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떠나기 전
태자가 경멸과 분노하는 눈빛으로 하빈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올려다봐야 해서 경멸과 분노의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화가 나고 껄끄러워진 태자는 계단으로 올라가서 하빈과 같은 계단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내려다보는 쾌감이 느껴졌다.
“어렵게 잠드셨는데 전하께서 꼭 봬야겠다고 고집하면 황상을 깨워야 하는데, 그러면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빈은 요 며칠 초조하고 무기력해진 바람에 한 반년 동안 잘 잠재워 온 성깔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감히 고가 황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태자는 분노했다. 역시 하씨 중에 좋은 물건은 하나도 없구나!
그때 상 태감이 종종거리며 대전에서 달려 나왔다.
“전하, 전하. 고정하십시오, 전하. 하빈 마마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빈 마마는 막 회임하셨습니다. 점괘를 봤는데 아들이랍니다. 아직 안정되지도 않았습니다. 전하, 반드시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빈 마마가 이럴 때 화를 내게 되면…….”
상 태감은 태자와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쉴새 없이 공수하며 허리를 숙이고 장읍했다.
태자의 안색이 확 변했다.
“회임? 아버지가? 말도 안 된다! 웬 잡것을 품은 겝니까!”
하빈은 화가 나서 얼굴이 다 창백해졌다.
“감히요! 이 아이가 잡것이면 태자 전하도 잡것이란 말입니까!”
“이런, 무엄한 것이!”
태자가 버럭 고함치며 발을 들어 하빈의 배를 모질게 걷어찼다. 한쪽 발로 걷어차고는 즉시 다른 바로 연달아 걷어찼다. 잠시 후,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던 하빈의 치맛자락 아래로 가늘게 피가 흘러내렸다.
“태자 전하!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상 태감은 손을 비비며 목소리를 깔고 초조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애타게 설득하면서도 한 발짝도 다가가지 않았다. 하빈을 모시는 시녀들은 벌써 겁에 질려서 파르르 떨었다. 하빈은 허리를 구부리고 배를 감싸 안은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황상! 살려주세요! 태의! 태의!”
“상 태감, 황상이 혼절하셨습니다! 어서요!”
내시가 안에서 허둥지둥 뛰어나오다가 문턱에 걸려 엎어진 채 고함쳤다. 상 태감은 태자와 하빈을 상관할 겨를 없이 획 돌아서서 대전 안으로 달려가면서 내시에게 분부했다.
“어서, 보록궁으로 가라!”
하빈은 시녀들이 부축해서 편전으로 옮겨 탑상에 눕혔다. 피에 젖은 깔개를 계속해서 갈아야 했다.
“태의는?”
하빈은 유모 정 어멈을 단단히 붙들고 물었다. 하반신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갈수록 두려움이 짙어졌다.
“마마, 회임한 일을 황상도 모르시는데, 상 태감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정 어멈이 얼굴이 시퍼레져서 힘겹게 묻자, 하빈이 멈칫했다.
“태의가 진맥했을 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두었었는데……. 어멈, 상 태감이 날 해치려는 걸까? 내가 뭘 잘못해서? 어멈, 태의는 왜 아직이지? 피가…….”
하빈은 고개를 들고 하반신을 내려다봤다. 두 시녀가 그녀를 들추고 세 번째 깔개를 가는 참이었다. 하빈은 울음을 터트렸다.
“이러다가 죽겠어! 왜 안 오는 거야. 어멈, 어멈이 가 봐. 태의가 어째서 아직이야. 날 죽일 생각이야?”
어멈은 일어서서 걸음을 내딛다가 멈춰서 시녀에게 분부했다.
“네가 가서 상 태감에게 물어봐라. 상 태감이 안 보이면…… 그럼 정전에 누가 있는지 가 보고 물어봐라.”
“어멈이 가야지, 저 애가 가서 무얼 해. 어멈이 가서 상 태감을 불러와. 내가 곧 죽을 것 같다고 와서 보라고 해.”
하빈은 두려움이 갈수록 짙어졌고 조바심을 낼수록 하반신에서 피가 더 빨리 흐르는 기분이었다.
정 어멈은 하빈을 상대하지 않고 편전 문 앞으로 다가가서 휘장을 걷고 정전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휘장을 내려놓고 하빈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
“승상 나리들도 오셨습니다. 저쪽, 대전 입구엔 사람이 가득해요.”
하빈은 망연하게 정 어멈을 바라봤다. 정 어멈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낭자, 보아하니 황상이 눈을 감으시려는 모양입니다.”
“뭐라고? 멀쩡히 왜? 황상의 춘추가 몇인데? 황상은 지금 한창때라고, 어멈이 한 말이잖아! 어멈이 한 말이라고!”
하빈은 너무 놀라서 목소리가 다 변했다. 정 어멈이 시선을 피했다.
“하늘의 흐름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낭자, 이게 다 낭자의 운명입니다.”
하빈의 안색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야, 내 운명은 그렇지 않아. 내가 이제 몇 살인데? 어멈, 그게 무슨 말이야? 태의는? 태의를 부르지 않았어? 어멈…….”
정 어멈이 하빈의 말을 잘랐다.
“낭자, 잘 생각해 보세요. 상 태감이 어떻게 낭자가 회임한 일을 알았을까요? 상 태감이 태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낭자를 해치려 작정한 겁니다. 낭자, 상 태감이 누구 사람입니까? 황상의 뜻이 아니라면, 황상이 이미 늦었다는 의미입니다. 상 태감이 새 주인을 맞은 것이지요. 낭자, 낭자는 영리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길에 오른 이상, 이 길은 원래 구사일생인데…….”
하빈은 훌쩍이며 정 어멈의 말을 무질렀다.
“아니야! 구사일생이라니, 그런 말을 한 적 없잖아. 태후가 될 운명이라고 했잖아. 주 태후처럼 될 거라고 했잖아. 그런 소리는, 그런 소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잖아…….”
하빈은 소리 내서 울었다. 울기 시작하니 하반신에서 피가 더 빨리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난 죽기 싫어! 어멈, 방법을 생각해 봐라. 난 필요 없어. 다 필요 없어. 어멈, 어서 방법을 생각해 봐. 죽기 싫어, 어멈!”
하빈은 정 어멈을 붙들고 눈물 콧물 흘리며 펑펑 울었다.
“낭자, 내려놓고 생각하세요. 이 길에 오른 이상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정 어멈은 자기네 낭자가 죽을 때가 됐음을 깨달았다. 낭자의 죽을 때는 자신의 죽을 때이기도 했다. 이런 순간이라 평소처럼 마음을 다잡고 낭자를 위로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정 어멈의 말에 하빈은 더 심하게 울었다.
“내가 가서 태자에게 빌어야겠어. 태자에게 잘못한 것 없어. 난 일개 나약한 여인이야……. 내 아이까지 걷어차서 없앴는데, 뭘 더 하려고? 어멈, 가서 빌자. 살려달라고요. 나 죽기 싫어. 어멈, 나 살고 싶어…….”
정 어멈은 넋이 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채 하빈이 흔드는 대로 몸을 맡겼다.
복안 장공주는 황상의 침상 발치 쪽에 서서 태의를 향해 팔을 휘두르며 포효하는 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쓸모없는 놈! 부황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 산 채로 묻어버릴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무얼 하느냐! 쓸모없는 놈들!”
태자가 포효하며 뿜는 침이 온 얼굴에 튀자 상 태감의 표정이 흐려졌다. 뻣뻣하게 침상에 누운 황상의 얼굴에도 적지 않게 침이 튀었다.
“태자가 지나치게 상심하여 제정신이 아니구나. 진정하도록 모시고 나가라.”
갈수록 커지는 태자의 포효 가운데 장공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복안 장공주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태자의 포효를 눌렀다.
상 태감이 즉시 다가가서 태자를 부축했지만 태자가 휙 뿌리치고는 돌아섰다. 태자의 손가락이 복안 장공주의 코끝을 가리키고 태자의 입에서 다시 고함소리가 나오기 직전, 대전 입구에 서 있던 영원이 움직이나 싶더니 모두의 눈앞이 어른거린 사이 어느새 태자와 복안 장공주 사이에 서 있었다.
“태자 전하, 장공주 누님이 분부하신 대로 잠시 편안히 쉬다가 오십시오.”
영원이 공손하게 말하면서 어느새 양손으로 태자의 어깨를 꾹 누르고 있었다. 공손해 보이지만 사실은 꿈쩍하지 못하게 태자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발이 땅이 닿지 않게 들어 올려 정전 밖으로 향했다.
복안 장공주는 못 본 체 오로지 황상만 바라보고 있다가 영원이 태자를 떼어낸 후 황상 곁으로 다가갔다. 상 태감이 매우 싹싹하게 의자를 내어주자 장공주는 황상 앞에 앉아서 황상의 서늘한 손을 꼭 잡았다.
“오라버니.”
“사가아가 성격이 급해서……. 짐이 아픈 걸 보고, 조바심이 나서…….”
황상은 숨을 돌리자마자 태자를 위해 변명부터 했다.
“성격이 급하긴 하지요. 오라버니 숨이 끊어지는 것을 기다리지도 못할 정도로 급하고 말고요. 하빈을 걷어찬 것처럼 오라버니도 어서 보내지 못해서 안달 낼 정도로요.”
복안 장공주는 말수 없고 평온하던 평소와 달리 신랄하고 박정했다. 황상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라보는데,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사가아, 그리고 대가아가 어떤 인품, 성격인지 잘 알지 않습니까.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런데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눈 가리고 아웅 할 생각이세요?”
“진진!”
황상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뭘 어쩔 생각이냐?
복안 장공주가 황상을 직시했다.
“주씨 죽음의 진상을 훤히 알잖습니까. 태의원의 진맥 기록을 보셨잖아요. 주씨는 비상 말고 단장초에도 중독됐습니다. 첫째뿐만 아니라 넷째도 독을 썼다는 걸요. 주씨가 제 속으로 낳은 두 아들이 동시에 마음을 품고 동시에 손을 써서 동시에 독살했어요.”
“진진!”
황상은 놀란 가운데 당황해서 일어나 앉으려고 버둥거렸다. 상 태감이 재빨리 다가가서 뒤에서 부축해 일으키자 내시가 등받이를 댔다.
“진진, 미쳤느냐? 미친 게냐?”
“태의원의 진맥 기록, 진단한 사람, 단장초를 태자에게 판 사람 모두 있습니다. 보시겠어요, 오라버니?”
복안 장공주가 자상하게 황상의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진진…….”
황상은 충격과 놀라움이 가시고 당혹스러움과 서글픔이 뒤섞인 눈빛으로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그런 황상의 모습이 어쩐지 가련해 보였다.
“오라버니, 아버지가 눈을 감기 전에 오라버니에게 했던 말, 아직 기억하세요?”
복안 장공주가 비통한 눈빛으로 황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진, 너는 일개 여인이다. 일개 여인이, 여인이…….”
복안 장공주는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들어 올렸다.
“맞아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종종 오라버니 이야기를 하셨지요. 다행히 성품이 온화하고 진언을 듣는다고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군주의 첫 번째 조건이 진언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요. 그 점이 있으면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도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요.”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황상은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장공주를 바라봤다.
“네. 아버지는 오라버니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오라버니는 장자라서 아버지가 가장 아끼셨어요. 기대도 가장 많이 하셨고요. 이 천하를, 임가 조상이 남긴 근본을 오라버니에게 맡기는 게 가장 마음 놓인다고도 하셨어요.”
“아버지…….”
혼탁한 눈물이 황상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사람을 볼 줄 알아요. 주씨 죽음의 진상을 잘 알고요. 첫째가 어떤 사람인지, 태자는 또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아요. 주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체한 거죠. 오라버니,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주씨가 죽었어요. 첫째가 죽었고요.”
복안 장공주의 말머리가 다시 돌아왔다.
“사가아는…….”
황상은 과거와 현재 사이를 망연하게 배회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이제 아버지, 할아버지를 뵈러 가야 해요. 임가의 열성조를 뵈러 가야 해요. 태자가 주씨를 독살한 일을 어떻게 아버지께 말씀드리려고요? 임가의 근본을, 생모를 독살하고 동복형제를 태워 죽이고 또 회임한 비빈을 걷어찬 사람에게 넘겼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진진…….”
황상은 몸을 반듯하게 일으키려고 두 손을 버둥거렸다.
“오라버니, 이런 말, 제가 하지 않으면 누가 오라버니에게 하겠어요. 언젠간 나도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해요.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손윗사람이에요. 아버지가 가장 중시한 아들이고요. 오라버니, 태자는 덕이 없어요. 임가 근본을 짊어질 수 없어요. 이 천하는 더더욱 짊어질 수 없고요.”
“그 아이는 태자다…….”
황상은 목숨줄이라도 잡듯이 이불을 꽉 붙들었다.
“짐에게 아들은 이제 그 아이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