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진위
“말씀하시게.”
계 천관은 어두운 눈빛으로 강환장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황상, 황상께서 절 돌려보내신 겁니다.”
강환장이 진왕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마디 했다. 황상이란 말에 진왕은 겁에 질려 등을 등받이에 바짝 붙이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강환장을 바라봤고, 계 천관도 넋이 나가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너무나 무서운 말이었다.
강환장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려 진왕을 바라봤다. 그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고는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자는 올해를 넘기지 못합니다. 태자가 죽고 다음 달에 왕야가 태자가 되십니다. 연말에 황상이 승하하시고 왕야가 즉위합니다. 연호는 건흥입니다.”
진왕은 꺽꺽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미친 듯이 팔걸이를 부여잡았다. 팔걸이를 잡은 손등의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내가 태자가 된다? 내가 황상이 된다? 나의 연호가 건흥?
계 천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럼 장공주는? 감국은?”
계 천관은 상체를 기울이며 긴장한 채 물었다. 강환장은 힐끔 그를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건흥 원년 2월, 양 태후께서 의지를 내려 장공주에게 혼사를 정해준 후 장공주는 금을 삼키고 자진합니다.”
“뭐라고?”
계 천관은 귀를 의심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강환장은 계 천관이 너무나 놀라서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태후가 두 분이란 말인가? 그럼 다섯째는?”
진왕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영 황후는 스스로 술을 받아서 선제를 따라갔습니다. 오…… 크흠, ……는 불가와 인연이 있어 대상국사 청공 큰스님이 데리고 갔습니다. 나중에 과연 불법을 깊이 깨우쳐 좌화(坐化: 앉은 채로 죽다. 승려의 죽음을 말함)했습니다.”
강환장의 목소리는 입에서 꺼내면 곧바로 공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듯이 매우 가볍고 느릿느릿했다.
얼굴을 찌푸린 계 천관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태자는 어찌 죽었는가?”
영 황후가 죽고 오황자가 출가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가슴이 철렁하던 진왕은 계 천관의 말을 들었는데 못 들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강환장은 진왕을 힐끔 보고는 계 천관을 바라보며 주저하다가 얼버무렸다.
“두 용의 쟁투로 두 분이 모두 다쳤습니다.”
“두 용? 오황자? 영가?”
지금 상황에서 두 용이라고 하니 계 천관은 당연히 오황자와 영가를 떠올렸다. 강환장은 그런 듯 아닌 듯 그렇다고 대답했고 계 천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강환장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물었다.
“주가는?”
강환장은 계 천관을 힐끔 보고는 아직도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진왕을 바라보며 대답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계 천관의 시선이 강환장을 따라갔다. 자제하지는 못하고 격앙된 진왕의 모습에 순간 속이 메스꺼워졌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모험과 위험은 조금도 감당하지 않으려 하면서 매일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길 기대하고 꿈꾸고 있지 않은가.
계 천관은 진왕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강환장을 빤히 봤다.
“아까, 황명을 받고 돌아왔다고 했는가? 무슨 큰일이 있었기에 그런 황명을 받았는가?”
진왕도 그 말은 들었다.
“그래. 무슨 큰일이기에……. 자네를…….”
진왕이 다급하게 강환장을 바라봤다. 혼백이 다시 돌아온다는 이런 이야기는 전엔 전기 소설에서나 조금 읽었었다. 이건 신선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재주를 강환장의 혼백을 돌려보내는 데 쓰다니. 그런 법력이 있는 신선이 있다면 장생불로를 청했겠지. 무슨 큰일이기에 강환장의 혼백을 돌려보내기로 결정 내렸을까?
이런 질문을 진작 예상한 강환장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서서 입구로 다가갔다. 그러고 휘장을 젖히고 주변을 둘러봤다. 진왕부는 진 왕비의 다스림에 안팎이 유별하고 질서정연했다. 지금 이 의사청이 있는 작은 뜰은 온통 고요했고, 사환, 종복들은 모두 뜨락 밖에 공손히 서 있었다.
강환장은 휘장을 고리에 걸고 돌아와서 앉으며 또 한숨을 내쉬었다.
“왕비가 지금 회임한 아이는 왕야의 장자입니다. 두 살이 되는 해에 태자로 봉해집니다. 왕야는 진 황후를 경애하고 존중하고 태자를 총애하시는데……. 후!”
강환장의 표정이 순간 분연하고 처량해졌다.
“건흥 14년, 황상께서 후궁을 채울 때 조 귀비가 입궁합니다. 조 귀비는 온순하고 현숙한 분이라, 황상께서 매우 총애하십니다. 건흥 16년, 조 귀비가 육황자를 생산하는데 육황자가 매우 영특하고 총명하고 태생적으로 인자하고 후덕해서 황상이 매우 아끼십니다. 육황자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학식이 풍부하고, 예와 어짐으로 서생들을 대하니, 그 인자하고 후덕한 마음을 조정 안팎이 칭송합니다.”
계 천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강환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태자는…… 후! 황상께서 진 황후와 진씨 일족을 지극히 신임하시고 궁중과 경성 안팎을 모두 진씨 두 형제에게 맡겼는데 건흥 29년부터 진씨 일족이 퇴위하고 천수를 누리라고 황상을 핍박합니다. 건흥 30년, 진씨 형제가 황상이 보는 앞에서 육황자와 조 귀비의 목을 베어 죽이는 바람에 황상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강환장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육황자와 조 귀비의 목을 벤 것은 진씨 형제가 아니라 진 황후였다. 진씨가 지옥에서 걸어 나온 악귀처럼 서슬 퍼런 칼로 조 귀비의 목을 긋고 육황자의 목을 긋는 걸 똑똑히 봤다. 두 사람의 피가 황상의 온몸에 튀었었다.
계 천관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얼마나 원한이 크기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황상 앞에서.
진왕은 양손으로 팔걸이를 붙잡고 몸을 떨었다.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진씨가 어떻게 그런 짓을. 진가 형제는…….
“허튼소리!”
계 천관이 더는 참지 못하고 호통쳤다. 강환장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구부려 이마를 두 무릎에 댄 채 어깨를 흔들어대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날의 두려움이 그날처럼 다시 그를 에워쌌다. 몇만 마리 개미가 함께 심장, 온몸을 물어뜯을 듯이 후회가 몰려들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다. 문 이야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또 한 번 벌어진 쟁투에서 공을 세우려 망상을 품지 말아야 했다. 그 여인을, 그 여인을 만만하게 봐선 안 됐다. 그녀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강환장은 그 후회와 고통에 깔려서 무너질 것만 같았다. 억제하지 못한 고통스러운 흐느낌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계 천관은 더 이상 호통칠 수 없었다. 아마도 저자의 말은 헛소리가 아니리라.
계 천관이 우물거리며 말의 방향을 바꿨다.
“자네를 돌려보낸 것은, 자네더러, 무엇을 하라고 자네를 돌려보낸 것인가?”
“황상께서는…….”
강환장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육황자에게 미안하고, 조 귀비에게 더 미안하다고.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든 다시는 조 귀비를 궁에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강환장은 다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귀비는 무위현 조 현승의 막내딸입니다. 올해 벌써 두 살이고요. 일찍 좋은 혼사를 마련해주고, 평생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계 천관의 미간이 여전히 단단히 좁혀져 있었다. 고개를 들고 진왕을 바라봤더니, 진왕도 강환장과 만만치 않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왕은 강환장과 계 천관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달싹이다가 또 눈물을 철철 흘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오늘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계 천관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설령 혼백이 돌아온 이 일이 사실이라도 하더라도, 지금 그가 말한 인과 중에 진위가 얼마나 있을지, 누가 알겠나.
“며칠 전에 그 큰스님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진왕 곁을 너무 오래 떠나 있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변고가 생긴다고요.”
강 환장은 계 천관을 보지 않고 오로지 진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탈정하겠다는 것인가?”
계 천관이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강환장도 그 비아냥거리는 기색을 읽었지만 상대하지 않고 오로지 진왕을 바라봤다.
“자네를 돌려보낸 그 큰스님 말이냐?”
역시나 진왕의 관심은 계 천관과 달랐다. 강환장이 고개를 끄떡이자 진왕은 계 천관을 돌아봤다.
“나는 소화의 말이 실로……. 계 천관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혼백이 돌아온 일 말입니까? 아니면 탈정 말입니까?”
계 천관이 되물었다.
“그 두 가지 모두 같은 일이지요. 소화의 말대로라면 소화가 오래 내 곁에 없으면 변고가 일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왕은 조금 초조해졌다. 변화가 생기면 황상이 되지 못하는 거 아닌가.
“강 장사는 진왕부 장사입니다. 왕야께서 강 장사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여기시고 탈정해야겠거든 왕야께서 직접 요구하셔야 합니다.”
거리낌이 조금 생긴 계 천관은 매우 완곡하게 말했다.
“아마, 예부 쪽에 이야기해야겠지요?”
진왕이 묻는 말에 계 천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왕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가겠습니다. 예부와 이부에 알리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소화가 상주를 쓰고 내가 인장을 찍어 올리도록 하지요.”
밖으로 나간 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갈수록 멀어지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화로 위 주전자가 끓는 소리만 보글보글 들릴 때, 다수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시녀 명염이 꿈틀거리면서 찻잎을 넣어 두는 궤 옆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명염은 주변을 둘러보고 앞으로 조금 움직이다가 다시 멈추고 유심히 귀를 기울이며 살금살금 움직였다. 그리고 멈췄다가 다시 기척을 듣고 조금씩 움직이길 반복하면서 다수방 문 앞까지 가서 살며시 문을 밀고 머리를 내밀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엎드려 문턱을 기어나와서 재빠르게 달아났다.
진 왕비 진씨는 명염이 단숨에 하는 이야기를 다 듣도록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너 지금 꿈을 꾼 것이냐?”
명염은 힘껏 도리질하며 눈물을 훔쳤다.
“아닙니다! 조금 전에, 소인이…… 소인은 황상이라는 말까지 듣고 달아나려 했으나……. 소인 실로 너무 두려워서……. 너무 두려운 일입니다.”
“제대로 들은 것이냐?”
진씨는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는 명염을 빤히 바라봤다. 명염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모신 시녀였다. 믿음직하고 진중해서 의사청처럼 중요한 곳에 보낸 것이었다. 명염의 성격, 됨됨이가 어떤지 잘 알아서 이 아이가 허튼소리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명염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얇은 벽 너머로 똑똑히 들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이 뜨락에서 수화문 밖으로 나가지 말아라. 다른 사람에게 허튼소리 해서도 안 된다. 내 곁에만 있어라.”
잠시 넋이 나갔던 진씨는 천천히 명염을 바라보며 분부했다. 명염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들부들 떨면서 진씨 뒤쪽으로 가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서 있었다.
진씨는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의자에 앉아서 살짝 볼록해진 배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배 속의 이 아이가 어떤 성격, 성품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기 아이다. 이 아이가 그럴 리 없다.
그리고 큰 오라버니와 둘째 오라버니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안다. 두 오라버니가 정말로 황상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잔인하게 그 모자의 목을 베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기에, 그녀, 그리고 두 오라버니가 그런 짓을 하게 되었을까.
진씨는 망연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옥청을 부르렴.”
한참 만에, 진씨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분부했다. 방 안엔 그녀와 명염뿐이었고, 명염이 문가로 다가가 머리를 내밀고 대시녀 옥청을 불러들였다.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대야를 모셔오너라. 조용히 해야 한다. 아무도 모르면 제일 좋고.”
옥청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진씨의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해졌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하는 분부에도 옥청은 조금 이상함을 눈치챘다. 옥청은 뒤에서 숨을 죽이고 서 있는 명염을 힐끔 살펴보고는 재빨리 대답하고 직접 나가서 어멈을 골라 진가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