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53화 (453/463)

453화: 매우 공교로운 일

한잠 자고 일어난 이동은 옆을 더듬다가 아무도 없자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아서 조금 넋이 나간 듯 텅 빈 자리를 바라봤다.

밤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영원이 나갔다. 잠결이었지만, 똑똑히 기억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이동은 걱정하는 가운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불과 며칠 사이에 벌써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옆에 그가 있는 게 더 당연하게 여겨지다니.

그때 수련이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부인, 깨셨어요? 칠야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성에 가신다고 전하라셨어요.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큰일이긴 하지만 별것 아니고 식은 죽 먹기라고요.”

수련은 영원의 말을 하나도 빼지 않고 전했다.

“새벽에 간 거야?”

이동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말에 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왔는데?”

이동이 다시 묻자 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기별하러 온 사람은 대영이었어요. 새벽에 장원으로 찾아온 사람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칠야 곁에 있는 사람은 저흰 아직 잘 모르니까요.”

이동은 소세하고 나와서 대충 아침을 먹고 두봉을 걸치고 회랑에 서서 맑아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영원이 밤새 경성으로 돌아갈 만한 큰일이자 작은 일이 무엇일지 떠오르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어 부엌에서 점심을 올릴 때까지 영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동은 탕을 조금 마시고 밥 반 그릇을 비운 다음 책 한 권을 골라 남쪽 창 아래 화항에 앉아서 창문을 빼꼼 열고 멍하니 수화문 쪽을 바라봤다.

영원은 해가 완전히 진 후에야 장원으로 돌아왔다.

이동은 화항에 기대서 책을 들고 읽는 듯 마는 듯 딴생각에 잠겨 있다가 영원이 돌아왔다는 말에 책을 내던지고 다급하게 맞이하러 나갔다. 막 휘장을 들어 올리는데 휘장을 젖히려고 팔을 뻗는 영원을 마주쳤다.

영원은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었는데 눈빛은 희한할 정도로 빛났다. 이동이 나오는 걸 보고 그녀를 안아 올려서 빙그르르 돌았다.

“부인, 다녀왔어요!”

이동은 빙글빙글 도느라 머리가 어질거렸다.

“내려줘요!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신난 거예요? 밥은 먹었어요? 옷이 젖었어요.”

“점심도 못 먹었지! 어서 상 차리라고 해요.”

영원은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두봉을 내던지고는 허리띠를 풀고 장삼을 벗고 신발을 걷어차서 벗었다.

“좀 씻고 올게요. 온몸이 땀에 젖어서. 좋은 일이 있어요. 씻고 와서 이야기할게요.”

이동은 뛸 듯이 좋아하는 영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일로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걸까. 태자?

녹매와 수련은 이동이 분부할 필요도 없이 서둘러 상 차리라고 분부하고 옷을 꺼내왔다.

소유가 어멈들을 거느리고 큰 찬합을 들고 들어왔을 때 영원은 재빠르게 씻고 머리를 늘어뜨린 채 정방에서 나왔다.

“점심, 저녁에 물리신 찬을 보니 거의 안 드셨길래 부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몇 가지 만들었어요.”

소유는 찬합을 열어서 찬 몇 가지를 우선 이동 앞에 늘어놓았다.

“왜 안 먹었지? 입맛이 없어서? 어디 아픈가? 기운 없어서?”

영원이 몸을 내밀며 이동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멀쩡해요. 종일 방에 있는데 많이 먹히겠어요? 원래 많이 안 먹어요.”

이동은 탕을 담아서 영원에게 건넸다.

“한기 가시게 일단 탕 좀 마셔요.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좋은 일이지! 잘됐군, 그럼 나랑 같이 먹읍시다. 혼자 먹으면 재미없어.”

이동은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조금 담았다.

소유가 어멈들을 거느리고 나가자 영원은 눈썹까지 미소를 걸고서 그릇을 내려놓고 흥분해서 말했다.

“어젯밤에 최신이 직접 찾아왔어요.”

영원은 고 대야가 옥묵을 만나서 문제를 일으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몽한약을 사러 간 일을 이야기했다.

“그 골목엔 거세했는데 입궁하지 못했거나, 죄를 짓고 궁에서 쫓겨난 내시들이 모여 살았는데, 거기에서 몽한약을 판다는 말을 듣고 최신이 신경이 쓰여서 황성사 이름을 걸고 가 봤답니다. 그랬더니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황성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겁하고 창으로 뛰어내렸다는군요. 달아나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달아나는 바람에…….”

영원은 기쁜 듯이 싱긋 웃었다.

“최신에게 산 채로 붙잡혔지요. 끌고 가서 심문했는데 채찍 두 번에 모든 걸 털어놓았답니다. 태자를 모시는 황금아라는 자의 명령으로 단장초를 샀었다고 하더군요. 바로 주 귀비가 죽기 이틀 전에요. 나중에 주 귀비가 독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생각할수록 두려워졌는데, 내시라서 경성을 떠날 수가 없었답니다.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그 골목으로 들어간 거였어요. 일단 거기엔 모두 내시가 살아서 눈에 띄지 않고 또 하나는 소식에 밝은 곳이니까.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지. 하필 고사현 그 사고뭉치 때문에 덩달아 끌려 나오게 되었지 뭡니까.”

이동은 멍해졌다. 정말이지, 하늘이 무심한 것 같아도 죄인은 결국 벌 맞게 되는구나.

“태자 그 무지렁이, 오만방자하고 간이 팅팅 부어도 유분수지. 그 내시를 살려뒀을 뿐만 아니라 황금아를 아직 곁에 두고 있는 겁니다!”

태자 이야기가 나오자 영원은 철저히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황금아에겐 한창 뜨거운 사이인 여인이 있는데 마침 그 여인이 최신에게 약점 잡힌 것이 있었답니다. 성으로 돌아가서 그 여인을 통해 황금아를 금수교로 불러냈지요. 싸움이 일어난 척 꾸미고 황금아를 금수교로 빠뜨렸어요. 한겨울에 물에 빠지면 죽는 일은 다반사니, 태자는 분명 황금아가 죽었다고 여길 겁니다.”

“황금아가 불었나요?”

“불었지. 자술서를 받았습니다. 사람과 자술서를 함께 보록궁에 들여보내고 난 돌아온 겁니다.”

영원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장공주가 받았어요?”

이동은 뜻밖이라는 듯 묻는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다만, 지금 장공주가 펄펄 뛰고 있을 것이다. 영원이 이렇게 큰 골칫거리를 생으로 그녀에게 안겼으니.

영원은 싱글싱글 웃었다.

“받아야지, 뭘 어쩔 도리가 있겠어요. 임가의 추문입니다. 난 장공주의 체면을 고려해준 건데요?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감사해야죠.”

“장공주가 고맙다고 했어요?”

이동은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 영원은 조금 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그 스라소니의 안색이 안 좋길래 얼른 나왔습니다. 괜히 불똥 튀면 어째요.”

“내일 돌아가요. 보록궁에 가 봐야겠어요.”

이동은 복안 장공주를 떠올렸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우린 막 혼인했다고요! 장원에 오자마자 보록궁엔 왜요? 그럴 필요 없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화풀이할 곳은 많아요. 조정 대신이 얼마나 많은데, 화풀이할 곳 없을까 봐요.”

영원의 모습을 보아하니 장공주가 화가 난 일을 아주 즐기는 듯했다. 이동은 들릴 듯 말 듯 콧방귀를 뀌며 그를 흘겨봤다.

돌아가지 않아도 그만이긴 했다. 장공주는 예전과 달라졌다. 전에는 화를 내고는 그냥 넘겼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화를 내고 넘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장공주가 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약을 손에 넣지 못한 고 대야는 그저 약방 맞은편에 서서 눈만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당하게 약방을 드나드는 옥묵을 이틀 동안 지켜보다가 아이들이 토닥거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별안간 옥묵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래, 강가 사당에서 키운다고 들은 것 같은데?

고 대야는 흥분해서 지벅지벅 강가 사당으로 달려갔다. 아이를 데리고 가도 지금처럼 나오는지 두고 보자!

수녕백부가 뿌리째 사라진 후로 원래 위엄 넘치던 강가 사당도 한순간에 매우 초라해졌다. 수녕백 일파가 매우 궁상스럽긴 해도 어쨌든 존귀한 존재였지만, 황상으로부터 얻은 무한한 영광이 사라진 후 강가 사당도 덩달아 빛을 잃었다.

사당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아이들이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고함치고 떠들면서 한창 신나게 놀고 있었다.

고 대야는 아이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당 안엔 뛰어노는 아이들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고 대야는 쭉 안으로 들어가다가 사당 맨 뒤쪽 낮은 집채 앞에서 서로 밧줄로 허리를 묶은 꾀죄죄한 두 아이를 발견했다.

사실 묶어둘 필요도 없어 보였다. 두 아이 중 하나는 멍한 눈으로 손을 빨고 있었고 하나는 잠들었는지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고 대야는 눈살을 찌푸리고 싫은 듯이 또 연민이 느껴지는 듯이 두 아이를 바라봤다. 이 둘이 강환장의 아들임이 틀림없으리라. 하나는 옥묵이 낳은 것이고, 또 하나는 누이가 낳은 아들.

누이를 떠올린 고 대야는 조금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누이? 너무 오랜만에 떠올리는 단어였다. 지금 어떻게 됐지? 고 대야는 열심히 생각해 봐도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죽진 않고 살아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고 대야는 힘껏 도리질하며 누이라는 두 글자를 털어내고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두 아이를 유심히 살폈다. 두 아이가 비슷해 보여서 옥묵의 아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네가 형이냐, 아니면 저 아이가 형이냐?”

고 대야는 손가락을 쪽쪽 빠는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고 다시 물어도 여전히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고 대야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둘 다 멍청이로군!

“네가 형이냐, 아니면 저 아이가 형이냐? 대답하지 않으면 때릴 것이다!”

고 대야는 인상을 쓰며 위협했고, 손을 빨던 아이는 때린다는 말에 놀라서 목을 움츠렸다. 고 대야가 다시 묻자 아이는 입을 삐죽이면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고가 대야다!”

사당 입구에서 신이 나서 뛰어놀던 아이 중 하나가 후다닥 달려 들어와서 고 대야 곁에 서서 한참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질하며 킥킥 웃었다.

“생질을 울렸네!”

고 대야는 그 말에 허리를 숙여 자는 아이를 덥석 안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이! 고가 대야! 그쪽이 아니에요! 얘가 생질이에요! 아니라고요! 얘예요!”

그 아이가 따라가며 고함쳐도 고 대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걸음을 서둘렀다. 사당에서 나간 고 대야는 옥묵이 머무는 약방으로 직행했다.

강대를 안고 단숨에 약방 맞은편으로 달려간 고 대야는 강대를 뒤로 숨기고 옥묵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벌써 잠에서 깬 강대는 고 대야 등 뒤에 웅크리고 앉아서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맞은편에 옥묵이 나타나자 고 대야는 강대를 일으켜 세워 등 떠밀었다.

“어서 가라! 어머니하고 불러! 네 어미다! 네 친어미! 어서 가라! 가서 불러라! 큰 소리로 불러!”

강대는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고 대야는 강대를 들어 올려서 사납게 다그쳤다.

“이 새끼가! 잘 들어라,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린다! 어서 가서 어머니라고 불러! 잘 들어라, 네 어미다. 네 친어미! 어머니라고 부르면 먹을 게 생기고 비단옷이 생긴다. 어서 가라!”

고 대야가 아이의 등을 냅다 밀었다. 고 대야 때문에 놀랐는지, 아니면 어머니라고 부르면 먹을 게 생긴다는 말에 끌렸는지, 강대는 비틀비틀 걸어가며 팔을 내밀고 옥묵을 향해 달려갔다.

“어머니!”

옥묵은 파르르 떨면서 뒤돌아봤다.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작고 더러운 강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휙 고개를 들어 고 대야를 노려봤다. 득의양양하던 고 대야는 옥묵의 매섭고 흉악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부르르 진저리쳤다.

오가던 사람 중엔 벌써 걸음을 늦추고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불쌍한 아이와 깔끔한 옥묵을 번갈아 보며 의문스러운 가운데 질타하는 눈빛이었다.

옥묵은 다급히 돌아서서 당황한 걸음으로 약방 후각문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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