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폭로
“아악!”
진씨는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일어나 앉았다.
“왕비!”
각탑에서 잠든 대시녀 옥청이 허둥지둥 일어나더니 명염을 불렀다.
명염이 허둥지둥 등을 들고 다가왔다. 진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익숙한 실내를 멍하니 바라봤다. 옥청을 바라보다가 볼록 나온 배를 내려다봤다.
내가, 악몽을 꿨구나.
진씨는 옥청이 대준 등받이로 천천히 몸을 기대면서 배를 쓰다듬었다.
“무슨 시진이냐? 왕야는?”
“자시입니다. 왕야는 오늘 바깥 서재에서 쉬신다고, 푹 쉬시라고 기별하셨습니다.”
옥청이 나긋나긋 대답하자 진씨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를 보는 건지 망연한 눈빛이었다. 마음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명염.”
한참 만에 진씨가 살며시 불렀다. 명염은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걱정되고 두려운 얼굴로 진씨를 바라봤다. 왕비는 요 며칠 내내 불안정해 보였다. 왕야는 벌써 며칠 동안 왕비에게 들르지 않았다.
진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사람을 불러 너를 북쪽으로 보내주마. 북으로 가거라. 오라버니에게 부탁해서 좋은 사람을 찾아 맺어주마. 앞으로 잘 살아라. 이런저런 모든 것을, 다 잊어라. 깨끗하게 잊어라.”
“예. 이 큰 은혜를, 큰 은혜를…….”
진씨가 빤히 바라보며 하는 말에 명염은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이래 살지 못할 것으로 여겼었다. 이미 준비도 끝냈다. 왕비의 명령만 떨어지면……. 그런데 이렇게 말씀해주실 줄이야.
“명염의 일은 네가 준비해라. 일단 병을 고하고, 요양해야 한다고 내보내라.”
진씨가 다시 옥청에게 분부했다. 옥청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 역시 영리한 사람이라, 무슨 일인지 몰라야 했다.
“적당한 사람을 찾아서 힐수방에 보내고 이가 대낭자가 올 때까지 지켜라. 대낭자를 좀 만나야겠다. 옷 몇 벌 골라달라고 해야겠어.”
진씨가 이어서 분부하는 말에 명염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엎으려 고개를 조아렸다. 왕비는 무사하실 거야.
진 왕비를 배웅한 이동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뜨락에 서 있었다. 한참 만에 겨우 돌아서 고개를 숙이고 실내로 돌아갔다.
강환장, 미쳤구나!
“낭자?”
이동과 진 왕비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멀리서 지켜보던 수련은 갈수록 창백해지는 이동을 보며 겁에 질렸다.
“괜찮아. 넌 청국과 함께 계속 옷감을 골라. 녹매, 넌 따라와. 보록궁에 다녀와야겠어.”
이동이 나지막이 분부하자 수련은 재빨리 대답했고 녹매는 이동을 따라 후원으로 가서 마차를 타고 보록궁으로 향했다. 수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다스린 다음 계속 옷감을 골랐다.
“응? 왜 다시 돌아왔어? 일찍 돌아가서 혼수에 쓸 옷감을 고른다며?”
복안 장공주는 이동이 들어오자 붓을 내려놓고 놀리듯이 물었다.
“일이 좀 있어요.”
이동은 그리 좋지 않은 안색으로 녹운을 바라봤다.
“장공주와 이야기할 게 좀 있어.”
녹운은 얼른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장공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모두 물러가라고 분부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데?”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살폈다.
“조금 전에 진 왕비 진씨가 힐수방으로 절 찾아왔어요.”
이동은 진씨가 아까 한 말을 토씨 하나 빠짐없이 전했다.
“그런 일을 상상한 적도 없다고, 일가가 평온하게 평생 살기만을 바란대요.”
복안 장공주는 가늘게 떴던 눈을 제대로 뜨고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네 생각은 어때? 혼백이 다시 돌아온다는 말, 진짜일까 가짜일까?”
“혼인하라는 성지가 정말로 내려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동은 장공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입술을 꾹 다문 복안 장공주의 안색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알겠어. 넌 이만 돌아가.”
한참 만에, 복안 장공주가 별안간 분부했다. 이동이 일어서서 막 걸음을 내딛는데 복안 장공주가 다시 불렀다.
“아직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어. 혼백이 다시 돌아온다는 일, 넌 어떻게 생각해? 진짜일까 가짜일까?”
이동은 움직이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잠시 서 있다가 나직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장공주께서 진짜라고 생각하면 진짜고 가짜라고 생각하면 가짜겠죠.”
한참 만에 장공주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고마워.”
이동은 돌아보며 장공주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금세 다시 시선을 피하고 예를 갖추고 돌아서서 나갔다.
녹운은 회랑에 서서 이동이 돌아간 후에도 다리가 시릴 때까지 서 있어도 장공주가 부르지 않자 조마조마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녹운이 더는 못 기다릴 것 같아 조바심 내는데,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어제 종정시(宗正寺)에서 보낸 상주 꺼내서 영 황후에게 보내. 상주서에 이름 오른 종친 여식들을 어떻게 할 건지, 신경 좀 쓰라고 양비에게 전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쭙더라고 해.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상주서를 양비에게 전하고.”
녹운은 살짝 안도하며 직접 상주서를 찾아서 품에 안고 영 황후를 만나러 갔다.
“여봐라, 요 상궁을 불러라.”
잠시 후, 실내에서 다시 분부가 떨어졌다. 시녀들이 서둘러 요 상궁을 불러왔다. 잠시 후, 요 상궁은 실내에서 나와 보록궁을 나갔다.
진왕이 올린 탈정 상주서를 예부에서 돌려보냈지만, 강환장은 그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며칠 전에 황상이 모처럼 조회를 열었는데 진왕이 조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다가 온몸을 꽁꽁 감싸고 고개를 숙인 채 걷던 사환이 말 앞다리에 부딪히고 말았다. 별일도 아니라서 진왕도 따질 생각이 없었는데, 사환이 고개를 들더니 진왕을 보자마자 냅다 달아났다. 그렇게 당황해서 달아나다가 거리에서 유명한 무뢰배 주흑피와 된통 부딪히고 말았다.
이틀 동안 끼니가 끊겼던 주흑피는 어렵게 시빗거리가 생기자 대뜸 사환을 붙들고 자연스럽게 진왕의 말 앞으로 굴러왔다. 이런 일이 생겼는데 은자 몇 냥 뜯어내지 못하면 주흑피의 명성에 미안할 일이었다.
진왕과 관련된 일이라, 경부 관아의 아전이 날 듯이 도착했다. 사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은자 몇 냥 물어주면 될 일 아닌가. 진왕은 벌써 은자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일을 무마하면 될 일이었다. 그는 일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사환이 옷으로 얼굴을 단단히 가리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너무나 수상했다. 아전 몇이 합심해서 얼굴을 가린 옷을 걷어내고 사환을 일으켰더니 수녕백부 종복인 서가아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바로 있었다.
수녕백부 종복이라는 말에 진왕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수녕백부 종복이 왜 자신을 보고 그렇게 놀란단 말인가. 왜 달아난 것일까? 의아한 일이 생겼으니 물어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웬걸, 서가아는 자기가 수녕백부 종복이라는 것을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알아본 구경꾼도 끈질긴 사람이었는지 낱낱이 설명했다.
경부 관아 왕 추관은 식견 넓고 경험 많은 능구렁이라서, 몇 마디 물어보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깨달았다. 서가아 일가가 수녕백부에서 달아난 것이었다. 도망 노비이니 진왕이 자기를 알아볼까 봐 무서울 수밖에. 들키면 잡혀가서 죽지 않더라도 죽을 정도로 맞을 터이니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만도 했다.
사실 이것도 별일은 아니라서, 왕 추관이 진왕에게 보고하고 서가아를 수녕백부로 돌려보내려고 아전 둘을 부르는데, 서가아가 거리에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제 어미가 수녕백 세자 강환장과 부인 곡씨가 수녕백 부인 진씨를 죽이는 걸 보고 말아서 입막음 당할까 봐 달아난 것이라고 고함쳤다.
그 고함에 주변이 술렁였고, 진왕은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왕 추관은 속이 다 뒤틀리는 듯했다. 힘만 들고 좋은 꼴은 못 보는, 여기저기 난처해질 이런 사안이 하필 자신에게 떨어지다니!
공훈 가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을 통틀어도 이런 천륜을 거스르는 큰 사건은 몇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 사건으로 온 경성이 쑥대밭이 되었고, 각종 추문과 뜬소문이 들끓었다. 거기에 각자의 상상까지 더해서 갈수록 떠들썩하게 퍼져나갔다.
이런 사안은 즉시 위로 보고될 일이었다. 왕 추관이 위로 올리자 형 부윤도 즉시 올리고, 형부에서도 서둘러 보고해서 묵 승상 손에 들어갔다. 묵 승상 역시 즉시 위로 보고해서 두어 시진 만에 황상과 장공주 손으로 들어갔다.
장공주는 상주서를 슬쩍 훑어보고는 콧방귀 뀌며 저쪽으로 내던졌다. 말썽거리를 그럴싸하게 수면으로 올리는 일에서 영칠 이놈은 그야말로 적극적이었다.
황상은 화가 나서 상주서에 구멍이 뚫릴 듯이 붉은 칠을 해댔고, 반드시 직접 맡아서 진상을 확실히 조사하고 율법대로 엄벌하라고 묵 승상에게 분부했다.
강환장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알아보기도 전에 수녕백부는 겹겹이 포위되었다. 온 저택 위아래, 몰락한 수재를 붙들고 글짓기를 하던 수녕백부터 부엌에서 불을 지피던 허드렛일 어멈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몽땅 옥에 갇혔다.
소식에 밝은 추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흥분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문 이야의 뜨락으로 곧바로 달려가다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서서 효풍원으로 달려갔다.
효풍원 뜨락 앞에 도착한 추미는 침착해질 때까지 호흡하며 숨을 고른 후에야 단정한 모습으로 들어가 상방 문 앞에 서서 뵙길 청했다.
이동은 마침 수련, 시녀들과 탑상 가득 무늬 견본을 늘어놓고 고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추미는 탑상 위의 견본을 고개를 빼고 바라보다가 이동과 수련, 녹매를 번갈아 보고 다시 이동에서 수련, 녹매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추미의 그런 모습에 녹매가 눈을 흘겼다.
“내 얼굴에 무늬가 있어? 아님, 수련 언니 얼굴에 무늬가 있나?”
“아니, 그게……. 뭐냐, 밖에…….”
추미는 혀가 꼬였다. 멸문할 만한 큰 사건이 강가에 일어났는데 이렇게 들뜬 건 너무 교양 없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밖에 왜?”
수련이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밖에, 뭐 별일은 아니고, 난 그저…….”
더듬더듬 말하던 추미는 춘연을 떠올렸다.
“낭자께 춘연 이야기를 좀 하려고…….”
“춘연은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낭자, 알고 계셨어요?”
이동이 견본을 골라 수련에게 건네며 하는 말에 추미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너도 아는 일을 낭자가 모르시겠어? 저택에서 너무 편안히 살아서 갈수록 멍청해지는 것 같다, 너. 나중에 다시 일하게 되면 분명 고생 좀 하겠어!”
녹매가 추미의 이마를 톡 때렸다.
“그건 그래.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사실 흥분할 것도 아니야. 난 그냥 춘연 때문에…… 오늘 글씨 공부가 아직 남아서, 난 이만 갈게. 낭자, 저 물러가요.”
추미가 머쓱하게 웃으며 돌아서자 이동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 숙이고 무늬를 골랐다.
장공주의 일 처리가 갈수록 벼락같고 매서워졌다.
대리시(大理寺) 뒤쪽, 매우 협소한 감옥에 수녕백부 윗전, 종복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몇십 명씩 전부 던져져 들어가 있었다. 몽땅 가둘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구분해서 가둘 수도 없었다.
먼저 던져진 편인 강환장은 맨 안쪽에서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서서 잇달아 들어오는 가족과 종복들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