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62화 (462/463)

462화: 만남과 헤어짐

“그 소씨가 같은 소씨일까요?”

“동동.”

이동이 빤히 보며 묻는 말에 복안 대장공주가 웃음을 거두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너와 나, 모두 평범한 사람이야. 인연이 닿아서 어쩌다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과 평범하지 않은 일을 몇 건 만난 건, 그냥 다 우연일 뿐이야. 그런 건 보고 잊으면 돼. 그냥 심심풀이 삼아 이야기나 하면서.”

복안 대장공주는 잠시 후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게 다야! 깊이 파고들 것 없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쩌다가 고승의 신통력을 보게 되는 게 큰 복인 것처럼요.”

“꼭 복이라고만 할 순 없어. 됐다, 이런 이야기 그만하자. 어제 네가 돌아가자마자 진씨가 왔더라.”

복안 대장공주는 화제를 돌렸다.

“진왕비요?”

이동은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선황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진왕이 쓰러져서 아직도 문을 걸어 잠그고 정양 중이었다. 이런 때에 진왕비가 보록궁엔 무슨 일로?

복안 대장공주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응, 마음을 밝히러 왔더라고. 셋째를 위해서 온 거겠지. 셋째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요즘 매일 셋째 곁을 지키며 아무런 근심 없이 살고 있다고. 그런 나날을 보내는 게 너무 좋대. 자기도 셋째도 신선처럼 사는 것 같다고 하더라.”

이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근심 없이 산다라……. 근심 없이 산다는 말을 조마조마하게 산다는 말로 바꾸면 예전에 진 황후가 이 보록궁으로 피해 들어온 후에 자주 하던 이야기와 비슷했다. 황상이 아직 잠저(潜邸: 천자가 즉위하기 전에 살던 집)에 살 때, 자기와 황상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앉아서 화가 닥치지 않길 바라며 조마조마 살았었다고. 그때 황상과 그녀는 기댈 곳이 서로밖에 없었다고.

복안 대장공주가 손을 휘휘 저었다.

“걱정이 지나쳐. 배포가 곽씨만도 못해.”

복안 대장공주가 대황자비 곽씨를 거론하자 이동은 주저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라는 벌써 항주에 도착했어요.”

“그 위봉낭도 잘 지켜봐.”

아라 이야기가 나오자 복안 대장공주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것 좀 보라고. 영원 그놈, 수하를 하나같이 어떤 인간을 쓰는 거야. 모두 도적이야! 큰 도적이 작은 도적을 거느리고 있다고!”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 없이 복안 대장공주의 불평을 들었다.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위봉낭은 도적 출신이 맞으니까.

한참 투덜거리던 복안 대장공주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정말이지, 이게 다 무슨 일인지. 하나같이 말이야. 뒤처리를 내가 다 해야 하잖아. 영원 그놈, 진씨의 두 형제가 다 장군 재목이라고 하잖아. 하나는 자기가 거두고 하나는 북으로 보냈어.”

“군영으로요?”

“그래, 영원이 진씨 두 형제가 쓸 만하다고 하니, 쓰라고 했지. 그러면 진왕도 마음 놓이겠지.”

복안 대장공주는 지극히 완곡하게 말했지만, 이동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진왕과 진왕비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진왕비가 지난번에 사실을 알린 공을 치하하는 것이었다.

“하나 더 있어!”

복안 대장공주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다음에 입궁할 때, 가서 네 시누이 좀 말려 봐! 태후가 친히 금군을 훈련한 전례가 없다고 전해! 체통을 생각해야지!”

이동은 켁 소리를 낼 뻔했다. 그걸 어떻게 자신이 설득한단 말인가. 지난번에 궁에 갔을 때 태후는 어전 삼위(三衙: 금군禁軍을 총괄하던 최고 군사 기구)가 꼴이 말이 아니어서 제대로 훈계해야 한다고 했을 뿐 아니라 금군이 너무 허약하다고 타박했는걸…….

이동은 복안 대장공주의 푸념을 공손히 경청하다가 대장공주의 원망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진 후에 인사하고 물러났다. 입궁해서 태후를 설득해 보라는 말은 아예 못 들은 것으로 했다. 태후와 대장공주, 둘 중 누구도 그녀가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설득할 일이 있으면 태후가 대장공주를 ‘설득’하고 대장공주도 친히 태후를 ‘설득’할 수밖에 없다. 이 두 분 일에 자신은 끼어들 수가 없었다.

봄기운이 갈수록 짙어지는 어느 날, 지방직을 청한 주육의 청이 비준되었다. 주육은 주가 사당을 찾아 하루 묵으며 몇 개월 만에 십여 년은 늙은 부친 주 후야와 작별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이부에 가서 관련 문서를 받고 짐을 꾸려 식솔 여남은 명을 데리고 마차 두어 대에 나눠타고 이른 아침에 나서는 객상처럼 길을 떠났다. 막 성문 밖으로 나가는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묵칠이 사환, 종복을 거느리고 다급히 뒤쫓아 왔다.

“이리 갑자기 떠나는 게 어디 있어? 곧 전별해주겠다고 며칠 전에 말했거늘. 어째서 말도 없이 바로 출발한 거냐?”

주육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레면 칠 형님이 돌아오잖냐. 이부에 확인했는데 보름 뒤에 출발해도 넉넉하던데, 왜 이렇게…….”

묵칠은 주육이 왜 이리 우울하고 낙담한 것인지 잘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게 나았다. 이야기할수록 주육에겐 좋지 않은 일이었다.

“나도 안다.”

“알면서 왜…….”

주육은 묵칠의 말을 잘랐다.

“알아서 오늘 서둘러서 가는 거다. 보고 싶지 않다. 평생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묵칠은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이해할 것도 같았다.

“소육, 무슨 말인지 나도 안다. 하지만 이건 칠 형님 탓이 아니야. 이 일은…….”

“나도 안다. 탓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보고 싶지 않아.”

주육은 고개를 숙인 채 묵칠의 손에서 옷깃을 빼냈다.

“너도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돌아가라. 난 이만 가야 한다.”

“어이…….”

묵칠은 목이 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육의 쓸쓸하고 외로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 못 할 정도로 마음이 착잡했다.

영원은 이틀이 되기 전에 그다음 날 늦은 밤에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동은 이미 잠들었다가 영원이 팔을 쿡 찌르는 바람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영원은 침상 앞 각탑에 앉아서 팔꿈치로 침상 가장자리를 지탱한 채 두 눈을 기쁨으로 반짝이며 몽롱해서 눈을 깜빡이는 이동을 바라봤다.

“내일이나 되어야 온다고 했잖아요. 왜 이 시간에 도착한 거예요? 무슨 일이…….”

이동은 허둥지둥 일어나 앉았다.

“아무 일도 없어요. 당신 얼굴 빨리 보고 싶어서.”

영원이 올려다보며 하는 말에 이동은 멈칫하다가 상체를 기울여 영원 앞에 바짝 다가갔다. 휘장 밖의 은은한 촛불 빛 사이로 자세히 영원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뺨을 쓰다듬었다.

“나도 빨리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은 싫어요. 왜 이렇게 말랐어요.”

영원은 얼굴을 이동의 손바닥에 대고 비비며 대답했다.

“내일 보고 올리고 돌아와서 하루 꼬박 푹 자면 괜찮아져요. 며칠 동안 씻지 못해서 냄새납니다.”

“물 준비시킬…….”

이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원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날 밝자마자 역참으로 돌아가야 해요. 씻는 동안 당신을 못 보는걸. 이야기할 시간도 아까워요.”

“내내 돌아다니느라 많이 힘들었죠?”

이동은 고집부리지 않고 아예 침상에서 내려가 영원 옆에 앉았다. 영원은 침상 위의 이불을 끌어당겨 이동에게 둘러주며 대답했다.

“이야기도 하지 말아요. 길에서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그 망할 놈들이 정말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서, 그 망할 놈들과 교류하는 게 정말로 힘들었지!”

보아하니 고생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도 많이 겪은 듯했다.

“대장공주는 그 사람들이 싸움으로 당신을 못 이기고 수작으로도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이동이 영원의 어깨를 주물러 주자, 영원이 몸을 틀고 어깨를 그녀에게 맡겼다.

“그야 그렇지! 그래도 고생했어요. 너무 염치가 없어서 화가 나더라고.”

“나도 당신이 보낸 상주서 봤어요.”

“그 이야기는 됐습니다. 당신은 잘 지냈죠?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고?”

영원은 언짢은 화제를 털어버리려는 듯 손사래 치며 물었다. 이동은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감히 날 괴롭혀요? 난 잘 지냈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서 그랬지.”

“나도 보고 싶었지!”

영원은 이동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서 얼굴에 대고 비볐다.

“속 터지는 일을 겪을 때마다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맛있는 걸 먹으면 더 보고 싶었고. 혼자 먹으니까 뭘 먹어도 맛이 없어서, 원. 가끔 기쁜 일이 생기긴 했는데, 당신이 없으니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처럼 아무 재미도 없지, 뭐예요.”

“그럼 기뻤던 일들, 지금 이야기해 봐요.”

“좋지. 그럼 내가 군영에 잠입한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이동이 손을 잡자 영원은 좀더 바짝 붙어서 이동의 손을 꼭 잡고 기뻤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이동은 턱을 영원의 무릎에 대고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신이 나서 이야기를 마친 영원은 이동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당신 이야기해 봐요. 누님이 난처하게 하진 않았지요? 대장공주는?”

“형님이 날 왜 난처하게 해요. 당신이 떠나기 전에, 대장공주가 자기는 군무를 모른다고 경성 방위 문제를 형님에게 넘기고 가라고 했잖아요. 형님이, 금군이 그야말로 허깨비에 너무 나약하다고 몸소 금군을 훈련해야 한다지 뭐예요. 영가의 훈련법으로요. 단 하루 만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어요. 나라의 체통이 손상됐다고 하나같이 대장공주를 찾아가니까, 대장공주는 나더러 형님을 설득하라고 하고…….”

“당신이 설득할 수 있고?”

영원이 입을 비죽였다. 누님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안다.

“당연히 안 되죠. 나중에 대장공주가 형님을 찾아가서 싸웠어요.”

영원이 빤히 이동을 바라봤다.

“누가 이겼는데?”

“황상의 말씀으로는 그 싸움은 대장공주가 우세였대요.”

“그 싸움은? 그럼 한 번이 아니었다는 건가?”

“응, 그 싸움을 발단으로 계속 싸웠어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싸웠는지 몰라요. 바둑처럼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고, 큰일로 싸울 때도 있고 사소한 일로 싸울 때도 있고. 예를 들어 단오에 종자(粽子)는 단 것이 정통인지, 짠 것이야말로 정통인지 하는 걸로요.”

(※종자: 쫑즈. 찹쌀, 멥쌀, 쌀가루, 대추, 팥, 고기 등 재료를 댓잎, 연잎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싸서 쪄먹는 중국요리.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이 멱라강에 몸을 던진 후 이것을 던져 넋을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 단오절 음식으로 자리 잡음)

“그런 걸로 싸울 게 뭐가 있어서? 당연히 단 것……이 정통이 아니지. 종자는 역시 호주 종자가 천하제일이거든.”

영원은 이야기하다 말고 매우 빠르게 말을 바꿨다.

해가 어찌나 빨리 밝아 오는지, 몇 마디 나눈 것 같지도 않은데 햇귀가 어느새 창가에 아른거렸다.

“부인, 조회 시간 되었어요.”

수련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영원의 목소리가 뚝 그치더니 꼼지락거리며 내키지 않는 듯 일어섰다.

“당신 시녀, 내 말은 당신 시녀들, 다 나이가 찼지? 슬슬…….”

“누구로 바꾸든 할 말은 해야 해요. 본분이니까요.”

이동이 영원의 말을 자르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어서 역참으로 돌아가요. 어서 보고 올리고 어서 돌아와요. 기다릴 테니 같이 아침 먹어요.”

“좋아요! 동동, 당신은 좀 더 자요. 보고하고 며칠 휴가 낸 다음에 금방 돌아올 테니.”

영원은 이동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영원은 먼저 황상과 영 태후를 만나서 순조롭게 보고하고 보록궁으로 향했다. 복안 대장공주는 긴 서안에 상주 여러 개를 늘어놓고 뭘 찾는지 한 장씩 대조하고 있었고 영원은 들어가서 고개를 조아리자마자 금세 쫓겨났다.

영원이 매우 신이 나서 궁문을 나서 말에 올라타려는데, 묵칠이 맞은편 다포에서 손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칠 형님! 칠 형님! 반나절이나 기다렸소!”

“내가 아침에 경성에서 돌아와서 지금까지 아직 반나절이 안 되었다. 무슨 일이냐? 말해라.”

영원은 한 발로 등자를 밟고 당장에라도 갈 자세로 물었다.

“급히 집에 가야 하는 거 나도 알지. 큰일은 아니고. 같이 갈 테니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묵칠이 말을 끌고 오라고 사환에게 손짓하며 말하자, 영원은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같이 가다니, 무슨 뜻이냐.

“어딜 같이 간다는 것이냐. 할 말 있으면 얼른 해라. 같이 갈 것 없다.”

묵칠도 정말로 이해했다.

“칠 형님, 형수 만날 생각에 조바심 내는 거 아니오. 나도 알지. 저택 앞까지 배웅할 테니,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두 가지 일 다 지체할 일이 아니니.”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한 것이야?”

영원은 그제야 말에 올라타서 묵칠을 살피며 물었다. 묵칠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소육 일. 소육이 지방직을 청한 건 형님도 알겠지. 그끄저께 이부에서 위임이 내려왔고 그저께 아침에 소육이 바로 떠났소. 가기 전에 전별해주겠다고 이야기해 두었는데, 대답하지 않더니 그저께 별안간 출발했지 뭐요. 마침 녀석이 수로신(守路神) 제 지낼 물건을 사러 사람을 보냈는데 이가 형님이 마주치고는 소식을 알려주었소. 그날은 너무 늦어서 다음 날 아침에 저택에 가 봤더니 벌써 출발했더라고. 급하게 쫓아갔는데 다행히 만났지…….”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묵칠의 목소리에 서글픔과 갈등이 느껴졌다.

“형님 탓을 하지는 않고, 그냥 보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 칠 형님…….”

“슬퍼할 것 없다. 날 보고 싶지 않은 건 인지상정이지. 드디어 깨우쳤구나. 나쁜 일이 아니다.”

영원의 안색도 조금 어두워졌다.

“나도 알지.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고. 하지만 나는…… 예전을 생각하면……. 형님은 못 봤지만, 그저께 소육이 겨우 여남은 명 데리고 마차 서너 대로 가는데, 너무 안 되어 보였소. 예전만 생각하면…….”

묵칠은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다 지난 일이다. 너도 지방직을 청하지 않았어. 언제 떠나느냐?”

영원은 그 화제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묵칠은 다시 눈물을 훔치고 대답했다.

“다음 달. 아버지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고 하시면서 함께 가시겠다고 한다. 한 번 떠나면…… 아버지가 연달아 두 임기 있으라고 해서 한 번 가면 6년 걸린다.”

“예전 일은 생각할 것 없다. 앞날을 잘 생각해라. 이제 어른 아니냐. 계소영도 지방직을 청해서 며칠 안에 출발한다더라.”

“응.”

묵칠은 눈물이 또 흘렀다.

“다들 떠나는군. 이가 형님도.”

“응, 형님은 벌써 부임하러 떠났지.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다. 이 연회가 끝나면 다음 연회가 시작된다. 다음 연회는 더 떠들썩하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

“다음은 없어.”

묵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마음속엔 우리의, 우리의 연회가 제일 좋다. 칠 형님, 이가 형님이 떠났을 땐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육누이가 연지포도 챙겨서 떠났고, 이가 태태, 이가 전체가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소육은……. 우리 처음엔…… 소육은…….”

묵칠은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영원의 표정이 차츰 서늘해졌다.

“그때야말로 호랑이 굴이고 위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너는 보지 못했고, 소육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울고 싶으면 울어라. 울고 나면 앞으로 다시는 옛 생각하지 말고.”

“알았소. 울기도 했고, 소오에게 한소리도 들었지. 이제 울지 않을 거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냥 형님을 만나니 소육 생각이 나서……. 그래, 소육 생각도 그만해야지. 아버지가 나나 소육은 모두 바보 나름의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시더라고. 형님, 이만 돌아가라. 앞으로 다신 생각하지 않고 울지도 않을 거다.”

묵칠은 정북후부 골목 앞에서 말을 멈추고 영원과 인사했다. 영원도 말을 멈추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삐를 당겨 다가가서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고삐를 풀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묵칠은 골목 앞에서 영원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말 위에 앉아 한참 멍하니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칠 형님의 말이 맞다. 화려하고 떠들썩한 연회는 이미 끝이 났다. 앞으로 경성에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난다. 이제 각자의 화려하고 떠들썩한 이야기는 또 다른 시끌벅적한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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