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33화 (433/463)

433화: 아비를 속이고 아들을 속이고

“전하, 조정은 아직 흔들리고 있습니다. 고서강은 줄곧 몸져누웠고, 전하 곁엔 신밖에…….”

주 추밀부사는 계속 노력했지만 태자는 싸늘하게 웃었다.

“흔들려요? 그런들 어떻단 말입니까. 흔들리면 흔들리라지요. 안 좋을 것도 없습니다. 촉중이야말로 중요하고 중요한 곳입니다. 됐습니다. 얼른 돌아가서 정리하고 며칠 내에 출발하세요. 됐습니다. 물러가세요.”

태자는 일단 조정이 흔들리든 말든 자기와 상관없다고 여겼고, 또 하나, 설령 도를 넘는 소인배가 있어도 자신의 총명함과 영특함이 있는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냐고 여겼다.

주 추밀부사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더 이야기해도 쓸모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떨군 채 물러나서 지척지척 선덕문을 나서서 말에 올라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분부했다.

주 추밀부사가 막 말에 올라타는데 손 학사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주 형, 주 형! 잠깐, 잠깐만!”

주 추밀부사는 고삐를 잡고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손 학사를 돌아봤다. 주 추밀부사 앞까지 달려온 손 학사는 헐떡이느라 말도 못 하고 내려서 이야기하자는 듯 손짓만 했다.

주 추밀부사가 말에서 뛰어 내려오자 손 학사가 잠시 더 숨을 고르고 말을 꺼냈다.

“마침 잘 만났네. 급한 일이 하나 있네. 잠시만, 숨 좀 돌리세. 후. 황성사 가경 말일세……. 아, 이렇게 된 일일세. 조금 전 황상께서 비준한 상주가 내려와서 성지를 써야 하는데 중간에 황성사 가씨의 상주가 있었네. 나이가 많고 몸이 안 좋아서 사직해야겠다고. 황상이 윤허하셨네. 영원이 황성사를 맡게 되었고.”

손 학사가 숨을 고른 후에 단숨에 하는 말에 주 추밀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태자가 아시는가?”

“그걸 내가 어찌 아나.”

주 추밀부사가 태자를 거론하자 손 학사는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팠다. 근래 완성된 성지를 들고 가서 보여줄 때마다 번번이 욕을 얻어먹었고,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이제 태자를 만나러 가기도 두려웠다.

“상주는?”

주 추밀부사는 이제 자기가 촉중에 가게 된 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황성사가 영원 손에 떨어지게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태자는 분명 이 일을 모를 것이다. 얼른 태자에게 가서 말해야 했다.

“주 형! 다급하니 주 형도 정신이 나갔구먼! 비준한 상주서를 어찌 가지고 나온단 말인가. 자네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이미 관례에 어긋난 것일세. 얼른 가야 하네. 상주서가 잔뜩 쌓였어.”

전해야 할 이야기를 전한 손 학사는 바로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그는 원래 그랬다. 발을 담가도 발바닥까지지, 그 이상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 추밀부사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돌아서서 급한 걸음으로 태자를 만나러 선덕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런 일을 모르다니, 어째서!”

주 추밀부사의 말에 태자는 이를 갈고 삿대질하며 매우 분노해서 호통쳤다. 주 추밀부사는 난감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태자가 왜 모르는지, 그가 어찌 알겠나.

“하나같이……. 흥!”

“전하, 황성사는 황상의 명으로만 움직입니다. 가경이 직접 황상에게 상주를 올려 사직을 청하고 황상이 곧바로 비준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만 영원에게 황성사를 넘긴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됩니다.”

주 추밀부사는 완곡하게 태자에게 귀띔했다. 황상은 아직 황상이었다. 황성사는 원래 무슨 일이든 황상에게만 고하고, 황상의 명령만 따른다. 가경이 상주를 올려 황상이 직접 비준한 건 응당한 일이며, 그 중간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은 오로지 영원이 황성사를 맡은 일뿐이었다. 그러나 태자 눈에 중점은 그게 아닐 것이 분명했다.

사실 태자는 이미 분노가 가라앉았다. 자신을 따돌리고 이뤄지는 일이 너무 많았고, 많아서 익숙해졌다.

“맞는 말이지. 영원 같은 고얀 놈이 어찌 황성사를 이끌어! 이런 허튼짓을!”

주 추밀부사는 힘껏 침을 삼켰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황상이 친필로 영원에게 황성사를 맡겼다. 허튼짓이라니. 누굴 가리키는 말인가.

“전하, 얼른 황상을 만나러 가세요. 영원이 황성사를 맡아선 안 됩니다. 바꿔야 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성지가 내려오면…… 바꾸기 어렵습니다.”

주 추밀부사가 태자를 재촉했다. 화를 내고 푸념할 일이 아니었다. 얼른 막아야 했다.

“음, 그렇지. 그럼 황성사는 누가 맡아야 적합하겠습니까?”

인선을 고를 때가 되면, 대다수의 경우 태자 마음속의 후보가 엉망으로 엉키곤 했다.

“태자 전하, 황성사는 첫째, 궁중을 호위해야 합니다. 둘째, 황상…… 또는 태자를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태자가 황성사를 움직이진 못하지만, 주 추밀부사는 얼른 사심을 보태 고했다.

“조당에 분부하기 어려운 일, 혹은 알아봐야 할 일 같은 건 모두 황성사에서 합니다.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태자는 ‘조당에서 분부하기 어려운 일, 혹은 알아봐야 할 일’이라는 말에 곧바로 아라, 그리고 대놓고 말하기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떠올렸다.

“맞는 말이로군요. 고의 생각엔 소육이 가장 적합한 것 같습니다.”

주 추밀부사는 얼떨떨하다가 금세 미친 듯이 기뻐했다. 소육이 황성사를 맡게 되면……. 정말 너무 좋은 일이지!

“소육이 근래 확실히 갈수록 진중해졌습니다. 모두 태자 전하의 지도 덕분입니다. 따지고 보면 소육은 정말 태자 전하의 명만 듣는군요. 평소에 제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습니다.”

주 추밀부사는 찬성하는 동시에 얼른 아부도 했다.

작은 일이 아닌 데다가 다급한 일이라 태자는 즉시 입궁했다. 태자가 황상을 만난 뒤, 주유민이 황성사를 맡고 영원이 부사를 맡아 협조하라고 성지 내용이 바뀌었다.

태자가 주유민이 갈수록 발전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황상도 소육이 갈수록 번듯해진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귀비 생전에 가장 아끼던 조카였으니 그가 황성사를 이끌면 그보다 더 적합한 일이 없겠다 싶었다. 그러나 영원 그 녀석도 괜찮고 무술도 할 줄 아니, 소육을 보좌하면서 힘들 일은 영원이 하면 그야말로 적절하지 않겠나. 그렇게 정하고 보니 이건 뭐, 아무리 봐도 너무나 적합한 결정이었다.

수정된 성지가 복안 장공주 손에 들어갔을 때 장공주는 베껴온 얇은 종이를 흔들며 이동을 바라봤다. 웃고 싶은 건지 화가 난 건지 모를 얼굴로 종이가 찢어지기 직전까지 흔들어대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주유민에게 황성사를 맡기고 영원에게 협조하라니, 무슨 생각인 걸까? 황상은 대체…….”

장공주는 ‘머리가 있냐’는 말을 겨우 참아냈다.

“정말이지 웃기는 일이야!”

복안 장공주가 종이를 휘이 내던졌다. 이동도 멍해졌다가 금세 헛웃음 쳤다.

“주가 육소야는 사사건건 영칠의 말을 따른다던데요.”

“사사건건 말을 따르기만 해? 주유민의 머리는 예전부터 영원의 몸에 붙어 있었어. 영원이 하는 말은 뭐든 믿는다고.”

복안 장공주는 이를 갈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무기력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온몸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그거 알아?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 성 밖으로 피해서 산 건 골칫거리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이 무지렁이들 때문에 속 터져 죽을까 봐 그런 것도 있어!”

이동은 얇은 종이를 향해 턱을 까닥였다.

“나쁠 것도 없네요. 이 성지, 어차피 장공주의 원래 계획과 같잖아요.”

장공주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칠에게 가서 전해. 첫째, 주유민은 세상에서 손꼽히는 무지렁이야. 둘째, 주유민은 영원 그 녀석이 기르는 개보다 더 영원한테 충성해. 그러니 사정을 봐주라고 해. 얽히지 말아야 할 일에 얽히지 않도록 잘 단속하라고 해.”

이동은 유심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안 장공주는 한숨을 푹푹 쉬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것도 전해. 주가는 두려워할 상대도 아니고, 선 태후의 친정이자 황제의 외가니까 봐줄 수 있는 한 봐주라고 해. 나중에 사서에 적히는 내용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예.”

이동은 안쓰러운 듯 장공주를 바라봤다. 주가 같은 집안은 장공주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주육이 황성사를 총괄하고 영원을 보좌로 임명한다는 성지가 내려간 후 주 추밀부사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선덕문을 나오다가 자기가 촉중으로 임명된 사실을 떠올리고 순간 근심이 가득해져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두운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서 언제나 그랬듯이, 줄곧 시름시름 앓고 있는 모친 문안부터 드리러 간 주 추밀부사는 예를 갖추고 진맥은 했는지 탕약은 드셨는지 묻고 자리에 앉았다. 조 노부인을 바라보고 있으니 별안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는 긴장해서 숨을 잠시 멈췄다가 진지하게 고민해봐도 그야말로 묘책 중의 묘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을 내린 주 추밀부사는 얼굴을 굳히며 말을 꺼냈다.

“어머니, 그게……. 휴!”

주 추밀부사는 용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서글프게 한숨부터 쉬었다.

“성도부 안무사가 공석이 되었는데 중서성 상공들이 소자를 그곳으로 보낼 작정이랍니다.”

조 노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그 먼 곳에, 네가 어찌 그 먼 곳에 간단 말이냐. 촉중은 야만인의 땅인데, 어떻게 널 보낼 수가 있느냐. 무슨 생각이라더냐!”

“세 상공의 뜻은, 소자가 지방에 임명된 적이 없고 추밀부사 자리에 오랜 세월 있었으니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휴!”

주 추밀부사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태자는? 태자도 그들이 허튼짓하는 것을 가만히 둔단 말이냐? 지방에 임명된 적이 없으면 회남, 강남으로 가면 될 것 아니냐? 굳이 촉중? 단지 귀비가 없다고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는구나!”

조 노부인은 슬퍼하며 눈물을 훔쳤다.

“상공들이 논의한 일이라서 태자도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태자도 처지가 어렵습니다.”

주 추밀부사는 반은 이야기하고 반은 감췄다. 사소한 일로 어머니 마음을 괴롭힐 것 없었다.

“네가 어찌 그 먼 곳에 간단 말이냐. 촉중은……. 나는 벌써 무덤에 발을 반쯤 들인 몸인데, 드러눕게 될 때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이 곁에 없으면 어쩌라고!”

조 노부인은 생각할수록 슬퍼졌다. 촉중은 습하고 더워 풍토병이 생기기 쉬운 땅이라고 들었다. 행여 아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조 노부인은 더 생각할 수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서글픈 얼굴로 아들을 바라봤다.

주 추밀부사가 고개를 숙인 채 슬퍼했다.

“소자의 불효입니다. 어머님 병이 이리 깊은데, 소자가 멀리 촉중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언제 다시 어머님을 뵐 수 있을지. 소자 이 마음이…… 칼에 베이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소자 어찌 어머님을 두고 떠날지.”

“방도를 생각해 보아라. 응? 촉중에 굳이 네가 가야 하느냐?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안 되느냐? 방도를 생각해 보아라. 가면 안 된다. 그 지역은 구사일생의 땅이라고 다들…….”

조 노부인은 갈수록 슬퍼졌다.

“어머님, 상공들이 논의한 일이라 태자도 반박하지 못합니다. 방도라면, 황상에게 빌 수밖에요. 하지만 촉중이 고된 곳이라서 소자는 그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외척입니다. 나라와 주군의 근심을 덜어드리는 일에 소자가 앞장서지 못할망정 뒤처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가서 황상에게 빌어보마!”

조 노부인은 양손으로 탑상을 짚으며 일어나려 했다.

“이렇게 너를 핍박하고 우리 주가를 핍박하는 걸 그냥 두고만 볼 순 없다. 내가 아직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다! 내가 황상에게 빌러 가마! 황상에게 가서, 내 몸이 이 지경인데 며칠이나 살겠냐고 해 보마. 아들이 딸랑 둘인데, 그중 하나를 멀리 보내려고 하다니. 죽으라는 소리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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