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빙설량수
명가 삼낭자는 계소영과 정혼한 후 절차를 거의 끝내고 이제 친영례(親迎禮)만 남았다. 육 누이는 이 전려와 정혼해서 한창 떠들썩하게 납폐를 진행 중이고, 소자람 형님까지 해가 삼낭자와 정혼한 바람에 큰 고모님도 바빠서 묵칠이 책을 외우는지 어떤지 보러 올 겨를이 없었다.
묵칠 본인도 글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어졌다.
묵칠은 거처에서 빙글빙글 돌며 전원의 떠들썩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책을 내던지고 소우, 소무 두 심복 사환을 데리고 도둑처럼 살금살금 후각문을 빠져나갔다. 제 영칠 형님을 찾으러 일단 정북후부에 들렀다가 다시 경부 관아로 향했다.
영원은 또 한 번 빙설량수를 사서 바치고 지금은 경부 관아 후원의 낡은 흔들의자에 다리를 높이 치켜들고 앉아서 머리 위의 거대한 녹나무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칠 형님, 여기서 여유 부리고 있었군.”
“집에서 글공부나 할 것이지 여기엔 왜 온 것이냐?”
드디어 영원을 찾은 묵칠이 희희낙락하며 묻자, 영원이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묵칠은 제자리에서 빙글 돌면서 낡은 대나무 의자를 발견하고는 영원 곁으로 끌고 와서 앉았다.
“칠 형님, 글공부를 할 수가 없어. 형님, 들었지? 육 누이가 이가 대랑과 혼인한다! 아, 참!”
묵칠은 갑자기 떠올라서 허벅지를 철썩 내리쳤다.
“칠 형님, 앞으로 우린 친척이구나!”
영원이 무시하는 듯 묵칠을 흘겨봤다.
“그 먼 사이도 친척으로 엮는 거냐?”
“멀기는! 형님은 내 사촌 매부의 매부다. 하나도 안 멀지!”
묵칠은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했고 영원은 귀찮은 듯 손사래 쳤다. 묵칠이 바짝 다가갔다.
“칠 형님, 중요한 일이 있다. 형님, 모두의 혼사가 정해졌는데, 나만…….”
“모두라니? 그 모두라는 게 누구냐?”
영원은 모두의 혼사라는 말에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혼사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요즘 매일 악몽을 꾼다. 이렇게 늘어지다가 행여 무슨 변고라도 생겨서 마지막에 모두 수포가 되면…….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모두가 아니라, 저들이라 칩시다. 칠 형님, 저들의 혼사는 다 정해졌는데, 나는 어쩌지?”
묵칠은 간절하게 영원을 바라봤고 영원은 그를 흘겨봤다. 네가 어쩌면 좋을지 내가 어찌 아냐. 내 문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걸!
“칠 형님, 이러지 마십시오! 내 일이라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은 날 도와줘야지. 봐봐, 우리는 친척이라고. 이렇게 가까운 친척.”
묵칠은 알랑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몇 다리를 거쳐야 하는데 가까운 친척은 개뿔.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좋다. 그럼 동문 밖 그 집에 가서 빙설량수를 사 와라. 하나도 녹지 않은 상태로 내 앞에 가지고 오면 내가 방도를 생각해 주마.”
영원이 손사래 치며 하는 말에 묵칠이 힉, 소리를 냈다.
“칠 형님, 이건 사람 괴롭히는 거지. 동문이 얼마나 먼데, 이 더운 날에 그 집 빙설량수는……. 그래, 그래, 알았다. 간다, 가. 사람 괴롭히는 게 아니라 시험하는 거지. 음, 안다. 형님, 안심해……. 내가 어떻게든 가지고 올게.”
관아에서 나간 묵칠은 말을 타고 동문 밖으로 직행했다. 처음엔 반쯤 달려왔을 때 빙설량수가 이미 녹아 물이 되었고, 두 번째엔 반도 못 와서 완전히 녹았다. 연달아 서너 번 왔다 갔다 한 묵칠은 초조해져서 은자 백 냥을 탁 내놓고 동문 밖 빙설량수 가판을 통째로 경부 관아 안으로 옮겼다. 경성 관아에 있던 사람은 물론 개 두 마리까지 죄다 몫이 돌아갔다.
영원은 빙설량수 두 그릇을 먹고 다가오라고 묵칠을 향해 손짓했다.
“넌 좀 아둔하지만, 네 아버지, 그리고 네 할아버님은 능구렁이다. 분명 네 수작을 어느 정도는 간파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네가 입을 열기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네가 입을 열면 수많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그럼 어쩌지?”
서안 위에 새로 늘어난 높디높은 서책 두 더미를 떠올린 묵칠은 순간 쓴 즙을 삼킨 듯이 울상이 되었다.
“이 일은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 두 분이 먼저 말씀을 꺼내게 해야 해. 두 분이 먼저 꺼내기만 하면 일이 쉬워진다.”
영원이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자 묵칠은 망연해졌다.
“두 분이 먼저 말을 꺼내게? 형님, 말도 안 되는 소리. 두 분이 먼저 말을 꺼낼 리가 있나…….”
“쉽다. 네가 버티기만 하면 된다.”
“버틸 수 있지! 그건 걱정하지 마라. 형님, 내가 글공부도 다 하는데 이 세상에 어려울 것이 뭐가 있나. 책도 외우는데 이 세상에 내가 버티지 못할 일이 없다!”
묵칠이 가슴을 탁탁 치며 장담했다.
“그럼 됐다. 돌아가라. 가서 계속 책을 외워라. 제대로 외워라. 열심히 외워라. 목숨 걸고 외워라.”
영원이 외우라고 할 때마다 묵칠은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알았다! 알았어! 형님, 안심해라. 그럼 그다음엔?”
“밥을 먹지 말아라.”
“뭐라고?”
묵칠은 제 귀를 의심했다.
“내 말은, 밥을 먹지 말란 말이다. 한 입도, 간식도 안 된다. 아무것도 안 된다. 버틸 수 있으면 물도 마시지 마라. 아니, 책을 외워야 하는데 물도 마시지 않으면 입이 말라서 책을 외우지 못하겠구나. 차는 좀 마셔라. 탕도 마시지 말고. 그렇게 해라. 가라.”
영원이 밖을 향해 손을 휘둘렀지만 묵칠은 멍하니 서 있었다.
“칠 형님, 지금 나더러…….”
“묻지 마라. 말해도 넌 모른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두 끼 만에 못 버티게 되어도 내 탓을 하지 말아라.”
영원이 경고했다. 묵칠은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 칠 형님을 향한 강한 신뢰가 있으니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칠 형님의 말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책만 외우기로 했다.
묵칠이 저택으로 돌아가 책을 외우기 시작한 후에 금세 오시가 되었다. 찬모들이 공들여 준비한 찬합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묵칠이 성가신 듯이 손사래 치며 내쫓았다.
“나가라, 나가. 책 외우고 있는 것 보이지 않느냐. 다 나가라!”
“칠소야, 소인은 식사를 가지고…….”
“나가라는 말 들리지 않느냐? 나가라! 책 외우는 것 안 보이냔 말이다! 다 나가라! 들고 가! 글공부 중이다! 안 먹어!”
어멈들은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봐도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찬합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부엌 관사 어멈에게 이야기했더니, 관사 어멈이 깜짝 놀라서는 전 노부인에게 고하러 달려갔다.
소칠이 밥을 먹지 않으려 한다는 말에, 전 노부인은 어서 소칠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골라 따로 만들라고 분부하고 소칠 아비에게 사람을 보냈다. 소칠이 며칠 내내 공부하느라 지쳤는지 밥도 먹지 않으려 한다고 얼른 가서 그만 외우고 나가서 놀면서 기분 전환하고 오라고 하라고 전했다.
묵칠이 열심히 글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묵 이야는 웬만하면 관아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아들을 지켰다. 전 노부인의 전갈에 묵 이야는 눈살을 찌푸리고 서둘러 묵칠의 거처로 향했다.
찬모들을 내쫓은 묵칠은 정말로 배가 고픈 건지, 아니면 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배가 고파진 건지, 어찌 됐든 어멈들이 나가자마자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꼬르륵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책을 들고 아까 맡았던 음식 냄새를 떠올리면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수화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소우가 회랑에서 미친 듯이 손짓했다. 부친이 왔음을 깨달은 묵칠은 얼른 책을 들고 큰 소리로 외우기 시작했다.
“어찌, 글공부하느라 밥도 먹지 않는다고?”
안으로 성큼 들어온 묵 이야는 책을 들고 열심히 외우느라 자기가 들어온 것도 깨닫지 못하는 척하는 아들을 보고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생각 없습니다. 책 외우고 있는걸요!”
묵칠은 핏대를 세우며 대답하고는 책을 높이 치켜들고 고개를 들고 계속 외웠다. 묵 이야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다가가서 의자에 앉았다. 책을 높이 들고 웅얼웅얼 외우는 아들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결국 발을 구르며 입을 열었다.
“됐다. 말해라. 어느 댁 낭자가 마음에 든 것이냐?”
“켁.”
열심히 책을 외우던 묵칠은 아비의 말에 목이 턱 막혀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이게…….”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묵 이야가 일어서려 하자 묵칠이 얼른 책을 내던지고 달려갔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뭐냐, 아버지, 조금 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묵 이야가 이를 갈 듯 또박또박 말했다.
“어느 댁 낭자가 마음에 든 것이냐. 말해라.”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말은…….”
묵칠은 어질어질해졌다.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아셨을까? 아버지가 이렇게 묻는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째서 영칠 형님이 말한 것과 완전히 다르지?
“말할 생각 없느냐? 그래, 됐다.”
묵 이야가 다시 일어서려 하자 묵칠이 후다닥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니요, 아니요……. 아버지도 참. 그, 그, 아버지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할 것이냐 말 것이냐?”
묵 이야는 얼이 빠진 아들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들놈, 속셈이라는 게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버지, 제가 이야기하면 어떻게 됩……. 아니, 아니. 이놈의 입. 제 말은, 제가 마음에 든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에 든 사람이 없으면 또 어떻고요?”
묵칠은 다급한 나머지 조금 영리해졌다. 묵 이야가 위아래로 그를 살폈다.
“너는 어쩌고 싶은 것이냐?”
“제가 뭘 어쩌고 싶겠습니까. 그야 물론 혼인…….”
묵칠은 이야기하다가 말고 깨달았다. 그래, 다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군.
“아버지,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함정을 파다니요! 그래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혼인하고 싶다고요! 예! 어쩔까요?”
“어느 댁 낭자냐.”
묵 이야의 목소리는 가라앉고 마음도 쿵덕쿵덕 날뛰기 시작했다. 묵칠은 갈등하는 얼굴로 이를 악물며 발을 굴렀다.
“이야기하라면 못할까 봐요! 탕가 오낭자입니다. 탕호우의 누이!”
묵 이야의 긴장해서 튀어나올 것만 같던 심장이 순간 제자리로 돌아가고 숨이 조금씩 쉬어졌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미리 말해둡니다만, 나와 탕가 오낭자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냥 내가 마음에 두었을 뿐입니다. 오낭자가 절 마음에 둔 게 아닙니다. 탕 오낭자는 저를 몰라요! 탕 오낭자와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묵칠은 이제야 영리해져서 얼른 해명을 덧붙였다. 묵 이야가 그를 노려보다가 별안간 손을 치켜들어 머리통을 내리쳤다.
“고얀 놈!”
“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묵칠은 고얀 놈이라고 야단하는 부친의 모습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쭈그리고 앉아서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묵 이야는 아들을 걷어차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달랬다.
“일어나라! 네가 마음에 둔 낭자가 아직 너를 모른다는 걸 너도 안다면 이 혼사가 너의 일방적인 바람이라는 것도 잘 알겠구나. 그렇다면 너도 너무 기대하지 말아라.”
“응?”
묵칠은 눈물을 훔치다 말고 얼떨떨해져서 벌떡 튀어 올랐다.
“아버지 그 말씀은…… 서로 원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정말 최고의 아버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