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속마음
“차가 뭐가 뜨거워서 데겠어요.”
이동은 온몸이 거북해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자니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긴장과 어색함으로 온몸이 굳었다. 영원은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닦아 주고 살짝 떨어진 다음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이야기나 합시다.”
수련과 시녀들은 벌써 조용히 바깥 칸으로 물러나 숨죽이고 있었다.
영원이 살짝 떨어지자 이동은 어지럽고 숨 막히던 압박감이 순간 훨씬 줄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다고 하는 말에 안도하다가 이야기나 하자고 하니 얼른 화제를 찾아 말을 꺼냈다.
“위봉낭더러 내 거처에서 일하라고 했다면서요?”
“그냥 일하라는 게 아니라, 당신 이등, 아니 삼등이 좋겠군. 삼등 시녀로 두어요.”
영원은 어쩐지 이를 갈 듯 그렇게 말했다.
“고작 아라에게 몇 번 물건을 보냈다고 이러는 거예요?”
영원은 큰 등 받침을 가지고 와서 이동의 등 뒤에 놓고 기대보고는 느낌이 별로인지 앞으로 옮겼다가 또 옆으로 옮겼다가 했다. 이동은 그가 한참 적당한 곳을 찾아 옮기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원은 간신히 제일 편한 곳을 찾았는지 등 받침을 하나 더 가지고 와서 기대 누워서 꿈틀꿈틀 편안한 자세를 잡고는 후우 숨을 내뱉으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힘들면 여기 기대요. 우리 편안하게 이야기합시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아라에게 물건 보낸 이야기요.”
이동은 자기 곁에 기대 누운 영원을 바라봤다. 본인은 기댄 거라고 하는데 적어도 보기엔 매우 편안하고 안락해 보였다.
“물건 문제가 아닙니다. 예전에 도적이었다고 이야기했었듯이, 너무 제멋대로입니다. ‘법도’ 두 글자를 가르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요즘 조금 바빠서 잠깐 소홀했더니, 보세요, 난리가 났습니다. 천 리 제방도 개미구멍 하나에 무너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제멋대로 아라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는 걸 가만히 두면 내일은 제가 죽이고 싶으면 사람도 죽일 겁니다. 내버려 둘 일이 아닙니다.”
이동은 영원이 엄숙한 얼굴로 설명하는 것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확실히 그렇긴 했다.
“그런데 나한테 보내는 게 무슨 소용 있어요. 내 거처에 위봉낭이 할 만한 일도 없는데.”
영원은 꼼지락거리며 옆으로 좀 더 다가와서는 한 손으론 이동의 허리춤 끈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건 시녀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일하라고 보낸 게 아니라 당신 시녀들을 배우라고 보낸 거예요. 법도가 무엇인지, 월권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저택엔 당신이 데리고 온 시녀들 말고 법도를 아는 시녀가 없어요. 몇십 년 동안 비어있던 곳이라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앞으로 고생해줘요.”
이동은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 저택엔 몇십 년 동안 주인이 살지 않았다. 내부가 어떤 모습일지 누가 알까.
“이 허리끈에 금사도 섞였나? 이건 무슨 무늬라고 합니까? 올해 가장 유행하는 형식인가?”
영원은 이동의 허리끈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냥 제일 평범한 여의결(如意結: 중국 전통 매듭 중 ‘만사가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뜻의 매듭)을 조금 변형한 거예요.”
이동은 고개를 숙이고 허리끈의 매듭을 바라봤다. 무슨 허리끈을 맸는지 유의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복, 장신구는 대부분 여의결, 여의 무늬였다.
“정말 예쁘군!”
영원은 진심으로 칭찬했다. 정말로 예뻤고.
“치마는 더 예쁘고. 응? 두 겹인가? 초사와 박릉(薄綾) 두 겹이고 위에 꽃을 수놓았군. 색이 참 좋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겁니까? 이것도 올해 최신 유행인가?”
“그런 셈이에요.”
살짝 몸을 숙여 이동의 허리끈부터 치마까지 들여다보느라 영원의 가슴이 이동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당신은 뭘 입어도 아름답지만, 오늘이 제일 아름다워요.”
영원은 치맛자락까지 들여다본 후에 한쪽 팔을 거두고 머리를 받쳤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이동에게 가까이 붙어 있었다. 다른 손으로 이동이 입은 겹옷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직금단? 아닌 것 같은데. 직금단보다 더 부드럽군.”
“주단이에요. 무늬는 같은 색 실을 가장 얇게 쪼개서 수놓은 거고요.”
이동은 편안하게 영원의 가슴에 기대 있었다. 이제 아까처럼 어색하고 거북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대고 있으니 앉아 있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참, 어제 혼수 단자가 들어왔던데, 깜빡하고 확인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힐수방을 혼수로 주셨겠죠?”
영원은 아주 중요한 일을 떠올린 듯 상반신을 기울여 이동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건 왜 물어요?”
이동이 몸을 비틀어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 집에 아마 침선방이 없을 겁니다. 힐수방이 아니면 그렇게 훌륭한 수낭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다른 곳은 다 됐고, 힐수방은 꼭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안 주셨으면 인사 갈 때 형님을 찾아가서 말씀드려야겠어요. 형님이 뭘 달라고 하든, 어찌 됐든 힐수방은 당신을 위해서 찾아와야 합니다.”
영원의 엄숙한 표정에 이동은 진심인지 농담인지 헷갈렸다.
“나와 혼인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예전보다 더 잘 지내야지요. 아주 조금이라도 예전보다 더 잘 지내야 합니다. 체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의 옷가지가 더 중요하지.”
영원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동은 예전보다 더 잘 지내야 한다는 말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잘 지내고 말고는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 모든 면에서 다 좋아야 합니다.”
영원은 뒤에서 이동의 허리에 팔을 둘러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동동, 우리 자등 산장에서 살면 어때요? 난 자등 산장이 좋던데.”
“자등 산장에 살면 조회는 어떻게 가려고요?”
이동은 영원에게 손을 잡힌 채 돌아보며 물었다.
“하긴. 예전이라면 아무리 일러도 일어나지만, 앞으로는 일찍 일어나려면…… 못 일어나지. 그럼 조회에 나가지 않아도 될 때가 오면 자등 산장으로 가서 삽시다.”
영원은 이동의 손을 잡고서 손톱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그러려면 멀었어요.”
이동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 곧입니다. 큰일이 정해지면 궁엔 누님이 있고 조정엔 장공주가 있으니 우리가 상관할 것 없어요. 바로 사직할 겁니다. 사직하고 나면!”
영원은 들뜬 듯이 꼼지락꼼지락 이동을 품에 가둬 끌어안고 웃으며 말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닐까요? 남쪽으로 가장 멀리 온 것이 바로 이 경성입니다. 강남 경치가 그렇게 절경이라던데, 사람은 걸출하고 경치는 아름답고. 우리 강남으로 가 볼까요? 호주부터 가서 외할머님이 말씀하신 청증어도 먹고?”
“정말 사직할 수 있어요?”
이동은 영원의 말이 너무 아름다웠다. 꿈처럼 아름다운 말이었다.
“큰일이 정해지고 나면 안 될 게 무엇입니까. 내가 경성에 계속 남아있으면, 나처럼 재주가 뛰어난 사람에게 조정의 권력이 기울지 않겠습니까? 그럼 안 되지. 누님을 곤란하게 하면 안 돼요. 당신 머리카락에 향기가 나는군요. 계화인가? 아닌데, 합향?”
영원은 이동 머리카락 쪽으로 고개를 내미는 김에 비녀를 다시 뽑았다.
이동은 살짝 굳어서 몸을 조금 틀었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늦은 것 같군. 안고 갈 테니 움직이지 말아요. 우리 북부의 풍습입니다.”
영원은 이동을 안아 올렸다. 이동은 한 손으로 영원이 얇디얇은 단삼을 움켜쥐었다. 덜컥 걱정됐다. 어찌 됐든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머리 장식 내려달라고 해야겠어요.”
이동의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내가 있잖습니까. 부를 것 없어요.”
웅얼거리는 영원의 목소리에 나른함이 느껴졌다. 이동을 침상 자락에 앉히고 천천히 귀걸이를 빼주고 머리 장식을 하나씩 뺄 때마다 한마디씩 물었다. 장신구를 다 빼서 머리카락이 모두 풀려 내려오자, 슬쩍 몇 마디 들어 올려 향을 맡았다.
“향이 참 좋군. 무슨 향을 쓴 거지? 다음에 나도 이걸 써야겠어요. 빗 가져 와서 빗겨 줄 테니 기다려요.”
영원은 맨발로 내려가서 빗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휘장을 하나씩 내렸다. 이동은 폴짝폴짝 뛰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막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영원이 흔들어 깨웠다.
“동동, 일어나요.”
“응? 시간 됐나요?”
이동은 가물가물 눈을 떴다. 막 눈을 감은 참이었는데. 졸리고 힘들었다.
“아직이요. 그런데 소 사야가 왔습니다. 이야기했었는데, 기억합니까? 아버지가 구해서 우리 사당에서 십몇 년 살았다는 그 소 사야.”
영원은 이동을 안아 일으켜서 옷을 입혀주며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영원의 말, 그보다 영원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진지함과 긴장감에 이동은 잠이 달아났다.
“이런 시간에 왔어요? 무슨 일이에요? 왜…….”
소 사야가 왔는데 그녀는 왜 깨운 걸까? 무슨 일이 생겼기에.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수상쩍어요. 후각문에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겠답니다. 당신만 만나겠대요. 소세하고 단장하게 시녀를 부를까요?”
영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도 속은 조마조마했다. 소 사야가 동동을 만나겠다고 한다. 동동을 만나서 무얼 하려고.
“응, 나를요?”
소 사야가 콕 짚어서 자신을 만나겠다고 했다는 말에 이동도 조마조마해졌다. 그녀의 괴이한 과거 때문에 만나려고 하는 걸까? 무엇을 하려고? 이 세상에 살면 안 되어서? 강환장은 이미 사라졌는데…….
그 생각에 이동은 손가락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내가 있어요.”
영원은 이동의 차가운 손가락을 꼭 잡고 눈썹을 까딱이며 웃어 보였다. 불안해하지 말라고 달래는 듯이. 혹은 자신의 당황을 감추려는 듯이.
이 세상에서 그가 거리낌이 들고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소 사야가 첫 번째일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고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기가 그를 두려워하는 걸 안다.
안으로 들어온 수련과 녹매는 영원과 이동이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걱정하는 모습을 민감하게 느끼고는 덩달아 조마조마해져서 살금살금, 민첩하게 이동과 영원의 소세, 환복 시중을 들었다. 영원은 두꺼운 자초 두봉을 골라 이동에게 둘러주고 자기는 수련이 내미는 두봉을 매우 성가신 얼굴로 밀어냈다.
“난 됐다. 따라올 것 없다.”
수련과 시녀들은 입구에서 서서 영원이 한 손을 이동의 허리춤에 두르고 다른 손으로 두봉을 여며주면서 두 사람이 함께 회랑을 돌아 후원으로 가는 걸 지켜봤다.
대영은 등롱을 들고 정원 후각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이 나오자 허리 숙여 예를 갖추고는 앞장섰다.
정북후부 후각문 안엔 복백과 대웅, 최신을 비롯해서 이동이 처음 보는 중년 사내 몇 명이 공손히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 적당한 키에 앙상하고 창백한 젊은이 하나가 백주 원단에 여우 털을 댄 두봉을 입고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소 사야? 이동은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 사야는 가장 먼저 영원과 이동을 발견한 듯 살짝 돌아섰다. 그리고 딱 붙어서 다가오는 영원과 이동을 감상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영원과 이동이 다가가자 복백이 손을 휘두르며 대웅 등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서 걸음을 멈추고 공손히 기다렸다.
“너도 물러가라.”
소 사야가 영원을 가리키며 온화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영원의 눈썹이 순간 높이 올라갔다. 이동은 영원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법사를 만난 요괴가 된 기분이었다. 그가 자기를 거둬가면 다시는 영원을 만나지 못한다.
“걱정하지 마라.”
소 사야는 영원을 꼭 붙들고 있는 이동의 손을 슬쩍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갈수록 미소가 짙어지면서 따듯한 느낌이 밀려들자, 이동은 순간 마음이 놓였다. 영원도 묘하게 마음이 진정되어서 이동의 손을 놓고 한 걸음씩 뒷걸음쳐서 복백과 그리 멀리 않은 곳으로 가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