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탕 한 그릇
곡 대내내는 화들짝 놀랐다.
“그게 말이 돼? 일방적으로 하는 말인데? 내가 불효라고 고한대도 어떻게 불효했는지 말해야지!”
“대내내, 이런 일은 이치가 필요 없습니다. 부인이 불효라고 말하면 불효인 겁니다. 아무도 진위를 논하지 않아요. 국법이 그렇습니다. 감히 나서서 논할 사람이 없어요.”
왕 어멈은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날뛰는 진 부인을 힐끔 바라봤다. 곡 대내내는 의문스러운 듯 왕 어멈을 바라봤고 왕 어멈은 그런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못 믿겠으면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세요. 부인이 정말 고발하면, 한마디면 끝납니다. 대내내 목이 날아가요.”
곡 대내내는 슬슬 자신감이 없어졌다. 경성은 어찌 됐든 그녀가 자란 작은 마을과 달랐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이 미친 여편네는 정말로 그럴 만한 물건이니 일단 진정시켜야 했다.
결정을 내린 곡 대내내는 즉시 나긋나긋해졌다.
“부인! 두 아가씨가 허튼소리 하는 것 믿지 마세요. 어머니 곳간의 물건이 많은데 이걸 제가 옮겨갔다면 어디에 뒀겠어요? 저택 안을 마음대로 조사하세요. 실오라기 하나라도 찾아내면 제가 가지고 갔다고 인정하지요! 일단 진정하세요. 천천히 조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말로 구슬릴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내 물건을 훔쳤다! 돌려놓아라! 어서 돌려놓아!”
진 부인은 원래 증거, 논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곡 대내내가 훔친 것으로 생각하는 이상 정말로 곡 대내내가 훔치지 않았더라도 훔친 게 된다.
“이야기했잖아요. 훔쳐도 숨길 곳이 없다고요. 왜 이렇게 물고 늘어지세요.”
무슨 말을 해도 물건을 돌려놓으란 소리밖에 하지 않는 진 부인을 상대로는, 곡 대내내의 온몸에 입이 났더라도 말주변을 선보일 여지가 없었다.
“돌려놓아라! 실낱 하나도 빠짐없이! 돌려놓아라! 잘 들어라! 돌려놓지 않으면 고발할 것이다! 이 천것! 불효 죄로 고발할 것이다!”
진 부인은 평생 모은 자기 물건만 생각하면 온몸을 칼에 베이는 듯이 아팠다.
“이야기했잖아요. 제가 가지고 간 게 아니에요!”
곡 대내내는 다급해졌다. 진 노부인이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강완은 진 부인과 곡 대내내를 긴장한 얼굴로 바라봤다. 어머니가 이 곡가 천것을 예부에 고발하길 바랐다. 그래야 오라버니가 좋은 아내를 다시 구해 오니까.
주먹 쥐고 바라보던 강녕은 틈을 보고 끼어들었다.
“바로 너야! 너 말고 누가 있어! 네가 어머니 물건을 훔쳤어! 이 가난뱅이…….”
강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까부터 머리끝까지 분노했던 곡 대내내가 손을 치켜들어 뺨을 후려쳤다. 그 귀뺨에 강녕이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물건을 돌려놓아라! 내 직금단! 내 은자! 모두 돌려놓아!”
진 부인은 지금 오로지 자기 물건밖에 보이지 않았고 강녕이 맞은 걸 보고도 제 할 말만 외쳤다. 봤어도 보지 못한 것과 별 차이 없었다. 물건을 돌려받아야 했다. 목숨으로 의지할 그녀의 물건, 이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미쳤군요!”
곡 대내내는 다시 인내심을 잃고 얼굴을 구기며 또 목소리를 높였다. 왕 어멈이 얼른 그녀를 잡아당겼다.
“대내내, 참으세요. 참아야 합니다, 대내내.”
“잘 들어요. 난 모르는 일이에요!”
“이 천것!”
진 부인은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감히 내 물건을 훔쳐? 잘 들어라, 내 부친은 국자 제주다! 나는 당당한 백부인이다! 감히 내 물건을 가지고 가? 죽여버릴 테다! 고발할 것이야! 불효로 고발할 것이야! 갈가리 찢어놓을 것이야!”
“대내내, 숙이세요. 대내내, 정말 고발하면 대내내는 죽은 목숨입니다.”
왕 어멈은 다급해졌다. 정말로 고발하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
“알았어요, 알았어.”
곡 대내내는 무슨 말도 통하지 않는 진 부인을 상대로 이를 악물고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곳간이 허름해져서 일단 물건을 다른 곳간으로 옮긴 거예요. 장난 한번 친 거예요. 어머니도 참. 곳간 수리가 끝나면 물건을 돌려놓을 거예요.”
곡 대내내는 지연책을 쓰기로 했다.
왕 어멈은 고개를 숙이고 신발코를 내려다봤다. 부인 곳간에 있던 비단, 장식품은 그날로 대내내가 전당포에 팔아 버렸다. 돌려놓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곡 대내내는 이번엔 정말로 허리를 숙였다. 간절하게 이야기도 하고 악도 쓰면서 이틀 안에, 늦어도 사흘 안에 물건을 돌려놓겠다고 하는 데다가 왕 어멈까지 애를 쓰며 설득한 끝에 진 부인도 드디어 하루 이틀 기다리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 부인을 정원으로 배웅한 후, 곡 대내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뜨락 문밖으로 나와 쥘부채를 미친 듯이 흔들면서 휘몰아치듯 제 거처로 돌아갔다.
“이제 어쩌면 좋은지 말 좀 해 봐.”
곡 대내내가 화를 내며 왕 어멈에게 물었다. 왕 어멈은 울상을 지었다. 무슨 방법이 있겠나. 그 곳간의 물건들은 원래도 부인의 목숨줄이었는데. 열쇠는 밤낮없이 부인의 허리춤에 걸려 있고 드나드는 사람도 부인뿐이었다. 긴 세월 동안 봉운이나 부인이 보는 앞에서 들어가서 청소나 했을까, 그런 목숨줄 같은 곳간을 대내내가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털어 가놓고, 어쩌면 좋으냐고? 뭘 어쩔 수가 있나.
“아니면, 세자야가…….”
방법이 없어도 방법을 쥐어짜야 하는 왕 어멈이 끙끙대며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곡 대내내가 말을 잘랐다.
“안 돼! 세자야가 알면 절대로 안 돼!”
“그럼…….”
그럼 정말 방법이 없었다. 사실 세자야가 나서도 부인을 진정시키지 못할 것이다.
곡 대내내의 얼굴이 음침하게 어두워지고, 언뜻 음산하고 표독한 기색이 번뜩였다.
“차분히 생각해야겠어. 자넨 이만 물러가.”
잠시 후, 곡 대내내가 싸늘하게 분부하자 왕 어멈은 서둘러 공손하게 물러났다. 곡 대내내의 표정을 생각하니 은근히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간 왕 어멈은 새벽에 계속 악몽을 꾸었다. 악몽에서 깨어나 다시 자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문을 열었더니 춘연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왕 어멈이 막 문을 열자마자 춘연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왕 어멈을 빤히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대내내, 대내내가…… 가서, 가서…… 비상을 사 오래요.”
비상, 두 글자는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만 크게 말해도 독살되기라도 할 듯이. 하지만 그 작은 두 글자가 왕 어멈의 귀엔 천둥처럼 들렸다.
“뭐라고? 대내내가?”
춘연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왕 어멈은 넋이 나가서 춘연을 바라봤다. 춘연은 그런 왕 어멈의 시선을 잠시 마주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 쳐서 빼꼼 열린 문을 비집고 나가서 다급하게 달려갔다.
왕 어멈은 날이 밝을 때까지 다시 잠이 들지 못했다. 날이 밝자마자 밖으로 나가서 얼이 빠진 것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과 대충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큰 약방이 있는 거리 쪽으로 향했다.
비상은 뭐에 쓰려고. 뭐에 쓰긴!
왕 어멈은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누가 알게 되면 관여된 사람은 목이 날아갈 일이었다.
얼이 빠진 채 약방 근처로 걸어간 왕 어멈은 거리를 오가는 인파 너머로 약방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바라보다가 심호흡하고 청석길을 따라 약방 안으로 들어가 궤대에 동전 더미를 탁 내려놓았다.
“파두(巴豆: 독성 있는 한약재), 서 푼 어치 주게.”
파두를 안고 수녕백부로 돌아온 왕 어멈은 달달 떨면서 파두를 곡 대내내 앞에 내놓았다. 곡 대내내가 이상한 걸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곡 대내내는 탑상에 단정히 앉아서 왕 어멈이 탁상에 놓은 작은 봉지를 내려다보다가 춘연에게 분부했다.
“열어보렴.”
춘연은 핏기없는 얼굴로 손을 떨면서 봉지를 열었다. 곡 대내내는 여전히 턱을 치켜들고 내려다봤다.
“됐다. 신경 써서 탕 한 그릇 고아오게. 다 되면 여기로 가지고 오고. 부인이 몸보신을 좀 해야 해.”
관문 하나를 넘은 왕 어멈은 내심 안도하며 공손히 물러났다. 큰 부엌으로 돌아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닭 한 마리 잡으라고 분부하고 당삼(黨蔘: 산시성 동남부 상당에서 나는 삼) 등을 넣고 진한 닭탕을 고았다.
곡 대내내는 춘연이 약을 닭탕 그릇에 털어 넣는 걸 보고 춘연에게 그릇을 들려서 전 노부인의 정원으로 향했다.
춘연은 타고 있는 숯이라도 든 것처럼 닭탕을 들고 곡 대내내의 뒤를 따랐다. 한여름에 등줄기가 으스스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하룻밤 새 몰라볼 정도로 초췌해진 진 부인은 곡 대내내가 들어가자 막 사람을 잡아먹은 대머리독수리처럼 휙 고개를 들고 죽일 듯이 곡 대내내를 노려봤다.
“내 물건은? 돌려놓았느냐?”
“분부했어요. 사람도 보냈고요. 금방 들고 올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실낱 하나 부족하지 않아요.”
곡 대내내가 방실방실 웃으며 하는 말에 진 부인은 길게 안도하며 이를 갈았다.
“그 정도 머리는 있어서 다행이다!”
“감히 부인의 물건을 어떻게 건드려요.”
곡 대내내의 미소가 더 찬란해졌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부엌에 분부해서 닭탕을 고았어요. 당삼, 천마를 넣은 거예요. 몸보신하게 드세요.”
곡 대내내는 그렇게 말하며 탕을 따르라고 춘연에게 눈짓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반월과 그 옆에 공손하게 서 있는 두 시녀를 향해 분부했다.
“여기서 멍하니 무얼 하느냐? 이 시간이 되었는데, 부엌에 가서 부인의 식사가 어떻게 됐는지 재촉하지 않고!”
아직 점심시간이 아니었다. 반월은 어리둥절했지만, 끽소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곡 대내내가 자기를 보고 한 말이라서 다른 시녀를 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직접 밖으로 나가는데 걸음을 떼자마자, 곡 대내내가 두 시녀를 향해 화를 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지 못해? 반월 혼자 어찌 들고 온다고! 어쩌면 하나같이 눈치가 이리 없지?”
두 시녀도 허둥지둥 반월의 뒤를 따라 달려 나왔다. 시녀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반월은 몇 걸음을 가다가 상방을 돌아봤다. 은근히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다 내쫓은 거지?
반월은 몇 걸음 더 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너희 둘이 먼저 가. 난 이따 갈게.”
두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진 뒤, 반월은 수화문으로 나가서 후각문으로 둘러 가서 살금살금 다수간으로 들어가 실내를 엿봤다.
반월과 두 시녀가 실내에서 나가서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는데, 춘연은 손을 떠느라 탕 한 그릇을 다 채우지 못했다.
“이 쓸모없는 것!”
곡 대내내는 이를 갈며 욕을 내뱉고 다가가서 춘연의 발끝을 콱 밟은 다음 모질게 짓이겼다. 춘연은 아파 죽을 것 같아도 끽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마음을 모질게 먹고 탕을 따랐다. 그릇 안의 닭탕의 반이 밖으로 쏟아졌다.
곡 대내내는 춘연이 든 손수건을 뺏어서 탕 그릇을 닦은 다음 춘연의 얼굴에 내던지고 그릇을 진 부인 앞에 올렸다.
“부인, 탕부터 드세요. 족히 두 시진은 고았답니다. 보세요, 푹 고아서 당삼, 천마가 모두 탕에 녹았답니다. 어서 맛보세요.”
진 부인은 물건을 곧 돌려놓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놓이자 배가 고파왔다. 어제 곳간이 텅 빈 걸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는데 구수한 닭탕 냄새를 맡으니 순간 너무 배가 고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