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35화 (435/463)

435화: 불안한 마음

복안 장공주가 가차 없이 단칼에 거절하자 고서강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일어섰다.

“예. 장공주의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소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복안 장공주는 고서강이 뜨락 문밖으로 나가는 걸 여전히 찻잔을 쥔 채 살짝 고개를 틀고 지켜보다가 안에서 나오는 이동을 향해 살며시 코웃음 치며 말했다.

“봐봐. 정말 주판을 잘도 튕기지 않아? 너보다 훨씬 주판을 잘 튕기겠구나.”

“저는 일거구진일(一去九進一: 주판을 놓을 때 십 자리 수가 변할 때 9개를 빼고 십 자리 수 알을 올리는 주판 계산법) 셈법만 알지 저런 셈은 못 해요. 고서강이 큰 악행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황상의 신하로서 넷째에게 의탁한 건 황상을 배신한 걸까 아닐까? 지금은 또 넷째가 빙산에 앉은 듯이 위험한 걸 보고 넷째에게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어. 이건 넷째를 배신한 걸까 아닐까? 이건 큰 악행일까 아닐까? 그래, 큰 악행은 아니지. 하지만 큰 악행보다 더 가증스러워. 이대로 쉽게 벗어나서 계속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가만히 두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안 좋은 모범이 생기지 않겠어? 앞으로 온 조정에 이런 기회주의자들만 넘치게 돼.”

복안 장공주가 매서운 목소리로 하는 말에 이동은 생각해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었다. 윗전에게 이런 일은 큰 악행보다 더 큰 악행이었다.

“탕가가 묵가와 사돈을 맺은 걸 보고 자신이 생겨서 감히 나를 찾아와서 촉중으로 가겠다고 부탁하는 거야. 허허. 정말이지, 염치도 좋네. 이제 자신 있게 떵떵거려도 된다고 생각하기 전에, 예전에 사돈인 탕가를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을 했어야지. 며느리 탕 삼내내가 그 집에서 어떻게 보냈는데. 듣자 하니, 그 집에서 조금 체면 서는 관사 어멈도 감히 삼내내에게 눈치를 준다던데. 흥! 사람이 참.”

복안 장공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가에서 탕가의 돈을 얼마나 가져다 썼게. 그래놓고 탕가를 위해서 한 일이 얼마나 있다고. 돈만 가져가고 도와주진 않는 것이 가장 가증스러워!”

“돈만 받고 도와주지 않는 일은 많아요. 우리 같은 상인은 비천한 존재고 기껏해야 은자가 있을 뿐이니까요. 대부분 은자를 주는 건, 일을 해달라고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릴 괴롭히지 말라고 주는 거예요.”

“우리, 우리 할 것 없어. 넌 이제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라고 해야지.”

복안 장공주가 흘겨보며 하는 말에 이동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참 이상했다. 몇십 년 동안 왕부 안주인으로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자기를 ‘그들’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우리’ 속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여겨왔었다.

다음 날, 고서강의 사직 상주서가 올라왔다. 매우 애절한 내용으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깊으며 고향의 산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지니 눈 감기 전에 다시 고향의 우물 한 잔 마시고 고향의 조면(莜面: 귀리 국수) 한 그릇 먹고 싶다고 호소했다.

복안 장공주는 두 번 읽고 뛰어난 문장이라고 칭찬할 뿐 비준하진 않고 황상이 친히 보셔야 할 상주라고 상 태감에게 보냈다.

황상은 상주서를 읽다 말고 비처럼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면서 비준하고 고서강을 태사로 봉하고 영광스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웅하라 백관들에게 명했다.

성지를 받은 고서강은 중병을 핑계로 영광스러운 연회, 병문안 등등 일체를 거절하고 짐을 꾸렸다. 삼야 고자안과 탕 삼내내, 그리고 오야 고자의만 경성 모든 일을 돌보라고 남겨 두고 며칠 만에 그들을 제외한 모든 고가 사람이 고서강을 따라 조용히 산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성에 남아 경성 고가의 모든 것을 맡으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고자안은 들떠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이제 드디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고서강은 사직 상주를 올린 그 날 부인 유씨와 탕 삼내내를 함께 불러들였다. 거의 종일 이런저런 당부를 받은 탕 삼내내는 근심이 가득해서 지아비 고자안의 흥분, 추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부모가 다섯째의 혼사와 앞날, 고가의 미래까지 모두 그녀의 손에 맡겼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저 오저아가 묵가와 혼인한 걸 보고 자신에게 맡긴 것이지. 자신을 통해서 묵가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고. 오저아는 안 그래도 묵가에서 힘들 것이 뻔한데…….

무슨 일이 있어도 오저아에게 골치를 보탤 수는 없다.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못하는 건, 못 하는 거지!

이 일로 고자의가 가장 슬퍼했다.

고서강이 온 가문을 이끌고 경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날, 고자의는 말을 타고 배웅하면서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몇십 리까지 따라갔다. 고서강이 돌아가라고 몇 번이나 엄명해도 돌아가지 않다가 다시 한번 호통칠 때 더는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쏟으며 말에서 뛰어내려 길가에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 길가에 꿇어앉아서 길고 긴 행렬이 하늘 끝으로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을 때야 서서히 일어섰다.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멍하니 서 있다가 사환이 한참 붙잡고 문질러준 다리를 이끌고 다시 말에 올라 기운 없이 경성으로 돌아갔다.

부친이 앞으로 셋째 형수를 모친처럼 존중하고 모든 건 셋째 형수를 따르라고 했다. 그리고 서둘러 지방직을 청해서 떠나라고 했고.

또 앞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그는 예전에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이뤄가야만 했다. 고자의는 서서히 허리를 숙여 말 위에 엎드려서 또다시 목 놓아 울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길 얼마나 바라는지 모른다. 자기가 아직 예전의 자기이길, 상공부 자제도 거들떠보지 않던 사사부의 다섯째이길…….

위주 문밖에서 고서강 일가를 떠나보낸 수국공 세자 주유해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말에 올라타서 근심 가득한 모습으로 고민에 잠겨 돌아갔다.

소육이 황성사를 인솔하게 된 일은 진작 들어 알고 있었다. 숙부가 성도부 안무사로 낙점되었는데 할머님이 입궁하여 황상에게 빈 덕분에 맡지 않게 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땐 일이 잘못되어가는 걸 깨닫지 못했다. 소육은 어릴 때부터 태자를 따랐으니 황성사를 소육이 인솔하는 건 매우 타당했다. 넷째 숙부가 지방 관리를 맡은 적 없는데 성도부에 공석이 생겼으니 그 자리에 숙부를 낙점한 것도 매우 정상이고, 멀어서 숙부가 꺼린 것도 또 매우 정상이었다. 촉중은 실로 너무나 먼 곳이니까.

그런데 고서강 일가가 오늘 이렇게 갑자기 경성을 떠난 일은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었다. 고서강은 병이 그리 깊지도 않고 아직 젊었다. 묵 승상과 여 승상과 비교하면 한창때였다. 태자가 그를 그렇게 신임하는데 어쩌면 저렇게 깔끔하게 떠날 수 있을까.

주유해는 생각할수록 혼란했고 혼란할수록 더 깊이 생각했다. 그렇게 내내 생각하면서 수국공부 앞에 당도해 말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멍하니 더 있다가 계단으로 올라갔다. 고개를 떨구고 뒷짐 진 채 월동문으로 들어가다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분명 뭔가 잘못되었다!

주유해는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 뭐가 잘못됐을까? 대체……. 장 선생이 있으면 좋을 텐데.

장 선생을 떠올린 주유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 장 선생에게 물어보면 되지. 장 선생이 바로 대황자부에 있다. 높은 담장 안에 있어도, 자신은 들어가려고 하면 그 높은 담장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지금 바로 가자!

주유해는 돌아서서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 말에 올라 곧장 대황자부로 향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머리를 돌려서 몇 바퀴를 돌았다. 대황자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에서 내려 사환 하나에게 말을 지키라고 명하고 심복 둘을 데리고 대황자부로 향했다.

바람 하나 통하지 않게 단단히 저택을 에워싼 높은 담장에 육중한 철을 댄 좁은 나무 문을 빼꼼 밀었다. 그 좁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고는 뒤따라 비집고 들어온 사환을 따라 장 선생의 거처로 직행했다.

대황자부 안은 위리안치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화초가 잘 피었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본채, 별채, 정자 등도 예전과 다름없이 곳곳이 새로 칠한 듯이 깔끔했다.

주유해는 그런 걸 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주변의 기척을 주시했다. 다행히 지금 이때 대황자부는 밖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안은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당번 같은 건 아예 없고 지금 후원엔 햇빛이 비치는 꽃들 말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환을 뒤따라 내내 빠르게 달린 주유해는 곧 장 선생의 작은 집채 문 앞에 당도했다. 사환은 주유해를 돌아보고 허락을 얻고서 다가가 살며시 문을 두드렸다.

“장 선생, 우리 대야가 오셨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장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들어와라.”

“접니다.”

주유해는 사환에게 문 앞에서 지키라고 눈짓하고 혼자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낮고 간소한 집채였는데 실내는 매우 깔끔하고 상쾌했다. 네 귀퉁이에 얼음 대야가 놓여 있어 매우 선선했다.

“자네가 웬일인가?”

글을 쓰던 장 선생은 주유해를 보고 조금 놀란 듯 붓을 내려놓고 유심히 그를 살폈다.

“선생, 고 사사가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막 배웅하고 오는 길입니다. 상주를 올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오늘 일가가 모두 떠났습니다.”

장 선생이 앉으라고 할 것도 없이 주유해는 알아서 의자에 앉아서 장 선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모두 떠나? 그럼 고자의는?”

장 선생은 매우 놀란 듯했다.

“고자의만 남기고 갔습니다. 고자의는 호부에서 일하는 관리이니 떠날 수 없지요. 그리고 셋째 고자안 일가도 남고 나머지는 모두 떠났습니다.”

주유해가 이마를 짚으면서 말했다.

“셋째 일가? 셋째 며느리가…… 아마 탕씨였지? 탕가가 왜? 탕호우가 근래 특별한 점이 있는가?”

장 선생은 매우 예민하게 깨달았다.

“탕호우는 별것 없습니다. 다만 묵 승상부 그 칠소야가 탕호우의 누이 탕 오낭자와 정혼했습니다.”

주유해는 장 선생의 사고 회로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에 익숙했고, 묻는 대로 대답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장 선생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쩐지. 그렇다면 삼방은 남겨 두어야지. 고서강, 그 능구렁이는 무사히 벗어났군.”

장 선생은 의미 모를 헛웃음을 터트렸다.

“선생,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주유해는 알아듣지 못했고, 장 선생은 팔걸이를 내리치며 피식 웃었다.

“태자가 불안정한 것이지! 그럴 줄 알았다. 덕이 부족한 무지렁이가 천하를 군림할 자격이 있을 리가 있나. 역시나. 영 황후는 어찌 되었는가? 장공주는? 그리고 오황자는? 지금 선생이 누구지? 진왕야는? 일거리를 맡았는가?”

장 선생은 기운이 나는 얼굴로 물어댔다.

“영 황후야 당연히 궁에 있지요. 황상이 궁중 내무를 맡겼는데 영 황후는 양비에게 넘겼습니다. 양빈 말입니다. 비로 진봉 됐어요. 장공주는 아직 보록궁에 있습니다. 황상이 요즘 정무를 게을리하는데 듣자 하니 상주를 모두 장공주가 비준하고 있답니다.”

주유해는 하나를 물으니 열을 대답하며 끈기 있게 장 선생의 물음에 대답했다. 두 사람은 반 시진 가까이 묻고 대답했다.

“국면이 이미 명확해졌네.”

마지막까지 들은 장 선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팔걸이를 툭툭 치며 탄식하듯 말했다.

“국면이 명확해져요? 국면이야 진작 명확해졌지요. 태자가 봉해졌는데, 그때 명확해진 것 아닙니까?”

주유해는 망연한 표정이었다. 국면? 진작 명확해진 것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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