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58화 (458/463)

458화: 큰 불

“왕비!”

도요가 놀라고 의아한 마음으로 고함치는 소리 위로 장 선생의 침착한 소리가 들렸다.

“왕비의 말씀이 옳다. 태워라. 자네가 가게.”

장 선생 곁에 있던 노복이 성큼 안으로 들어가 초사 휘장을 잡아채서 끌어내린 다음 촛불을 그 위로 던졌다. 불길이 눈 깜짝할 사이에 타올랐다.

장 선생이 담담하게 도요에게 분부했다.

“왕비를 모시고 후원에 가 피해 있어라. 뒷일은 내가 처리하마.”

“싫습니다! 여기에서 보겠습니다! 재가 된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습니다!”

곽씨에게서 광기 어린 모습은 차츰 사라지고 대신 독기가 짙어졌다. 장 선생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온 정원 가득 서 있는 시녀와 어멈들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보아라. 하나씩 하자. 너부터 말해라.”

“대, 대, 대, 대왕야가 살해됐습니다. 왕비, 왕비께서…….”

맨 앞에 선 시녀가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모습으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안으로 던져라.”

시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 선생이 냉랭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아까 불을 지른 노복이 단숨에 시녀를 붙잡아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방 안으로 집어 던졌다.

“네가 말해라!”

장 선생이 뒤에 있는 시녀를 가리키자 시녀가 겁에 질려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인, 소, 소인,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사람을 불러 불을 꺼라!”

장 선생이 조금 누그러진 모습으로 분부하자 시녀는 큰 사면을 받은 듯이 허둥지둥 기어 일어나 밖으로 달려갔다. 뒤에 남은 시녀들도 금세 깨닫고 누구보다 더 빠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불길이 그녀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온 정원에 가득하던 시녀, 어멈들이 사람들을 부르러 나간 뒤, 장 선생은 돌아서서 곽씨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왕비, 후원에 가서 잠시 피해 계십시오. 여긴 제가 있습니다.”

“선생도 후원에 가서 피하세요.”

곽씨는 지금 이 순간 장 선생을 향한 감사 말고 다른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나는 일개 여인이라…… 선생,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도와주세요.”

곽씨가 장 선생 앞에 무릎을 꿇자 도요도 얼른 따라 꿇었다.

“선생, 이건 매우 큰 일입니다. 왕비는 일개 여인입니다. 선생, 살려주신 이상 끝까지 도와주세요.”

장 선생은 잠시 주저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곧 죽을 사람이 하루 더 살든 덜 살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가시지요.”

도요가 재빨리 일어나 곽씨를 부축하고 장 선생을 따라 허둥지둥 수화문 밖으로 나가서 후원의 너른 공터로 대피했다.

위봉낭은 한 손으로 다다의 머리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 아라의 정수리를 누른 채 번쩍이는 불꽃 사이로 장 선생과 곽씨가 수화문으로 나가는 걸 바라보다가 아라와 다다를 하나씩 들고 이 높은 담장의 유일한 출구인 후각문으로 달려갔다.

물통이니 물총이니 온갖 것들을 들고 불을 끄려고 미친 듯이 달려오는 호위 병사들을 보고 위봉낭은 다급하게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숨을 곳을 아직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때 짧은 고함이 들렸다.

“여기! 이쪽으로!”

장대의 목소리였다. 위봉낭은 크게 기뻐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담장과 거의 가까워졌을 때, 담장에서 콰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담장 아래쪽에 큰 구멍이 뚫렸다. 담장이 몇 번 흔들리더니 무너지면서 하늘을 뒤덮을 듯한 먼지가 흩날리고 수많은 잡음이 들리는 가운데, 위봉낭은 무너지는 담장을 넘어 옆의 골목으로 뚫고 들어갔다.

위봉낭은 단숨에 골목을 빠져나와서 또 모퉁이를 돌아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다다와 아라를 벽 쪽으로 뿌리쳤다.

옷을 입은 다다는 위봉낭에게 허리띠 채 붙잡혀서 어지러운 것만 빼면 다른 건 괜찮았는데, 발가벗은 아라는 추운 건 둘째치고 한쪽 팔을 잡힌 채 끌려온지라 피멍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탈구까지 되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욱신욱신 쑤셨지만, 생사가 걸린 관문이라 기절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소저, 옷이요! 소저, 우리 도망쳐 나왔어요!”

다다는 제 치마부터 풀어서 대충 아라의 허리에 둘러주고 제 웃옷을 벗었다.

“팔이…….”

아라가 가까스로 한마디 하는데 헐떡거리고 있던 위봉낭이 언짢아져서 입을 열었다.

“팔? 너 그거 무슨 뜻이냐? 팔 잡았다고 타박하는 거냐? 그럼 네가 말해봐. 어딜 잡아야 했지? 머리카락? 네가 사고를 얼마나 많이 쳤는지 모르냐? 도망쳐 나왔다고? 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칠야가 보살인 줄 알아? 무슨 일이든 널 감싸줄 수 있을 줄 알아? 이 일? 왜? 뭣 때문에? 네가 뭐길래?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

위봉낭은 말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화가 날 뿐만 아니라 매우 두려웠다. 오늘 일은 임무를 망쳤을 뿐만 아니라 칠야에게 큰 화를 부른 것이었다.

내가 황자를 죽였다고!

“말 좀 해 봐. 그동안 사고를 얼마나 쳤지? 칠야가 너한테 잘못한 거 있어? 내가 잘못한 거 있어? 대체 무슨 배포로 감히 살인까지 해? 대단하구나, 너?”

위봉낭은 생각할수록 두려워져서 철퍼덕 주저앉았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다는 솜치마를 아라에게 입히고 안 그래도 추운데 위봉낭의 말까지 들으니 한기가 파고들어서 아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울고 싶지만 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라는 멍하니 위봉낭을 바라봤다. 반 시진 동안 그녀는 죽었다가 살아나고 다시 죽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사람까지 죽였다. 제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지금 그녀는 추위와 통증에 둔감했고 생사 두 글자도 요원하게 느껴졌다.

“소저!”

다다가 아라에게 더 다가가서 위봉낭과 아라를 번갈아 봤다. 입을 비죽대면서도 울지는 못했다.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위봉낭도 다소 망연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칠야에겐 뭐라고 보고해야 하나. 칠야가 어떻게 처분할까. 일을 이렇게 망쳤는데, 칠야의 법도대로라면……. 난 죽었다.

“소저!”

두 사람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다다는 더 두려워져서 아라에게 더 바짝 붙으면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제 소저를 불렀다. 아라는 정신을 차리더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사고 친 사람이 감당해야지. 내가 죽였어. 죽이든 살든, 내가 감당해야지. 언니, 다다는 보내줘요. 다다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위봉낭이 불퉁스럽게 아라를 흘겨봤다.

“이게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 같고? 너도 감당하지 못하고 나도 못 해. 감당할 사람은…….”

칠야뿐이었다. 칠야가 감당할 수밖에 없고. 칠야가 크게 다칠 사고를 치고 말았다.

“내가 칠야께 빌어볼까요?”

아라가 고개를 들고 위봉낭을 바라봤다. 위봉낭의 입꼬리가 축 처지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맞아. 지금 정북후부에 주인은 칠야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네가 무슨 염치로 칠야께 빌어. 칠내내에게 빌어 봐.”

위봉낭이 벌떡 일어났다. 아라와 다다 모두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칠내내요?”

“칠야, 혼인하셨어. 얼른 가! 지금 칠야는…….”

위봉낭은 불길이 활활 타는 대황자부를 돌아봤다. 칠야는 황성사를 통솔한다. 아까 장대의 목소리를 들은 걸 보면 지금 칠야는 분명 대황자부의 불을 끄는 걸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저택엔 칠내내 혼자 계실 것이고. 그러니 마침 잘 되었다. 칠야가 저택에 없고 칠내내만 있으니 지금 가면 일부러 부탁하러 칠내내에게 간 것이 아니라 당연히 칠내내를 찾아갈 수밖에 없어서 간 것이다.

“어서 가자!”

결정을 내린 위봉낭은 휘파람을 불어 말을 부르고 아라와 다다를 말 위에 올리고 자기는 말을 끌고 잰걸음으로 달려 정북후부로 직행했다.

대황자부의 불빛에 경성이 환해지고 온 경성이 술렁였다.

대황자부와 그리 멀지 않은 궁중, 하빈 궁의 궁인은 저쪽에 환한 불길을 봤지만 침궁에 있는 황상과 하빈을 감히 깨울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 하빈이 황상과 잠든 후에는 경성이 함락되지 않은 이상 절대로 깨우지 말라고 엄명했었다.

지금은 불이 난 것이지 함락된 것이 아니다.

궁중 다른 쪽, 영 황후는 대전 입구에 서서 뒷짐을 진 채 저 멀리 보이는 불길을 바라봤다.

“정북후부에 다녀올까요?”

영 황후 뒤에 서 있던 소심이 나직이 물었다.

“그럴 것 없다.”

영 황후가 살며시 콧방귀를 뀌었다.

“이 불은 죽을 각오를 하고 질렀거나, 아니면 살려달라는 신호다. 다만 그 신호를 받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지.”

보록궁 안, 복안 장공주는 회랑에 서서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가서 두봉을 휘두르며 침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주 귀비의 뼈도 다 삭았을 텐데, 울고불고 죽겠다고 사달을 내는 꼼수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대황자부 밖, 영원은 가장 먼저 달려와 놓고 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순시 병사들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걸 보고 또 경부 관아 형 부윤이 화급하게 달려가는 것까지 보고서야 어둠에서 나왔다. 묵 승상보다 조금 먼저 현장에 도착하자, 뒤이어 여 승상과 초 승상도 도착했다.

제일 늦게 도착한 태자가 가장 소란스럽게 나타났다. 아직 저쪽 거리 끝에 있을 때부터 호위, 내시들이 줄줄이 “태자 전하의 분부다! 대왕야부터 구해라!” 하고 외치며 다가왔다.

말을 타고 나타난 태자는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다짜고짜 묻기부터 했다.

“대왕야는요?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아룁니다, 태자 전하. 지금 불을 끄는 중이라 아직은 모릅니다.”

묵 승상이 허리를 숙이며 고했다.

“고얀 것들! 불을 끌 겨를이 어디 있느냐! 사람부터 구해라! 들어가서 대왕야부터 구하라고 해라! 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똑똑히 확인하라 해라!”

태자가 다급하게 분부하는 말에 여 승상이 나가서 고했다.

“아룁니다, 태자 전하. 불길이 이미 퍼져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도 구할 수 없고요. 왕부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다 저쪽에 있습니다.”

“형님은? 형님도…… 저쪽에 있습니까?”

태자가 숨을 죽이며 물었다. 여 승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태자는 무심결에 안도했다.

“어서 불을 꺼라. 궁과 가까운 곳인데 황상께서 놀라시면 큰일 난다! 누가 벽을 부순 것이냐? 불길이 퍼지면 어쩌려고! 황명으로 세운 벽인데, 누가 부순 것이냐!”

묵 승상과 여 승상, 그리고 초 승상은 활활 타는 불길을 바라보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벽을 부수지 않고 어찌 불을 끄나. 벽으로 가둬놓고 다 태워 죽이라고?

영원은 한 걸음 물러섰다. 태자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뒤로 물러나서는 기뻐했다가 화를 냈다가 하는 태자를 멀리서 바라봤다. 참으로 의문이었다. 저토록 어리석으면서 어떻게 자기가 천하를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온몸과 얼굴이 그을음에 얼룩덜룩해진 순시군 통령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세 승상과 형 부윤을 향해 장읍했다.

“나리, 대왕야를 찾지 못했습니다. 대왕야는 아마도…….”

순시군 통령은 당황하고 두려운 얼굴로 거센 불길을 가리켰다. 대황자의 시신이 있는 그 집채는 대황자부의 중심이자 발화점이었다. 큰불이 활활 타고 있는데 대황자를 어찌 찾겠나.

“고얀 것들! 들어가서 찾아라! 형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래 너희들 다 살 생각하지 말아라!”

태자가 펄쩍펄쩍 뛰었다. 순시군 통령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제야 태자임을 알아보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자마자 초 승상이 그를 걷어찼다.

“태자 전하의 말씀을 못 들었느냐? 어서 가서 불을 끄지 않고 무얼 하느냐! 대왕야는 분명 아직 무사하실 것이다! 어서 가라! 어서 가서 불을 꺼라!”

통령은 기어 일어나서 뛰어갔다. 태자는 초 승상의 말에 안색이 변해댔다. 너무 급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정말로 첫째가 아직 살아 있는데 불을 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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