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다급해진 토끼
“네가 낳은 네 새끼다!”
진저리치다가 불현듯 깨어난 고 대야가 버럭 화를 내며 옥묵 뒤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옥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각문으로 들어가서 문을 쿵 닫았다.
“이웃 사람들, 말 좀 들어 보시오! 아까 저것은 도망 노비, 옥묵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가 아들이고요. 말 좀 해 보십시오. 세상에 이리 모진 어미가 있습니까? 인간이 어찌 이런 짓을 합니까! 제 속으로 낳은 아이입니다. 제 아들이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버려둔 겁니다. 이러고도 인간입니까?”
옥묵이 허둥지둥 달아나는 모습에 고 대야는 뿌듯해져서 아이도 내팽개치고 계단 위에 올라서서 구경꾼들을 향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고함쳤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고함쳤다.
“강가의 아이 아니오? 고 대야, 이 아이가 당신 생질이지요? 그럼 아까 그 여인이 누이요?”
“아닙니다. 이 아이는 강가 대랑, 아까 그 천것이 낳았습니다. 우리 집 도망 노비입니다!”
고 대야가 얼른 설명했다.
“고가 도망 노비가 강가 대랑을 낳다니요?”
아까 말을 꺼낸 사람이 즉시 되물었다. 인파에서 우하하 웃는 소리가 터지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게. 고가 도망 노비가 강가 대랑을 낳았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군.”
“그 댁 도망 노비요, 아니면 강가 도망 노비요? 괜히 한탕 하려는 수작 아니고? 고가 때문에 강가가 망했다고 하던데?”
“고가 대야, 이럴 시간 있으면 생질이나 신경 쓰지 그러시오? 그쪽이야말로 피붙이 아니오?”
“이 강가 대랑은 바로 아까 그 천것이 낳았소. 세상이 이리 양심 없는 어미가 있소? 게다가 이 아이는…….”
고 대야는 화제를 다시 끌고 오려고 노력했지만, 갈수록 커지는 소리에 그의 목소리는 금세 묻히고 말았다.
구경꾼들은 도망 노비에서 강가 이야기를, 강가에서 곡씨 이야기를, 곡씨 이야기에서 또 이가, 이가에서 며칠 전에 있었던 혼례를 거쳐 영가 이야기까지 하다가…… 아예 천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강대를 고 대야 품에 안겨주었다.
“아이나 데리고 가요. 고아까지 끌고 나와 괴롭히다니. 악덕하기 짝이 없군.”
고 대야는 강대를 안은 채 이리저리 밀렸다. 억울했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단숨에 약방으로 돌아간 옥묵은 약 광주리를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가 문을 쾅 닫고 문에 기댄 채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한창 바쁘게 일하던 어멈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광주리와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우두머리 어멈이 한숨을 내쉬며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니네. 우리 중에 이런 어려운 일 없는 사람 있는가.”
“휴, 그러니까요.”
어멈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옥묵 일을 전부는 모르고 죽기 직전까지 시달리다가 어렵게 도망쳐 나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우두머리 어멈은 방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까 옥묵이 내팽개친 약을 들고 후각문으로 나가서 약방에 가져다주었다.
뒤통수를 문에 댄 채 얼마나 서 있었을까. 옥묵은 무감각해진 다리가 저려 오고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비틀비틀 걸어가 침상에 철퍼덕 엎어졌다.
다시는 고가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사람답게 살게 되었는데 다시 끌고 가려고 하다니. 다시 그 지옥에…….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인간이 아닌 꼴로 시달릴 순 없었다.
이틀 후, 황금아의 시신이 강 하류에 떠올랐다. 온몸을 물고기에게 뜯겨서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고 뼈가 다 드러나 있었는데 얼굴은 깔끔했다.
태자는 황금아의 시신을 건졌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확인하고는 마음 아파하는 가운데 내심 한숨을 돌렸다.
황금아가 강에 빠진 날, 태자는 백 명 가까이 사람을 보내 강을 따라 시신을 찾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어서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제 죽었다니 되었다. 잘 죽었다.
영원이 소식을 들었을 때 이동도 곁에 있다가 대영의 보고가 끝나자 경성으로 돌아갈 마차를 준비시켰다. 대영은 영원을 슬쩍 바라보고 영원이 어두운 얼굴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고는 공손히 물러나서 마차를 준비했다.
어둠이 내릴락 말락 할 무렵, 옥묵은 옷을 새로 차려입고 거울을 바라보며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새 손수건을 챙기고 일어서서 탁자에 놓인 염낭을 조심스럽게 품에 넣고 문을 열고 고개를 숙인 채 약방 각문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옥묵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눈에 띄지 않는 각문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서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두 거리 정도 걸었을 때, 어둠이 완전히 내린 거리를 불빛이 환하게 밝혔다. 타지 사람을 가장 빠져들게 하는 경성의 밤이 시작되었다.
거리 하나를 더 지나면 정북후부가 나온다. 옥묵은 정북후부 정문에서 서쪽으로 걸어가 각문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르신, 혹시 추미 언니가 저택에 있나요?”
옥묵이 웃음 지으며 묻는 말에 문지기 어멈은 위아래로 그녀를 살폈다.
“누구신지?”
“추미 언니 친척이에요. 급한 일이 있어서 왔어요. 혹시 있으면 수고스럽지만 기별 좀 넣어주세요.”
옥묵은 웃음 지으며 동전을 한 움큼 건넸다. 어멈은 얼른 되돌려주었다.
“낭자, 이럴 것 없어요. 우리 저택에서는 이런 것 안 받아요. 이름이 뭔가요?”
“약방 친척이라고 말씀해주시면 돼요. 그렇게 말하면 알 거예요.”
옥묵은 자기 이름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멈은 잠시 더 옥묵을 훑어볼 뿐 더 캐묻지는 않고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추미가 금세 어멈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옥묵은 추미를 이끌고 각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품에서 염낭을 꺼내 추미에게 건넸다.
“추미 언니, 고마웠어요. 그리고 소유 언니, 하섬도요. 덕분에 잠시나마 사람처럼 살았어요. 언니와 소유 언니, 하섬의 큰 은혜, 이번 생엔 못 갚을 것 같으니 내세에서 꼭 갚을게요.”
추미는 옥묵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고가 그 짐승 때문이야? 널 어쩌지 못해. 신경 쓰지 마.”
“언니, 이 염낭에 있는 돈이 내가 모은 전부예요. 많진 않아요. 언니가 대신 가지고 있어 줘요. 만약…… 언니가 지전을 좀 태워줘요. 저승에서라도 내가 사람을 해치지 않는 이상 남도 날 해치지 못하는 부자로 살고 싶어요.”
옥묵은 추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추미의 안색이 변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너 지금 후사를 부탁하는 거야? 옥묵, 우리가 예전엔 사이가 안 좋았지만, 난 진심으로 널 돕고 싶어.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알아요. 언니가 진심이라는 거, 나도 알아요. 별일 아니에요. 언니가 이렇게 잘해준 거, 내 평생…… 사실, 사실……. 나 이만 갈게요. 언니, 고마워요. 부탁해요, 언니.”
옥묵은 염낭을 추미 손에 찔러주고는 뒷걸음질 치다가 별안간 무릎을 꿇고 쿵쿵 고개를 조아리고는 일어서서 다급하지만 단호하게 달려 나갔다.
“야! 너 대체…….”
추미는 염낭을 붙들고 무심결에 뒤쫓아가다가 발을 동동 구르고는 후각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빠르게 들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옥묵, 쟤 분명 후사를 부탁한 거야. 무얼 하려고? 죽으려고? 아이고! 아까 왜 안 잡았을까. 정신이 어떻게 되었었지.
추미는 후회가 되어서 이마를 탁탁 내리쳤다. 멀쩡히 왜 죽으려고 하는 걸까. 고가 놈 때문에? 고가 놈이 무슨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고가 놈이 뭘 어쩔 수 있어서?
무슨 일일까? 나는 멍청해서 모르겠는데 낭자가 저택에 안 계셔. 맞다! 문 이야!
추미는 휙 돌아서서 각문으로 달려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마방(馬房)으로 달려갔다. 이야는 집에 계신걸. 이야를 만나려면 마차를 타고 가야 해!
옥묵은 정북후부에서 나가서 향수항으로 곧장 달려가서 사창이 옹기종기 모여 영업하는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고 대야가 자주 오는 곳이었다.
“고 대야를 만나러 왔는데, 어느 집에 있는지 아시나요?”
옥묵은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녹색 두건을 쓴 심부름꾼에게 동전을 찔러주며 물었다. 심부름꾼은 동전을 가늠하면서 옥묵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소도홍네 있소. 맞은편 세 번째 집이요.”
옥묵은 심부름꾼이 알려주는 대로 소도홍네로 달려가서 대뜸 문을 열었다. 소도홍네는 한 칸짜리 집채였고, 문을 열자마자 얼룩덜룩한 큰 침상이 보였다. 앞에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 침상 위에는 두 사람이 뒹굴고 있었다.
“누구냐?”
고 대야는 막 들어와서 소도홍을 침상에 눕힌 참이고 아직 주둥이를 들이대지도 못한 때였다.
“저예요.”
옥묵은 고 대야의 팅팅 부은 얼굴부터 꾀죄죄한 옷깃까지 빤히 바라봤다. 고 대야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옥묵을 바라봤다.
“너였구나. 네가 웬일이냐? 네가…….”
“대야, 제가 잘못했어요. 사죄하러 왔어요.”
옥묵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덩달아 일어나 앉은 소도홍은 무심결에 목을 움츠리고 옥묵과 고 대야를 번갈아 봤다. 이게 사죄하러 온 사람이야? 시비 걸러 온 사람이지?
고 대야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서 두 눈이 다 커졌다.
“음? 하! 아아! 눈치는 있구나! 잘못한 걸 알았다니, 받아주마. 가자. 이 나리와 집에 돌아가자!”
고 대야는 은자로 휘감은 사람이라도 보듯이 옥묵을 바라봤다. 소도홍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으랴.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옥묵 앞으로 다가갔다.
옥묵은 고 대야의 눈빛과 다가오는 모습을 빤히 마주하며 두 다리로 굳건히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적을 맞이하는 전사 같은 모습이었다.
소도홍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옥묵을 바라보며 넋이 빠져 있다가 일어서서 우물쭈물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옥묵이 돌아서서 고 대야를 앞세우고 뒤따라 나가버렸다. 소도홍은 문 앞까지 쫓아가서 문틀을 붙잡고 옥묵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골목을 나간 뒤, 옥묵이 고 대야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돈을 좀 벌었어요. 내일 약방에 가서 받아 올게요.”
“돈도 벌었다고? 얼마나?”
고 대야는 흥분해서 숨이 다 거칠어졌다. 돈 소리 듣는 게 제일 무서웠다. 많이 들으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많지도 않아요. 은자 몇 냥이에요. 약방에 맡겨 두었어요. 제가 가진 건 다 털어서 조금 전에 손가네 각점(脚店: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가는 작은 객잔)에 자리를 하나 마련했어요. 나리께 사죄하는 뜻으로요.”
옥묵은 고 대야를 빤히 바라봤다. 조마조마해서 가슴이 뛰었다.
“자리는 무슨……. 손가네 각점은 돼지 꼬리찜이 일품이다. 돼지머리도 괜찮고. 분별은 있구나.”
고 대야는 너무 궁핍해서 제대로 고기를 못 먹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손가네 각점이라는 말에 곧바로 돼지 꼬리찜과 열세 가지 돼지머리 요리를 떠올리고 입에 침이 고여서 옥묵의 등을 떠밀며 각점으로 직행했다.
옥묵은 손가네 각점 제일 구석 방을 잡았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일꾼이 재빠르게 꼬리찜, 돼지머리 고기, 양다리 구이, 양고기 청탕 등 한 상 가득 차리고 오래된 여아홍도 한 주전자 내놓았다.
고 대야는 털썩 의자에 앉자마자 젓가락을 들고 양구이를 입에 쑤셔 넣고 술을 따르라는 듯이 잔을 들어 올렸다.
옥묵은 고분고분 주전자를 들고 고 대야 곁에 서서 술을 따르고 또 따랐다.
고 대야는 먹고 마시고, 온몸이 짜릿해졌다. 옥묵은 주전자 하나를 다 따르고 큰 주전자를 들고 옆으로 가서 신이 나서 먹어대는 고 대야를 힐끔 돌아보고 허리띠에서 봉지를 꺼내 봉지에 든 가루를 전부 주전자에 넣고 돌아와 작은 주전자에 쪼르륵 쏟아부었다. 큰 주전자 반 정도 따른 후에 큰 주전자를 내려놓고 작은 주전자를 들어 살며시 흔들면서 계속해서 고 대야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