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우연한 만남
“아후, 참! 맞다. 지난번에 이야가 저택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밖에도 나가보라고 하셨잖아. 나가 봤어?”
“아직…….”
“그런 얼른 가! 뭘 더 기다리는 거야? 지금 바로 가자. 내가 같이 가줄게. 하섬도 데리고 가자. 하섬도 아직 길을 못 찾았어.”
“좋아요!”
소유가 벌떡 일어나자 추미도 소유처럼 득달같이 일어나 하섬을 불렀다. 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만 어멈에게 청가하고 후각문으로 나가서 우선 마행가로 향했다.
세 사람은 거리로 나가 바글바글한 인파 속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추미는 원래 속이 없는 사람이라 눈앞이 떠들썩하자 구경하느라 아까까지 초조하고 걱정하던 마음이 별 느낌 없을 정도로 옅어졌다.
세 사람은 가장 시끌벅적한 곳을 골라서 구경했다. 마행가부터 어가까지 구경하다가 지쳐서 앉아서 차 마실 곳을 찾아 다포로 들어갔다.
“이 거리에서 조금 더 앞으로 가서 골목 두 개 지나면 작은 골목이 있는데 과부항이라고 불러. 예전에 어머니와 바로 거기서 살았지.”
소유는 차를 마시면서 생각이 많은 듯 말을 꺼냈다.
“과부항? 무슨 이름이 그래, 과부라니? 정말 듣기 거북하네!”
하섬이 싫다는 듯 한마디 했다.
“그 안에 홀로된 여인이 많이 살아서 그래.”
소유의 대답에 추미가 차를 내뿜었다.
“과부가 왜 모여서 살아? 아, 맞다. 언니 어머니는……. 아니잖아. 아냐, 맞긴 하지.”
“다 나와 어머니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야. 그 골목, 말이 골목이지 들어가면 뜨락이 하나뿐이야. 뜨락은 꽤 크고, 방은 크고 작은 거 다 있고. 돈이 정말 없으면 다른 사람과 한 방을 같이 쓰기도 했어. 우리가 처음에 들어갔을 때, 다른 두 사람과 한 방에서 같이 살았어. 방 안에 작은 침상 세 개만 놓고 발 디딜 틈도 없었지. 나중에 어머니가 돈을 벌어서 따로 작은 방을 빌렸고 나중엔 나왔어.”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소유의 목소리에 서글픔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이따 한번 들어가 볼까?”
추미와 하섬까지 서글퍼졌다. 추미가 기운을 내서 웃으며 제안했다.
“뭐 볼 거 있다고. 난 다시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 차 좀 더 마시고 이만 가자. 지금까지 돌아다녔는데도 뭘 하면 좋을지 아직 아무 방법도 없잖아.”
소유가 단칼에 거절했다. 추미는 아직 아무 방법도 없다는 말에 순간 울상을 지었다.
“오늘도 방법을 찾지 못하면 안 돌아갈래!”
하섬이 입을 비죽이며 무시하듯 힐끔 보자, 추미가 즉시 말을 바꿨다.
“내 말은, 돌아갔다가 다시 오자는 거지.”
“알았어. 가자.”
소유가 찻값을 내고 세 사람은 다포에서 나와 계속 거리 구경을 했다.
금세 소유가 말한 그 과부항 앞에 도착했다. 세 사람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 추미와 하섬은 궁금한 듯 발끝을 세우고 어둑어둑한 골목 안을 들여다봤다. 골목 입구에 꾀죄죄하고 나이를 알 수 없는 거지 여인이 꿈틀꿈틀, 애써 담벼락 구석으로 몸을 움츠렸다.
소유는 의아한 듯 거지를 살펴봤다. 골목 안을 들여다보던 추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실망하며 시선을 거두다가 소유의 시선을 따라 거지 여인을 바라봤다.
“어!”
추미의 장점은 잠이 얕은 것 외에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사람을 잘 기억하는 재주. 눈앞의 거지, 왜 볼수록 눈에 익은 것 같지?
추미가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거지 여인을 바라봤다. 거지 여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기어가듯이 그 과부항으로 들어가서는 담장을 짚고 허둥지둥 골목 안으로 달아났다.
“어머!”
추미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거지 여인을 가리키며 ‘어머, 어머!’ 하고 외치다가 별안간 치맛자락을 들고 뒤쫓아 갔다. 소유와 하섬은 어리둥절해져서 추미 뒤를 쫓으며 고함쳤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소유가 말한 대로 과부항은 매우 짧았다. 추미는 몇 걸음 만에 뜨락으로 쫓아 들어가서 좌우를 살피고는 대문 맞은편 구석에 개집처럼 보이는 움집에 웅크린 거지 여인을 발견했다.
추미가 얼굴을 두 다리 사이에 묻고 완전히 웅크린 거지 여인을 허리를 숙이고 보며 물었다.
“너 옥묵이지?”
“뭐라고?”
하섬이 놀라 고함쳤다. 옥묵? 고 낭자 시녀 아니야? 왜 이런 꼴이 되었어? 세상에!
옥묵은 머리를 더 처박고 바들바들 떨면서 더러운 움집 안에서 웅얼거리며 부인했다.
“아니에요……. 아니야…….”
“너 옥묵이잖아! 내가 잘못 볼 리 없어!”
추미는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들게 하려고 옥묵의 어깨를 흔들었다.
“네가 왜 이런 곳에 있어? 너…….”
말라서 사람 꼴도 아니고 입가엔 피멍이 가득한, 인간도 귀신도 아닌 꼴인 옥묵을 보는 순간, 추미는 슬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옥묵이 싫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순간까지 이 인간이 싫었다. 고 이낭이 싫은 것처럼. 하지만 눈앞에 이런 모습으로 있는 옥묵을 보자 괴로워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렀다.
“얘 좀 봐,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어? 병에 걸렸어? 너…….”
추미는 마음이 아파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소유도 웅크리고 앉았다. 나달나달해져서 몸도 거의 가리지 못하는 옷을 위에서 아래로 일일이 들추면서 옥묵의 짓무른 다리와 발, 팔과 손을 보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겨울에 동상 걸려서 이런 거지? 어쩌다가 이렇게 짓물렀어. 열도 많이 나네. 며칠이나 이랬어?”
옥묵은 고개를 푹 숙이고 움직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너도 고 이낭처럼 이낭이 되었다더니?”
하섬이 허리를 숙이고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옥묵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너…….”
아는 게 좀더 많은 추미는 입을 떼다가 입을 다물었다. 옥묵이 영리하다면 경성에서 달아났을 거라고, 멀리 가면 갈수록 좋다던 이야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경성에서 달아나는 게 어디 그렇게 쉽나.
“언제부터 아팠던 거야? 옥묵, 말을 해. 나 추미야. 나 기억하지? 분명 기억할 거야. 우리 싸우기도 했잖아. 얘는 하섬, 여긴 소유 언니. 다 아는 사람이야. 네 일, 우리도 다 들었어. 우리가 전에 사이가 안 좋긴 했지만……. 휴. 그건 됐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야? 너…….”
소유가 주절주절 말이 많은 추미를 살짝 잡아당겼다.
“추미, 그만해. 옥묵, 이거 닷 냥짜리 은표야. 너희 둘, 돈 가지고 나왔니? 다 꺼내 봐.”
소유는 이야기하다 말고 추미와 하섬을 돌아보며 물었다. 추미와 하섬은 얼마 안 되는 동전을 모두 꺼내서 소유에게 건넸다. 소유는 모든 동전과 은표를 옥묵의 손에 쥐여주었다.
“동전도 좀 있어. 받아. 일단 향수항에 가서 목욕하고 깨끗한 옷을 사서 입어. 그리고 전장에 가서 은표를 동전으로 바꿔. 바꾼 돈으로 의원을 찾아가고. 네 다리, 그리고 손, 팔, 더 미루면 못 쓰게 돼.”
소유가 꼼꼼히 당부하자 옥묵이 고개를 들고 소유를 바라봤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린 갈게. 며칠 뒤에 나랑 추미, 그리고 하섬, 셋이 다시 올게. 걱정하지 마. 우리 셋 다 널 만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아. 가자.”
소유는 말을 마치고 추미와 하섬에게 가자고 했다. 추미는 뜨락 입구에서 뒤를 돌아봤다. 은표와 동전을 꼭 쥐고서 자기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옥묵을 잠시 보다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서 소유를 따라갔다.
골목에서 나간 세 사람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골목 입구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마음이 안 좋아. 구경 그만하고 돌아가자.”
추미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소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기운 없이 이가 저택 쪽으로 돌아갔다.
하늘이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무렵, 영원은 몸을 옆으로 틀고 각문을 비집고 들어가서 담 모퉁이 나무 그늘을 따라 연기처럼 미끄러지듯 이동의 거처로 달려갔다.
노련하게 여아장을 넘어 월동문으로 들어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복두를 바로 잡고 매무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리한 다음에 살짝 목을 가다듬고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가 서둘러 걸음을 멈추고 품에서 쥘부채를 꺼내 펼쳤다가 다시 접고서 경쾌하게 계단에 올라 회랑으로 올라갔다.
막 모퉁이를 도는데 맞은편에서 수련이 화책(畵冊)을 잔뜩 끌어안고 나타났다.
영원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수련이 눈썹을 치켜뜨며 고함쳤다.
“어머! 칠야, 왜 또 오셨어? 정혼한 후에는 만나면 안 돼요! 칠야, 얼른 돌아가세요.”
“그런 법도가 어디 있느냐.”
영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련이 무질렀다.
“우리 호주 법도예요. 태태가 분부하셨어요. 낭자도 태태의 분부는 거역하지 못해요. 칠야, 얼른 가세요.”
“너희 태태…….”
“우리 태태가 왜요?”
벌써 영원 앞까지 다가간 수련이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영원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일리 있는 말씀이라고. 그럼 얼굴은 안 보고 문 뒤에서 이야기만 몇 마디…….”
“안 돼요! 안 가시면 태태를 모셔올 거예요. 녹매야!”
수련은 융통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듯 소리 높여 녹매를 불렀고 녹매가 실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가서 칠야가 또 오셨다고 태태께 말씀드려. 내쫓아도 안 가신다고. 우리 대야, 그리고 문 이야도 모셔와. 태태의 분부야.”
“알았다, 알았다, 알았어! 가마! 가면 되잖으냐!”
영원이 손사래 치며 뒷걸음질 쳤다.
“너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맞다, 수련! 너…….”
수련이 시선을 빤히 마주하자 영원은 허허 웃었다.
“내 말은, 훌륭하단 말이다. 바로 돌아가마!”
영원은 꽤 시원스럽게 돌아서서 가면서 내내 툴툴거렸다.
“수련! 수련이라 이거지. 기억했다. 정말 좋은 시녀로구나, 좋다! 두고 보자. 너희 낭자와 혼인하면 이 몸이, 가장 먼저 널 혼인시켜 내보낼 것이다! 늙고 못 생기고 성격은 괴팍한 못난이와 혼인시킬 것이야! 두고 봐라! 염라대왕보다 저승사자가 더 상대하기 어렵다더니, 정말 그 짝이구나!”
정북후부 입구에서 미끄러지듯 말에서 내린 묵칠은 서리를 수십 번 맞은 가을 나뭇잎처럼 우중충한 모습으로 기운 없이 손사래 쳤다. 다행히 소우, 소무 두 사환이 영리했고, 서둘러 계단 위로 쪼르르 올라가서 영 칠야가 계시는지 문지기에게 물었다.
영원이 웬일로 저택에 진짜 있었고, 소우, 소무는 다시 후다닥 내려와서 기운이 없어서 잘 걷지도 못하는 묵칠을 양옆에서 부축했다. 계단을 올라 정북후부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종복을 따라 줄곧 안으로 들어갔다.
영원은 부들부채를 들고 따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회랑 흔들의자에 널브러져 있다가 소우, 소무가 묵칠을 부축해서 들어오는 걸 보고도 눈꺼풀도 들지 않았다. 이미 짜증이 나 있는 상태인걸!
“칠 형님!”
영원을 보자 기운이 생긴 묵칠이 소우, 소무를 밀치고 울면서 제 칠 형님을 향해 달려갔다.
영원은 기겁해서 의자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
“왜 그러느냐? 네 아버지, 할아버지가…….”
초상이라도 난 건가? 아니지, 초상을 알리러 본인이 오지는 못하지.
“칠 형님, 나는 못 산다.”
단숨에 영원 앞에 들이닥친 묵칠이 주변을 두리번거려봐도 회랑엔 영원 엉덩이 아래 이 의자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묵칠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못 산다는 말에 영원은 안심했다. 못 산다고 하는 걸 보면 별일 아닌 것이다. 영원은 다시 흔들의자에 널브러져서, 목 놓아 우는 묵칠을 다리로 툭툭 찼다.
“또 왜 못 산다는 거냐? 울지 말고 말을 해라!”
묵칠은 양손으로 번갈아 눈물을 훔쳤다.
“응! 이번엔 진짜 못 산다. 칠 형님, 나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