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달콤한 부부
복안 장공주는 살짝 뒤로 기대고는 숨을 죽이고 단정하게 앉은 오황자를 느긋하게 바라봤다.
영원은 이동을 데리고 오황자 앞에 서서 예를 갖추지 않고 고개를 갸웃한 채 그를 바라봤다. 오황자는 망설이는 얼굴로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는 즉시 시선을 돌리고 차를 마셨다.
장공주가 시선을 떼는 순간 오황자가 즉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우선 이동을 향해, 그리고 영원을 향해 공수하며 예를 갖췄다.
“외숙모, 외숙.”
“옳지, 오늘은 가족의 예로 만나는 것이다. 소오가 예법을 아는구나.”
황상은 껄껄 웃고는 영 황후를 바라보며 칭찬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영 황후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동은 영원이 잡은 손을 놓고 금이 상감된 보석이 박힌 채찍을 두 손으로 올렸다. 잔뜩 멋 부리며 휘두르던 영원의 채찍이었다.
오황자는 놀라서 고함치며 채찍을 받아들고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영원을 바라봤다.
“말은 안 되고 채찍만 주는 것이다. 작은 말을 골라서 길들여라.”
오황자가 입을 열기 전에 영원이 먼저 입을 막았다. 오황자는 분한 눈빛으로 영원을 흘겨봤다.
“자, 이제, 앞으로 잘 살아라.”
황상의 목소리에 피로가 느껴졌다. 머리가 어질거려서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영원이 재빨리 대답하자 상 태감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황상을 부축해 일으켰다. 하빈이 허둥지둥 따라갔다.
태자는 일어서서 허리 숙여 황상을 배웅하고는 몸을 일으키고 옷자락을 털고는 거들먹거리며 대전에서 나갔다. 태자비가 곧바로 태자 뒤를 따라 나갔다.
복안 장공주는 어두운 눈빛으로 하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 모습이 보이지 않자 흥, 소리를 내더니 오황자의 머리를 툭 쳤다.
“돌아가서 공부하자!”
“장공주 누님, 조심해서 가십시오.”
영원이 얼른 배웅했다.
눈 깜짝할 사이 대전 안이 텅 비자 영 황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누님, 누님이 꼭 보셔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영원이 눈짓하자 이동이 목에 걸고 있던 황옥을 빼서 영원에게 건넸다.
“이것 좀 보십시오. 복백 말이 선조의 초상화에서 봤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본 것 같습니다. 누님도 좀 보세요.”
영원이 황옥 장식을 영 황후에게 바치자 영 황후가 받아서 꼼꼼히 보다가 들어 올려서 들여다봤다.
“어디에서 난 것이냐?”
“소 사야가 가지고 왔습니다. 선조의 물건이라고 하면서 영씨 가문 사람이 된 걸 축하하는 선물이라고 동동에게 주었습니다. 소 사야가 어떻게 선조의 물건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영 황후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 사야가 그렇다면 틀림없겠지. 고조부의 수기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영가 선조가 수십 년 동안 지닌 황옥 매미를 지키려고 사람을 죽였다고. 아마도 이것이겠구나.”
“그럼 나중엔요?”
영원의 눈빛이 빛났다. 영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소 사야의 일은 북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께 여쭤보아라. 소 사야가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나도 아는 게 별로 없다. 소 사야는 떠났느냐? 다른 말은 없었고?”
“갔습니다. 전 만나지도 않고 동동만 보고 갔습니다. 동동에게 감사 인사하러 일부러 왔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이걸 주었고요. 동동 말이, 키가 매우 큰 백의 사내와 함께 갔답니다.”
영원은 황옥 매미를 이동의 목에 걸어주면서 대답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영 황후가 이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 사야가 한 번은 속속들이 파고들지 말라는 말을 했었다고 아버지에게 들었었다.
우리 영씨 가문은 재가인지 아닌지 그런 걸 따진 적 없고, 첩을 금지하는 법도는 있다. 선조께서 세운 법도지. 넌 아직 어리지만 보기 드물게 달관하고 생각이 깨인 아이이니 길게 당부할 것도 없겠지.”
그러고는 영원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한번 돌아오라고 하시길래, 너희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언제 돌아갈지는 너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고 내가 대답했다. 동동의 초상화를 그려 어머니께 보냈는데…….”
“누님이 그렸습니까?”
영원이 말을 자르며 묻자 영 황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내가 그렸다. 왜?”
“그 살기등등한 화풍으로 맹호를 그리면 모를까, 동동을요?”
영 황후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렸고, 보냈다. 그것도 급보로!”
영원은 이동을 끌고 돌아섰다.
“갑시다! 어서 사람을 보내 초상화를 막아야 합니다. 내가 야차와 혼인했다고 여기시기 전에!”
영 황후가 뒤에서 이를 갈면서 상을 탁 내리쳤지만, 영원은 이동을 끌고 단숨에 영 황후의 뜰에서 나갔다. 이동이 영원을 잡아당겼다.
“정말로 화난 건가요? 고작 이런 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선녀와 혼인할 거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는데, 누님은 분명 당신을 맹호처럼 그려놨을 겁니다. 어머니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동은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첫째, 난 선녀가 아니에요. 둘째, 형님의 그림, 나도 봤어요.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여기 일을 어서 마무리해야겠군. 어서 당신을 데리고 북삼로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
영원의 표정이 엄숙하고 심각했다. 이동은 영원의 허리띠를 잡고 그의 앞으로 돌아가서는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게 급해요?”
“급하지! 어머니가 당신을 봐야 할 뿐만 아니라, 온 북삼로가 봐야 합니다!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건 재미없지요!”
영원은 두봉 안에서 손을 뒤로 뻗어 이동의 손을 잡고는 당당하게 외쳤다.
이동은 웃음이 날 것 같은데 눈가는 촉촉해졌다.
선덕문을 나가서 마차에 탄 이동은 휘장을 들추고 말을 타고 마차 옆을 따르는 영원을 내다봤다. 이동의 시선을 느낀 영원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이동이 계속 바라보고 있자 말을 가까이 대고 허리를 숙였다.
“할 말이라도?”
“없어요. 그냥 보고 싶어요.”
이동의 작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영원이 멈칫하더니,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는 한 손으로 고삐를 바짝 잡고 다른 손으로 현란하게 채찍을 휘둘러댔다.
이가 저택 대문 앞, 영원은 말에서 내려 마차를 따라 중문 안으로 들어갔다. 만 어멈이 휘장을 젖히자 영원이 이동을 부축했다.
두 사람이 중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장 태태가 보였다.
“어머니, 왜…….”
이동이 눈이 휘둥그레진 걸 보고 장 태태가 서둘러 손사래 쳤다.
“아니다, 아니야! 너희 마중 나온 것이 아니라, 손 어멈이 납매가 피었다길래 나왔다가 마침 마주친 것이다.”
이동은 씁쓸하고 달콤하고 포근하고 또 울컥해서는 장 태태의 팔짱을 끼고 어머니의 어깨에 기댔다. 장 태태가 웃으며 그런 그녀를 토닥였다.
“얘 좀 봐라. 아이처럼 구는구나. 고야가 보고 있다.”
“보면 보라지요.”
이동은 장 태태의 어깨에 턱을 비비면서 장 태태의 팔짱을 끼고 딱 달라붙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만에 이신과 묵 대내내가 서둘러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영원이 얼른 이신을 향해 깊이 장읍했다.
“형님, 뭘 이렇게.”
묵 대내내는 얼른 옆으로 비켜서면서 이동과 인사하며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춥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장 태태는 두봉을 입지 않은 묵 대내내를 보고 재촉했다. 이신과 영원은 장 태태와 두 사람을 앞세우고 뒤를 따랐다.
“막 궁에서 나온 건가? 별일은 없었고?”
이신이 나지막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영원의 눈가에 희미하게 냉랭한 빛이 스쳤다.
“다행이군.”
이신은 살짝 안도했다.
몇 마디 나누는 사이 벌써 대청 앞에 도착했다. 문 이야는 대청 앞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영원과 이동을 번갈아 봤다.
이동은 장 태태를 상석에 앉혔고 이신은 왼쪽 첫 자리에 앉았다. 문 이야는 체면치례도 없이 오른쪽 첫 자리에 앉았다. 묵 대내내는 장 태태 곁에 서서 이동과 영원이 나란히 엎드려 장 태태에게 절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두 사람이 막 무릎을 꿇자마자 장 태태가 웃으며 손짓했다.
“됐다, 됐어. 어서 일어나라.”
묵 대내내는 미소를 머금고 얼른 다가가 이동을 일으켰다. 영원은 따라 일어서지 않고 진지하게 세 번 고개를 조아렸다.
이가의 식구가 너무 단출해서 빙글 도는 것만으로 상견례가 끝났다. 영원은 이신, 문 이야와 함께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고 이동은 장 태태의 팔짱을 끼고 묵 대내내와 함께 뒤쪽 정청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눴다.
“칠야가, 잘해주지?”
장 태태가 물었다. 영원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느껴지는 배려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달콤함이 느껴졌지만, 묻지 않고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응.”
이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 태태의 걱정하는 다정한 눈빛에 한마디 더 덧붙였다.
“생각한 것보다 더 잘해줘요.”
“그럼 됐다.”
장 태태는 한시름 놓았다. 묵 대내내는 차를 들고 와서 웃으며 이동을 바라봤다.
“안색이 너무 좋네요.”
이동은 무심결에 얼굴을 쓰다듬었다. 오늘 새벽까지 시달리다가 막 잠들자마자 일어났는데 안색이 좋아?
“그래, 좋구나.”
장 태태도 유심히 그녀를 살피다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겨 주었다.
“어제부터 많이 힘들었지?”
딴생각하던 이동은 힘들었냐는 장 태태의 말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에요…….”
묵 대내내는 입을 가리고 눈이 휘어라 웃었다. 이동은 말하는 순간 깨닫고는 어머니 앞이라는 생각에 순간 너무 어색해졌다. 하지만 장 태태는 마음이 많이 놓이는 듯 딸의 손을 두드리면서 웃으며 묵 대내내에게 분부했다.
“꼭 밥을 먹고 돌아가야 한다는 법도는 없으니 이만 돌아가라고 하자. 날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정신없었을 텐데, 얼른 돌아가서 제대로 밥 먹고 푹 쉬어야지. 동저아, 잘 들어라. 그 저택은 오랫동안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고, 칠야는 집안일을 상관하는 사람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좋은 곳이지만, 안으로 어떤 모습인지 모른다. 서두를 것 없다. 일단 푹 쉬고, 천천히 살핀 후에 천천히 다스려라.”
“나도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이동은 장 태태와 함께 일어섰다. 장 태태는 이동을 계단 아래까지 배웅하고는 더 나가는 건 적당하지 않기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나란히 걸어 나가는 이동과 영원을 계단 위에 서서 바라봤다.
“어머니, 저것 좀 보세요.”
묵 대내내가 장 태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이동의 손을 꼭 잡은 영원의 모습을 가리켰다. 이동의 손을 꼭 잡은 영원의 손이 금세 두봉에 가려졌다. 장 태태는 영원의 두봉에 감싸인 채 걸어가는 이동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마차가 이가 저택이 있는 골목에서 돌아 나왔을 때 영원은 말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탔다.
“말타기엔 너무 추운걸. 역시 마차 안이 따듯하군. 왜, 어머니와 조금 더 이야기하지 않고 금방 나와요.”
“어머니가 그러는데…….”
이동은 갑자기 ‘피곤하다’는 말의 다른 의미를 깨닫고는 조금 거북해졌다.
“요 며칠 줄곧 바빠서 힘들었을 거라고 어서 가서 쉬라고 해서요.”
“그럼, 오늘은 별다른 일은 없는 건가?”
영원이 꼼지락대며 옮겨 앉아서는 이동을 끌어당겨 안았다.
“원래라면 어르신의 훈화를 듣고 법도를 배워야 하는데…….”
영원이 이동의 말을 잘랐다.
“우리 집엔 어르신이 없는걸요. 그럼 오늘은 별일 없는 것이고. 내일은요?”
“내일은 어머니가 난녀(暖女: 이바지 물건)를 보낼 거예요.”
“무슨 난? 어머니도 오시나? 형님은?”
영원은 혼례 법도는 하나도 모른다고 할 수 있었다. 북삼로의 법도도 모르는데 하물며 경성 법도는 당연했다.
“아니, 그냥 비단, 향유 같은 걸 보내는 거예요. 받기만 하면 돼요.”
“그럼 장원에 갈까요? 지금 바로! 열흘 휴가인데 벌써 이틀이나 지났잖아요.”
“장원에요? 지금?”
이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 나오자마자 간다고?
“바로 갑시다!”
영원이 발판을 굴렀다.
“마차 돌려라! 장원으로 간다. 대영 있느냐? 저택에 가서 물건을 챙겨서 장원으로 오라고 전해라.”
마차가 다급하게 방향을 틀자 이동이 영원 품으로 쓰러졌다. 어이없어 웃음이 터졌다.
“정말이지…….”
“저택에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올 거란 말이지. 막 아내를 맞은 사람인데 그치들을 만날 시간이 어디 있나. 하늘을 보니 곧 눈이 내릴 것 같은데, 밤이 되면 온천에 몸 담그고 눈 구경하면 딱 좋겠군.”
영원은 신이 나서 이동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눈 구경만 하게요?”
이동이 고개를 돌리고 영원을 흘겨보자 영원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음?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싶은데? 동동, 난 원래 마음이 물처럼 평온했는데 그 한마디에 다 흐트러졌어. 어쩌지?”
“마음이 물처럼 평온한 것도 있어요?”
이동의 얼굴이 붉어졌다.
“있지. 내가 그래요. 동동, 옷이 참 이쁘군. 옷감 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