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새로운 시대
“오가아도 있어요.”
복안 장공주가 황상의 말을 잘랐다.
“오가아?”
황상은 매우 망연해 보이더니 울기 시작했다.
“진진, 짐은 교교에게 약속했다. 약속했었어…….”
“오라버니, 휴. 그럼 아버지는요? 어머니처럼 황릉에 의관총(衣冠塚)을 세울 건가요? 아버지를 보지 않고 임가 열성조를 보지 않고요?”
“진진…….”
황상이 애걸하듯 장공주를 불렀다.
“오라버니, 나에겐 친 오누이가 오라버니뿐이에요.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오라버니예요. 이런 때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오라버니가 아버지와 임가 열성조를 당당하게 뵙길 바라서예요. 태자는 임가와 천하를 짊어지지 못해요. 어울리지 않아요. 오라버니, 이건 오라버니를 위해서예요.”
장공주의 목소리는 매우 온화했지만, 내용은 매우 잔혹했다.
멍하니 장공주를 바라보던 황상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제, 그저께, 그끄저께, 짐은 매일 꿈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예전의 꿈을 꾸었어. 진진, 이 오라비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네가…….”
황상은 더듬더듬 복안 장공주의 손을 잡았다.
“임가를 지키고, 임가의 근본을 지키고 우리 임가 천하를 지켜다오. 영씨는…….”
“안심하세요. 제가 있잖아요.”
복안 장공주가 황상의 말을 이어 대답했다.
“그래, 그래……. 진진, 사가아는…… 아직 어린애다. 다 짐 탓이다. 그 아이는 아직 어리다. 그러니…….”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어쨌든 그 아이도 임씨예요.”
황상이 목이 메어서 하는 말에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씨인 이상 죽을 자리에 다리를 뻗지 않은 한 죽을 일은 없다.
“묵 경, 여 경을 들라 해라…….”
황상은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분부했다. 복안 장공주가 상 태감을 힐끔 바라보자 상 태감이 잰걸음으로 재빠르게 나와서 진작 대전 밖에서 기다리던 묵 승상 일행을 불렀다.
묵 승상이 맨 앞에 서고 여 승상과 초 승상이 그 뒤를 따랐다. 진왕, 해 상서, 손 학사 그리고 당직 한림, 승지, 계소영을 비롯한 모두가 주르륵 안으로 들어와 황상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지를 쓰라.”
황상은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며 조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태자는 부덕하여 크게 쓸 인물이 아니다. 태자를 다시 세운다.”
침상 구석 자리에 앉은 진왕이 화들짝 고개를 들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황상을 빤히 바라봤다. 맨 앞에 꿇어앉아 종이와 붓을 들고 있던 계소영이 무심결에 몸을 틀어 진왕의 시선을 가렸다. 고개를 들고 영원 쪽을 슬쩍 바라보다가 영원의 웃는 듯 아닌 듯한 눈빛과 마주쳤다.
“오가아 임예를 태자로 세운다.”
황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영 황후를 거론하지 않고 복안 장공주를 불렀다.
“복안을 영국(寧國) 복안 대장공주와 육합(六合) 공주로 봉하고 종정경(宗正卿), 검교시중(檢校侍中), 행중서성(行中書省) 직을 맡긴다.”
황상은 장공주의 손을 잡았다.
“짐은…… 모든 걸 네게 맡기겠다.”
묵 승상은 황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여 승상은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초 승상은 살짝 흥분한 표정이었다. 역시 이렇게 되었구나!
계소영은 잠시 기다리다가 황상이 더 발언하지 않자 고개를 숙인 채 성지를 쓰러 물러났다. 그때 손 학사가 손을 내밀어 종이와 붓을 가로챘다.
“중대한 일이니 내가 하지!”
손 학사가 성지를 완성하자 황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 승상이 성지를 들자 모든 이가 복안 장공주만 남기고 발끝을 들고 조용히 물러갔다.
대전 밖으로 나간 영원은 어슬렁어슬렁 계소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난 군자일세.”
계소영은 힐끔 그를 바라보고는 조금 낙담한 것 같은 진왕을 쳐다봤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영원의 말은 아까 그의 행동이 소인배의 마음으로 군자의 생각을 가늠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계소영은 영원이 군자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이 군자의 생각을 가늠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틀 후, 황상이 숨을 거뒀고 거의 동시에 하빈도 눈을 감고 정 어멈은 독을 마셨다. 하빈과 정 어멈의 충정에 영 황후, 복안 장공주 그리고 온 조정이 칭송했고 하빈은 황귀비로 진봉하여 황상을 따라 황릉에 묻혔다.
눈이 다시 내리고 궁궐에 흰 눈이 두껍게 쌓였지만, 그렇게 서글퍼 보이진 않았다.
지난번엔 수국공이 대황자부 담장을 높이 쌓았고, 이번엔 주육이 태자의 예전 왕부의 담장을 높이 쌓았다.
주육은 마차에 앉아서 갈수록 높아지는 담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매우 슬펐다. 황상의 대행(大行: 황제나 황후가 죽은 뒤 시호諡號를 올리기 전) 때문인지, 눈앞에 보이는 높은 담장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정리되지 않으니 정리하지 않았다. 그저 은연중에 모든 게 과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꿈에서 깨어났다.
오황자의 즉위는 조급해하는 사람 없이 느긋하게 한 달 후로 정해졌다.
영국 복안 대장공주가 된 복안 장공주는 산더미처럼 쌓인 공주부 수리 상주를 거절했다. 자기는 수행하는 사람이고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나라와 가문을 위해 정사를 돌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나 이 모든 것은 임시방편이고 몇 년 뒤엔 다시 성 밖으로 돌아가 수행할 것이라 그동안은 보록궁에 머무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보록궁에서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서쪽 곁채에 머물렀고, 그녀가 머무르는 편원(偏院) 외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영원은 오황자의 즉위식 다음 날 복안 장공주의 명으로 각지 군비(軍備)를 순시하러 떠났다. 이동은 한 달 동안 경야했으나 영 황후가 모두를 잘 보살펴 주어서 무릎 꿇고 우는 시간이 짧고 쉬는 시간이 많아서 그리 힘들진 않았다. 영원이 떠난 후에 이동은 거의 매일 보록궁으로 향했다. 선황이 떠난 이래 대장공주가 많이 야윈 것이 조금 걱정이 되었다.
황상이 된 오황자는 예전처럼 매일 보록궁에서 공부했다. 시간은 매일 조회가 끝난 뒤로 바뀌었고, 이동은 황상의 수업이 끝난 후 보록궁으로 향했다.
새로운 봄이 살금살금 찾아와 버들가지가 하나씩 싹을 틔워 노란 잎을 드러내는 어느 날, 이동은 그물창 너머로 봄의 신록이 내뿜은 생기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길디긴 황량몽 같기만 했다.
보록궁 앞 골목으로 마차가 돌아서 들어갔을 때, 이동은 마차벽을 두드려 마차를 세우고 마차에서 내려 길 양쪽에 만개한 동백꽃을 감상하며 뜨락으로 들어갔다.
뜨락 안으로 막 발을 디뎠을 때, 회랑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황상과 마주친 이동은 서둘러 옆으로 피하면서 예를 갖췄다. 황상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외숙모, 좋은 아침입니다. 외숙모, 조금 전에 고모님이 제 안목이 좋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열흘 동안 대장공주께 세 번이나 칭찬 받으셨군요.”
이동도 덩달아 싱긋 웃으며 말하자, 황상은 뿌듯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젠 어머님도 칭찬하셨습니다. 활쏘기 솜씨가 칠외숙 대여섯 살 때와 비교할 만해졌다고요!”
이동은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대단하세요, 황상.”
“지금 놀리시는 거지요?”
황상이 툴툴거리자 이동이 얼른 해명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칠외숙은 어른이 될 때까지 무술만 배우고 다른 건 배우지 않았다고 했어요. 지금도 칠외숙은 싸움만 할 줄 알지, 황상은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잖아요. 칠외숙보다 훨씬, 훨씬 많이요. 특히 대장공주에게 배우는 것들은, 황상 같은 분이나 이렇게 잘 배우시는 거예요.”
이동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뒷짐을 지는 황상의 모습은 복안 대장공주와 매우 닮아 보였다.
“그러니 말입니다. 천자의 길은 참 어렵습니다.”
이동은 웃으려다가 얼른 참으며 난간에 바짝 붙어서 황상이 뜨락 문을 나가는 걸 바라봤다. 황상이 문득 돌아보며 찬란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침햇살이 황상의 옆얼굴을 비췄다. 갈수록 애티가 가시는 그의 얼굴 위로 눈 부신 햇살이 감돌아 이동은 무심결에 눈을 찌푸렸다. 눈을 가늘게 뜨는 그 순간, 아침햇살 아래 그 얼굴과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던, 석양 속에서 찬란히 웃던 얼굴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였어!
이동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튀어나올 뻔한 비명을 막았다.
지난 생에, 홀연히 대상국사에 나타났었던 고승, 그녀에게 어머니를 찾을 수 없다고 했었던, 그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했었던,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던 그 고승이…….
큰 은혜를 입었다고 했던 게, 지금 말이었어?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이지?
이동은 얼이 빠진 것처럼 뜨락 문 앞에 서 있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서쪽 곁채로 들어갔다. 복안 대장공주는 그녀가 앉아서 찻상을 끌고 와서 차를 그을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가 넋이 나가서 뜨락 문에 서 있더라고 녹매가 그러던데, 무슨 일이야?”
“아니에요. 옛일이 좀 떠올라서요.”
“옛일이라…….”
이동이 고개도 들지 않고 하는 말에 대장공주는 그 말을 천천히 읊조리다가 한참 침묵했다.
“며칠 전에 태후가 영가의 옛이야기 몇 가지를 내게 이야기해 주더군. 영가에 있던 소 사야, 그자가 은거하기 전에 너만 만나고 떠났다며?”
“네.”
이동은 눈을 내리깐 채 나직이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태조의 수기에 환생한 사람 이야기가 있었어. 그때 태조는 아직 부장군이었는데, 몰락한 수재가 찾아와서 22년 뒤에 천하를 군림하게 될 거라고 했대.”
복안 장공주는 잠시 멈췄다가 이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태조는 너무 놀라서 그를 죽였어.”
이동의 표정이 굳었다.
“10년 뒤, 태조는 실수였다는 걸 깨달았어. 태조는 그 수재가 말한 날 등극하셨어. 태조께서는 그 날짜를 알고서 그날로 정한 거였지만. 또 하나.”
복안 대장공주는 손에 쥔 찻잔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승려도 아닌 도인도 아닌 소씨 성의 사내를 만났다고 쓰여 있었어. 그 사람도 마르고 나약했어. 태조에게 미친 소리를 많이 했대. 예를 들면 임가 천하는 이씨 손에 이뤄지고 이씨 손에 멸망한다고.”
이동의 어안이 벙벙한 모습에 복안 대장공주가 싱긋 웃었다.
“평생 참 이상한 일을 많이 겪으셨지. 수기를 아주 잘 적어두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
이동은 복장 대장공주를 빤히 바라봤다. 복안 대장공주는 한참 웃다가 이동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태조는 임가 천하가 이씨 손에 이뤄지고 이씨 손에 멸망한다는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이씨 손에 이뤄졌다면 이씨 손에 멸망한다고 해도 공평한 것이다.”
“태조의 그 수기는…….”
이동은 간담이 서늘해져서 물었다. 복안 대장공주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수기는 말이야…….”
대장공주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주셨어. 선황은 그런 걸 안 좋아했거든. 선황은 시사가부(詩詞歌賦) 같은 운문을 좋아해.”
이동은 살며시 안도했다.
“난 지금 이 수기를 소오에게 보여줄까 말까 고민 중이야. 정말로 재미있거든.”
이동이 안도하는 걸 느낀 복안 대장공주가 짓궂게 또 한마디 이었다.
“이씨 손에 이뤄지고 이씨 손에 망한다는 말 말고 하나 더 있어. 물을 지니고 태어난 임가 여식이 있으면 태어나자마자 물에 빠뜨려서 죽여야 한대. 아니면 그 여인이 태어난 뒤로 2대째에 가문이 멸망한다고.”
이동은 멍하니 대장공주를 바라봤다. 물을 지니고 태어난 여인, 대장공주가 태어난 날 큰비가 내렸는데…….
“거기에 대해, 태조께서 두 글자 평가해 두셨더라. ‘개뿔!’”
복안 대장공주가 까르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