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불타는 눈 오는 대낮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눈이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이 왔다. 이동이 휘장을 젖히고 밖을 빼꼼 내다봤을 때 소복소복 내린 큰 눈에 사방이 하얗고 바닥에도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정말 눈이 오네!”
이동이 놀란 듯 고함치고는 금방 수줍은 얼굴이 되었다. 뒤에 바짝 붙어서 자기 머리 너머로 밖을 내다보는 영원을 올려다보며 꿍얼거렸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 눈이 이렇게 온 줄도 몰랐잖아요.”
“괜찮아요. 나도 몰랐는걸. 곧 도착할 것 같은데.”
영원이 휘장을 조금 더 걷어서 내다보다가 바닥을 구르며 어디쯤 왔는지 물었다.
“곧 도착합니다!”
대웅이 밖에서 목소리 높여 대답했다.
“어머!”
이동이 당황해서 외쳤다. 내 옷!
“장원 근처에서 한 바퀴 돌자꾸나. 경치 감상 좀 해야겠다.”
영원이 큰소리로 분부하고는 마차 창문을 닫았다.
“급하긴. 한 바퀴 돌면 되지. 한 바퀴로 모자라면 두 바퀴 돌고. 자, 내가 입혀줄게요.”
“종복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이동은 서둘러 매무새를 고쳤다.
“뭐라고 생각해? 감히? 게다가 음식남녀(飮食男女: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가리키는 말. 식욕과 성욕.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라는 말, 성현들의 말씀입니다.”
영원은 바삐 움직이는 이동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이쪽저쪽 끌어올리고 당겨주었다.
“성현들도 마차에서는, 이 대낮에는…….”
“마차에선 안 된다는 말씀을…….”
이동이 흘겨보자, 영원이 금세 말을 바꿨다.
“예예, 내 잘못입니다. 성현은 그런 말씀을 한 적 없지만 동동이 말했죠.”
이동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됐어요. 내 비녀는요?”
이동이 이리저리 비녀를 찾자 영원도 따라서 찾기 시작했다.
“이건가?”
영원은 잔뜩 납작해진 누사백화부귀잠(累絲百花富貴簪)을 이동 앞에 들어 올리자, 이동은 이마를 짚었다.
(※누사累絲: 중국 금은 주조의 전통 공예로 금속 공예 중 가장 정교하다. 장인이 금은을 실처럼 만든 다음 엮어서 땋거나 각종 모양으로 만들고 다시 기물 위에 용접하기 때문에 입체감이 뛰어나다.)
“당신 머리, 내가 올려주지.”
영원은 비녀를 툭 내던지고는 이동의 새카맣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동은 ‘어머나!’ 하고 외치고는 완전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언제 머리카락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영원이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나와요? 이제 어째요. 머리 올릴 줄 알아요?”
“그럼!”
영원은 이동의 이마를 제 가슴에 누르고 양손으로 새카만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하지만 몇 번이고 말아 올려도 손을 풀면 그대로 흘러내렸다.
“이렇게 합시다. 일단 두봉에 풍모를 쓰고 꼭꼭 감싸요. 눈이 이렇게 많이 오니 춥잖아!”
영원이야 언제나 꼼수가 꽤 많았다.
이동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영원의 매무새를 고쳐주면서 투덜거렸다.
“이번뿐이에요. 다음엔 절대 안 돼요.”
“응? 그거 지금 본인한테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나한테 하는 말입니까?”
“당연히 당신이죠……. 그리고 나도.”
영원이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 웃었다.
“동동, 저기…… 그냥 머리 올리는 법, 나도 배울까? 당신 시녀 중에 누가 머리를 제일 잘 올리지? 그 아이에게 배웁시다.”
“청국이요.”
이동이 정말로 대답하자 영원은 이동을 덥석 끌어안고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동동, 이런 당신, 정말 뼛속까지 사랑해요.”
큰 눈이 펑펑 내리자, 고 대야는 목을 움츠리고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다. 작년 겨울에 그나마 씀씀이가 생겨서 사면(絲綿) 두봉이니 짧은 털 두봉이니 긴 털 두봉을 마련했는데, 하필 작년 겨울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눈송이가 목으로 파고들자 고 대야는 부르르 진저리쳤다.
수녕백부가 사라진 후에 근래 돈 나올 구멍이 없어져서 털 두봉, 겹 두봉, 단겹 두봉까지 몽땅 전당 잡히고 말았는데 올해 겨울은 또 이렇게 춥다니. 정말이지, 하늘도 무심하시지!
고 대야는 어느 다포 처마 아래 웅크리고서 저택을 저당 잡혀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올겨울을 넘기고 돈이 생기면 다시 찾아오면 되지 싶었다. 하지만 저택을 잡히면…….
집구석에 가득한 입이 떠올랐다. 아침에 듣자 하니 어머니가 또 아이를 가졌다는 것 같았다. 고 대야는 혀를 쯧 차며 저택을 잡힐 생각을 지웠다. 게다가 아버지도 아직 살아있어서 자신의 지장(指章)만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고 대야는 목을 움츠린 채 다포 안에서 풍기는 간식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배가 꼬르륵 울었다. 일단 어디 가서…….
고 대야의 시선이 맞은편 약방 문 앞으로 향했다. 약방 일꾼들이 천막을 치고 탁자를 옮겨 나왔다.
그렇지! 눈 오는 날에 경성 악뱡은 약을 나눠주지! 가끔은 동전도 나눠주고.
고 대야의 눈이 빛났다. 경성엔 약방이 꽤 있고 자신이 물건 볼 줄도 아니까 한 바퀴 돌면 돈은 못 받더라도 값나가는 약은 얻을지 모르지. 어쩌면 하룻밤 즐길 돈이 나올지도 모르고.
그 생각에 고 대야는 기운이 나서 어디부터 돌아야 한 곳도 빠짐없이 돌 수 있을지 가늠하고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연달아 네댓 곳을 돈 고 대야는 긴 약 꾸러미를 들고 소매 안에 있는 동전을 쓰다듬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음 약방까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고 대야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쪽을 바라봤다. 옥묵이 그곳에서 어한약(禦寒藥: 추위를 녹이는 약. 추위를 막아주는 약)을 사람들에게 한 봉지씩 나눠주고 있었다.
고 대야는 눈알을 굴리며 살금살금 옆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어렵게 찾아낸 것인데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디에 사는지 똑똑히 지켜봐야 했다. 다시는 놓칠 수 없지!
고 대야는 약을 나눠주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옥묵이 어멈들과 함께 약방 뒤로 돌아가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약방에 살고 있었구나!
고 대야는 흥분해서 큰 소리로 웃으며 약방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는 옥묵이 들어간 각문으로 돌아가서 문을 쿵쿵 두드리고 걷어찼다.
“누구야!”
안에서 어멈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덜컥 문이 열렸다.
“장삼을 입을 정도 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문을 두드리는 게 어디 있습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옥묵을 불러라!”
고 대야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문을 연 어멈이 어깨로 힘껏 밀쳐냈다.
“여긴 약방이지 사창가가 아닙니다! 가세요, 가!”
어멈이 문을 닫으려고 하자 고 대야는 발을 구르며 문틈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약방인 걸 알고 찾아온 것이다. 약방이면 도망 노비를 감춰도 되는 것이냐? 잘 들어라. 옥묵을 불러라. 옥묵만 데리고 가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아니면 관아에 고발해 약방을 싹 쓸어버릴 것이야!”
“꺼져요!”
어멈은 고 대야의 손을 밀쳐내고는 문을 닫았다.
옥묵은 각문 뒤에 서서 굳은 얼굴로 죽어라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친놈이다. 상대할 것 없어.”
어멈은 옥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며칠은 최대한 나가지 말아라. 휴.”
고 대야는 어멈에게 쫓겨나고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옥묵은 고가의 도망 노비, 그의 사람, 그의 은자였다.
고 대야는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 가슴을 활짝 펴고 약방 안으로 뛰쳐 들어가 궤대를 내리쳤다.
“너희 장궤 나오라고 해라! 감히 도망 노비를 숨겨? 죽고 싶은 것이냐?”
고 대야와 고 노야 2인조를 이 경성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예전엔 몰라도 수녕백 강가가 뿌리째 사라진 후로 고 대야와 고 노야의 지위도 따라서 바닥에 떨어졌다. 고 대야가 궤대를 내리치며 고함을 꽥꽥 질러대도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다.
묵칠은 내년 봄에 지방 지현으로 나가기로 이미 결정이 되었다. 전량 쪽에 꽤 재능이 있어서, 가을부터 묵 이야가 그를 형부로 들여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눈이 밤새 내린 다음 날, 묵칠은 이른 아침부터 상관을 따라 감옥을 한 차례 순시하고, 또 몇 명의 범인을 심문한 후, 자신의 작은 방으로 돌아갔다. 벌써 점심시간이라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주육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너희 칠소야는 계시냐?”
묵칠이 바로 고개를 내밀었다.
“있다! 웬일이냐? 이렇게 큰 눈이 오는데. 어서 들어와라. 마침 점심 먹으러 돌아가려던 참이다.”
“점심 먹자고 온 것이다. 가자, 능운루로 갈까?”
주육은 예전보다 훨씬 말랐다.
“넌 상중 아니냐. 능운루엔 사람이 많으니 심가네 원자(園子)로 가자. 거기가 조용하다.”
묵칠이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지금 묵칠은 본인도 정진하는 데다가 부친이 옆에서 잔소리해서 예전보다 생각이 꼼꼼했다.
“그럼 심가 원자로 가자.”
주육은 어쩐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잠깐만.”
묵칠이 소우를 불렀다.
“오늘 점심은 주 육소야와 함께 먹는다고 칠 소내내에게 가서 전해라. 주 육소야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같이 있어 줘야 해서 그러는 거라고 말씀드리고.”
묵칠의 말에 주육이 눈을 치켜떴다.
“어이! 무슨 말이 그러냐. 이게 지금…….”
“그냥 하는 말이지. 따지기는. 됐다, 됐어. 얼른 가서 칠 소내내에게 전해라. 그리고 저녁에 일찍 돌아갈 테니, 매듭은 내가 돌아간 다음에 함께 만들자고 전하고.”
주육이 혀를 끌끌 차자, 묵칠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너니까 같이 밥 먹는 거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냐. 난 밖에서 밥 안 먹는다.”
주육은 말문이 막힌 채 등 떠밀려 나가면서 기가 막힌 듯 묵칠을 손가락질했다.
“허허. 밖에서 밥을 안 먹어? 낯짝은?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두 사람은 입씨름하며 형부 관아에서 나가서 심가 원자로 직행했다.
심가 원자는 줄곧 조용한 곳으로, 두 사람은 작은 뜰을 차지하고는 반쯤 창문을 열고 눈을 감상하며 식사했다. 묵칠은 오후에 일이 있어서 술을 마실 수 없는데 주육은 술을 시켜서 찬이 올라오기도 전에 두어 잔 들이켰다.
“왜 그러냐. 걱정거리라도 있냐?”
묵칠이 주육을 살피며 물었다. 주육은 조모가 세상을 떠난 후로 꽤 조용해졌다. 부친은 좋은 일이라고 하는데, 오늘은 조용한 것이 아니라 우울해 보였다.
“걱정거리까지는 아니고.”
주육은 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이 오잖냐. 어제부터 시작해서 밤새 그치지도 않고…….”
“그냥 눈 때문이라고? 네가 언제부터 눈이 오고 달이 지는 걸 서글퍼했다고?”
묵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 좀 끝까지 하자. 이렇게 인내심 없어서야 백리후(百里候 : 현 지사의 별칭)를 어찌 모시려고?”
분위기를 잡던 주육은 묵칠 때문에 흐름이 끊기자 순간 툴툴거렸고, 묵칠이 얼른 다독였다.
“그래, 그래. 말해라. 해. 천천히 말해라. 됐지?”
“어디까지 했더라?”
“눈이 밤새 그치지도 않고!”
“그래, 눈! 밤새 눈이 왔잖으냐. 눈이 온다고 황상께서 대황자를 좀 들여다보라고 황성사로 사람을 보냈더라.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별일은 없는지 말이다.”
주육이 이어서 하는 말에 묵칠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이 정말로 대왕야를 아끼시지. 그리고 태자도.
“원 형님이 성 안에 없던데, 알고 있지?”
“알지. 어제 장원으로 갔다.”
“장원에? 어쩐지 찾아도 없더라니. 어느 장원에?”
주육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팔걸이를 내리쳤다.
“그건 안 물었지. 정북후부의 경성 장원이 몇 개 안 되지 않나? 그래서, 본론이 뭐냐?”
“찾아다녔으니 말이지. 그래, 본론 이야기하자. 원 형님이 없길래, 황상이 분부한 일이니 내가 직접 다녀오자 싶었지. 한 1년 대왕야를 못 만나서 보고 싶기도 했고.”
주육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웬걸, 대왕야는 못 만나고 누굴 봤는지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