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너무나 다른 길
태자는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버럭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태자로서는 화를 내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강가의 천륜을 거스르는 악행이 폭로된 다음 날, 계 천관은 병가를 내고 며칠 만에 간곡한 사직 상주를 올렸다. 백 노부인은 보록궁으로 두 번이나 달려갔고, 그 상주는 장공주 서안에서 사흘 머무르다가 한 바퀴 돌아서 윤허와 함께 계 천관 손으로 돌아갔다. 계 천관은 며칠 안에 조용히 경성을 떠나 구름처럼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종친 여식들의 일은 복안 장공주의 분부인 데다가 영 황후의 손을 거친 일이라, 양 숙비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 서둘러 처리했다.
양 숙비는 며칠 만에 종친 여식들의 거취를 타당하게 처리했으며, 영 황후와 복안 장공주가 허락하면 그대로 처리하겠다고 고했다.
복안 장공주가 양 숙비에게 종친 여식의 거취를 처리하게 한 것엔 분명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 황후는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연유를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영 황후는 양 숙비의 처리에 아무런 태도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종실의 일은 전혀 모르니 복안 장공주를 찾아가라고 했다.
양 숙비가 보록궁에 도착했을 때 이동이 벌써 와 있었다.
수녕백 강가의 일로 진왕이 연루된 지 며칠 안 되었을 때고, 양 숙비는 요 며칠 내내 초조하게 애를 태웠다. 그런데 지금을 이동을 만나니 곧바로 강가가 떠오르고 아들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이동을 힐끔거렸다. 뱃속 가득한 원망이 저도 모르게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양 숙비가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통해 그녀를 살피던 복안 장공주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양 태후를 십여 년 동안 곁에서 모신 이동은 그녀의 마음을 사려고 적잖게 공들여 그녀의 성격, 품성을 가늠했었다. 지금 양 태후의 얼굴을 살필 것도 없이, 진왕이 골탕 먹은 일로 자신을 탓할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게다가 분명 가장 큰 잘못을 그녀 탓으로 돌릴 것이다. 이동은 잘못을 남 탓하는 양 태후의 희한하고 괴상한 사고 회로를 잘 꿰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이해는 할 수 없었다.
복안 장공주는 이동이 일어서서 예를 갖추는 걸 바라보며 양 숙비에게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이동이 차를 내려주고 다시 자리에 앉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다 됐습니까?”
양 숙비가 급히 잔을 내려놓고 웃음 지었다.
“예, 모두 종친 여식이라 귀한 분들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거취를 잘 마련해야지요.”
이동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그을렸고, 복안 장공주는 가볍게 그러냐며 웃어 보였다.
“영 황후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황후마마는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종친 여식 일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요.”
양 숙비는 곁눈으로 이동을 힐끔힐끔 살폈다. 아들 생각에 자꾸 정신이 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복안 장공주는 영 황후가 이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게 묻지 않았다.
“음, 그래서 어떻게 처리했나요. 자세히 말해 보세요.”
양 숙비로서는 조금 뜻밖이었다. 이 종친 여식들은 기껏해야 성이 ‘임’이라는 것 말고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다섯이고, 셋은 아직 어립니다. 부모 형제 없는 분도 한 분 있지만, 어찌 됐든 숙부며 백부는 있습니다. 좋은 상대를 골라주라고 했고요. 그리고 둘은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여인네가 무슨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좋은 상대를 찾아서 어떻게든 거취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양 숙비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하는 거취란 좋은 상대를 찾아 혼인시키는 것이란 말인가. 하긴, 전에도 그랬지. 혼인하면 다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모두 혼처를 찾아줬단 말입니까? 모두 혼인하라고요?”
복안 장공주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간신히 모두 상대를 찾아주었지요.”
양 숙비가 한숨을 돌리며 대답했다.
“모두 다섯 명이고 나이는 열아홉에서 마흔일곱인데, 무슨 일로 종정시에서 상주를 올린 건지, 알아는 봤고요?”
복안 장공주의 물음이 조금 쌀쌀맞아졌다. 양 숙비는 얼떨떨해졌다.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라고 상주서에 쓰여 있지 않습니까?”
빤히 바라보는 장공주의 시선에 양 숙비는 온몸이 거북해졌다.
“가장 어린 사람도 열아홉이나 되었는데 아직 혼인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다 기댈 곳이 없어서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인이란…….”
“알겠습니다. 일단 두세요. 나중에 상세히 알아보고 다시 이야기하지요.”
복안 장공주는 양 숙비의 말을 무질렀다. 아까보다 훨씬 온화해진 모습이었다.
양 숙비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일어서서 물러가겠다고 인사하고 걸음을 내딛다가 돌아섰다. 망설이는 얼굴에 복안 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삼가아는 괜찮을 겁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양 숙비는 크게 안도하고 저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고는 불안한 듯 덧붙였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제 말은, 글공부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가다듬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복안 장공주는 들릴 듯 말 듯 대답하고는 양 숙비가 밖으로 나가는 걸 바라보다가 창문 너머로 그녀가 뜨락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런 무지렁이를 봤나…….”
복안 장공주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건 어떤 자리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져요. 예전에 주 귀비도 어리석다고 하셨었잖아요. 어리석으면 어때서요? 결국 장공주도 귀비를 피해서 성 밖으로 가셨었잖아요.”
“주 귀비를 피하려고 성 밖으로 간 게 아니야!”
복안 장공주가 곧바로 대답하고는 한참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총명한 사람은 고려할 게 많아서 이리저리 가늠하느라 발이 묶인다고 계 노승상이 항상 말씀하셨어. 오히려 생각 없는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을 잘 성사한다고. 어릴 때라 아무리 생각해도 틀린 말 같았는데, 지금 보니…….”
“근본 없는 권법으로 사부를 때려죽이는 법이라고 저희 외할머니도 자주 말씀하셨어요.”
이동의 말에 복안 장공주는 생각이 많은 듯했다.
“맞아. 덕행에 어울리지 않은 자리를 누리는 것도 악행이지. 덕행뿐만 아니라 머리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고. 됐어.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혼수 준비는 다 되었고?”
“거의요. 저도 그 사람도 너무 거창하게 할 생각이 없어서 그냥 평범하게 준비할 생각이에요. 그래서 별로 준비할 것도 없어요.”
“너무 이것저것 고려할 필요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활개 치면서 하면 또 어때서?”
“그냥 거창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창하게 하지 않는 것도 하고 싶은 대로 활개 치고 하는 거잖아요.”
복안 장공주가 흘겨보며 하는 말에 이동이 웃으며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는 헛웃음 쳤다.
“하긴. 그럼 혼롓날 나도 가, 말아? 나는 중매인인데?”
“이가로 오실 거예요, 아니면 영가로 오실 거예요?”
이동이 되묻는 말에 복안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안 갈래. 영원 그놈 얼굴 보기 싫어.”
이동은 웃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은 갈수록 조회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궁중에서든 조정에서든 황상이 강녕하고 일체 평안하다고 한결같이 입 모아 말하지만, 황상의 실제 상황이 어떤지 알 만한 사람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황상은 스스로 갈수록 정력이 넘친다고 여겼고, 갈수록 낮에 졸리고 정신이 떨어지는 것도 그저 그동안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이고 조금씩 회복 중이라고 믿었다.
태의원을 통틀어도 황상의 그 자신감을 까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엄두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밝힌다고 해도 까발려지리란 보장이 없었다. 황상은 어떤 방면으로는 언제나 자부심이 넘쳤다. 예를 들면 예전엔 주 귀비에 대해서, 지금은 하빈에 대해서 그랬다.
황상 앞에서는 항상 얼버무리며 호응하는 태의원도 복안 장공주와 대신들 앞에선 사실을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랬다가 산이 갑자기 무너진 후에 뭐라고 해명한단 말인가.
온 조정이 황상이 갈수록 몸이 안 좋아지는데도 본인이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조마조마해했고, 모두가 경성, 심지어 온 천하가 태평하길 바라는 바람에 원래라면 떠들썩해야 마땅할 몇 번의 친영례도 희한할 정도로 조용하게 치러졌다.
이동이 정북후부에 들어가는 그날, 혼수도 백여 대(擡), 경성 부유한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조용히 이가에서 정북후부로 들어갔다.
이동과 이가는 실속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거창하지 않게 치르려 했지만, 영원은 사실 가능하면 온 세상이 자기가 아내를 맞이하는 걸 알도록 떠들썩하게 치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동이 싫다고 하니, 자기는 원래 거들먹거리는 걸 싫어하고 조용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국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복안 장공주의 보록궁이 자극전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온 조정 위아래 모두가 알지만 입에 올리지 않는 일이 되었고, 장공주의 유일한 지기인 이동이 조용히 치르고 싶어 하지만……, 그게 어찌 가능하겠나. 혼례 두어 달 전부터 줄이 닿는 사람, 닿지 않는 사람 할 것 없이 몇 다리를 거쳐서라도 공들여 준비한 선물을 혼수에 보태려고 애를 썼다. 이가가 부유하다지만, 혼수를 보태는 건 원래 성의를 보이려고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영원의 줄을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은 더더욱 많았다.
강가가 멸문해서 사라지고, 진왕은 글공부하러 성 밖으로 떠났다. 태자는 여전히 태자 자리에 있지만, 조정에 널리고 널린 게 총명한 사람이었다. 아니, 조정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모두 총명한 사람이라고 해야 옳다.
황성사는 몇 달 만에 영원의 손아귀로 들어가서 영원이 손 하나만 까딱해도 돌아갔고, 외부에 얼굴을 내미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오황자는 듣자 하니 보록궁에 머무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고 했다. 한림원 수업도 줄이고 묵 승상, 여 승상, 초 승상을 비롯한 대신들이 번갈아 가르친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점들이었다.
그렇게 영원이 성혼하는 날이 되자, 부지가 넓기로 소문난 정북후부가 처음으로 비좁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달 전 계 탐화의 혼례 영친 행렬엔 온 경성의 재자가 거의 모였다면 영원의 영친 행렬엔 어전시위 중 용맹한 미남이 모두 모였다. 쌍쌍이 서서 몇십 명 줄지어서 선 사내들이 어찌나 잘생겼는지 차마 골탕 먹이기 아까울 정도였다.
옥묵은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서 까치발을 들고 열심히 앞으로 밀치고 나갔다. 반나절 청가한 이유가 바로 이가 대낭자가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강가가 무너진 후로 비로소 밖을 돌아다닐 용기가 생겼다.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어리석어도 목숨을 구해주고 사람답게 살게 해준 사람이 바로 추미와 소유, 그리고 이가 대낭자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가 대낭자의 큰 은혜는 이번 생엔 갚을 길이 없고, 그저 이가 대낭자가 성대하게 혼인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녀가 이렇게 잘 지내는 걸 보고, 앞으로 더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갈 곳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옥묵은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신랑 빈상들보다 훨씬 더 잘생긴 영 칠야가 말을 탄 늠름한 모습과, 영 칠야 뒤로 온 경성을 헤집고 다녀도 이보다 더 좋은 걸 구하지 못할 정도로 화려한 꽃가마를 바라보며 가슴 앞에 양손을 꼭 부여잡고 감동해서 눈물을 철철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