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
황상은 하빈의 궁 안에 얇은 이불을 덮고 누워서 가물가물 잠들어 있었다.
예전에도 자극전에 있지 않을 때는 주 귀비 궁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하빈을 총애하며 하빈 궁에 머물렀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예전엔 대부분 시간을 상주를 비준하고 정무 처리하는 데에 썼다면, 지금은 상주를 모두 장공주에게 넘겼고 정무는, 상주서와 함께 사라진 듯했다.
지금은 거의 매일 하빈 궁에 틀어박혀 있었다. 낮에도 늘 이렇게 비몽사몽이고 밤엔……. 자신의 밤 생활에 매우 만족했다. 몸이 나날이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젊을 때처럼. 조금 더 지나면 낮에도 활기차질 것 같았다. 젊을 때, 스물, 서른 남짓할 때처럼.
거의 매 순간 하빈 곁에 있지만, 하빈을 편애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절대로 하빈 앞에서 정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조정, 관리 그리고 정무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일은 절대로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으니까. 하가에 특혜를 준 적도 없고. 자신은 성군이었다. 조정 법도와 조상의 유지를 엄격하게 지키는 성군.
상주를 모두 장공주에게 넘기는 일은, 곰곰이 생각한 적은 없지만, 어찌 됐든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부친은 그 누이를 품에 안고 용상에 앉아서, 자극전 그 거대한 용상에 앉아서 모든 대신의 절을 받고 조정 대신과 함께 정무를 논의했었다. 누이는 그런 걸 보면서 자랐다.
등극한 지 몇 년 안 되었을 땐 누이만 보면 정무를 논의하는 부친 곁에 앉아 있던 누이 모습이 떠올랐다. 매우 거북했고 매우 경계했다. 단속하라고 모친에게 암시도 했었다. 심지어 여훈(女訓) 외에 다른 서책은 더는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 벌써 황제 노릇을 20년이나 했다. 안정될 대로 안정되어서, 지난날의 경계와 불안은 진작 저 멀리 내던져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장공주가 조정 정무를 처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황상이 주무신다고 돌아가라고 전해라.”
귓가에 홀연히 들리는 하빈의 목소리에 황상은 눈을 뜨지 않고 나긋나긋 물었다.
“누가 왔느냐?”
“장공주예요. 시끄러웠나요?”
하빈이 대답하면서 민첩하게 탑상 앞으로 다가왔다.
“잠들지 않았다. 들어오라고 해라.”
황상은 하빈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며 분부했다. 입구에 있던 내시는 하빈이 분부할 필요 없이 쪼르르 달려가 복안 장공주를 정전으로 모셨다.
하빈은 유순하고 온화한 얼굴로 손수 복안 장공주에게 차를 바쳤다. 복안 장공주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받았다.
“황송하군요.”
“무슨 일이냐? 처리하지 못할 일이 있어?”
황상은 하빈이 건넨 삼탕을 받아서 냄새를 맡고는 넌더리 나는 듯 상에 내려놓았다.
“네.”
복안 장공주가 희미하게 대답하자 황상이 하빈을 향해 손짓했다.
“물러가라. 장공주와 할 이야기가 있다.”
하빈은 매우 유순하게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물러났다. 주 귀비가 평생 총애받은 이유가 바로 예법을 알고 본분을 지키며 조정 일에 끼어들지 않아서였다. 입궁하기 전부터 수많은 이가 그 점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지켜야 할 철칙이었다.
하빈이 물러가자 대전 안에서 시중들던 시녀와 내시도 물러가고 상 태감 홀로 남아 공손히 탑상 앞을 지켰다.
“이야기해라.”
황상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복안 장공주는 눈살을 찌푸려다가 곧바로 동작을 멈췄다.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복안 장공주는 가늠하며 말을 꺼냈다. 황상하고 이야기할 땐 그래도 신중한 편이었다. 그녀의 오라비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사람이었다.
“어제 보니 보록궁에 있는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이 열렸더이다. 올해 포도 맛이 매우 좋답니다.”
“음, 아주 좋더구나.”
황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보록궁에 있는 포도나무는 어머니가 그 당시 손수 재배한 나무였다.
“그래서 황상께 드리려고 가지고 왔지요. 상 태감이 상주를 가지러 왔을 때 물었더니, 황상께서 요즘 줄곧 하빈 거처에 있다고 하길래 이리로 왔습니다.”
복안 장공주는 황상을 바라봤다. 황상의 얼굴엔 별 변화 없었다.
“하빈 거처에 있으면 편안하다. 세심하고 배려 깊거든.”
“예. 황상, 낮에도 자주 이렇게 주무십니까? 아까 밖에 있는데 황상이 주무신다고 하기에 이런 시각에 어째서 주무시는지 의아했습니다.”
“짐은 요즘 갈수록 기력이 좋아진다. 낮에는 좀 졸리긴 하지만……. 하하하. 한동안 네게 수고 끼쳤구나. 한동안 더 쉬면 금방 다 나을 것이다.”
복안 장공주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황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상 태감을 바라봤다. 상 태감은 눈 감고 귀 닫은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복안 장공주의 시선이 다시 황상에게 향했다. 입술을 달싹여봐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나.
“마음 놓아라. 짐의 몸은 짐이 가장 잘 안다. 걱정할 것 없다.”
황상은 충만한 자신의 정력을 떠올리고 참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이런 일은 너는 모른다. 마음 푹 놓아라. 짐의 몸은 갈수록 좋아진다.”
복안 장공주는 할 말이 없어서 물끄러미 황상을 바라보다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빈을 만나고 가겠습니다. 하가에 연지를 만드는 비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어요.”
“가 보아라, 가 보아. 여자들은 연지, 분 같은 걸 좋아하지.”
황상이 빙그레 웃었다. 복안 장공주는 일어서서 인사하고 하빈을 만나러 뒷전으로 향했다.
전에는 황상이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황상이 모르는 걸 확신했다. 황상이 모른다면 하빈은 분명 알 것이다.
하빈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장공주를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가 말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더 버티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장공주, 앉으세요. 차 드세요.”
“그래요. 하빈도 앉으세요.”
하빈은 장공주에게 차를 올리고 지극히 거북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아서 시선을 피하고 입을 다물었다.
“황상이 요즘 정력이 갈수록 좋아진다고 하더군요. 낮에 자꾸 졸리지만.”
복안 장공주는 하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빈은 가슴이 철렁해서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장공주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잠시 침묵하다가 장공주가 계속 말했다.
“하빈이 글을 많이 읽었다던데, 그 점은 좋군요. 황상은 정양할 춘추입니다. 지금 태자가 한몫하고 있어서 황상도 마음을 놓을 수 있지요. 태자 말고 셋째도 있고, 다섯째도 곧 황상의 근심을 덜어줄 수 있을 겁니다.”
장공주는 매우 느리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하빈은 조금 움찔하더니 거북해하던 모습이 조금 사라졌다. 대신 느껴질 듯 말 듯한 적의가 은근히 퍼져 나왔다.
복안 장공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나이가 어린 만큼 경험이 적겠지.
“하빈이 황상을 모시게 된 건 큰 복입니다. 다들 화와 복은 함께 온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내 보기에 하가 같은 집안은 본분만 잘 지키고 헛된 꿈을 품지만 않으면 복은 복으로 누릴 수 있고 화를 부를 일은 없을 겁니다. 안 그런가요, 하빈?”
“장공주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하빈은 여전히 장공주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상대의 수단에 대응할 방법이 있다는 듯이 굴었다.
“헛된 꿈은 당연히 품지 않을 것입니다. 품어도 되고, 품어야 할 것들은 본분 내의 일이니 그건 지킬 생각입니다.”
황가에서 비빈을 들이는 이유는 바로 자손 번창을 위해서지! 아들을 낳는 건 빈의 본분이다!
복안 장공주는 잔을 내려놓고 말없이 하빈을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긴 하지요. 뜻을 이루길 바랍니다.”
하빈의 궁에서 나온 복안 장공주는 갈수록 걸음을 서둘러 단숨에 자극전을 지나친 후에야 나무를 붙잡고 멈춰 섰다.
“괜찮으시죠?”
녹운이 재빨리 다가가 장공주를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장공주가 화가 많이 나셨구나!
복안 장공주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괜찮아. 무지렁이 둘 때문에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좀 쉬다가 가세요.”
녹운은 덩달아 한숨을 내쉬고 장공주를 부축하고 앉을 만한 곳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됐어. 황후의 거처가 멀지 않으니 거기 가서 잠시 쉬다가 가자.”
복안 장공주가 주변을 살펴보고 말했다.
“알겠어요.”
녹운이 부축하려 하자 복안 장공주가 손을 뿌리쳤다.
“내가 노인네도 아니고.”
녹운은 눈을 흘기고 싶은 기분으로 복안 장공주의 팔을 놓았다. 그래도 멀리 갈 순 없었다. 장공주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일은 드문데, 날도 더운 날 열이 올라 더위 먹으면 큰일이었다.
복안 장공주가 다시 걸음을 뗐다. 느리진 않지만 씩씩대서 걷던 조금 전보다는 안정된 걸음이었다.
복안 장공주가 찾아왔다는 말에 영 황후는 조금 놀라며 서둘러 맞이하러 나갔다. 영 황후의 거처가 그리 멀지 않아서 복안 장공주는 벌써 수화문으로 들어섰다.
“좀 거닐다가 힘들어서 시원한 차 한잔 얻어 마시러 왔어요.”
복안 장공주가 영 황후를 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영 황후는 웃으며 몸을 틀어 비켜주고 복안 장공주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궁을 거닐다니, 드문 일이군요.”
영 황후는 거닐다가 힘들어서 들어왔다는 복안 장공주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황상을 좀 들여다보세요.”
복안 장공주는 첫째, 그럴 심정이 없었고, 둘째, 원래 영 황후와는 쓸데없이 말을 돌리는 법이 없어서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쓸데없이 말을 돌리기 시작하면 두 사람 모두 고수라서 종일 끝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영 황후는 아무런 말 없이 장공주를 바라봤다.
“황후는 후궁의 주인입니다. 하빈을 그냥 둘 생각입니까? 이대로요?”
복안 장공주가 날카롭게 물었다.
“장공주, 그렇게 말씀하시면 재미없지요.”
영 황후가 조금도 양보하지 않자 장공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됐어요, 됐어. 그건 됐고, 본론 이야기해요. 황성사(皇城司: 황성 출입, 궁문 개폐 등을 관리하는 부서)의 가경(賈慶)이 나이가 많은데 새해가 된 이래 줄곧 몸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사직 상주를 올렸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황성사를 맡을 만한 사람이 영원 그 녀석밖에 없는 것 같은데, 황후 생각은요?”
잔을 쥐고 있던 영 황후가 손을 떨면서 놀란 얼굴로 장공주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소칠은 나이도 어리고 차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중임을 어찌 맡겠습니까.”
영 황후는 놀란 건 놀란 거고, 대답은 바로 했다.
“그럼 황후가 생각하기엔요?”
복안 장공주가 비스듬히 쳐다보며 묻는 말에 영 황후는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난 주 추밀부사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황성사 아닙니까.”
영 황후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주 추밀부사가 글공부하던 사람이라 무술이 안 되어서 그러는 거라면, 소칠이 밑에서 보좌하는 건 적합하겠네요.”
복안 장공주는 피식, 하고 비웃었다.
“주가는 조 노부인 대부터 아래로 주택헌이 가장 똑똑하다 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저 조금 똑똑한 무지렁이일 뿐입니다. 주가에 쓸 만한 인물은 단 하나도 없으니 굳이 마음 쓸 필요 없어요. 그리고 주가는 어찌 됐든 황상의 외가입니다.”
영 황후는 시선을 피하고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장공주는 지금 주가는 첫째,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고, 둘째, 자신의 외가라서 감싸겠다고 태도를 밝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