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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457화 (457/463)

457화: 다급해진 토끼

이동과 영원이 정북후부로 돌아가서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에 추미가 옥묵의 이야기를 보고하러 찾아왔다.

추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원이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고사현은 술을 마시고 죽었다. 고유덕이 돌보지 못했고. 그는 고사현의 생부고 의도한 바가 아니라서 그대로 끝낼 일이다. 이 일에 옥묵인지 금묵인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영원의 싸늘한 얼굴에 추미는 겁이 나서 움츠리며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살짝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칠야는 널 위해서 훈계하시는 거야. 고사현 일은 칠야의 말씀이 옳아. 술을 마시고 죽었어. 누구도 상관없는 일이야. 단단히 명심해.”

“예, 예! 알았습니다. 알아들었습니다! 전 그냥 낭자와 칠야…… 아니, 부인과 칠야께 말씀드린 거예요. 저도 분별 있어요. 낭자, 아니 부인, 안심하세요.”

추미가 얼른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이동은 웃음을 꾹 참았다.

영원은 싫다는 듯 추미를 흘겨봤다. 이 멍청한 것을 문도 그치는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굳이 곁에 두고 부리라고 넘겨주다니! 게다가 고가 아이까지 보내? 정북후부가 어중이떠중이를 거두는 곳이라도 된단 말인가!

영원은 바쁜 일이 끝나면 문도를 찾아가 제대로 따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추미는 영원의 훈계를 듣고 즐겁게 인사하고 물러갔고, 이동이 수련을 불러 보록궁에 간다고 마차를 준비시키는데 영원이 그녀를 물렸다.

“보록궁엔 내일 가요. 어제 황금아를 건졌는데 우리가 오늘 이른 아침에 돌아왔습니다. 거기에 당신이 곧바로 장공주를 뵈러 가는 건 너무 급해요.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장공주가 황금아 일을 어떻게 처리하든 대국에 영향 주지 않을 겁니다. 대국에만 영향이 없으면 다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닌 일로 서두를 것 없어요. 내일 오후에 가요.”

“나는 대국을 위해서 가는 게 아니에요. 장공주가 걱정되어서 가는 거예요. 어찌 됐든 장공주의 핏줄이에요. 이런 일이 생겼는데, 장공주도 마음 아플 거예요.”

이동이 나긋하게 하는 말에 영원이 코웃음 쳤다.

“마음 아파한다고요? 말했듯이 장공주는 고양이가 아니라 스라소니입니다. 게다가 내 보기엔 주 귀비와 주 귀비의 두 아들을 핏줄로 여기지도 않아요. 장공주 눈에 핏줄은 아마 황상 하나뿐일 겁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마음 아파하진 않고 화는 내겠지만요.”

영원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문의 불행이자 임씨 자손이 변변찮으니까요. 다만 황금아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다시 꺼낸 이유가 무엇일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황상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영원이 턱을 문지르며 하는 말에 이동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황상의 옥체가 갈수록 안 좋아진다고 했었는데, 설마?”

“음! 나가봐야겠어요.”

영원이 화항 아래로 훌쩍 내려갔다.

“황성사에 갔다가 묵 승상부에 들러야겠습니다. 그리고 여 승상부에도요. 다른 곳에 갈지도 몰라요. 저녁은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요.”

이동은 두봉을 꺼내 오라고 수련에게 분부하고 자기도 화항에서 내려가서 배웅하러 나갔다. 영원은 이동이 두봉을 걸쳐 줄 수 있도록 무릎을 구부리고 고개 숙이고 있다가 끈을 매주자 일어섰다. 보란 듯이 두봉을 멋지게 휘두르며 걸음을 내딛다가 고개를 돌리고 한마디 더 당부했다.

“돌아올 때까지 자지 말고 기다려요.”

이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영원은 그제야 마음 놓고 문을 나가 곧장 사라졌다.

다음 날 이동은 오후가 되기 전에 예전과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서서 보록궁으로 향했다.

뜨락 안으로 들어갔더니 복안 장공주가 서쪽 곁채 앞에 서서 고개를 기울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왔어?”

“어떠신지 궁금해서요.”

이동은 걸음을 서둘렀고 복안 장공주는 그 말에 콧방귀 뀌고는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이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자 복안 장공주는 화항에 앉아서 다시 위아래로 이동을 살폈다.

“예전이랑…… 달라진 것도 없구나.”

“달라질 게 뭐가 있어요.”

이동이 실소하며 되물었다. 복안 장공주의 입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역시 달라졌어. 그냥 물은 건데 웃긴 뭘 웃어? 전엔 이렇게 경망스럽지 않았어.”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웃는 건데 경망스럽긴요. 기분 안 좋으실 줄 알았어요. 역시나.”

“내 기분이 왜? 기분 좋은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어! 오늘 날씨처럼, 봐봐!”

복안 장공주가 창문을 열어젖히며 음침한 하늘을 가리켰다. 이동은 쳐다보지 않았다. 방금 밖에서 들어왔는데, 날씨가 어떤지 봐야만 아나.

이동이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찻상과 다구를 끌고 와 차 그을릴 준비를 하자 장공주는 조금 분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영원이 황금아를 장공주께 보냈다길래 바로 오려고 했는데…….”

이동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이미 아시던 일이었을 것 같아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죠. 나중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괜찮으세요?”

이동은 걱정되는 듯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복안 장공주는 별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로 대답했다.

“물론!”

물론 괜찮다는 건지, 물론 괜찮지 않다는 건지.

이동은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됐어요. 눈이 많이 오길래 어제 돌아오면서 일부러 대상국사에 들렀었어요. 이번 눈이 오자마자 청공 큰스님이 성 밖 곳곳을 둘러보러 바로 나가셨대요. 이제 연세도 많으신데.”

“안 그래도 찾아왔어. 큰일은 이미 끝났으니 주지 직책을 내려놓고 천하를 주유하러 떠나겠다고.”

이동이 청공 큰스님 이야기를 꺼내자 복안 장공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주전자를 들고 있던 이동의 손이 움찔했다. 청공 큰스님, 대체 어떤 사람일까.

장공주는 한참 만에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붙잡을 수 없었어. 하지만 눈앞에 벌어진 큰일이 다 마무리된 다음에 떠나라고 했더니 승낙했어. 1년 더 경성에 머무르겠다고도 약속했고.”

이동은 멈칫하고 복안 장공주를 빤히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의 어두운 얼굴이 서글픔으로 바뀌었다.

“내 가까운 사람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야.”

“오황자도 장공주와 가까운 사람이에요. 저도요. 그리고 영원도요.”

이동의 느리고 낮은 목소리에 복안 장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차 줘.”

위봉낭은 회랑 대들보에 웅크리고 앉아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창에 붙은 얇은 초사 너머에서 벌어지는 선정적인 장면을 바라봤다. 아니, 선정적인 장면이 아니라 고문이라고 해야 할 듯했다.

요즘 최신 오라버니, 그리고 복백이 큰일로 떠들썩하게 바빠서, 칠야가 그녀를 하필 이곳으로 보냈다. 덕분에 매일 이 변태 같은 짓을 보고 있어야 했다.

위봉낭은 한숨을 내쉬려다가 다시 삼켰다. 칠야를 탓할 수 없었다. 누가 오지랖을 부리라고 했나. 누가 아라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라고 했나. 다 잠깐 마음이 약해진…….

도적이 마음이 약해져?

위봉낭은 제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인데, 칠야를 따른 후로…… 아니 경성에 들어온 후로 마음이 약해지는 이런 망할 병이 생기다니! 번화한 곳은 제일 해로운 곳이라고 하더니, 역시나!

도적이 마음이 약해지다니. 그것 봐라. 스스로 무덤을 파서 매일 대들보에 웅크리고 앉아 있잖은가.

위봉낭은 또 한숨이 나올 것 같은데 다시 참았다. 이런 날이 언제쯤 끝날까.

갑자기 눈앞에 피가 보이자 위봉낭은 순간 기운이 나서 벌떡 일어서다가 머리를 찧었다. 하지만 아픈 것도 몰랐다. 너무 흥분됐다. 아라, 드디어 좀 기운을 내는구나!

위봉낭은 대들보에서 훌쩍 뛰어내려 단걸음에 입구로 달려가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날로 대황자의 목을 내리치자, 꽥꽥 고함치던 대황자의 비명이 뚝 그쳤고, 대황자는 비틀거리다가 스르륵 바닥으로 쓰러졌다.

“언니!”

아라가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히고 고함쳤다. 위봉낭이 나타난 건 보살이 현신한 것과 다름없었다. 흥분해서 ‘언니!’ 하고 부른 아라는 그 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선 채 광풍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언니!”

위봉낭이 나타나자, 겁에 질려 굳어 있던 다다도 그제야 움직였다.

“언니, 우리 소저를 살려주세요. 언니, 나를 좀 살려주세요.”

“입 다물어!”

위봉낭은 단숨에 달려와 제 다리를 붙들고 우는 다다의 입을 찰싹 때렸다. 다다는 얼른 입을 꼭꼭 다물었다.

드디어 방 안이 조용해지자 위봉낭은 허리를 숙이고 대황자를 살폈다. 물어뜯긴 하반신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씹는 힘 좀 봐라.”

아라는 망연한 얼굴로 위봉낭을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씹는 힘이라니?

“받아라.”

위봉낭은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를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 두 손가락으로 칼끝을 잡고 아라에게 건넸다.

“이 지경까지 저질렀는데, 차라리 시원하게 해.”

아라는 입술을 꾹 깨물고 비수를 받아서 결연한 얼굴로 위봉낭을 바라봤다.

“맞아요, 어차피 죽을 거!”

“응?”

위봉낭이 어딘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미처 반응하기도 전, 아라가 비수를 꽉 움켜쥐고 독한 얼굴로 모질게 온몸을 다해 대황자 위로 쓰러졌다. 대황자의 심장을 겨눈 비수가 그대로 쿡 박혔다.

위봉낭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건을 자르라고 한 거지, 죽이라고 한 게 아니야!

아라는 우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울면서 찌르고 뽑고, 뽑고 찌르고…….

다다는 대황자의 온몸에 구멍을 뚫을 듯이 비수를 내리찍는 자기네 소저를 넋이 완전히 나가서 바라봤다. 위봉낭은 이마를 치며 앞으로 다가갔다. 아라가 발가벗고 있어서 잡을 곳이 없자 머리채를 잡고 대황자에게서 떼어냈다.

“내가 언제……. 됐다, 됐어. 널 만난 게 내 평생의 액운인가 보다!”

위봉낭은 아라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서 단번에 대황자의 물건을 잘라버렸다. 고개를 갸웃하고 봤더니 물건에 잇자국이 남아있어서 다시 비수를 들어 좌우로 슥슥 긋고 뒤로 물러나서 다시 들여다봤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불을 질러야겠는데…….”

“누가 와요!”

위봉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다가 바들거리며 고함쳤다.

“언니, 다다를 데리고 가요.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감당해요. 나는…….”

아라가 덜덜 떨면서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봉낭이 덥석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다다까지 들어 올려서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온 시녀는 온 방에 가득한 핏자국에 대황자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사람이 죽었다! 살인이다! 누구 없어요?”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대황자부는 서서히 눈을 뜨는 거대한 짐승처럼 곽씨의 정원에서부터 후원 장 선생의 작은 거처까지 줄줄이 곳곳에 불이 켜졌다. 곧 대황자부 전체에 불빛이 환해졌다. 대황자 거처와 가장 가까운 곽씨가 허둥거리며 제일 먼저 달려와서 문틀을 부여잡고 온 바닥에 가득한 핏자국과 피로 물든 대황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후, 곽씨의 가슴 속에서 누르지 못한 웃음이 솟구쳤다. 곽씨는 문틀을 붙잡고 웅크리고 앉아 깔깔 웃었다.

죽었다! 이렇게 처참하게 죽다니! 참으로 잘 되었다!

“왕비, 괜찮으세요? 왕비, 이러지 마세요. 왕비, 이러시면 소인 놀라요.”

곽씨 곁엔 도요뿐이었고, 도요는 주저앉아 웃는 곽씨를 따라 쭈그리고 앉아서 당황하고 놀란 얼굴로 왕비를 일으키려 했다.

광기 어린 곽씨의 얼굴에 독기가 떠올랐다.

“난 괜찮아. 불을 질러! 태워라! 다 태워버려! 저 인간을 태워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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