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불효
묵칠이 튀어 올라 부친을 덥석 끌어안자 묵 이야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온몸이 뻣뻣해졌다.
“놓아라! 이 고얀 놈……. 어쩌면 이리 어리석으냐!”
“아버지,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입니다!”
묵칠은 부친을 놓아주고 진지하게 칭찬했다. 묵 이야가 단단히 굳은 얼굴로 이를 갈며 대답했다.
“정말이지 고약한 무지렁이 놈이구나! 제대로 책을 외워라! 그렇지 않으면…….”
“걱정 붙들어 매세요. 평생 외우겠습니다! 지금 바로 외우겠습니다!”
묵칠이 빙빙 돌다가 바닥에서 책을 주워서 치켜들고 막 한마디 외치는데 부친이 무질렀다.
“밥부터 먹어라! 밥 먹고 쉬다가 다시 외워라.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다. 쉴 때는 쉬어야 한다!”
묵 이야가 한마디 할 때마다 묵칠이 고개를 꼬박꼬박 끄덕였다. 십여 년 동안 묵칠이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건 처음이었다.
아들의 거처에서 나온 묵 이야는 어머니를 만나러 정원으로 직행했다.
전 노부인은 아들이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어디 아픈 것이야? 태의를 모셔야 할까?”
“괜찮습니다. 밥 먹고 있습니다.”
묵 이야는 안심부터 시키고 전 노부인에게 눈짓했다. 전 노부인은 알아듣고 방 안의 어멈, 시녀를 물렸다. 묵 이야는 탑상 자락에 몸을 틀고 앉아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마음에 든 낭자가 있었습니다.”
전 노부인은 무심결에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게…… 어느 댁이냐?”
“진정하세요, 어머님.”
묵 이야는 안색이 싹 변한 모친을 보면서, 아까 조마조마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른 대답했다.
“탕가 낭자입니다. 산서 탕가, 고 사사와 사돈인 탕가.”
“아미타불!”
안도한 전 노부인은 보살부터 찾았다.
“며칠 동안 소칠 일만 생각하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너는 모른다. 난 혹시나 소칠이……. 네 부친의 말이 맞다. 소칠은 큰일에선 어리석지 않다. 정말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어머님,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소칠이 이렇게 정진하는 건 아마도 탕가 낭자와 혼인하고 싶어서일 겁니다. 순조롭게 혼인하게 되면 앞으로 소중함을 모를까 걱정입니다. 차라리…….”
묵 이야는 중요한 고민을 했다. 전 노부인도 곧바로 알아들었다.
“조금 더 미루자는 것이냐?”
“음, 우리 쪽에서 말고요. 소칠 그 고얀 놈이 음식을 끊는 수까지 썼는데 우리가 더 막고 나서면 어깃장을 둘 겁니다. 지난번처럼 죽네, 사네 하면…….”
“지난번 같은 일은 다시 있어선 안 되지. 하마터면 빠질 뻔했잖느냐. 난 아직도 악몽을 꾼다.”
“예. 탕가 쪽에서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혼사는 탕가에서 조건을 내세워서 소칠을 골려야 합니다. 탕가에서, 자기 집안은 상인 가문 출신이라서 우리 집안과 걸맞지 않는다고, 탕 낭자가 묵가에 들어오면 친정에서 힘을 쓰지도 못하는데 소칠이 정진하지 않기까지 하니 혼인한 후에 탕 낭자가 고생할 것이 뻔해서 딸을 주기 싫다고 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러면 혼인한 후에 탕 낭자가 소칠을 닦달할 수 있는 핑계도 되겠구나.”
전 노부인도 매우 찬성했다.
“예, 바로 그겁니다. 적당한 사람을 찾아서 말을 전해야겠습니다.”
묵 이야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전 노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야 쉽지. 이가 신가아를 부르거라. 탕가 가아가 신가아와 같은 과 진사다. 탕가는 이가와 대대로 교제하는 집안이고. 신가아가 가장 적합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묵 이야는 안도하고 일어섰다.
“어머님도 좋다고 생각하신다니 바로 가서 만나겠습니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신가아 모친에게 부탁해서 탕가에 말을 넣어야겠습니다. 사돈을 맺으려면 지켜야 할 예법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야지요.”
“그래야지. 어서 가거라. 난 소칠에게 가 보마. 휴. 그 녀석, 참으로 손이 가는구나.”
전 노부인도 따라 일어섰다. 보배 덩어리 손자를 한 번 보고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묵 이야는 이신을 만나 이야기를 전하고는 한림원에서 나와서 곧장 묵 승상을 만나러 중서로 향했다. 묵 승상은 아예 밖으로 나와서 아들과 함께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님, 전 관직에서 물러날까 합니다.”
묵 이야는 몇 마디 만에 본론으로 돌입했다. 묵 승상으로서는 뜻밖인 말이었다.
“응? 소칠을 위해서?”
“소칠 때문만은 아닙니다.”
묵 이야는 무심결에 보록궁 방향을 바라봤다.
“아버님은 큰형님을 경성으로 불러 호부를 맡길 때 저를 지방으로 보낼 생각이었지만, 지금 조정 형국은 그때와 다릅니다. 장공주도 예전의 장공주가 아니고요.”
아들의 말에 묵 승상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장공주는 황상과 다릅니다. 게다가 육저아가 이가와 혼인합니다. 이신은 장공주가 고른 사람이고요.”
묵 이야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거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묵 승상은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황상이 조회에 나오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정사를 논하는 시간도 갈수록 줄어든다. 처음엔 밀소가, 지금은 거의 모든 상주서가 보록궁에서 나왔다. 황상이 비준하는 상주서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태자는…….”
묵 승상이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보록궁은 태자의 체면을 깎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휴.”
묵 승상의 탄식에 연민이 느껴졌다. 방임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특히 장공주 같은 사람의 방임은.
“고서강의 병은 아마 낫지 않을 겁니다.”
“벌써 사직 상주를 올렸는데 장공주가 돌려보냈다.”
묵 승상은 고서강이 읍소하던 상주를 떠올렸다. 고서강 역시 사리 밝은 자였다.
“우리 세 부자가 모두 1품 관리인 건 과합니다. 하나는 물러나는 게 좋습니다.”
묵 이야의 목소리가 매우 낮았다.
“여 승상은 이번 달에 벌써 태의를 두 번 저택으로 불렀습니다. 은퇴할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는 여 승상보다 젊으니 몇 년 더 고생하셔야 할 겁니다. 큰형님은 정무 면이든 인품이든 저보다 뛰어납니다. 제가 사직하는 게 가장 적당합니다. 몇 년 뒤에 아버님도 사직하면 소칠 대의 아이들의 앞길이 열릴 겁니다.”
묵 승상은 한참 침묵하다가 서서히 한숨을 내뱉었다. 이 일로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모른다. 원래는 자기가 사직하려고 했었다.
“제가 사직하려는 건 소칠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소칠이 이제 정진할 마음이 생겼으니, 혼인하자마자 지방직을 얻어서 제가 아들 며느리와 함께 갈 생각입니다. 소칠 곁에서 몇 년 돌봐 주고, 아이가 생기면 제가 직접 손자를 가르치고요.”
묵 이야가 앞으로의 계획을 계속 이야기하자 묵 승상은 조금 마음 아픈 듯이 아들을 두드렸다.
“휴, 너희 형제자매 중에 이 아비가 제일 미안한 게 너다. 재능만 따지면 네가 네 형보다 더 낫거늘. 하지만…….”
“형님이 저보다 낫습니다. 저는 젊을 때 철이 없었고, 소칠을 얻은 후에야 아버님과 어머님이 그 당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깨달았습니다. 아버님은 제 성격을 잘 알지 않습니까. 저는 느긋하고 나태한 성격이라 원래 관료 사회에 있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지금 발을 빼고 물러나서 소칠을 가르치다가 나중엔 손자 가르치고,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아버님보다 편안하게 사는 겁니다.”
묵 이야는 정말로 홀가분해 보였다. 소칠이 이제 믿음직해졌다는 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쁜 일이었다.
묵 승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녕백부, 진 부인의 가득 찬 곳간이 하루 사이에 텅텅 빈 사건은 며칠을 숨기지 못했다.
진 부인은 거처 안에 달린 내실이 빈 것부터 발견했다. 그녀의 은자, 그녀의 보물이 싹 없어졌다는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바람처럼 다른 곳간으로 뛰쳐들어가 모든 곳간이 실오라기 하나 없이 텅 빈 것을 본 진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곡 대내내는 요 며칠 줄곧 진 부인을 지켜보고 있었고, 반월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진 부인이 열쇠를 들고 내실로 들어가는 순간 반월은 질겁해서 두 다리를 달달 떨면서 곡 대내내에게 시녀를 보냈다.
곡 대내내가 허둥지둥 달려왔을 때, 진 부인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혼수를 도둑맞았다고, 경부 관아에 고발하러 간다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부인, 진정하세요. 어느 곳간의 물건이 없어진 건지부터 말씀해 보세요.”
곡 대내내는 매우 침착하게 진 부인을 잡으라고 반월과 춘연에게 눈짓했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휘두르면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곳간에 물건이 있었나요? 안주인인 제가 왜 몰랐을까요? 비어있던 것 아닌가요?”
“다 가득했었다! 그건 내 물건이다! 내 혼수! 다 내 것이야! 어서 가라! 관아 사람을 불러라!”
진 부인이 미친 듯이 괴력으로 날뛰는 바람에 반월과 춘연도 붙잡지 못했다. 진 부인은 곳간 안으로 뛰쳐 들어가서 손가락으로 한 바퀴 가리켰다.
“이 곳간이 꽉 차 있었다. 곳곳이 가득했어! 내 비단, 진공으로 들어온 직금단이…….”
곡 대내내는 미치광이 같은 진 부인을 태연하게 바라보며 느긋하게 손수건을 휘둘렀다.
“집안이 이토록 궁핍했는데 부인의 곳간엔 직금단이 가득했군요.”
“네가 어머니 물건을 훔쳤구나! 너였어!!”
멍청하게 지켜보던 강녕이 순간 깨닫고 곡 대내내를 손가락질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어머나, 아가씨,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곡 대내내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강완도 곡 대내내를 가리켰다.
“너야! 네가 맞아! 어쩐지, 웬일인가 했지. 우리와 어머니를 대상국사에 보내주더라니! 알고 보니 유인책이었구나! 어머니 물건을 훔치려고 우릴 빼돌린 거야!”
강완이 역시 강녕보다 똑똑했다.
곡 대내내가 사방을 둘러보며 시치미를 뗐다.
“아이고머니나, 쯧쯧. 유인책 같은 소리. 우리 저택에 유인해야 할 사람이나 있고요? 난 왜 몰랐지?”
“내 물건, 돌려놓아라!”
진 부인은 곡 대내내를 노려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곡 대내내를 붙들었다.
“이 천한 것! 내 물건을 돌려놓아라! 잘 들어라, 실낱 하나 건들 생각하지 말아라! 내 물건은 실 하나까지 다 세어두었다! 돌려놓아! 이 천한 것! 이 염치없는 천것! 돌려놓아라!”
진 부인은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곡 대내내는 거의 얼굴에 달라붙을 것 같은 그 얼굴에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미쳤군요! 저것들이 하는 허튼소리를 믿다니요!”
“돌려놓아라!”
곡 대내내가 진 부인을 힘껏 떠밀었지만, 진 부인은 버럭 고함치며 곡 대내내를 힘껏 흔들었다.
“천것! 물건을 돌려놓아라! 실오라기 하나라도 건들기만 해 봐라! 당장 내쫓을 것이다!”
“어서 부인을 끌어내! 내가 천해? 이 미친 여편네가! 하! 날 내쫓아? 내쫓아요! 나는…….”
자신은 황상이 친히 비준한 성지를 들고 수녕백부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성지가 있으니, 진 부인의 위협이 두렵지 않았다.
“불효로 고발할 것이다! 잘 들어라! 돌려놓지 않으면 예부에 불효로 고발할 것이다!”
미친 듯이 고함치던 진 부인을 왕 어멈과 반월이 뜯어냈다. 곡 대내내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콧방귀를 뀌고 담담하게 매무새를 고쳤다.
고발? 고발하고 싶으면 하라지. 이건 모두 집안일인데? 청백리도 집안일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댔어!
왕 어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고개를 치켜든 곡 대내내, 절망감으로 미친 것 같은 진 부인을 번갈아 보다가 진 부인을 잡으라고 춘연에게 눈짓하고 자기는 곡 대내내 곁으로 다가가 잡아당겼다.
“대내내, 일단 숙이세요. 부인이 정말 고발하면 큰일 납니다.”
“흥! 고발하려면 하라고 해! 무서워할 줄 알고? 예부? 예부라도 억지를 쓸 순 없지. 내가 가지고 갔다고 주장하면 내가 가지고 간 것이 되나? 증인은? 물증은? 이건 집안일이야! 청백리도 집안일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댔어!”
곡 대내내는 자신의 박식한 식견을 과시했다. 왕 어멈은 헛웃음 쳤다.
“대내내, 예부에 불효로 고발하는 건 집안일이 아닙니다. 불충, 불효는 십 대 악행의 첫 번째입니다. 부인이 고발하기만 하면 끝이에요. 대내내가 불효하다는 한마디면 족합니다. 대내내, 불효는 참수할 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