금빛 햇살과 파란 하늘이 멀리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에게 해 위에 투영되었다. 렉소스는 아름다운 섬이었고, 이 웅장한 저택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시설이 편리하게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독방에 감금된 죄수나 다름없이 살고 있는 현실을 보상해 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갈구하는 자유는 지금까지처럼 요원했다. 아버지는 더이상 그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 같은 4년 동안 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4년 전의 탈출 기도는 무분별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계획이 치밀하지 않았던 탓에 그녀의 의도를 아버지에게 미리 알려 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테네에서 정기적으로 치아 교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치과를 몰래 빠져 나와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 경호원을 따돌린 뒤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달아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항공시간표를 미리 확인하는 선견지명도 없었고 아무 국제선이나 출발이 가장 임박한 표를 그냥 사 버리는 지혜도 없었다. 그랬다. 오로지 런던으로 가겠다는 생각에 마냥 기다리고 앉았다가 문제의 비행기가 착륙하기도 전에 경호원들한테 쫓기다 강제로 공항에서 끌려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감히 그녀가 달아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불같이 화를 내며 어이없어하던 아버지에게 받은 환영식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어머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남편의 냉소적인 욕설과 그보다 심한 주먹질에 시달리느라 아만다 가키스가 조금이나마 갖고 있던 기백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 내가 가면 어디로 가겠니? " 10대 시절, 그렇게 학대받고 사느니 다 떨쳐 버리고 떠나는 게 낫다는 뜻을 넌지시 비쳤을 때 어머니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그렇게 반문했다. " 이곳을 떠나선 살아갈 방법도 없지만, 내가 어디를 가든 네 아버지가 찾아낼 거야. 날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날 지나칠 만큼 사랑하거든!"

사랑. 이오네는 나이답지 않게 냉소를 머금었다. 사랑은 그녀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남편의 폭력에 대해 아만다가 가장 많이 둘러댄 변명이 바로 사랑이었다. 아울러 남편의 성미에 대해서는 그의 일중독증이 몰로 온 스트레스와 그녀 자신의 용서할 수 없는 어리석음 탓으로 돌렸다. 어머니는 자신을 탓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남편과 아들에게 폐를 끼칠 만큼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탓했다.

사랑으로 양녀를 보호해 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 눈물이 핑 도는 순간, 비위를 잘 맞추는 아버지의 비서가 간사한 미소를 머금고 나타나자 이오네는 두려움에 이내 경직되었다.

"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죠"

미노스 가키스는 천장 높은 방에 걸려 있는, 실물보다 잘 나온 자신의 초상화 밑에 서 있었다.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크고 옹골찬 체구지만 항암 치료를 받느라 체중이 빠진 상채였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치료가 성공적이긴 해도 거친 얼굴엔 주름살이 더 깊어지고 몇 달 전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수척해 보였으며 안색도 연한 회갈색을 띠었다. 그토록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던 아버지 였지만 기대보다 회복이 무척 더딘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 괜찮으세요, 아빠?" 그녀는 본능적으로 놀라서 물었다. 해외 출창에서 돌아온 뒤로 몇 주일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 인정 많은 우리 딸이 없어져서 식구들이 몹시 섭섭하게 생겼구나" 미노스가 빈정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이오네의 창백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다가 이내 어디로 가길래 식구들이 섭섭하게 생겼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마음속에서 희망이 솟구쳐 오르는 통에 그대로 서 있자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침내 탈출 사건을 용서해 주시는 걸까? 좀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생각일까?

"이제야 네가 쓸모 있어질 것 같구나"  우람한 사내가 흡족하게 말했다.

사생활이 허용될 거라는 잠시 허황한 꿈에 부풀었던 이오네는 그대로 굳어졌다. 언제 한번 그녀를 기쁘게 해준 적이 있는 아버지였던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놀라면서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그런 마음은 개미 한 마디도 해친 적이 없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며 괴롭혔던 모습들이 떠오르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지지 않았던가.

" 네 남편감을 찾아냈다" 미노스는 선언하듯 말한 뒤 잠시 반응을 기다렸다.

이오네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 폭탄 선언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막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튀어나갔다. 가슴이 마구 뛰는 가운데 날카로운 판단력이 그보다 빨리 내달렸다. 남편감? 왜 내게 남편감을 찾아준다는 거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얻는 게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주제넘다고 핀잔할 터였으므로 질문을 던지거나 감복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어린 시절 이오네의 머릿속 깊숙이 각인시켜 놓는 교훈이었다. <공손한 딸은 부모님께 질문하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침묵이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두 발을 그 자리에 들러붙게 만들었다. 남편.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속으로 되뇌었다. 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식구들을 마음대로 부리고 모든 면에서 자기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리라.

" 코스마스가 죽지 않았으면" 작년에 전용기 추락사고로 죽은 오빠 얘기가 나오자 아버지의 말투가 엄해졌다. " 네 결혼 얘기를 듣고 코웃음을 쳤을 거다. 하지만 이제 너밖에 안남았으니 언젠가는 네가 가키스 사를 물려받아야지"

아버지의 첫 번째 선언이 이오네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면 두 번째 선언은 입이 딱 벌이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더듬거렸다. " 제가... 아버지의 상속인이라고요?"

그는 냉소를 터뜨렸다. " 너 말고 또 누가 있다는 거냐? 내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지만 법적으로 넌 내 딸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키스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는 게 기뻤고 그의 유전자가 섞이지 않았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정신없이 내달리는 상념에 빠진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가키스사를 물려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의 다국적기업체는 그를 족쇄 풀린 권력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엄청난 부가 그를 무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들을 주저 없이 파멸시켰고, 세계적으로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업적 비리나 집안에서의 폭력을 알고 폭로하려는 자들에게는 뇌물을 먹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비호를 받는 입장이었다.

이런 순간에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윗입술에 땀방울이 맺혔다. 아버지는 방금 남편감을 찾아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 놀라운 선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는 걸까? 윙윙대는 침묵 속에서 정신은 멍하고, 속은 메슥거리고, 심장 박동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자신의 미래가 걸린 문제지만 말 한 마디 못한 채 중세의 신부처럼 시집가야 한다는 사실에 왜 전념할 수 없는 지 문득 이해가 갔다. 막을 수 없는 일을 놓고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역하는 날엔 아버지에게 맞을 뿐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말 텐데. 자칫 싫다는 말을 벙긋했다간 무자비한 위협을 가할 터였다. 미노스는 그녀를 어차피 못 이길 싸움이면 지레 포기해 버리는 비참하고 비굴한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기특하구나" 미노스 가키스가 조용히 칭찬하자 그녀는 뻣뻣하던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 이제야 네 주제를 아는구나. 이문제에 대해 허튼 소리를 해봐야 용납하지도 않을 테니 잘 된 일이지. 네 아버지로서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

"네 , 아빠" 그녀는 힘없이 우물거렸다.

" 네 남편 될 청년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느냐?" 그는 딸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걸 즐기며 비웃듯이 물었다.

"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신다면요" 그녀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다"

하마터면 무릎이 꺾일 뻔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냉혹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요?"

서서히, 아주 서서히 갸름한 얼굴이 붉어졌다. 너무도 선명하게 그 남자를 만났던 밤이 떠올랐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긴 속눈썹이 다시 내려가 옴쭉 못하는 그녀의 시선을 가렸다.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 희대의 한량, 신문 경제란과 사교란의 머릿기사를 장식하는 데 중독이 돼버린 듯한 인물, 비단 시트가 싫다며 한밤중에 침구를 갈아 달라고 우기던 남자, 그녀를 하녀처럼 대할 뿐 인간으로 보지도 않던 남자,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자기도 모르게 기회 있을 때마다 몇 번이고 훔쳐봤던 남자.

" 네가 이런 행운을 못 믿어하더라도 그다지 놀라지 않겠다" 미노스 가키스가 마땅찮은 듯 중얼거렸다. " 물론 그 친구에게 정절을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거라고 믿는다. 이건 사업적 협상이야. 그 친구는 네 오빠가 맡았던 자리에 앉을 거고 네 남편으로서 이 집안 사람이 될 거다"

아버지의 얘기가 계속될수록 그녀는 더욱 오싹해졌다. 그는 지금 아주 잔인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가 사위로서 신임 받는 위치에 올라서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 외곬수에 똑똑하고 강인한 녀석이야. 녀석을 설득하느라 시간 꽤나 걸렸지. 하지만 내겐 그 녀석이 필요해. 그러니깐 내일 그가 찾아오면 최선을 다하도록 해. 알았냐?" 아버지가 냉혹하게 강요했다.

그녀는 핏기 없는 입술을 붙이고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아빠"

" 그 녀석의 아내가 되더라도 넌 내게 더 충성해야 돼. 네가 입양아라는 사실은 절대로 발설하지 말고, 혈통이라면 자부심이 대단한 집안이니까. 네가 사생아라거나 창녀나 다름없는 쌍둥이 언니가 있다는 말을 해서 그들을 당황시키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일 역시 없도록 해. 그 언니하고 연락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고. 알아들었냐?"

이오네의 가녀린 몸이 부르르 떨리다 다시 굳어 버렸다. 지독한 반감과 분노가 온몸을 치달았지만 절망감에 떠밀려 뒤로 물러났다.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눈에 선했다. 지금처럼 온갖 제약을 받는 공허한 인생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 이익만 챙길 욕심에 딸이 낯선 남자와 결혼하여 그를 감시하면 살길 바라는 거였다. 폭군 미노스 가키스가 딸을 낳은 게 아니라 입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싫어서 그녀에게 옳지 못한 생활을 요구하는 거였다. 그걸 확실히 해두기 위해 만난 적도 없는 쌍둥이 언니의 생활 방식을 꼬투리 삼아 모욕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증오심에 가슴이 타 버릴 것만 같아 고개를 돌렸다.

" 대답해라. 이오네 " 아버지가 으르렁거렸다.

" 네, 아빠. 알겠습니다"  그녀는 로봇 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는 얘기가 끝나자마자 곧장 체육관으로 향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팽팽하게 떨리는 온몸에서 스트레스를 걷어내기 위해 격렬한 운동을 시작했다. 지칠대로 지친 이오네는 땀에 절어 덜덜 떨리는 몸을 매트에 내던지듯 스러진 채 바닥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 결혼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남편과 함께 이 섬을 떠나는 날이야말로 넌더리나는 가족들한테서 탈출하는 순간이 되리라! 이오네는 연한 금발을 뒤로 젖히고 텅 빈 체육관이 떠나갈 듯이 웃어젖혔다.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는 그녀의 삶에 들어온 또 다른 군주이자 주인이 아닌 자유를 향한 통행증이 될 터였다.

약자를 괴롭히는 폭군은 이미 겪어 본터라 또 다른 폭군밑에서 살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렉시오가 그녀와 결혼하여 렉소스에서 데리고 나가 준다는 게 중요했다. 그녀가 결혼식을 치른 즉시 신랑을 버려 둔 채 떠날 거라고는 아버지조차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처럼 잘생긴 일등 신랑감을 두고, 전세계의 여학교 사물함에 가장 많이 꽂혀 있는 사진의 주인공이라는 소문이 도는 남자를 두고 말이다.

이오네는 폭신폭신한 매트에 벌렁 드러누운 채 부드러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영국에 도착하면 미스티 언니부터 찾을 생각이었다. 쌍둥이 언니의 편지를 받은 지 4년이 지났지만 봉투에 적혀 있던 주소만은 아직도 기억했다. 포세츠, 언니의 수양 가정이었다. 지금은 그 집을 떠났다 하더라도 언니를 찾아내는 건 수울 터였다. 하지만 언니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이름조차도 모른다는 걸 참담하게 인정해야 했다. 원래는 섀넌이었지만 아만다 가키스가 양녀를 위해 이오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니가 정략적으로 여자를 이용하는 백만장자들의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고 아주 요령 있고 온화하게 설득할 만한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헬기가 렉소스의 하늘에 들어서는 동안 알렉시오는 이틀 전 미노스 가키스를 만났던 곤혹스런 순간과 이오네와 결혼하기로 한 약속에 대해 생각했다.

가키스는 알렉시오의 허를 찌른 아주 유리한 제안을 내놓은 뒤 자기가 가진 패를 모두 내보였다. 건강 상태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으면서 자신을 알렉시오의 수중에 맡겼다. 억만장자 대부호가 몇 달밖에 모 살거라는 소문이 돌면 재계는 엄청난 충격에 빠질 테고, 당연히 가키스 사의 주가도 폴락해 공개 매입할 때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가키스 제국은 미노스 가키스가 혼자 운영해 왔다. 고위 간부들은 빠른 결단력이 아니라 이의 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능률성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미노스는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입원해 있는 동안 회사를 관리해 줄 2인자가, 가족 관계로 구속된 사위가 절실히 필요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경우 섬에서 수녀처럼 자라나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수십억이나 되는 재산을 노리는 언변 좋은 남자들의 표적이 될 젊은 상속녀는?

사실 가키스는 몸만 병든 게 아니었다. 소중한 어린 딸의 애정까지 시샘하는 아버지가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딸을 그토록 부자연스럽게 격리시켜 키운 까닭이 뭐란 말인가?스물세 살이 다 돼가도록 남자친구 하나 없다니, 그 노인이 제 정신인가? 딸이 자기에게 조금의 관심이라도 보이는 남자가 있다면 정신없이 빠져들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아무래도 그 남자는 내가 될 것 같은데. 알렉시오의 머리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숭배의 눈길로 바라보며 매달리는 여자라면 질색이지만, 그래도 다부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결국 이오네는 그의 아내가 될 텐데 요구가 많은 여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말이 다르면 다루는 방법도 다른 법. 그는 냉정하게 자신만만한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면 둘의 정략결혼은 훨씬 더 수월하게 진행될 터였다. 하지만 어떤 여자가 자신을 상품처럼 교환하려 들겠는가?

같은 시간, 문제의 그 <상품>도 골몰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오네는 알렉시오를 안전하게 속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중이었다. 그가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지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녀는 알렉시오를 설득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는 아버지의 얘기를 잊지 않았다. 적어도 외모만큼은 지금 이 집에서 허락하는 것보다 낫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화장을 하고 가끔 방에서 혼자 기분낼 때 입어 보곤 하던 곡선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면 아버지가 벌컥 화를 낼지도 모르기 때문에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불행히도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의 머릿속엔 오직 섹스밖에 떠오르는 게 없을 것이다. 그녀는 콧등을 찡그렸다. 내가 잠자리에서 어떨지 궁금해하겠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욕망이 솟구치는 그리스 남자였다. 그리고 2년 전, 습관적으로 젖가슴과 엉덩이를 드러내 놓는 능력 말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천박한 여자 때문에 엄청나게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결국 그녀는 명석한 두뇌는 침실 밖에 놔두고 남성 호르몬에 지배당하는 아주 원초적인 남자를 상대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그녀 자신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수할 뿐 성적 매력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었으므로 그가 질겁을 하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어떻게든 그를 유혹하여 당장은 매력이 없어 보이더라도 첫날밤만은 화끈할 것 같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했다.

사실 첫날밤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는 아무런 사실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그런 꼴을 당해도 싼 남자니까. 사업상 거래하듯 냉혹하게 계산하여 결혼하려는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오만하고 무자비하고 둔감하고 권력에 굶주린 성차별주의자!

헬기에서 내리는 알렉시오 크리스토우라키스는 밝은 햇빛을 받아 온통 금박을 입힌 듯했다. 밤 2시에 침대 시트를 갈아달라고 우기던 이기적이고 버릇없는 남자! 이오네는 우람한 아버지 곁에 작은 동상처럼 뻣뻣이 서서 자신을 일깨웠다.

하지만 알렉시오의 잘생긴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가슴이 죄어 오면서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자신을 부정하며 잊어야 한다고 되뇌었다. 금빛 광선을 받아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짙푸른 머리카락, 남자답게 튀어나온 광대뼈, 빠져들듯 짙고 깊은 눈동자, 공격적인 턱선과 카리스마 넘치는 두툼한 입술까지 완벽했다. 게다가 푸른빛이 감도는 옅은 회색 양복이 벌어진 어깨와 날렵한 엉덩이, 길고 힘찬 허벅지를 모양좋게 감싸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남자라면 꽤나 곤혹스러워할 상황과 자신을 맞으러 나온 환영단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너무 긴장한 탓에 안절부절 못하고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다잡았다. 오랜 세월 수양한 덕에 그나마 덜덜 떨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넘치는 자만감에 분통 터질 노릇이었지만, 저 힘과 냉정하게 절제된 다부진 외모에 끌린 것뿐일 수도 있었다. 자칫 행동을 잘못하거나 말실수를 하는 날엔 그도 파멸당할 테니까. 저 남자는 지금 호랑이굴에 들어왔다는 걸 모르는 걸까? 가키스 집안의 사위가 되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 걸까?

" 이오네..." 알렉시오가 비취빛 눈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의 눈을 보아 왔지만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미리 준비했던 정중한 인사말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지만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파리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치 성모 마리아를 보는 듯한. 멀리서는 인형 같았는데 지금 보니 얼음조각상을 연상시켰다. 첫날밤이 그리 수월치 않을 듯했다.

" 알렉시오..." 이오네는 과업을 이루는 데 필요한 산소를 흠뻑 들이마시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짜내어 답례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시오는 이오네의 얼굴에 퍼진 붉은 기운과 불안하게 떨고 있는 갈색 속눈썹, 말할 때 부드럽게 긴장을 풀리면서 섹시하게 도톰해지는 입술선을 지켜보았다. 또한 섬세한 쇄골 밑으로 맥박이 팔딱거리는 걸 보고 그녀가 무심하거나 냉담한 게 아니라 그저 안절부절못할 뿐이며 그 사실을 감추려고 애쓰는 중이라는 걸 눈치챘다. 원초적인 만족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자 조작 같은 입술에 느릿하고 위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