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63화 (463/463)

463화: 미래와 과거

5년 후.

명화전. 이동은 탑상 앞 비단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막 관례(冠禮)를 행한 황상은 탑상에 다리를 틀고 앉아서 탁자 위로 턱을 괸 채, 말다툼하느라 정신없는 영 태후와 영국 복안 대장공주를 바라보며 이동과 속닥였다.

“외숙모, 외숙모가 보기에 이번엔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태후는 이기기 힘들 것 같고, 대장공주는……. 황상, 친히 출정하겠다는 말씀은 직접 하신 건가요?”

이동이 고개를 돌려 황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상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태조는 무로 나라를 세운 분 아닙니까. 난 그냥 여 선생에게 한마디 물었을 뿐입니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태조라면 친히 출정하시지 않겠냐고요.”

이동이 아무런 말 없이 비뚜름하게 바라보자, 황상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외숙모. 그냥 한번 나가보고 싶었습니다. 고모는 늦어도 올해 연말에 성 밖으로 반드시 돌아갈 거라고 하시고, 가늠해 보니 딱 좋을 때라서요. 하나같이 오합지졸이라고 칠외숙도 그랬잖습니까. 멀지도 않고요. 왕복해도…… 어차피 연말까진 분명 돌아옵니다. 친정을 시작하면 이런 기회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또 뺏어갔습니다.”

이동은 여전히 아무런 말 없이 바라봤고 황상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냥 전투를 보고 싶은 건데…….”

영 태후와 복안 대장공주는 벌써 탁자를 내리치며 다투고 있었다.

“천자는 장난삼아 말해선 안 됩니다! 뱉은 이상 반드시 해야 해요! 내가 아들 대신 출정하는 것이 왜요? 천지의 대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복안 대장공주가 양손을 허리춤에 대고 혀를 찼다.

“쯧! 속셈을 모를까 봐요! 천지의 대의, 영원한 진리 같은 소리! 잘 들으세요, 정신 차려요! 태후입니다, 태후! 어미처럼 세상을 감화하고 품어야 하는 태후요! 싸우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혼인했으면 호시절은 끝난 겁니다. 착실하게 궁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칼을 들고 나가서 싸우겠다? 역대 사서를 뒤져보세요! 나라가 망하지 않은 이상 태후가 출병한 적 있는지!”

“있지요! 부호(婦好: 중국 역사상 기록된 첫 여장군)가 있잖습니까!”

영 황후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태후가 부호입니까? 들으세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칼을 들고 싸우고 싶다? 하! 나는 천하를 주유하고 싶습니다!”

복안 대장공주는 펄쩍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장공주는 천하를 주유할 마차까지 다 준비한 것 아니고요?”

영 태후가 아주 빠르게 잇는 말에 복안 대장공주는 말문이 막혀서 황상을 획 돌아보았다.

“구경만 하지 말고 어머니 좀 말리세요! 법도에 어긋나는 이런 일을 해도 되느냔 말입니다!”

“초 승상이, 친히 정벌 가는 건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만한 법도를 따라야 하는데 큰돈이 든다고 했어요. 경성 금군을 탈바꿈하느라 큰돈이 들었다기에 묵 승상을 불러서 물었더니, 조정에 그만한 돈이 없답니다.”

황상이 울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복안 대장공주는 조금 뿌듯한 얼굴로 영 태후를 흘겨보며 코웃음 쳤다.

“태후가 아들 대신 출정하는 것도 황상이 친히 출정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일단 은자부터 변통해 내고 출정 이야기를 하든가 하세요!”

영 태후는 굳은 얼굴로 대장공주부터 황상, 그리고 이동을 바라보고 다시 거꾸로 돌아보고는 코웃음 치며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

복안 대장공주는 안도한 듯이 또 위세를 보이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는 살짝 고개를 틀고 황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보아하니 적어도 어머니를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나보다 나아진 것 같군요.”

“다 고모님의 가르침 덕분이지요.”

황상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으세요. 기껏해야 연말까지입니다. 황상의 칠외숙이 돌아오면 난 수행하러 성 밖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동안 수행이 얼마나 지체된 줄 아십니까!”

복안 대장공주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고모님, 난 아직 어립니다. 고모님이 떠나면 어머니는 어찌합니까. 조정이 혼란해질 겁니다.”

황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울상지었다.

“그럼 이신을 경성으로 부르세……. 다 속셈이 있으면서 내 속을 떠보려 하다니, 정말이지 이제 다 배우셨습니다!”

복안 대장공주는 말하다 말고 즉시 방향을 틀어 이동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상을 지나치게 감싸지 말라고 했지? 서둘러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라고 했거늘. 출발 날짜는 정했고?”

“내일 바로 출발해요. 오늘은 인사하러 온 거고요.”

이동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내일 영원과 함께 북삼로에 가서 내년 봄에나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일찍 돌아와.”

이동이 내일 바로 출발한다는 말에 복안 장공주의 얼굴에 아쉬운 듯한 표정이 잠깐 스쳤다.

“북부는 추워. 네가 못 견딜까 봐 그래. 그리고 네 시녀도. 잘 단속하렴. 미친 듯이 밖을 돌아다니게 두지 말고. 북부는 경성 추위와 비교할 수 없어. 얼어서 귀 떨어진 다음에 울어도 소용없다.”

이동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황상에게 인사하고 대장공주의 훈계를 들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황상은 두 사람이 대전 문밖으로 나가는 걸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대전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갈수록 멀어지는 이동과 대장공주의 모습을 보다가 한참 만에 서운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랐으니, 두 사람 모두 떠나려 하는구나.

* * *

어두운 밤, 대상국사 뒤 어둡고 낡은 작은 뜨락에 청공 큰스님이 마당에 서 있었다. 맞은편에서 뒷짐을 진 채 가슴을 활짝 편 채 선 사내를 처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막 입을 떼려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등지고 서 있던 그 젊은 사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네 사조(師祖)도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입을 열 것도 없다.”

“설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 밑에서 백 년 가까이 있었는데 성격을 모르겠습니까. 어르신을 말리려면 소원을 이루는 법밖에 없겠지요. 제가 어르신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사내는 돌아서서 청공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사부가, 네가 자기보다 낫다고 하더니, 역시 그렇구나. 그렇다면 네가 가라. 이번엔 너에게 맡기마.”

* * *

보록궁 안, 온몸을 소복으로 두른 진 황후는 정전 정중앙에 놓인 시커먼 관을 빤히 바라보면서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말 할 것 없네. 내가 살아 있는 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다 내 아이 때문이었네. 나는 자식이 있으니, 자식을 위해서……. 지금은, 내 아이가…….”

진 황후는 관을 바라보며 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이 악행이 가득한 인간 세상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든 불바다가 되든 물바다가 되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내 자식만 있으면 되네. 내 심장, 내 목숨이!”

청공 큰스님의 시선도 대전 정중앙의 관으로 향했다.

“마마, 결정을 내리셨다면, 슬슬 시각이 되었습니다.”

진 황후는 관에서 시선을 거두고 관 앞 향탁(香卓)에 놓인 반 자 길이의 서슬 퍼런 단도를 손에 쥐고 일어섰다. 대전에서 나간 그녀는 기다리던 시위들을 거느리고 궁 안으로 직행했다.

그가 말하길, 온 도성의 인명과 황손의 피로 제를 지내면 시간을 거슬러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다시 시작할 기회, 새로 선택할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다시 시작할 기회, 새로 선택할 기회가 있다면 다시는 서글픈 황후가 되지 않으리라. 다시는 아들이 그토록 괴로워하며 품에서 죽어가는 걸 눈을 뻔히 뜨고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

* * *

자극전 앞, 진 황후는 황상의 눈을 빤히 보며 공포에 질린 육황자의 목을 손에 쥔 날카로운 단검으로 차분하게 그었다. 가는 선을 따라 격렬하게 내뿜어진 피가 조 귀비의 얼굴, 몸에 묻었다. 조 귀비의 비명에 황상은 귀가 찢어질 듯했다.

“다, 다, 당신…….”

황상은 뒷걸음질 치다가 계단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진 황후는 황상을 내려다보며 반 발짝 내디뎠다. 손에 쥔 단검이 다시 조 귀비의 목을 그었다. 피가 또 한 번 높이 뿜어져 나오고 조 귀비의 비명이 뚝 그쳤다.

“다, 당신, 이, 이러지…….”

황상은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렸다. 뒤로 달아나고 싶어도 두려움에 꿈쩍할 수가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진 황후의 모습에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하반신이 뜨뜻해지더니 흘러나오는 소변과 함께 지린내가 풍겼다.

진 황후는 황상과 반 발짝 떨어진 곳에서 황상의 축축해진 옷을 경멸하듯 바라보며 단검을 내밀었다.

“조씨와 조씨의 아들을 가장 아끼지 않으십니까. 내가 두 사람을 죽였어요. 보세요. 숨이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황상이 죽으면 두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자, 받으세요.”

진 황후는 단검의 방향을 틀어서 칼집을 황상에게 건넸다.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아닙니까. 그럼 죽으세요. 죽으면 두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자요. 죽으세요. 한번 죽으세요.”

“아니오, 아니오, 아니야!”

황상이 미친 듯이 손사래 쳤다.

“그런 적 없소. 우리…… 우리야말로 결발 부부 아니오. 그런 적 없소. 우리야말로…… 우리야말로…….”

진 황후의 눈이 조금씩 가늘어지더니 황상을 빤히 보다가 코웃음 치고 또 코웃음 쳤다.

“우리? 우리! 말은 참 잘하는군요!”

진 황후가 단검을 다시 돌려서 부여잡았다.

“좋습니다. 우리인 걸 안다니, 그럼 우리, 우리 아이를 위해서 같이 죽읍시다!”

진 황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검을 재빠르게 내밀어서 황상의 목을 스윽 그었다. 황상의 피가 뿜어나오는 순간, 진 황후는 벌써 방향을 틀어 자기 목을 그었다. 황후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이미 기세가 약해진 황상의 피와 함께 허공에서 하나가 되었다. 허공에 분수처럼 솟구친 핏빛과 함께 노을빛이 피어났다. 핏빛 분수는 순간 사그라지고 노을빛은 갈수록 밝아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수녕왕부, 혼백이 이탈한 강환장과 정신이 가물가물한 이동이 노을빛에 휩싸인 채 노을빛 뒤의 검은 구멍 안으로 빠져들어 갔다.

* * *

“오가아, 어머니 말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영원은 덥수룩한 수염, 땀과 먼지에 찌든 모습으로 미간을 단단히 찌푸린 채, 맞은편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오황자를 빤히 바라봤다.

소심은 오황자 앞에 꿇어앉아 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오가아, 어머니가 눈 감기 전에 거듭 당부하셨잖아요. 달아나라고. 멀리 달아나라고. 오가아! 오가아, 제발 칠야랑 떠나세요. 앞으로…….”

영원이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말했다.

“앞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사는 거다! 그렇게 살고 싶으면, 화나고 억울하면, 이 외숙과 가자! 내가 수하는 많지 않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서량(西涼)부터 시작해서, 10년, 10년이면 충분하다. 천하를 손에 넣지 못한대도 천하를 박살은 내야지!”

종잇장처럼 마른 몸으로 꼿꼿하게 앉은 오황자가 고요한 눈빛으로 영원을 바라봤다.

“외숙, 외숙이 오기 전에 전 사부와 수행하기로 결정 내렸습니다. 어머니를 데리고 돌아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황자의 시선이 소심이 안은 백릉 보따리로 향했다. 보따리 안엔 어머니의 유해가 들어있었다. 어머니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눈 감은 뒤, 재가 되어 고향의 산과 강에 뿌려지기를.

영원은 비통하고 연민 가득한 표정으로 저쪽 구석에 주저앉은 청공 큰스님을 눈살을 찌푸리며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청공 큰스님이 영원의 살기 가득한 눈빛을 마주했다. 비통하고 연민 가득한 눈빛이 더 짙어졌다.

“소 사야는 잘 있습니까?”

“어느 소 사야?”

영원은 재빨리 대답했지만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영원이 다시 덧붙였다.

“죽었다. 내가 죽였어.”

청공 큰스님은 매우 피곤한 모습이었다.

“죽이지 않았더라도 죽었을 겁니다. 죽여달라고 했겠지요. 칠야에게 인과를 지어주려고 한 겁니다. 칠야에겐 칠야의 인과, 오지(五之: 오황자의 법명)에겐 오지의 인과가 있습니다. 나와 소 사야도 각자의 인과가 있고요.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 인과가 하루빨리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마무리되길요. 가세요. 저들을 데리고 떠나세요.”

영원이 혀를 찼다.

“인과 같은 소리! 난 너희들처럼 사람을 해치는 이런 선무당이 제일 통한스럽다!”

영원은 말은 모질게 해도 마음속으로는 소름이 끼쳤다.

“오가아, 가자! 저런 말 들을 것 없다. 네 어머니가 그 소가 사기꾼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죽지도 않았다. 우리 영씨 가문도 목숨 걸고 싸울 여력은 있다!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있다. 네 외숙 하나만 남더라도 이 정의는 되찾아 올 것이다! 널 위해 정의를 찾을 수 없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세상을 박살 낼 것이야!”

“외숙, 가세요. 너희들도 떠나라.”

오지는 평온하고 태연한 눈빛으로 영원을 올려다봤다.

“이건 내 결정입니다. 사부와 상관없어요. 누구와도 상관없습니다. 칠 외숙, 고맙습니다.”

“오가아!”

영원은 목이 바짝 탔다.

“외숙, 떠나세요. 이번 생은 하늘을 날며 자유롭게 천하를 종횡하세요. 앞으로, 폐 끼칠 일이 있을 겁니다.”

오지가 조용하고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영원은 묘하게 두려움을 느꼈다.

“오가아!”

“고맙습니다.”

오지의 그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영원은 괴이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영원은 일어서서 청공 큰스님을 흘겨보다가 다시 시선을 오황자에게 돌렸다.

“몇 사람 경성에 두고 가마. 언제든 네가 떠나고 싶으면…….”

“이 뜨락에서 다시 나가지 않을 겁니다. 칠 외숙, 내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오지는 영원의 말을 무지르고 그를 올려다봤다. 기쁜 듯 슬픈 듯한 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영원은 뒷걸음질 치다가 돌아서서 사라졌다.

* * *

승평 16년, 경성 외곽 자등 산장 후원에 옷자락이 휘날리고 떠들썩하기 짝이 없었다.

“왔어, 왔어!”

일곱 살 된 묵 십이낭이 영 육낭자의 시녀 명안을 앞질러 영 육낭자의 품에 폭 안겼다.

“아주 잘 생겼어!”

“가자, 대재자라는 그 사람 보러 가자!”

영 육낭자는 일어서서 묵 십이낭의 손을 끌고 갔다. 이런 일에 빠질 수 없는 이 대낭자, 소 대낭자와 여 이낭자를 비롯한 어린 낭자들도 허둥지둥 일어서서 재자를 만난다며 웃고 떠들며 전원으로 향했다.

계 탐화 일가는 십여 년 동안 지방을 전전하다가 계 탐화가 올봄에 이부 좌시랑이 되어 며칠 전에 일가가 경성에 들어왔다. 오늘 영가가 계가의 환영회를 자등 산장에서 열었다.

영국 복안 대장공주가 사직하고 경성 밖으로 수행하러 나온 이래 영가도 따라 성 밖 자등 산장으로 옮겼다.

지금의 자등 산장은 부지를 훨씬 넓혔다. 어린 낭자 무리는 후원에서 전청까지 잰걸음으로 달려가던 도중에 고작 여덟 살에 널리 이름난 계가 대공자가 이미 대장공주와 장 노부인을 문안하러 후당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는 영 육낭자의 인솔하에 방향을 틀어 대장공주와 장 노부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화청으로 달려갔다.

당직 시녀들은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영 육낭자와 외사촌 여동생 이 대낭자가 가장 먼저 병풍 뒤로 달려가 잘 보이는 곳을 차지하고 병풍 틈을 통해 화청을 바라봤다.

계 대공자는 방금 절을 올리고 방석에서 몸을 일으키던 참이었다. 이 대낭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막 키가 자라기 시작해서 조금 말라 보이는 계 대공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살며시 내뱉었다. 이렇게 뛰어난 사내아이는 처음이었다. 얼굴만 잘생긴 것이 아니라 일거수일투족, 말투며 미소며…….

이 대낭자는 넋이 나가서 바라봤고 영 육낭자는 심사하는 눈빛으로 계 대공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고는 그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일곱 살 된 계 이공자도 꼼꼼히 살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재능은 있어 보이나 역시 너무 문약해 보였다.

여 이낭자와 소 대낭자도 딱 달라붙어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 보이지 않는 건 묵 십이낭뿐이었다. 원래 키도 제일 작은 데다가 맨 뒤에 밀려 있어서 아무리 폴짝폴짝 뛰어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초조해서 동동거릴 뿐 목소리를 낼 순 없었다. 묵 십이낭은 이 대낭자의 소매를 붙들고 다른 손은 영 육낭자의 팔을 잡고 중간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두 사람을 힘껏 옆으로 밀었다. 그런데 잡아당겨도 움직이지 않고 다시 잡아당겨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자 묵 십이낭은 다급해져서 두 사람을 놓고 뒤로 물러나 힘껏 비집고 들어갔다.

포동포동한 묵 십이낭이 힘껏 부딪혀오자, 이 대낭자와 묵 육낭자가 끙 소리를 내며 나란히 앞으로 넘어졌다. 조화(雕花) 병풍은 앞으로 기울고 병풍 받침은 뒤로 넘어갔다. 병풍 받침에 여 이낭자와 소 대낭자의 발이 걸리면서 두 사람은 ‘어머!’ 하고 외치며 이 대낭자, 영 육낭자와 함께 병풍 위로 넘어졌다.

병풍이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와 어린 낭자들이 ‘아이고머니나’ 외치는 소이에 계 이공자는 깜짝 놀라서 형님 품에 안겼고 계 대공자는 아우를 품에 안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쪽을 바라봤다. 병풍 위에 한데 넘어진 어린 낭자들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경성의 누이들이겠구나. 역시나…….

이동이 화가 나서 코웃음 치고는 입을 열려는데 영국 복안 대장공주가 벌써 걱정스러운 듯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밀었다.

“육저아, 다치지는 않고? 너희들도 참, 어쩌면 이리 바보 같으냐. 십이저아, 이리 오렴. 네가 민 것이지?”

“네……니요. 민 게 아니에요. 계가 오라버니가 안 보여서 조금 앞으로 가려는 거였어요.”

혼자 일어날 수 없어서 시녀들이 일으켜준 묵 십이낭은 대장공주의 물음에 얼른 해명했다.

이 대낭자는 가장 먼저 일어서놓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계 대공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쥐구멍이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영 육낭자는 시녀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면서 노련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여 이낭자와 소 대낭자도 어르신, 어머니, 할머니하고 마구 불러대며 재빨리 영 육낭자를 따라서 잘못을 인정했다.

“다들 이리 오너라! 꼴 좀 보게 이리 와!”

백발이 성성해도 정정한 백 노부인이 크게 웃으며 어린 낭자들을 향해 손짓했다. 전 노부인은 대장공주를 나무랐다.

“다 대장공주가 오냐오냐한 탓입니다. 특히 요 녀석은요!”

전 노부인가 영 육낭자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대장공주는 그녀를 흘겨보고는 묵 십이낭을 품에 안았다.

“난 우리 십이낭을 제일 예뻐합니다.”

“고모님, 어제는 큰언니를 제일 예뻐한다고 하셨어요.”

묵 십이낭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이 대낭자를 가리키며 장공주의 말을 고쳐주었다. 대장공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요 녀석, 네 아비랑 똑같구나.”

화청 안엔 이야기 나누는 사람, 인사하는 사람, 상견 예물을 주는 사람, 크게 웃는 사람으로 곳곳이 떠들썩했다. 영 육낭자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아직도 얼굴을 빨갛게 붉힌 외사촌 동생 이 대낭자를 비스듬히 보다가 다소 문약해 보이긴 해도 쓸 만한 편인 계 대공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동생을 바라보다가 백 노부인과 외할머니 장 노부인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복안 대장공주는 묘하게 웃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는 영 육낭자를 보고 손짓했다.

“이리 와서 고모에게 이야기해 보렴.”

영 육낭자는 복안 대장공주 앞으로 다가가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조금 더 지켜 보고요. 그때 말씀드릴게요.”

복안 대장공주가 삐딱하게 바라보자 영 육낭자가 눈을 찡긋했다. 두 사람은 일제히 이 대낭자를 바라보며 함께 웃음 지었다.

《금동》 완결

지금까지 금동을 아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곧 다른 좋은 작품으로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 * *

제 1장: 변고

한 사람의 목숨은 얼마나 길까?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덴 또 얼마나 걸릴까?

그녀는 고작 며칠이란 시간, 고작 약 한 그릇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사주녕(謝姝寧)은 무력하게 창가에 기댄 채 이른 봄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두 눈을 감았다.

복숭아꽃이 만개한 양춘 3월, 벌써 봄기운이 느껴지는 이때, 그녀에게 몰아친 바람은 여전히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별안간 기침이 나왔다. 기침 한 번 할 때마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머니.”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밝은 남색 자수 협오(夾襖: 겹 저고리)를 입은 아이가 튀어 들어왔다.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가 품에 안기려고 달려오는 모습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가아(箴哥兒)!

그녀가 기침하면서 다가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다급하게 손을 휘두르자, 대시녀 월백과 녹농이 재빨리 다가갔다.

“어머니, 제가 싫어졌나요? 어째서 안아주지 않아요?”

아이는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입을 비죽였다.

사주녕은 마음이 찢어질 듯했다. 병이 심하게 걸려 아이에게 옮을까 봐 도저히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참을 수밖에.

그러고는 목이 또 간질간질해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연신 기침했다.

“세자, 부인은 아직 몸이 낫지 않았어요. 말 들으세요.”

월백이 말렸지만, 잠가아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라 말을 듣지 않았다. 사주녕은 애써 몸을 일으켰다.

“잠가아, 착하지……. 어미, 어미의 병이 다 나으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을 병이 아니었다.

아이는 올해 고작 네 살. 그런 아이가 슬픈 표정으로 애써 눈물을 참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말 들을게요. 어머니도 약 잘 드셔야 해요. 다 나으면 함께 연 날리러 가요!”

사주녕은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세자, 제가 모시고 돌아갈게요. 같이 가요, 네?”

녹농이 허리를 구부리고 다정하게 물었다. 잠가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몇 번이고 돌아보며 녹농의 손을 잡고 나갔다.

사주녕 역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 작디작은 뒷모습을 바라봤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뒷모습이 흐릿해졌다. 저렇게 어린아이의 손을 어떻게 놓을까. 임원치(林遠致)는 그녀를 죽이려 하지만,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때는 성국공(成國公) 연회(燕淮)의 세력이 하늘을 찌르는 시절, 사씨 가문은 그런 그에게 죄를 짓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중이었다. 임원치는 비굴하게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이었고, 사씨 가문의 딸을 처로 들인 일로 덩달아 눈 밖에 날까 봐 몹시 두려워했다. 그는 그녀가 우연히 풍한에 걸린 것을 기회 삼아 약에 독을 타서 그녀를 죽이려 했다. 모든 것을 청산하려고.

그러나 그녀는 잠가아의 앞날을 완벽하게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 전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녀가 질긴 목숨을 부지하자, 임원치는 ‘당신이 죽어야 잠가아가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걸 어찌 모르냐’고 다그쳤다. 독으로 죽이지 못했으니 화병으로라도 죽이겠다는 듯이.

연회를 향한 그의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는 걸, 그녀도 물론 잘 안다. 지금은 누구나 연회를 두려워하니까.

선황이 승하한 후, 성국공 연회는 고작 일곱 살이 된 십오황자를 보좌해 보위에 올렸다. 연호를 승흥(承興)으로 고치고 황제를 가명제(嘉明帝)로 칭했다. 힘없는 어린 황제라는 빌미로 섭정을 시작한 연회의 나이도 고작 스물다섯, 그 젊은 나이에 수단이 악랄했다. 매우 잔혹한 데다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다들 피하고 물러섰다.

그는 어릴 때 경성에 살지 않았다. 열세 살이 된 해에 아비 연경(燕景)의 병이 깊어져 세자인 그가 돌아왔다. 돌아온 지 사흘째, 부친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계모를 감금하고 배다른 형제인 어린 아우를 막북(漠北: 몽골고원 고비 사막 이북 지역)으로 보냈다.

몇 년 후, 계모 만(萬)씨가 몰래 아우를 경성으로 데리고 온 것이 발각되었을 때, 아우에게 삼척 백릉을 던져주며 만씨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다음 해, 금의위(錦衣衛) 지휘사(指揮使)로 진급한 다음 아우를 참했다. 그리고 또 1년 후, 약관(弱冠)이 안 된 젊은 나이에 중군 도독부 좌군도독에 진급하여 도읍 주둔군을 통솔했다. 스물둘이 되던 해엔 벼락같은 기세로 동서 양창(兩廠)을 집어 삼켰다.

그후로 몇 년 사이에, 조정 사람들은 연회의 이름에 벌벌 떨었다.

덕분에 지금 천하는 여전히 기(紀)씨의 것이지만, 사실은 진작 연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심지어 궁궐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무인지경으로 출입했다.

아무도 그를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으니, 몰락한 후야(候爺)인 임원치는 더더욱 멀리하기 급급했다. 하물며 임가엔 온(溫) 이낭도 있으니 어떻게든 사가와 선을 그으려고 하는 것도 인지상정이었다.

다만, 그녀는 그런 그의 경박함에 실망해서 이가 갈렸다.

체면 문제가 없었다면 그는 아예 칼을 빼 들고 그녀의 목을 베어 치워버릴 인간이었다.

목구멍이 비릿해지고 눈처럼 하얀 손수건이 붉게 물들었다. 사주녕은 시녀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데도 무표정하게 피를 토한 손수건을 던지고 눈을 꼭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주녕은 화들짝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비단 이불자락을 잡고 쉰 목소리로 세자는 어디 있냐고 외쳤다. 법랑 향로에 땔 것을 넣던 대시녀 녹농이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거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셔서, 화원으로 모셨어요.”

“찾아라! 찾아서 거처로 데리고 가!”

사주녕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조금 전 꾼 꿈에 마음이 어수선했다. 눈썰미 좋은 그녀는 은수저를 든 녹농의 손이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잠가아의 유모 주씨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부인, 큰일 났습니다!”

서둘러 들이라 명했더니, 주씨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어오기 무섭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세자가 물에 빠지셨습니다…….”

짧은 한마디가 천둥처럼 귓가에 울렸다. 사주녕은 벌떡 일어나 월백을 불렀다.

“월백, 부축해줘.”

월백은 그녀의 몸이 걱정되지만, 유모의 말에 너무나 놀란지라 곧바로 두꺼운 두봉을 꺼내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녹농이 다급하게 막아섰다.

“정말로 세자가 거처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이냐?”

사주녕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묻다가 또다시 기침했다. 이를 악문 그녀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지자, 녹농이 파르르 떨며 손을 놓았다.

주씨가 울며 달려들었다.

“부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주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외면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거의 월백에게 기대다시피 해서 걸음을 서둘렀다. 숨 한번 쉬기도 버거워서 주씨와 옥신각신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독을 깨끗하게 없애지 못했고, 병도 쉽게 낫지 않고 질질 끌었다. 움직이고 말하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

그런데도 잠가아 생각에 걸음이 갈수록 달리는 것처럼 빨라졌다. 두봉은 바닥에 떨어지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신도 벗겨질 듯했다.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눈을 파고들었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 별안간 누군가의 가슴과 부딪혔다. 싸늘한 가슴이었다.

“잠가아는 죽었소.”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지극히 싸늘했고, 어깨를 잡은 양손은 더더욱 차가웠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놔요!”

임원치는 그녀의 앙상한 어깨를 억세게 잡고서 비통한 듯 말했다.

“설라(雪蘿)가 잠가아를 구하려다가 물에 빠져 아이를 잃은 걸 알고 있소?”

온설라가 잠가아를 구해? 웃기는 소리!

사주녕은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들고 임원치의 청수한 얼굴을 바라봤다. 웃고 싶은데 울음이 터졌다. 목소리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 독한 호랑이도 새끼는 먹지 않는다는데, 후야, 정말이지 대단한 첩을 들이셨군요. 놓으세요. 잠가아를 보러 가렵니다.”

임원치는 양손에 살짝 힘을 뺐다.

“당신……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오?”

사주녕은 눈을 내리깔고 그의 손을 쳐냈다.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이 살며시 달싹였다.

“사씨 가문이 당신을 연루할까 봐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온설라가 당신을 연루할까는 걱정되진 않으신가요?”

온설라의 친정도 한땐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다. 그녀가 겨우 두 살이었을 때, 마찬가지로 어린 성국공 세자 연회와 정혼했다. 결국 맺어지지 않았다. 누구나 잘 알듯이, 연회가 어떠한 성정인가. 그가 필요로 하지 않는 물건은 제가 버려도 누가 줍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임원치는 그 역린을 건드렸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가 온설라에게 너그럽지 않다고 항상 나무랐다.

“사주녕!”

역시나, 화를 내는구나.

사주녕은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서둘러 잠가아의 거처에 도착했더니, 종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분명 얼굴을 보았었는데…….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웅크린 채 비단 이불에 싸인 잠가아의 작은 몸이 보였다. 얼굴은 마치 그 이불 위에 수 놓인 꽃처럼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하기만 했다.

형체 없는 손아귀가 가슴 안에 있는 심장을 틀어쥐는 듯했다. 아파서 제대로 설 수도 없었다.

거처로 달려들어 온 임원치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처음으로 무식한 여인네처럼 그를 마구 때렸다.

“이낭,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밖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온설라를 정말로 막을 순 없다. 사주녕이 피를 토하며 잠가아 곁에 쓰러졌을 때, 여인 하나가 벌써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때 세자를 붙잡지 못했어요…….”

“그게 왜 네 탓이냐!”

임원치가 황급히 부축하려 해도 온설라는 일어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가지꽃색 치맛자락이 붉게 번져갔다. 임원치는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화난 얼굴로 사주녕을 돌아봤다.

“얼마나 더 꿇려야 직성이 풀리겠소? 잠가아가 저렇게 된 일로 당신도 마음 아프겠지만, 나라고 아프지 않겠소? 설라는 잠가아를 구하려다가 아이를 잃었소. 어찌 사람을 이리 핍박하시오!”

“부인, 절 죽이세요…….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온설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힘없는 목소리, 넋 나간 듯한 모습, 그러나 아무도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사주녕을 잡은 그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가느다랗고 긴 온설라의 손가락이 사주녕의 손바닥을 모질게 파고들었다.

“제 목숨으로 세자의 목숨을 갚을게요…….”

“여봐라, 온 이낭을 모시고 돌아가라!”

임원치는 미간을 좁힌 채 돌아서서 밖을 향해 고함쳤다. 눈 깜짝할 사이, 눈물을 글썽이던 온설라가 아름다운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맹독을 지닌 뱀처럼 악독한 눈빛으로 사주녕을 빤히 바라보면서 앵두 같은 입술을 달싹여 지극히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아이였어. 네 아들의 목숨과 바꿨으니 꽤 가치가 있지.”

사주녕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조여오고 눈물이 모두 피눈물로 변했다. 온설라의 옷자락에 토를 하려는 듯하자, 그녀가 무심결에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온설라 역시 약해진 상태라 동작이 느렸다.

사주녕의 병약한 몸에서 경이로운 힘이 솟구쳤다. 그녀는 한 손으로 온설라의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 비녀를 뽑아서 안간힘을 다해 온설라의 목으로 찔러넣었다. 온설라는 신음하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사주녕이 손가락 끝이 새하얘지도록 입을 막고서 달아나지 못하게 죽어라 막고 있었다.

임원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온설라는 다시 사주녕의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온설라의 모습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사주녕이 살며시 그의 자(字)를 불렀다.

임원치는 제 귀를 의심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손짓에 저도 모르게 얼떨떨해져서 주저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온설라를 먼저 내려다본 후에 물었다.

“이제 잘 생각한 거요?”

“네, 똑똑히 생각했지요.”

사주녕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추워요. 안아줘요.”

임원치는 그녀를 바라봤다. 이해할 수 없고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래도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주었다. 온설라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걸 보고 의아해져서 사주녕을 떼어놓으려는데 갑자기 심장에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피 묻은 비녀가 보였다.

그 비녀는 사주녕의 혼수였다.

이날은 가명제 2년 봄.

햇살이 좋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이었다.

- 《규녕(闺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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