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상견례
소 사야는 영원이 멀어진 걸 보고 이동을 바라보며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떠난다. 작별 인사하러 왔다. 고맙다는 말도 하고. 예전의 모든 것은 이제 일장춘몽이다. 잊을 수 있다면 잊어라. 영원은 좋은 아이다. 너도 그렇고. 영가 선조가 훌륭한 후손에 훌륭한 며느리를 본다면 매우 기뻐하겠지. 이건 영가 조상의 물건이다. 받아라. 내 선물인 셈 치자.”
소 사야는 엄지 반만 한 물건을 건넸다. 황옥 장식이었다. 이동이 받아들자 소 사야가 살며시 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이동이 얼른 뒤따라가며 물었다.
“고맙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제가 왜…….”
“다 지났다. 모르는 게 낫다.”
소 사야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그런 이야기들, 영원에게 말해줘도 될까요?”
소 사야가 돌아보며 빙그레 웃으며 이동을 바라봤다.
“물론이지. 너에게 해도 되는 말이니, 너도 당연히 영원에게 말해줘도 된다. 걱정할 것 없다. 다 지났다.”
“알겠어요.”
이동이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소 사야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는 돌아서서 각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동이 얼른 쫓아나갔지만,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소 사야는 벌써 저 멀리 가 있었다. 소 사야보다 키가 크고 대나무처럼 꼿꼿한 백의 사내가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았다. 소 사야의 두봉이 펄럭이더니 몇 걸음 만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당신, 괜찮은 거지?”
영원이 몇 걸음 만에 달려와 뒤에서 이동을 안으며 긴장해서 물었다.
“괜찮아요.”
이동은 아직 소 사야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갔나? 왜 온 거지? 정말 괜찮은 거지?”
영원은 이동을 안은 채 이동이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봤다.
“정말 괜찮아요. 소 사야는…….”
이동은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감사 인사하러 왔대요. 그리고 당신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거, 영가 선조의 물건이래요. 내게 선물로 준 거예요.”
이동은 영원의 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영원의 품에 기댄 채 황옥 장신구를 들어 올려서 영원 앞에 내밀었다.
“영가 선조의 물건? 사당에서 훔친 건가? 복백!”
영원은 장신구를 받자마자 크게 고함쳤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복백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이것 좀 봐봐. 잘 봐봐, 이거 본 적 있나?”
영원은 작은 장신구를 복백 앞에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복백은 눈살을 찌푸린 채 이리저리 들여다봤다.
“어쩐지 조금 눈에 익은 것 같긴 한데,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처음 보는데 눈에 익어?”
영원은 장신구를 이동에게 돌려주고 그녀를 품에 안고 뒤를 돌았다.
“춥진 않고? 손이 좀 차요. 손난로 들고 오는 걸 깜빡했네.”
“처음 본 건데, 눈에 익습니다. 이상하군요.”
복백은 영원보다 더 혼란스러운 듯이 이마를 툭툭 쳤다.
“아! 칠야! 생각났습니다! 왜 눈에 익은 건지 생각났습니다!”
“사당에서 훔친 건가?”
영원과 이동이 걸음을 멈추자 복백이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선조의 초상화에서 본 것이라 눈에 익은 겁니다. 초상에 이 장신구가 있었어요! 허리 장식이었습니다. 똑똑히 그려져 있었어요. 매미에 황옥을 두른 것이었습니다. 선조의 몸에 장신구라고는 이것 하나뿐이었어요. 칠야, 기억나지 않습니까?”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영원은 이동의 손에서 황옥 매미를 받아서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 황옥 매미, 언제 잃어버린 것이지?”
“잃어버렸대도 예전에 잃어버렸겠지요. 칠야, 잃어버린 게 아닐 겁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선조의 초상화에 그려진 것인데, 분명 선조께서 아끼는 물건이었겠지요. 잃어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소 사야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영원도 더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장신구를 이동에게 돌려주었다.
“끈으로 엮어서 몸에 지녀요. 선조의 물건이니 분명 좋은 걸 겁니다.”
정북후부에 영원과 이동 신혼부부밖에 없지만 사당을 찾아가 예를 올리는 법도는 조금도 소홀히 할 일이 아니었다. 이동은 신불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두려워했고 영원은 존경은 몰라도 두려워하긴 했다.
날이 밝기 전에 천지 신령에게 절을 올리고, 이어서 주르륵 놓인 영씨 조상 위패에 절을 올리는 것으로 사당에 올리는 예가 끝났다. 이어지는 상견례를 위해 영원과 이동은 궁으로 직행했다. 황상의 명령이었다. 영원이 홀로 경성에 있어서 혼례가 썰렁했던 것이 안쓰럽다고 영 황후와 함께 부모 대신 상견례를 받겠다고 했다.
선덕문으로 들어가 마차에서 내려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상 태감이 벌써 마중 나와 있었다.
“칠야, 칠내내 축하드립니다. 백년해로하시고 부창부수하며 금슬합명(琴瑟合鳴), 거안제미(擧案齊眉)하여 자손 가득 보시길 바랍니다.”
(※금슬합명: 금과 슬, 두 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듯 어우러지는 사이.
거안제미: 밥상을 눈썹 높이로 가지런히 올린다는 뜻으로 남편을 깍듯이 공경함으로써 내외가 서로 신뢰를 쌓고 가정을 화목하게 함을 이르는 말)
“상 태감, 이렇게 문자를 줄줄 읊을 정도로 유식한 줄 몰랐군.”
영원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상 태감이 하하 웃으며 공수했다.
“칠야보다는 떨어지지요. 칠야, 이쪽으로 오십시오. 황상께서 정말로 칠야를 아끼십니다. 오늘은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셨어요. 어제는 소인에게 늦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고요. 칠야의 상견례는 중요한 일이라고요. 태자 전하도 오셨습니다. 태자비도요. 진왕야는 성 밖에서 글공부 중이라 방해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소인이 마중 나오기 전에 장공주도 출발하셨다고 하더군요. 오황자는 진작 오셔서 소인을 붙들고 상견례의 법도를 물으셨습니다. 솔직히 저도 법도를 이제야 알아봤지 뭡니까. 오황자가 북부의 법도는 어떤지도 물으시는데, 아이고, 정말이지 난감했습니다.”
상 태감은 걸어가면서 주절주절 친절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이동은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영원은 수시로 그녀의 손을 꼭 잡거나 손바닥을 꾹꾹 누르고 슬쩍 건들면서 상 태감의 잔말에 입을 비죽이고 싶은 기분을 대신 표현했다.
이동은 여전히 차분히 고개를 숙인 채 단정하게 법도를 지켰지만, 입꼬리가 시도 때도 없이 슬쩍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영 황후 궁의 정전에서 상견례가 치러졌고, 황상과 영 황후가 상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태자의 의자는 따로 빼서 황상의 살짝 아랫자리에 놓여 있었다. 복안 장공주는 오른편 첫 번째, 오황자가 두 번째 자리에 앉고, 맞은편에 자리에 앉지 못하는 태자비는 조금 어색한 모습으로 의자 뒤에 두드러지게 서 있었다. 왼편 끝자락에 하빈이 단정하고 장중하게 앉아 있었다.
영원이 이동의 손을 잡고 정전으로 들어오자 황상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흡족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영 황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선남선녀로군.”
“지극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영 황후는 담담한 표정으로 살짝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태감이 비단 방석 두 개를 놓자 영원과 이동은 우선 황상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동은 만 어멈에게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양지 여의옥을 받아서 두 손으로 바쳤다. 여의옥을 받은 황상은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보고는 흡족한 듯 웃었다.
“칠가아 처가 마음을 썼군. 참으로 좋은 옥이로다. 칠가아, 네 처는 좋은 아이다. 네가 직접 고른 사람이니 당연히 매우 마음에 들었겠지. 앞으로 잘 살고, 밖에 떠도는 뜬소문은 들을 것 없다.”
황상의 당부에 영원이 고개를 숙이며 ‘예!’ 하고 대답했다. 진심에서 우러난 대답이었다.
영 황후는 황상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동에게 시선을 돌리며 소심에게서 비취 팔찌를 받아서 건넸다.
“어머니가 보내온 물건이다. 전해달라고 하더라. 소칠이 어릴 때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허튼짓을 심하게 한다고 앞으로 잘 단속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 아이가 소칠을 단속할 수 있고?”
이동이 대답하기 전에 황상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영원이 얼른 대답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황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님도요. 어머니도 안심하라고 전해주세요. 말 잘 들을 겁니다.”
황상이 껄껄 웃으며 영원을 손가락질했다.
“이런 얼뜨기를 봤나. 잘 들어라, 짐 앞에서 한 말이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절대로 후회할 일 없습니다. 모처럼 절 단속해줄 사람이 생긴걸요. 잘 들을 겁니다. 무슨 말이든 들을 겁니다.”
영원이 다시 다짐하자 황상은 웃으며 어이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영 황후는 여전히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숙인 이동을 바라보다가 영원을 힐끔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복안 장공주는 잔을 내려놓고 영원을 삐딱하게 바라보다가 이동을 바라봤다. 혼인하고 나니 역시 달랐다. 이 두 사람이 주는 느낌이 어딘가 어렴풋이 예전과 달랐다.
태자는 황상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콧소리를 내고는 무시하는 듯 영원을 흘겨보다가 이동을 바라봤다.
영원과 이동은 복안 장공주 앞으로 옮겨가서 영원은 깊이 장읍하고 이동은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장공주는 태연자약하게 다리를 꼰 채 치맛자락을 툭툭 치고는 영원을 바라봤다.
“내 성격이 어떤지, 알겠지.”
영원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니 길게 말하지 않으마.”
복안 장공주는 녹운에게 금감(金嵌) 여의옥(如意玉)을 받아서 이동에게 건넸다.
“이 아이 주는 거지 네게 주는 거 아니다.”
“누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압니다.”
영원은 얼른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이동은 손을 내밀어 여의옥을 받아들고는 울컥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던 오황자는 얼른 단정하게 고쳐 앉고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영원은 이동의 손을 잡고 돌아서서 태자 앞으로 향했다. 태자는 쥘부채를 펼치고 입꼬리를 희미하게 실룩이며 이동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흠잡을 것 없는 모습이었다.
“당부할 것은 황상께서 다 당부했으니 고는 긴말하지 않겠네. 이씨는 재가한 몸이지만, 어찌 됐든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한 혼인이니 황상의 말씀대로 재가이니 어쩌니 하는 객소리는 신경 쓰지 말게. 신경 써도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태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영원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영원은 평온하게 태자를 바라보며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늘어뜨린 손을 내밀어 이동의 손을 잡았다. 이동은 고분고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저 사람이 하는 이런 말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신경 쓰면 객소리로도 사람이 죽을 것이고 신경 쓰지 않으면 그저 소란스러운 소리일 뿐이다.
영 황후는 잔을 들고 눈을 내리깐 채 영원이 이동의 손을 꼭 잡는 것을 곁눈으로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는 막 들어 올리던 찻잔을 다시 상에 내려놓았다. 뚜껑 덮인 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오황자는 태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장공주를 바라봤다.
“사가아의 말이 맞다.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
황상이 부드럽게 말을 잇자 영원은 이동의 손을 잡은 채 돌아서서 고개 숙여 “예!” 하고 대답했다. 영 황후는 미소를 머금고 차를 마시면서 대전 밖을 내다봤다. 복안 장공주는 잔을 들어 올려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오황자는 의문이 생긴 듯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황상을 바라봤다.
영원은 이동의 손을 잡고 태자비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갖췄다. 영원이 말을 하지 않자 이동은 더더욱 입을 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조마조마하던 태자비는 말없이 고개만 조아리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가늠을 끝내기도 전에 영원이 벌써 이동을 데리고 돌아서서 오황자 앞으로 가서 섰다.
막 잔을 내려놓고 단정하고 장중한 모습을 보이려던 하빈은 표정이 굳었다. 곧바로 손수건으로 입가를 누르면서 서러운 듯 황상을 바라봤다. 황상은 애틋한 눈으로 영원을 바라보고 있느라 그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 황후의 매서운 눈빛에 하빈은 가슴이 철렁했다가 금세 진정하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