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병문안
사람들은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따라 들어와 공손하게 두 줄로 서서, 상석에 나란히 놓은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나, 주관이 누군지 모호했다.
“오늘!”
주육은 목을 가다듬고 쩌렁쩌렁 외쳤다.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마침 차를 마시려고 잔을 들던 영원이 화들짝 놀랐다.
“나와 원…… 아니, 영 칠야, 나와 영 칠야가 황성사를 인수하여 관리하게 되었다.”
주육은 손을 저으며 이어서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뭐더라? 아버지가 뭐라고 했더라? 됐다. 그만 생각하자.
“영 칠야의 말씀을 듣자. 내 뜻이 바로 영 칠야의 뜻이다. 아니지, 영 칠야의 뜻이 바로 내 뜻이다! 다들 잘 따라야 한다! 원 형님, 말씀하시오.”
영원은 찻잔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마시지 말자. 괜히 뿜을라.
“대단한 것도 없다. 오늘부터 나와 소육은 여러분, 황성사와 한 몸이다. 나와 소육은 첫째, 젊고, 둘째,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임무를 맡은 것인데 황성사 일을 맡게 되었으니 모두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어찌 됐든 일을 잘 처리하면 황성사의 체면이 서고, 모두의 체면이 서는 것이니까.”
“칠야, 무슨 그런 말씀을. 안심하십시오. 저희는 반드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칠야.”
“안심하십시오, 육야.”
사람들이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칠야를 불러야 하는지 육야를 불러야 하는지, 저마다 다르게 불렀다.
영원이 이어서 말했다.
“가 주사가 황성사를 관리해 온 동안 황성사를 질서정연하게 관리해 온 것을 모두가 잘 안다. 오늘 나와 소육으로 바뀌었으나 규율은 모두 예전과 같다. 모두 해왔던 대로 하면 되고, 공을 세우면 상을 주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내린다.”
“그렇지, 그렇지. 바로 그렇지. 칠야, 너무 좋은 말입니다.”
주육은 손뼉을 쳤다. 원 형님, 말을 너무 잘해!
모두 얼굴을 구기고 주육을 바라봤다. 요 며칠 괜한 걱정을 했었다. 이 황성사는 예전과 같은, 아니 여전히 주관은 한 명이로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나와 소육은 일단 좀 둘러볼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고해도 되고 소육에게 고해도 된다.”
영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육이 얼른 가로채서 말했다.
“일단 칠야에게 고해라.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칠야와 상의하겠다.”
“예!”
모두가 입 모아 대답하자 영원이 손을 휘둘렀다. 실내 가득하던 사람이 물러가자 주육이 기지개를 켜고 벌떡 일어났다.
“우리 뭐부터 보지? 어디부터 가지?”
“여기에서, 이 문서부터 봐라.”
영원이 실내에 가득한 서가의 문서를 가리키자 주육이 순간 울상을 지었다.
“이게 뭘 볼 게 있다고. 이건……. 원 형님, 먼저 보고 있으시오. 소칠과 약속했던 걸 깜빡했네. 오늘 같이 마행가에 가 보기로 했거든. 다음 달에 탕가 오낭자 생일이라고 같이 가서 골라달라고 하더라고. 중요한 일이잖소. 그럼 난 이만!”
주육은 영원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제 원 형님이 이놈의 문서를 읽으라고 강요할까 봐 두려운 듯 밖으로 줄행랑쳤다.
“가라, 가.”
영원은 손을 휘휘 젓다가 별안간 멈칫했다. 다음 달이 탕가 오낭자의 생일이라. 동동의 생일도 곧 다가온다. 서너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얼른 준비해야겠군.
태의정 오 태의가 물러간 후 황상은 큰 슬픔에 잠겼다.
지난번에 조 노부인이 찾아왔을 때도 안 좋아 보였는데, 역시나! 황상은 천천히 등받이에 기댔다. 눈물이 흘렀다. 주씨가 떠났는데 노부인도 떠나려 하다니.
“황상, 생로병사는 인지상정입니다. 노부인은 장수한 편입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황상.”
병풍 뒤에 숨어서 듣던 하빈이 들어와 나긋나긋 황상을 위로했다.
조 노부인이 곧 죽는다는 소식은 그녀에게는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짐도 안다. 어가를 준비해라. 짐이 가 봐야겠다. 짐이…….”
무기력하게 대답하던 황상의 목이 멨다.
“짐이 노부인 마지막 가는 길을 보고 와야겠다.”
하빈은 얼른 황상의 명령을 전했다.
조 노부인의 맥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다는 소식은 태의원에서 황상에게 고하는 동시에 벌써 수국공과 주 추밀부사에게도 들어갔다. 조 노부인 본인은 상태가 딱히 더 나빠진 것이 없다고 여겼지만, 태의가 안 좋다면 안 좋은 것이었다. 수국공과 주 추밀부사는 태의원에서 황상께 조 노부인의 병세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이래 출타하지 않았다. 역시나, 오후에 황상의 어가가 도착했다.
황상이 출궁하여 조 노부인을 병문안한다는 소식을 들은 묵 승상의 표정이 멍해졌다. 다시 고개 숙여 문서를 읽었지만, 내용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짐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나친 생각이길 바랐다. 장공주가 주가를 통틀어 가장 연연하지 않을 사람이 아마도 조 노부인일 것이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묵 승상이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이냐고 묻자 휘장이 걷히더니 여 승상이 들어왔다.
“이야기 좀 할까 해서.”
“앉게.”
묵 승상은 서안의 문서를 치우고 다구를 꺼내서 차를 따라 밀어주었다. 여 승상은 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머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묵 승상도 자기 차를 따라 천천히 홀짝일 뿐 역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차를 홀짝이며 차 한잔을 비웠다. 여 승상이 일어서서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서서 뒷짐 진 채 나갔다.
마행가의 어느 점포 뒤쪽 독채 안, 영원이 묵칠과 함께 탁상 가득 한 희귀한 물건을 뒤적이고 있는데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드는데 주육이 울며 뛰쳐 들어왔다.
“원 형님!”
주육은 영원을 보자마자 처참하게 외쳤다. 얼마나 처참한지, 영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로 이리 처참히 울어!
“원 형님, 원 형님!”
주육은 영원의 품을 파고들고 영원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눈물 콧물 흘렸다. 말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왜 이러지? 무슨 일이야? 황상이 붕……. 크흠, 무슨 일이야?”
묵칠은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빨리 정신을 차리고 입으로 내뱉진 않았다.
“우리 어르신이…….”
주육 뒤를 따라 들어온 사환도 헐떡이며 말을 꺼내다가 다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며 통곡했다.
“어르신이 돌아가신 것이냐? 그런데 곁을 지키지 않고 여기엔 왜 온 것이냐?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묵칠은 이번엔 똑똑히 깨달았다.
“이 꼴을 보아하니 돌아가신 건 아니고 곧 돌아가실 것 같은 모양이다.”
역시 영원이 더 똑똑했고, 주육의 옷깃을 붙잡고 제 품에서 뜯어냈다.
“할머님이 많이 안 좋은 것이냐?”
주육은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축 늘어졌다.
“원…….”
주육은 우느라 원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했다. 묵칠은 덩달아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괜히 나까지 슬프네. 만약…… 만약…….”
묵칠도 울음을 터트렸다.
“닥쳐라! 네가 울긴 왜 물어! 불길하게.”
영원이 화를 내며 묵칠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영원의 말에 묵칠이 끅끅대며 울음소리와 눈물 모두 삼켰다. 영원은 주육을 의자에 앉히고 대영에게 분부해서 따듯한 수건을 가지고 와 얼굴을 닦아 주었다. 대영은 영원이 따로 분부할 것 없이 주육 뒤에 서서 어깨를 주무르고 눌러주었다. 잠시 후, 주육의 울음이 잦아지더니 훌쩍이다가 호두처럼 부은 눈을 뜨고 영원을 올려다봤다.
“원 형님, 조금 전에, 바로 조금 전에 황상이 할머님을 보러 오셨소. 할머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소.”
영원은 주육을 빤히 봤고, 묵칠은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막으려 얼른 입을 막았다. 주육 할머님이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황상이 문병하러 가신 것이었군. 이번에도 아버지 말씀이 맞았어!
“태의는 뭐라고 하더냐?”
영원이 주육을 빤히 보며 물었다. 주육은 쉴 새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난 몰라. 나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았소. 나는…… 할머님은 나날이 좋아지셨는데. 어제는 후원에서 반 시진 거닐기까지 하셨는데. 왜, 분명 멀쩡했는데!”
“소육, 이게 다…….”
묵칠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여는데 영원이 뒤통수를 내리치고는 그 김에 뒤로 끌어당겼다.
“이렇게 슬퍼하는 거 안 보이느냐? 이유가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할 겨를이 있어? 네 아버지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냐?”
묵칠은 쓸데없는 말이라는 말에 얼른 입을 가리고 끽소리도 더 하지 못했다.
영원이 주육을 토닥였다.
“울고 싶으면 울어라. 행여 무슨 일이 생긴대도, 네 백부와 부친이 계시는데 너에게 이야기하겠느냐. 잠깐 괜찮아 보여도, 원래 눈 감기 전에 잠깐 생기가 돈다고 한다. 생로병사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후.”
묵칠은 동정하는 눈으로 주육을 바라봤다. 마음이 처량해졌다. 소육이 참 안 됐다. 자기를 가장 아끼던 귀비마마가 떠나더니 이제는 할머님까지……. 에고!
영원은 훌쩍이는 주육을 아무런 말 없이 토닥여주었다. 조 노부인이 주택헌을 위해서 입궁했던 날, 오늘이 오리라 짐작했었다. 전 노부인이나 백 노부인 같은 능구렁이였다면, 다른 사람이 준비하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준비해서 자기 죽음 하나로 온 가족이 발 뺄 기회를 얻었으리라.
황상이 병문안 간 당일, 조 노부인은 식음을 끊었고 며칠 만에 병으로 작고했다. 황상은 한바탕 목 놓아 운 다음 상 태감을 장례에 보냈다. 복안 장공주는 저녁에 가서 조 노부인 영전에 향을 올리고 관 앞에서 말없이 잠시 서 있다가 곧 돌아갔다.
주유해는 며칠 동안 부친 뒤에 서서 쉴 새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절을 하면서 두려움으로 몸이 오그라들었다.
황상이 정말로 문병하러 왔고 할머님이 정말로 눈을 감았다. 그의 말이 다 맞았다. 그의 말은 항상 다 맞았다.
주유해는 장 선생이 했던 말을 쉴 새 없이 떠올렸다. 생각할수록 살이 떨리고 생각할수록 두려웠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유해는 드디어 부친 수국공과 이야기할 기회를 찾아서 나지막이 말했다. 수국공은 얼떨떨했다. 상주로서 며칠 너무 울고 너무 지쳐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반응이 조금 느렸다.
“무슨 일이냐?”
“저쪽에서 말씀하시지요.”
주유해가 영당 옆의 작은 내실을 가리켰다. 수국공이 엉금엉금 일어서려 하자 주유해가 얼른 다가가 부축했다. 부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댄 채 작은 내실로 향했다.
주유해는 주변을 둘러보고 문을 닫았다. 내실 안에 갖가지 마실 것과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유해는 우선 삼탕을 따라 수국공에게 건넸다. 수국공은 몇 입 마시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정신이 어느 정도 맑아졌다.
“상을 치러야 한다지만, 몸조심해라. 이틀도 안 됐는데 왜 이리 마른 것이냐. 네 할머님이 보시면 하늘에서도 눈 감지 못하실 것이다.”
수국공은 초췌하기 짝이 없는 아들을 마음 아픈 듯이 바라봤다. 이 아들이 참으로 효자구나.
“아버지, 할머님이 가시기 며칠 전에 제가 대왕야부에 다녀왔습니다.”
주유해는 상심해서가 아니라 두렵고 걱정이 지나쳐서 마른 것이었다. 정확히는 겁에 질려서.
“음? 그래, 그랬었다고 했지. 그 이야기는 왜 다시 하느냐?”
수국공은 자기가 죽을 따라서 천천히 마셨다.
“그때 아버지께 다 드리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그때 가서, 장 선생만 만나고 왔습니다. 장 선생이, 할머님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