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52화 (452/463)

452화: 화를 자초하는 움직임

“연말에 병으로 죽었다고 꾸며서 꺼내 올 생각이었는데, 이제 그 무지렁이가! 정말 죽게 되어도 자초했다고 할 수밖에.”

영원의 목소리가 조금 싸늘해졌다.

“살릴 수 있으면 살길을 열어줘요.”

잠시 침묵하던 이동이 나직이 말했다. 영원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위봉낭이 달려와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 높여 “칠야, 부인!” 하고 불렀다.

“대황자부에 다녀와라. 아라 그 무지렁이가 어쩌고 있는지 보고 와라. 아무도 모르게 가야 한다.”

“예.”

영원이 돌아보지도 않고 분부했다. 위봉낭은 멈칫하다가 공손히 물러나서 돌아섰다.

“듣자 하니 대황자가 시첩을 그리 잘 대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두 사람이 나란히 붙어서 말없이 걷다가 이동이 나직이 물었다.

“잘 대하지 않는 게 아니라…….”

영원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는 듯 말을 멈췄다.

“죽일 듯이 괴롭히지. 그런 물건을 가장 혐오합니다. 여인은 연약한 존재인데, 가녀린 꽃은 아니더라도 비슷하거늘, 사내로 태어나서 개돼지만도 못한 물건. 살아 있어선 안 될 물건이지.”

영원이 나직이 내뱉는 마지막 말에 이동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위리안치된 사람이니 앞으로 우리 사람은 들여보내지 말아요. 우리 손엔 임가의 피를 묻히지 않는 게 좋아요.”

이동은 영원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설득했다.

“나도 알아요. 그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살려둔 것뿐이에요. 영가 조상은 태조와 약조했습니다. 영씨 일가와 임가는 절대로 서로 죽이지 않는다고요. 오기 전에 아버지도 당부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손 쓸 필요도 없어요.”

영원은 이동의 손을 잡고 살짝 입을 맞추고 고개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꿍얼거렸다.

“멀쩡히 눈 구경하다가…….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우린 눈 구경이나 하자고요. 좋은 여아홍을 골라뒀어요. 뒤쪽 정자로 갑시다. 거기가 눈 구경하기 제일 좋아요. 갑시다.”

“좋아요. 난 주량이 좋아서 반 근은 마실 수 있어요.”

이동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자 영원이 싱긋 웃었다.

“반 근? 좋은걸? 주량이 좋은 것 맞군!”

“지금 비웃는 거예요?”

이동이 영원의 가슴을 톡톡 쳤다.

“아닙니다. 내가 감히요? 조심해요!”

바닥이 미끄러워서 이동이 비틀거리자 영원이 덥석 잡아당기고는 갑자기 허리를 숙여 옆으로 안아 올렸다.

“눈길 걷기가 쉽지 않으니까 안고 가야겠습니다.”

위봉낭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슴푸레 밝을 시각이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역시 칠야와 부인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문간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칠야와 부인이 일어났다는 기별이 들어오자 그제야 정원으로 찾아갔다.

“말해라.”

“별일 없었습니다.”

위봉낭이 이동을 힐끔 보며 하는 말에 영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가 이내 펴졌다.

“그럼 됐다. 물러가라.”

위봉낭이 공손히 물러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환이 연무장으로 그녀를 불렀다.

권법 수련을 마친 영원이 싸늘하게 말했다.

“말해라.”

“예. 대왕야 거처에서 찾아냈습니다. 양손이 침상 머리맡에 묶인 채 다리는 다른 사람이 누르고 있고, 대왕야는…….”

위봉낭은 눈을 내리깔고 계속했다.

“아라는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영원은 뒷짐 진 채 무표정하게 있다가 위봉낭을 힐끔 바라봤다.

“이런 일로 부인을 놀라게 할 것 없다는 걸 아는 걸 보니 철들었구나. 지금부터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 어차피 넌 거칠고 둔해서 부인 시중을 들지도 못한다.”

위봉낭은 기뻐서 눈빛을 빛내며 공손히 물러갔다.

연달아 며칠 동안 약방으로 달려간 고 대야는 셋째 날 약방 문을 넘다가 두 일꾼에게 달랑 들려서 쫓겨났다. 쫓겨나서는 맞은편에 서서 문 앞을 지켜보고 있는데, 옥묵이 환약 한 광주리를 들고 나와 약방에 가져다주고는 다시 나와서 그를 힐끔 노려보고는 광주리를 들고 탁탁 치고는 활개 치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고 대야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이대로 달려가 옥묵을 걷어차고 약방에 불을 질러 버리고 싶었다.

내 노비, 내 첩, 내 사람이다!

고 대야는 분통이 터져서 가슴이 쿡쿡 쑤셨다. 이 세상에 하늘의 도리가 있는 것일까? 이렇게는 안 된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고 대야는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하다가 좋은 수가 떠올라서 휙 돌아서서 내달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행상 하나가 그를 계속 지켜보다가 뒤따라갔다.

고 대야는 모퉁이를 이리저리 돌아서 대상국사와 그리 멀지 않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고 깊은 골목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행상은 좌판을 어느 점포 앞에 내던지고는 어깨를 움츠리고 고 대야 뒤를 바짝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고 대야는 골목 안 모퉁이를 몇 번 돌아서 어느 대잡원 안으로 들어가서 동쪽 곁채로 직행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아 등 떠밀려 쫓겨났다.

“다음 날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나리가 언제 돈을 떼어먹은 적이 있더냐? 어이!”

고 대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곁채 문이 쾅 닫혔다. 고 대야는 분한 얼굴로 대잡원에서 나왔다. 행상은 잠시 주저하다가 뒤에서 쫓아가며 웃는 얼굴로 쿡쿡 찔렀다.

“나리, 필요한 물건, 소인에게도 있습니다.”

“있다고?”

고 대야는 걸음을 멈추고 위아래로 행상을 훑어봤다.

“내가 필요한 게 뭔 줄 알고 있단 소리를 함부로 하는 것이냐?”

“나리도 참. 저기에서 구할 물건이 달리 있겠습니까?”

행상이 실실 웃으며 대잡원 쪽을 턱짓했다.

“그렇지! 가격은?”

고 대야는 옳다구나 하고는 두 손가락을 비비며 물었다.

“그야 나리께서 어떤 걸, 어디에 쓰시려는지에 달렸지요. 돈에 따라 물건이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행상이 어물쩍 대답했다.

“몽한약(蒙漢藥: 마취제)이 좋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어서?”

“몽한약만 구하시는 겁니까? 몽한약은 돈이 안 됩니다.”

행상이 실망한 듯이 말하고는 돌아서자 고 대야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

“2할 더 붙여주지. 아니면 3할?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나중에…… 내일, 내일 돈을 줄 테니 일단 약을 다오. 돈은 내일 바로 주마. 3할 더 붙여서, 3할!”

“3할을 붙여도 못 법니다.”

행상은 고 대야를 뿌리치고 쪼르륵 달아났다.

대황자부.

아라는 넋이 나간 채 침상에 누워있고 다다는 울면서 뜨거운 수건을 짜서 아라의 목에 생긴 커다란 멍 부분을 조심스럽게 찜질해 주고 있었다.

아라는 멍한 두 눈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목의 통증은 이미 감각이 없고 하반신도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하반신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은 여전히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흘렀다.

처음으로, 이제 정말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황자부로 들어 왔을 때, 무서웠었다. 그러나 그때는 싫은데 상대할 수밖에 없는 손님을 향한 두려움 정도였다. 지금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이제 죽는구나 싶었다.

다다의 울음소리가 훌쩍훌쩍 때론 가깝게, 때론 멀리서 들렸다. 더불어 마음속 후회도 짙어졌다가 흐려졌다가 했다.

이제야 칠야가 왜 꾀병을 부리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왜 뜨락에서 나가지 말라고 하고, 웬만하면 방에서도 나가지 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건가. 어떻게 주 육소야를 찾아갈 정도로 미치고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언제는 날 도와준 적 있다고. 무슨 미친 생각으로 거기에 부탁할 생각을 했을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반신에서 뜨거운 것이 계속 흘러나갔다. 곧 죽겠구나.

예전의 나날이 너무나 그리웠었다. 시와 술이 있고, 꽃과 노래가 있던 나날. 그땐 수많은 사내가 그녀의 웃음 한 번 사려고 그녀 곁을 맴돌았었다.

이제 그립지 않았다. 그냥 살고만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죽는 것이 두려웠다. 너무너무 두려웠다.

다다는 울어서 두 눈이 팅팅 부었다.

“소저, 어떡해요? 소저! 대왕야가 저녁에도 소저더러 시중들래요. 소저.”

“다다야.”

아라가 기운 없이 다다를 불렀다.

“소저, 저 여기 있어요. 여기 있어요. 소저.”

다다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다가갔다.

“다다, 이번엔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 나 죽은 다음에…….”

“소저!”

다다는 우왕 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아라 몸에 엎드렸다. 그녀도 봤다. 그녀도 자기네 소저가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나 죽으면 화장해줘. 유해는…… 물고기 밥으로 뿌려 줘. 다다, 넌 앞으로…….”

아라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뚝뚝 흘렀다.

“소저, 화장을 어떻게 해요. 이 저택에서요?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물고기 밥으로 못 줘요.”

다다가 훌쩍훌쩍 말했다. 아라의 눈물이 비처럼 흘렀다.

“그럼 난 상관하지 말고 넌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소저, 소저도 못 나가는데 제가 어떻게 나가요. 소저가 죽으면 저도 분명 죽어요. 대왕야가 우리를 태자 전하의 세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거 소저도 들으셨잖아요. 소저를 괴롭히는 걸 저더러 옆에서 보고 있으라고까지 하는데, 소저가 죽으면 저도 죽어요.”

다다는 애간장이 끊어질 듯이 울었다.

“그것도 좋네. 우리 둘, 죽어도 함께 묻히겠어.”

아라는 말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흐느끼고 다다는 끅끅거리며 울었다.

“함께 못 묻혀요. 대왕야가 우리를 개밥으로 던져 줄 거랬어요. 묻히지도 못해요.”

“다다, 다 내 탓이야. 한동안 연향루에서 조용히 지내라고 칠야가 그러셨는데 듣지 않았어. 꾀병을 부리고 나가지 말라셨는데 그것도 듣지 않았어. 다다, 나 때문에 너까지 이렇게 됐어. 혹시 내세가 있으면…… 내세가 있다면…….”

아라는 우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요즘 연달아 몇 가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해서 부글부글하던 최신은 행상의 보고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내려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 골목은…….

“너희 둘, 나랑 같이 가자!”

최신은 벌떡 일어서서 두 심복을 지명해서 재빠르게 골목으로 향했다.

그 골목엔 거세하고도 궁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궁에서 쫓겨나 생활이 궁핍한 내시들도 모여 살았다. 그러니 그곳에서 몽한약을 파는 걸 어찌 몰랐을까!

행상은 잰걸음으로 따라가서 대잡원 문 앞에 도착하자 서둘러 문을 비집고 들어가서는 동쪽 곁채 위치를 눈빛으로 최신에게 알렸다. 최신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곁채 입구까지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누구?”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경계 가득한 고함이 들렸다.

“황성사다.”

최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성사? 황성사 같은 소리! 퉤! 나는…….”

“어딜 달아나!”

저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고, 밖에 서 있던 심복의 호통에 방 안에서 들리던 술 취한 듯한 목소리가 끊어졌다. 최신은 재빨리 뒷걸음질 쳐 튀어 나갔고 행상과 심복 하나가 벌써 뒤쫓아갔다. 다른 심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뒷방에 있던 사람이 창문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최신은 곁채 안에 있던 사람은 상관하지 않고 심복을 데리고 뒷방으로 돌진했다.

잠이 옅은 이동은 너무 피곤한 상태에서도 밖에서 속삭이는 작은 소리를 바로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동은 영원과 거의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내가 가 볼 테니 당신은 자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는걸.”

영원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며 이동을 눕혔다. 이동은 웅얼거리며 당부했다.

“응. 밖에 추워요. 옷 잘 입고 나가요.”

영원은 내실에서 나가서 수련이 건네는 옷을 입다가 수련이 뭐라고 하려는 걸 보고 ‘쉿’ 하며 손가락을 세웠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영원은 두봉을 걸치고 나가다가 수화문에 서 있는 대영을 바로 발견했다. 대영은 초조한 얼굴로 상방 입구를 기웃거리다가 영원이 나오는 걸 보고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영원이 계단에서 내려와 뜨락을 지나쳐 다가오자, 대영이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칠야.”

“나가서 이야기하자.”

영원은 성큼성큼 수화문 밖으로 나가서 계속해서 걸어갔다.

“말해라.”

“예. 최신이 왔습니다. 독약 문제, 소식이 들어왔답니다.”

대영의 목소리에 흥분한 기색이 드러났다. 걸음을 멈춘 영원의 눈빛이 반짝였다. 뒤이어 두봉 자락을 휙 휘두르고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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