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두터운 형재 우애
여 승상은 갈등하며 넋이 나간 태자를 비스듬히 바라보다가 아무런 일 없는 듯 시선을 돌렸다. 묵 승상은 상대하기도 싫은 듯이 흘깃 바라봤다.
“고가 너무 다급했구나. 형님만 생각하면……. 고의 말을 전해라. 사람이 다쳐서는 안 된다. 사람이 다치면 고도 마음이 불편하고 형님은 더 불편할 것이다.”
태자는 잠시 갈등하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곁에 있는 호위에게 분부했다. 묵 승상은 답답한 듯 침을 삼켰고 여 승상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초 승상은 할 말이 없는 듯 눈을 흘겼다.
영원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태자, 어미 배 속에서 태어날 때 다른 건 다 갖췄는데 생각은 갖추지 않았구나. 조금도 갖추지 않았어.
“태자 전하, 왕비 곽씨, 그리고 대왕야의 선생이 모두 저쪽에 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침묵한 가운데 여 승상이 침묵을 깨고 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갑시다!”
태자는 여 승상이 하자는 대로 뒷짐 지고 전전 시위, 경부 관아, 그리고 황성사 사람이 뒤섞여 에워싸고 지키고 있는 곽씨와 장 선생 일행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곽씨는 진이 빠진 모습으로 유일한 비단 방석 위에 앉아 있었고 양옆에 나이 든 어멈이 부축하고 있었다. 도요는 곽씨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왕야 거처에서 밖으로 나온 시녀, 어멈들을 호시탐탐 바라보고 있었다.
장 선생은 바닥에 다리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입정한 듯이 매우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형님은?”
몇 걸음 만에 달려온 태자가 모든 이의 앞에 서서 매섭게 고함쳤다. 곽씨는 진저리치며 어멈의 팔을 꼭 붙들고 태자가 아닌 장 선생을 바라봤다. 도요는 등에 힘을 바짝 주며 행여 경중을 모르고 누군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시녀, 어멈 무리를 매섭게 노려봤다.
장 선생은 눈을 뜨고 태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기 전에 한숨부터 쉬었다.
“아룁니다, 태자 전하. 대왕야가 술에 취해 칼을 든 채 촛불을 쓰러뜨리며 불을 질렀습니다. 시녀들이 구하려고 들어가기만 하면 칼로 벴습니다.”
장 선생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소인이 도착했을 때 왕비께서 안으로 뛰쳐 들어가려고 하길래 소인이 독단적으로 왕비를 막았습니다.”
“형님은? 죽었느냐, 살았느냐?”
태자는 장 선생의 말을 무지르고 다급하게 물었다.
“대왕야가 사람 몇을 죽인 다음 입구의 대들보가 떨어져서 문이 막혔습니다. 휴. 왕비께서는 그래도 들어가시려고 해서 소인이 어쩔 수 없이 끌고 나오라고 분부했습니다. 대왕야는…….”
장 선생은 비통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이 죽었나? 직접 봤나?”
태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다시 물었고 장 선생은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는 크게 안도하며 피어나는 미소를 얼른 감추고 장 선생과 곽씨를 손가락질하며 매섭게 호통쳤다.
“어찌 감히 형님을 버리고 모른 척할 수 있나! 내 형님이 불바다에서 목숨을 잃는 걸 빤히 보고만 있었다니! 무슨 낯짝으로 도망쳐 나온 것이냐! 형님!!”
태자는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형님, 이렇게 처참하게 죽다니. 형님, 형님! 내 반드시 복수하겠습니다! 형님!!”
장 선생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태자를 냉랭하게 바라봤다. 울음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1년 못 본 사이 갈수록 머저리가 된 모양이었다.
“여봐라! 이것들을 다 불길에 던져라! 감히 내 형님을 버리고 돌보지 않다니! 형님을 위해 싹 순장시켜야겠다!”
태자는 아마도 우는 것만으로는 슬픔과 분노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곽씨부터 장 선생까지 대황자부 모두를 손가락질하며 날카롭게 고함쳤다.
여 승상이 할 수 없이 나서서 설득했다.
“태자 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태자는 일거수일투족 국법과 율법을 따라야 합니다. 이들을 불 안으로 떠미는 건 안 될 일입니다. 이 선생이 한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대왕야를 내버려 뒀는지, 모두 상세히 조사해야 합니다. 조사한 후에 죄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고의 형님을 해쳤습니다! 고에겐 형님이 하나뿐이란 말입니다!”
태자는 울며 고함쳤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기뻐서 그러니 어쩌겠나.
“태자 전하는 인의롭고 대왕야와 형제 우애가 두터우셨으니 매우 상심되시겠지요.”
여 승상이 장 선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 승상의 시선에 장 선생은 폭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여 승상, 눈 뜨고 딴소리하는 재능으로 승상이 되더니 아부 솜씨가 역시 아주 남달라!
“태자 전하는 국본, 일거수일투족은 매우 중대합니다. 태자 전하, 부디 절애하시고 변고를 받아들이십시오. 황상께서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초 승상이 여 승상의 말을 따라 태자를 설득하자, 태자의 울음소리가 더 쩌렁쩌렁해졌다.
“형님! 이렇게 느닷없이 가다니요! 고는 어찌 살란 말입니까! 형님!!”
묵 승상은 눈살을 찌푸리고 태자를 흘겨보다가 주육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를 불렀다.
“소육, 이리 오너라. 어서 태자를 마차로 모셔라. 마음 좀 다스리시고 절애하시도록 잘 설득해라. 몸 생각하셔야 한다.”
불이 난 곳에서 방금 물러 나와서 온몸이 그을음으로 얼룩덜룩한 주육은 ‘아이고’부터 외치고 대답하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영원을 찾았다. 영원은 주육이 자기를 보도록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 이쪽에 있는 마차로 태자를 모시라고 손짓했다.
대황자부의 화재는 밤새 이어졌고, 사람들이 현장을 에워싸고 밤새 바삐 움직인 끝에 날이 밝을 때쯤엔 불길이 잦아들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폐허에 서광이 비치는 광경은 마치 모든 것이 무너진 후에 새로 태어나는 듯한 기이한 느낌이 들게 했다.
대황자의 거처에서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 두 구가 발견되었다. 어느 것이 대황자고 어느 것이 시녀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아예 같이 놓고 얼렁뚱땅 염하고 상자에 넣었다.
묵 승상, 여 승상, 초 승상, 세 승상은 황상에게 바로 고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을린 시신 두 구를 앞에 두고 머리를 맞대고 한참 수군거린 끝에 묵 승상이 상자를 들고 복안 장공주를 만나러 갔다.
복안 장공주는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그을린 시신 두 구를 보고 냉담하게 물었다.
“어째서 시신이 두 구인가요?”
묵 승상이 얼른 설명하자 복안 장공주가 피식 웃었다.
“용자봉손이라고 하지만, 숯등걸이 되니 아무런 차이가 없군요. 태자가 그리 깊은 형제 우애로 슬퍼한다니 직접 황상에게 들고 가라고 하세요. 태자와 황상은 어느 쪽이 존귀한 몸이고 어느 쪽이 비천한 몸인지 구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묵 승상은 다른 말 없이 상자를 들고나와 곧장 태자를 만나러 갔다.
들떠서 밤새 잠을 못 잔 태자는 아직도 흥분 상태에 있다가 묵 승상이 뵙길 청한다는 말에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
“형님! 어찌 이리 떠나십니까!”
안으로 들어온 묵 승상은 통곡하는 태자를 상자를 든 채 끽소리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나오지도 않는 울음을 쥐어짜던 태자는 묵 승상이 칭찬하거나 말리지 않는 걸 보고 울음을 그치고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묵 승상을 흘겨봤다.
“형님이 어쩌다 죽은 건지 알아보지 않고 여기엔 왜 온 겁니까. 고는 지금 아무것도 할 심경이 아닙니다!”
묵 승상이 두 손으로 상자를 바쳤다.
“아룁니다, 태자 전하. 대왕야께서 목숨을 잃은 곳에서 찾은 시신입니다.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태자는 서둘러 다가가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는 식겁해서 뒷걸음질 쳤다.
“어찌…… 형님!”
형님, 하고 부르는 태자의 고함이 웃음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했다. 묵 승상은 고개를 숙이고 그를 보지 않고 오로지 할 말만 했다.
“태자 전하, 황상께는…… 어찌할까요?”
묵 승상이 묻자 태자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형님은 황상께서 가장 아끼는 장자셨습니다. 이 부분밖에 남지 않았더라도 마지막 모습을 보셔야지요.”
묵 승상은 눈을 내리깔았다. 태자가 이 숯등걸을 들고 황상을 찾아가게 한 복안 장공주의 의도와 태자의 지금 속셈이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태자는 상자에서 몇 걸음 떨어져서는 내시를 손짓해서 상자를 안으라고 분부했다.
“여봐라, 고의 형님이다. 작별 인사하시도록 아버지께 모시고 가련다.”
묵 승상은 상자를 내시에게 건네고 단 한마디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공손하게 물러난 다음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차를 마시며 한참 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라는 수련의 옷을 입고서 꿇어앉았다기보다 바닥에 바짝 웅크려서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아라 뒤에 앉은 다다는 저 높은 곳에 앉은 칠내내가 자기를 못 보길 바라며 대황자부에서 지내는 동안 훨씬 뚱뚱해진 몸을 숨기려고 애를 썼다.
위봉낭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할 수 있는 한 두루뭉술하게 보고했다.
“비수를 건넨 건, 거기에 잇자국이 있으면 골치 아플 것 같아서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제 탓입니다. 평소에 겁 많은 사람이 사람 죽이는 건 두려워하지 않을 줄 몰랐습니다. 나중엔 시간이 없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도 들이닥쳤고요.”
위봉낭이 두루뭉술 설명했지만, 이동은 똑똑히 알아듣고 조금 어이없는 듯 물었다.
“대왕야의 물건을 자르라고 하려 했단 말이냐? 그렇게 하면 잇자국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아서?”
위봉낭의 고개가 더 숙여졌다.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불은 누가 질렀고? 네가?”
“아닙니다. 원래는 지르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들이닥치길래 봤더니 대황자의 왕비, 그리고 거드름 피우는 장 선생이었습니다. 그 장 선생이 불을 질렀습니다. 불을 질렀을 뿐만 아니라 시녀, 어멈을 협박했습니다. 누군가 대왕야가 살해됐다고 말하자 그대로 불길 안으로 집어던졌습니다.”
이동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아라에게 돌렸다.
“칠야에게 네 일을 들었다. 대왕야도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늘 이 일은 너와 위봉낭 모두 잘못이 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내가 결정할 수 없어. 칠야가 돌아오시길 기다려야 해. 그리고 바깥 상황도 봐야 하고. 일단 일어나라. 수련, 네가 후조방에 데리고 가서 적당한 방을 찾아서 두 사람에게 내어줘. 일단 푹 자게 해주고, 봉낭도 함께 가. 네가 있어야 아라가 안심할 테니까.”
위봉낭은 일단 세 사람을 가두려는 것임을 깨닫고 고분고분 대답하고 수련을 따라 후조방으로 향했다.
이동은 세 사람이 나가는 걸 바라보며 찻잔을 입가로 가지고 가다가 잠시 후 찻잔을 내려놓고 녹매에게 분부했다.
“아까 했던 말 너도 다 들었지. 복백에게 가서 들은 대로 전하고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칠야께 말씀드리라고 해. 그리고 문 이야에게도 가서 들은 대로 알리고.”
“예.”
녹매는 서둘러 휘장을 열고 나가서 우선 복백부터 찾아갔다.
이동은 다시 잔을 들고 천천히 차를 머금었다.
대황자의 죽음을 황상 말고 누가 연연할까. 장공주?
이동은 시선을 내렸다.
그럴 리 없다. 장공주는 자신보다, 심지어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무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왕야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만큼 홀가분해할 리가 있나.
대황자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타 죽은 사실에 황상은 놀라고 비통한 나머지 쓰러지고 말았다.
온 경성은 또다시 작년처럼 흥겨움과 떠들썩함을 마음속으로 누르고 집에 갇혀서 지내야 했다.
태자는 이상할 정도로 황상의 진맥 기록과 병세에 관심을 가졌고, 태의가 황상을 진맥하고 나올 때마다 병세를 묻고 황상에게 혹시 문제가 생기면 다 함께 순장하겠다고 매섭고 엄하게 호통치는 것으로 태자로서의 효심을 표현했다.
진맥 기록을 신경 쓸 뿐만 아니라 요즘은 하루에 한 번 심지어 두어 번 찾아가 병문안했다.
황상의 진맥 기록을 샅샅이 살피고 또 태의를 호되게 협박한 태자는 오후에 대전에서 나와서 경치 구경하며 느긋하게 궁으로 들어가 황상을 병문안 하려 했다.
하지만 정전 계단 아래 막 당도했을 때 하빈이 어멈을 붙잡고 대전에서 나와 계단 높은 곳에 서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태자 전하, 황상은 막 잠이 드셨습니다. 황상의 병은 푹 쉬면 낫는 병이라는 태의의 말이 있었지 않습니까. 잠이 든 후에는 절대로 방해하지 말라고요.”
“고가 아버지를 뵈러 온 것이 방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