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마음이 걸리다
“왕비?”
묵칠이 재빨리 대답했는데 주육은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왕비를 왜 만나냐. 왕비 이야기가 왜 나와. 들어 봐라, 아라를 만났다!”
“누구?”
묵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라! 그리고 다다도.”
주육은 묵칠의 표정에 매우 만족해하며 다리를 꼬다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지도 못했지? 나도 그랬다. 들어가서 한 바퀴 돌았는데, 쯧!”
주육은 혀를 차며 두 눈썹을 함께 치켜들었다. 어쩐지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황자부를 한 바퀴 돌았지. 성지를 받고 간 것 아니냐. 그러니 간 김에 한 바퀴 둘러봤지. 대황자부는 높은 담장 말고 다른 건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더라. 여전히 호화롭고 화려해. 눈이 열 배는 더 내려도 아무런 문제 없겠더라고. 한 바퀴 돌다가, 후원의 눈 오는 경치가 좋길래 잠시 앉아서 감상했지.”
묵칠은 주육을 흘겨봤다. 주가가 몸을 사릴 줄 모른다더니 아버지가 말해도 줄곧 이해하지 못했는데 주육이 하는 말을 들으니 조금 알 것 같았다. 앉아서 경치 감상을 하다니. 몸을 사려야 하는 걸 깨닫지 못한 게 아니고 무엇인가.
“막 앉아서 구경하는데,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꼭꼭 싸맨 두 사람이 달려오지 뭐냐. 내 앞에까지 달려오길래 깜짝 놀랐지. 누구였게?”
“아라와 다다! 이야기했거든!”
“맞다! 아라와 다다였다! 아라는 예전보다 더 어여쁘고 다다는 살이 쪘더라! 아라가 왜 찾아왔는지 아느냐, 맞혀봐라.”
“모른다. 얼른 말해라.”
묵칠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급하기는. 왜? 아직 아라가 그리운 것이냐? 그래도 되는 것이야? 집에 있는 암사자가……. 그래, 그래. 알았다. 잘못했다. 아리따운 낭자, 아리따운 낭자지. 앉아라, 앉아. 중요한 이야기다. 아라가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하더라. 들어 봐라, 개소리 아니냐? 아라를 데리고 나오다니, 내가 미쳤나?”
“저기, 아라가 대황자부에 있는 거, 칠 형님이 알까?”
한참 만에 묵칠이 나직이 물었다.
“나야 모르지! 그래서 원 형님에게 물어보려고 한 것인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휴. 아라는 정말 전보다 예뻐졌던걸.”
주육은 우울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소칠, 요즘 늘 꿈을 꾸면 예전으로 돌아간다. 예전엔 지금보다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원 형님이 경성에 오기 전에, 그때 넌 아라 때문에 정신이 나갔고 난 그런 너를 놀리고. 너보다 먼저 아라를 품을 생각뿐이었는데. 결국 이기지 못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때 얼마나 좋았냐. 나중에 원 형님이 경성에 오고, 1년 동안 얼마나 재미있었냐. 그 후로…….”
주육은 잠시 멍하니 생각했다. 재미없어진 게 언제부터였더라? 아마 고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였던 것 같다.
“나중엔 네가 혼인해서 불러도 나오지 않고, 나와도 점심이나 같이 먹고. 해가 지기도 전에 쪼르르 집으로 달려가고. 재미없다.”
주육이 입을 삐죽이며 하는 말에 묵칠이 그를 흘겨봤다.
“너도 혼인하고 나면 나보다 더할 거다. 두고 봐라. 칠 형님도 혼인했지? 앞으로 나보다 더 심할 거다. 대낮부터 쪼르르 집으로 달려갈 거라고. 나만 그런 줄 아느냐?”
“난 아직 정혼하지도 않았는걸. 나 혼자 경성에 남았고. 전엔 저택이 좁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너무 넓은 것 같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주육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묵칠이 주육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역시 마음이 안 좋았다.
“아직 상중이잖냐. 칠 형님이 장원에서 돌아오면 우리 형제끼리 모여서 즐겨보자. 난 요즘 관아에 일이 많아서 말이다. 아니면 자주 같이 있을 텐데.”
“해가 지나면 지방으로 가잖냐.”
주육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더 저조해져서 술 한 잔 따라 단숨에 비웠다.
“넌 앞으로 어쩔 셈이냐?”
묵칠은 요즘 아버지에게 배우면서 주가, 그리고 주육의 상황에 대해 주육 본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주육의 낙담한 모습에 정말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앞으로?”
주육은 얼떨떨해하다가 피식 웃었다.
“난 지방으로 갈 생각 없다. 일단 황성사에서 몇 년 보내고, 그다음은 나중에 생각해야지. 태자 전하가 보위……에 오른 후엔 결정에 따르면 되고. 넌 안심하고 다녀와라. 경성엔 내가 있다. 원 형님도 있잖냐. 네가 골탕 먹을 일은 없다.”
묵칠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다시 다물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 나와서 주육은 걸음을 멈추고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또 밤새 눈이 오겠구나. 원 형님이 큰 눈 오는 날 사냥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고 했었는데. 우리 원 형님을 찾아서 사냥이나 하러 갈까?”
“난 관아에 일이 산더미라 못 간다. 칠 형님이 경성에 없는데 너까지 나가면, 황성사는 어쩌냐?”
묵칠은 지금 사냥할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오후에 어떻게 하면 일찍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궁리 중일 뿐이다.
“하긴. 원 형님이 없으니 내가 황성사에 있어야지.”
주육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고 묵칠을 향해 손사래 치고 말을 타고 가버렸다.
묵칠은 말에 올라 털 두봉을 꼭 여미고 관아로 돌아가면서 아라가 주육에게 꺼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근심 어린 얼굴로 곱씹었다.
아라만 생각하면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들었다. 미련은 아니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예전에 사라졌다. 그런데 아라가 대황자부에 갇혀 있다고 하니, 잘 못 지내는 건 둘째치고 나중에 혹시라도 어찌 되면…….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에 걸렸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는데 수수방관하고 도와주지 않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어떻게 돕지? 아라를 구해서 나오는 건 그로서는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아라를 도운 걸 소오가 어떻게 생각하겠나. 분명 매우 슬퍼할 것이다. 아라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차마 두고 볼 수 없는 것일 뿐이지만, 소오가 믿지 않으면? 소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
그렇지!
묵칠은 눈을 반짝이며 급하게 고삐를 잡고 소우에게 명령했다.
“성밖에 서둘러 다녀와라. 영 칠야를 찾아서 주 육소야가 오늘 황상의 명을 받고 대황자부를 순시하다가 아라, 그리고 다다를 만났다고 전해라. 아라가 꺼내달라고 주 육소야에게 부탁했다고 하고, 내가 그러더라고, 칠야가 혹시 아라를 꺼내줄 수 없는지 묻더라고 전해라.”
소우는 쉴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 소내내는 모르게 전해야 한다. 아니면 넌 평생 말 씻기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예, 예. 칠소야, 영 칠야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칠야는 장원에 있다.”
묵칠은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계속 말했다.
“일단 정북후부에 가서 물어봐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 한다. 만나서 말을 전해야 해!”
소우는 대답하고 정북후부로 말을 몰았다.
이동은 두봉을 꼭꼭 싸매고 상방으로 가자마자 정방으로 뛰어 들어가 목욕부터 했다.
연달아 며칠 동안 바짝 긴장했고 어제 제대로 잠을 못 잔 데다가 오늘 종일 바쁘게 움직이느라 지쳐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더니 하품이 연달아 나왔다.
씻고 나왔더니 영원은 술을 고르러 직접 술 창고로 갔다기에 피곤해서 눈도 뜨기 힘든 상태로 화항에 누워있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잠깐 자고 일어나니 눈앞이 어둑어둑한 가운에 따듯한 불빛이 보였다.
“무슨 시진이에요?”
이동이 뒤척이며 묻자 곁에 딱 붙어 있던 영원이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몸을 내밀었다.
“깼어요? 이제 좀 편안하고? 깊게 잠들었더군요.”
“벌써 해가 졌어요?”
이동이 몸을 일으키자 영원이 수련에게 겉옷을 받아 걸쳐 주었다.
“아직. 아직 일경(一更: 저녁 7-9시)인데, 배고프진 않고? 상 차리라고 할까요?”
이동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장원에 들어오자마자 잠들어서 점심도 못 먹었는데 벌써 일경이라니 배가 고팠다.
수련과 시녀들이 이동이 다시 목욕하는 걸 시중드는 사이 녹매가 어멈들을 데리고 상을 차렸다.
이동은 영원이 맞은편에 앉는 걸 보고 얼떨떨해졌다.
“당신도 아직 안 먹었어요?”
“당신이 잠들었잖아요. 같이 먹으려 했지.”
영원은 배가 고팠는지 탕을 들고 후루룩 마셨다. 이동은 조금 허겁지겁 먹는 영원을 바라보며 마음이 따스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서 나직이 나무랐다.
“기다리긴 왜 기다려요.”
“혼자 무슨 맛으로 먹으라고요. 이 새우살, 맛이 좋군. 먹어 봐요.”
영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새우살을 가리켰다. 이동은 새우살을 먹고 탕에 밥 반 그릇을 말아서 천천히 먹으면서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은 먹는 속도가 빨라서 이동이 반 그릇 먹었을 때 벌써 두 그릇을 비우고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머리를 내밀고 이동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리 조금 먹어요?”
“아름다운 건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잖아요.”
이동은 향차로 입을 헹구고 영원을 흘깃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영원은 멈칫하다가 껄껄 웃었다.
“아름답기로 따지면 내가 손꼽히긴 하지!”
이동은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뻔뻔한 것으로 따지면 정말로 으뜸으로 손색없긴 했다.
“함께 눈 구경 하러 갈까? 우리 북부의 눈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오던데. 갑시다. 한 바퀴 같이 돕시다.”
영원이 화항에서 훌쩍 내려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동도 따라 내려가서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밖엔 눈이 아직 내리고 있었다. 맞은편 지붕에 눈이 두껍게 쌓여 있고 눈이 닿는 곳은 모두 하얗게 빛났다.
“좋아요!”
이동도 기분 좋게 대답했다.
수련이 얼른 여우 털 안감을 댄 치마로 갈아입히고 검은담비 두봉을 꺼내 오자 영원이 받아서 입히고는 끈도 꼼꼼히 묶어 주었다. 청국이 손난로를 내오고 이동이 받아들자 영원이 따라올 것 없다고 분부했다.
수련은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눈썹 두 가닥을 함께 치켜떴고, 청국은 못 참겠다는 듯 꿍얼거렸다.
“칠야가 지금 우리 일거리까지 뺏으려는 거지?”
아무도 없이 고요한 뜨락에 허리춤까지 오는 커다란 붉은 등롱이 곳곳을 비춰 주었다. 영원은 한 손으로 이동의 허리에 두르고 자기 두봉 안으로 그녀를 감쌌다. 이동도 발치를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소곤소곤 이야기 나누며 나란히 걸었다.
막 뜨락 문에 도착했을 때 대영이 사환 하나를 데리고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이동은 대영 뒤에 있는 사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영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우가 이런 때에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기에?
소우는 영원을 보자 코가 시큰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장원 두 곳을 찾아다닌 끝에 드디어 영 칠야를 만났다. 지치고 춥고 배고프지만, 어쨌든 간신히 만났다.
“칠야!”
소우와 대영이 함께 예를 갖췄다.
이동은 영원 품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거리는데 영원이 힘을 주어 더 세게 끌어안고 소우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칠소야의 명으로 칠야를 뵈러 왔습니다. 주 육소야가 오늘 황상의 명으로 대황자부를 순시하다가 아라와 다다를 만났답니다. 아라가 육소야에게 꺼내달라고 부탁했다고, 저희 칠소야가 혹시 아라를 꺼낼 방법이 없을지 여쭤보라고 소인을 보냈습니다.”
소우는 단숨에 말하고서 숨을 돌리며 간절하게 영원을 바라봤다. 소우도 칠소야를 따라다니면서 아라, 다다와 친해졌고, 칠야가 손을 써서 다다와 아라 주종을 도와줄 수 있길 바랐다.
“주육이 어쩌다가 아라를 만난 것이냐?”
영원이 미간을 좁히며 곧바로 물었다. 소우는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룁니다, 칠야. 그건 못 들었습니다.”
“알았다. 대영, 사람을 둘 골라서 소우를 돌려보내라. 위봉낭은? 불러와라.”
영원은 더 묻지 않고 이동을 끌어안고 뜨락 문으로 나갔다.
“우연히 만난 거라면 너무 공교롭네요.”
이동이 영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라 그 무지렁이에게 꾀병을 부리라고 전했었는데. 밖으로 나오지도 말고 줄곧 누워있으라고. 우연히 만나? 찾아간 거겠지!”
영원의 말투에 분노가 느껴졌다.
“대황자가 위리안치되어서 누가 들어가든 지켜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 어찌 감히…….”
이동은 정말이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한숨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