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와사당
“그럼 저요! 저는요?”
하섬이 후다닥 다가갔다.
“넌 그냥 추미를 따라가라. 조수를 하든지, 뭐든 해라. 그럼 되지.”
문 이야가 대충 별 책임감 없이 하는 말에도 하섬은 순간 활짝 웃고는 얼른 의자를 옮겨 추미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추미가 아주 대범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내게 먹을 게 한 입 생기면 너도 반입 생기는 거야.”
“자주 가서 옥묵을 만나라. 챙겨줄 수 있으면 챙겨주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팔자가 안 좋은 것이다. 조금 지나면……. 몇 년 정도, 그래 몇 년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문 이야는 뒷말을 얼버무렸다. 새 황제가 즉위하고, 수녕백부가 경성에서 사라지면 옥묵도 당당하게 살 수 있으니까.
“이야, 생각났다는 일거리가 뭔데요?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요?”
궁금증을 잠시 참고 있던 추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건…….”
문 이야가 말꼬리를 늘였다.
“너희 낭자의 배가 시녀로 들어간 다음 앞으로 너희 고야를 모시…….”
“뭐라고요?”
추미가 날카롭게 고함치며 벌떡 일어섰다.
“고작 이런 개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동안 어른으로 모시고 존경했는데, 어떻게…….”
문 이야는 추미가 고함치는 바람에 술을 반쯤 쏟았다.
“이것아, 성격 좀 고쳐라! 침상에서 모시라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너희 고야를 모시는 일이 침상 데우는 일밖에 없는 줄 아느냐! 멀쩡한 백주 장삼을…….”
문 이야는 마음 아픈 듯이 장삼을 내려다봤고, 추미는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무슨 일거리인지부터 똑똑히 말씀해 보세요.”
녹매가 추미를 살짝 잡아당겼다.
“일단 앉아. 칠야 밑에서 할 일은 많아. 다 제대로 된 일거리야. 이야는 아마도 네가 사람 알아보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신 걸 거야.”
녹매의 말에 추미는 한시름 놓고 털썩 주저앉으며 꿍얼거렸다.
“제대로 말씀하실 것이지.”
“태태가 대교의 무술 실력이 괜찮긴 하지만, 영씨 가문에 무술 실력 좋은 사람이 제일 많다고, 이번엔 대교는 배가 종으로 보내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 대교는 앞으로 우리 대야 밑에서 마차를 몰고 잔심부름을 하게 될 거라고 하셨어.”
진주가 청국을 바라보며 한담을 나누듯 한마디 하자 청국의 안색이 변했다. 문 이야는 그런 청국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가 금세 풀면서 나긋나긋 말했다.
“고민이 있으면 서둘러 낭자에게 말해라.”
청국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일거리를 구한 추미는 걱정이 사라져서 하늘에 날아 오늘 듯이 들떠서 잔을 높이 들고 여기저기 술잔을 부딪치고 다녔다. 소유는 말리다가 안 되니 아예 내버려 두었다.
하늘을 찌를 뜻이 떠들썩한 큰 부엌의 즐거운 모임은 모두 잠든 시각이 되어서야 다들 돌아가고 끝이 났다.
한여름 오후, 보록궁 작은 뜨락 서쪽 곁채 회랑.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아도 곁채에서 나오는 서늘한 한기 때문에 회랑은 변함없이 쾌적하고 편안했다.
이동과 복안 장공주는 대나무 의자에 앉아서 냉침한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눴다.
복안 장공주는 그리 좋지 않은 안색으로 양손으로 잔을 돌리며 냉기를 느끼다가 이동을 돌아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
“수녕백 부인 진씨, 오늘 안장됐어. 꽤 모양새 좋은 장례였대.”
이동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자가 가장 잘하는 것이 모든 것을 모양새 좋게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진씨의 사인, 뭔지 알지?”
복안 장공주의 물음에 이동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가 의미 모를 헛웃음을 쳤다.
“그런 사람을 찾느라 문도도 참 고생했겠네. 생각해 보면 이 일로 진씨는 죽었지만 수녕백부 전체는 살았으니, 문도가 좋아할지 유감스러워할지 모르겠네.”
“아마 강환장은 3년상을 치르려 하지 않을 거예요. 장공주는 강가 온 가족이 살아났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강환장은 무한한 자기 미래를 망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동의 목소리가 냉담했다. 그녀에게 지금 강가와 강환장은 이 경성, 그리고 경성 밖 무수하게 많은 이름만 아는 관리나 다름없었다.
한참 만에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잔을 두드렸다.
“탈정한다고? 눈에 띄지도 않는 왕부 장사 주제에 무슨 재주로 탈정을 청해? 계 천관을 움직일 셈일까? 아니면 셋째? 응?”
복안 장공주는 말꼬리를 높이며 이동에게 물었다. 이동은 햇볕을 쫴서 조금 시들시들한 화초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설득할지 짐작이 됐다. 그녀가 줄곧 걱정해온 일이기도 하고. 그가 정말로 이야기했고, 믿는 사람도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제 생각엔…….”
이동은 말을 멈췄다가 계속했다.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 적어도 삼왕야는 설득될 거예요. 방법은……. 방법도 있을 거고요.”
복안 장공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화를 자초하는 거지. 감히 셋째 밑으로 들어가서 구사일생의 이 쟁투에 끼어 들어놓고,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걸까? 이 판에 발을 들인 순간 무수한 눈빛이 자기와 강가를 주시할 거라는 생각을 말이야.”
장공주는 그 점이 매우 의문이었다.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생에 그와 진왕은 아예 판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위가 빗방울처럼 별안간 진왕의 머리로 떨어졌고 강환장은 덩달아 구름 위로 날아올랐다. 나중에 태자가 장성하고 다시 쟁투가 시작됐을 때, 수녕왕부는 이동의 관리하에 물샐틈없는 철통같은 곳이 되었다. 강환장은 아마도 지금까지도 그의 수녕백부가 어떤 상황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리라. 그가 수녕백부에 있는 건 나체로 큰 거리를 걷는 것처럼, 일거수일투족, 모든 언행이 무수한 사람의 시선 아래 있는 것이라는 걸 전혀 모를 것이다.
복안 장공주는 이번엔 이동의 대답을 바라지 않고 생각이 많은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주제에 감히 망상을 품다니. 사람이 참!”
복안 장공주는 도리질 치며 혀를 끌끌 차다가 곧 헛웃음 쳤다.
“어리석은 당나귀 주제에 또 감히 망상을 품는 게 강환장 하나는 아니지.”
“네?”
이동은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는 코웃음 치고 또 코웃음 쳤다.
“태의원의 진맥 기록, 갈수록 이상해져.”
이동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황상의 진맥 기록이 이상해? 어떻게 이상하다는 걸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유를 알아냈어요?”
“응.”
복안 장공주는 한참 만에 흐린 얼굴로 대답했고 이동은 더 묻지 않았다. 보아하니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일인 듯했다. 무슨 일이기에 쉽게 처리할 수 없을까.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했다. 장공주가 처리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 흥분을 돋구는 약을 쓴 건가?
“뭔지 알겠어?”
복안 장공주는 더는 묻지 않고 시선을 내린 이동을 힐끔 보며 물었다. 이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댔다.
“그 나이에 창피하지도 않나. 말 좀 해봐. 역대 황조에 그런 일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짓을 해.”
이동은 어색하게 웃었다. 말 좀 해 보라니,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닌걸요.
“태의원엔 진언할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다 모른 체하고, 나한테 고하면 내가 어쩌라고. 출가도 안 한 처자인 내가 어떻게 타일러?”
복안 장공주는 터놓고 밝힌 후엔 참지 않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
“황후마마는요? 아니면 양 숙비마마는요?”
“영씨는, 황상의 일은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어. 오히려 바라는 일일걸? 양씨는 감히 황상 앞에 이야기를 할 수 있기나 하고? 황상은 아마 그게 누군지 기억도 못 할걸.”
복안 장공주는 영씨가 오히려 바라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동은 가슴이 철렁했다. 속으로 알면 됐지, 어떻게 저렇게 입에 올리시나.
“그럼 어떡해요. 내버려 둬요?”
“한참 됐는데 계속 내버려 두면……. 휴!”
복안 장공주는 조금 짜증 나는 듯 잔을 탁, 소리 나게 상에 내려놓았다.
“가서 슬쩍 떠봐야겠어.”
“지금 바로요?”
“응.”
이동이 얼떨떨해져서 물었지만, 장공주는 바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면서 손을 저었다.
“넌 돌아가. 내일 아침에 좀 일찍 오고. 지난번에 만들었던 간식, 몇 개 가지고 와.”
이동은 서둘러 일어나 대답하면서 뒤따라 나갔다.
급하게 나오느라 마차를 몰고 오라고 미리 대교에게 말하지 못했다. 보록궁을 나와서 녹매가 대교를 부르러 간 사이, 이동은 문 앞에 서서 복안 장공주가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 장공주가 방금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자 영원이 불쑥 나타났다.
“이런 우연이!”
영원은 ‘오늘은 정말 우연이군요!’ 하는 얼굴로 몇 걸음 만에 폴짝 이동 앞에 나타났다. 이동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요?”
“줄곧은 아니고. 당신이 들어갔을 때부터?”
영원이 머쓱한 듯 대답하는 순간, 이동은 얼굴이 뜨거워져서 매우 어색해졌다.
“왜 기다렸어요. 볼일 있어요?”
“당연하죠! 한 달 넘게 못 만났는걸요.”
영원은 매우 당당해 보였지만, 이동은 난처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게 볼일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그냥 해 본 말이고. 그런데 당신도 이게 볼일 같긴 한 거지? 사실 나는 이거야말로 큰일 같은데. 하지만…….”
영원은 허리를 살짝 숙이고 이동을 올려다봤다.
“얼굴이 조금 붉은 것 같은데, 햇볕을 쫴서 그런 거겠지? 흠, 여긴 해가 안 비치는데.”
“어딜 봐서 내 얼굴이 붉다는 거예요!”
이동은 애써 얼굴을 구겼다.
“날이 더워서 그래요. 마차 왔어요. 얼른 가세요. 누가 보면 뭐가 돼요.”
“다 당신 시녀인데 뭐. 아니면 대교고. 보면 보라지. 동동, 들어 봐요. 정말 볼일이 있답니다. 여러 가지. 다 요긴한 일인데…….”
“마차 왔어요.”
이동이 얼른 옆으로 피했다.
“저녁에 찾아가서 제대로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정말로 다 중요한 일이라니까.”
영원이 얼른 뒤를 쫓았다.
“만나면 안 돼요!”
영원이 바짝 뒤쫓아 오자 숨결이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듯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안 돼요! 어머니가 불길하댔어요. 당신한테 불길하대요!”
“난 괜찮습니다. 난 원래 그런 걸 거리끼는 사람이 아니라서.”
“당신은 괜찮은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이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영원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알았어요, 알았어, 알았다고. 동동, 형님 영친 날짜는 정해졌나?”
이동은 상대도 하지 않고 단번에 마차에 올라타 휘장을 내렸다.
대교가 마차를 몰려고 하는데 영원이 바짝 다가왔다.
“잠깐!”
대교는 사리 밝은 사람이라 이동이 분부하기 전에 고삐를 잡았다. 영원은 휘장을 들추고 그리 크지 않은 하얀 봉투를 건넸다.
“우리 주방에서 만든 생강 와사당입니다. 잘 만들어졌는지, 맛봐요.”
“와사당이 잘 만들어지고 말고 할 것 있나요?”
녹매가 봉투를 받고는 웃으며 물었다.
“너희 낭자 입맛에 맞으면 잘 만들어진 거고, 아니면 잘못 만든 것이다.”
영원이 엄숙하게 대답하고 이동을 돌아봤다.
“당신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주방 입맛을 이가와 똑같이 만들어 놓을 작정입니다.”
이동은 그런 영원을 보고 있으니 달콤한 마음도 들고 웃음도 날 것 같았다. 녹매는 와사당 봉투를 들고 풉 하고 웃었다.
“칠야, 그러실 것까지 없으세요. 소유 언니가 분명 낭자와 함께 배가 시녀로 갈 거예요. 오히려 전에 대영이 만든 살저채 있잖아요, 낭자는 소유 언니가 만든 게 맛없다고 타박하셨는걸요.”
“장공주가 곧 일거리를 줄 거예요. 이런 쓸데없는 짓은 그만 해요.”
이동은 영원이 아니라 봉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도 중요한 일인데……. 하긴.”
영원이 와사당처럼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
“이건 당신이 관리할 일이지. 부족한 건 없습니까? 필요한 게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말 못 하는 게 있으면 사람을 보내요. 내가…….”
“내가 부족할 게 뭐가 있어요? 사람 오가는 길이에요. 대교, 얼른 가지 않고 뭘 해.”
이동은 다시 어색해졌다. 녹매는 한 손으로 와사당 봉투를 들고 한 손으로 휘장을 내렸다. 영원이 머리를 거두자 마차가 바로 움직였다. 뒤에서 대교를 부르는 영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교, 천천히 몰아라!”
녹매가 웃으며 봉투를 열어서 이동 앞에 내밀었다.
“낭자, 맛보세요. 칠야가 수고하셨네요. 그런데 냄새가…… 생강 향이 너무 진한 것 같은데요.”
이동은 와사당 봉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어 하나를 입에 넣었다. 생강 향이…… 뭐, 괜찮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