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그럼 됐어요
“구저아에게 차를 내려주렴.”
“낭자!”
곡우가 기겁해서 외치자 묵 육낭자는 그제야 정말로 정신을 차렸다.
“아, 구저아, 갔어? 그렇지, 갔지. 난 괜찮아. 나가보렴. 다 나가. 난 괜찮아. 잠시 혼자 있고 싶어. 생각할 일이 좀 있어. 다 나가렴.”
정신을 차린 묵 육낭자는 한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부터 속까지 천만 개의 날카로운 칼이 살을 긋고 뼈를 바르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혼자 조용히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낭자.”
곡우는 더 두려워졌다. 묵 육낭자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가. 나 혼자…….”
“예, 예.”
곡우는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면서 방 안에 있는 모두를 물리고 자기는 마지막에 문밖으로 나가서 그물 휘장을 사이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낭자를 지켜봤다.
묵 육낭자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잠시 후, 서서히 옆으로 기울더니 탑상 위에 쓰러져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곡우는 문밖에서 그 모습을 보며 다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낭자가 성격이 좋긴 해도 지켜야 할 법도는 지켜야 했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한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애를 태우고 있는데 수화문 밖에서 명 삼낭자가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너희 낭자는?”
명 삼낭자가 수화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목소리 높여 물었다. 곡우는 구세주를 본 듯이 허둥지둥 다가가 맞이하며 예를 갖췄다.
“마침 잘 오셨어요. 방 안에 계세요. 낭자, 삼낭자 오셨어요. 삼낭자, 얼른 들어가 보세요.”
명 삼낭자는 곡우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육저아가 벌써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네. 아이고!
“육저아, 괜찮아?”
안으로 들어간 명 삼낭자는 탑상에 웅크린 묵 육낭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언니!”
명 삼낭자의 목소리를 들은 묵 육낭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니라고 부르고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목이 잠기고 눈물만 비처럼 흘렸다.
“울지 마, 울지 마.”
명 삼낭자가 다가가 묵 육낭자를 안아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울지 말라는 그 말에 묵 육낭자는 그녀를 끌어안고 말도 하지 못하고 꺽꺽 울었다.
“울지 마……. 아니, 울고 싶으면 울어. 제대로 울어. 울고 나면 괜찮아져.”
명 삼낭자는 애간장이 끊어질 것 같은 묵 육낭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묵 육낭자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명 삼낭자를 안고 한바탕 속 시원하게 운 묵 육낭자는 조 구낭자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에 엉망이 된 마음이 차츰 가라앉아서 서서히 울음을 그치고 훌쩍였다.
“언니, 언니……. 나, 언니…….”
“나도 들었어. 지금 막 듣고 오는 길이야. 슬퍼하지 마. 어쩌면 사실이 아닐지 몰라. 설령 진짜라고 해도 혼담을 넣었다고만 들었지, 고개를 끄덕였다는 소리는 없었어.”
하지만 묵 육낭자의 눈빛 때문에 명 삼낭자는 위로의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해 삼낭자는 유순하고 예를 아는 낭자였다. 해 상서의 친손녀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해 상서 슬하에서 자랐고 해 상서가 그녀를 해 이낭자와 똑같이 대하는 걸 모두가 안다. 거기에 해 상서가 친히 꺼낸 혼담이었다. 보기 드문 좋은 혼사라서 이가에서 승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일…….”
“이야기하지 마.”
명 삼낭자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묵 육낭자가 말을 자르더니 계속해서 도리질했다.
“더 이야기하지 마. 이제 입에 올리면 안 돼. 더 생각해서도 안 돼. 알아. 다 지나갔어.”
“육저아.”
명 삼낭자는 생기를 잃은 것 같은 묵 육낭자의 모습에 심장이 칼에 베이는 듯했다.
“난 괜찮아.”
“알아. 넌 괜찮아. 나도 다 알아.”
명 삼낭자는 묵 육낭자의 손을 힘껏 쥐었다. 마음이 너무 혼란했다. 해 상서가 혼담을 넣었다는 말만 들었지, 이가가 승낙했다는 이야기는 아직이었다. 아직 승낙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노력해 봐야 했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 그녀도 지금 육저아처럼 절망했었다.
“육저아, 일단 푹 쉬어. 난 일이 좀 있어. 급한 일이야. 푹 쉬고 있어.”
결정을 내린 명 삼낭자는 그렇게 당부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중문에서 나가 마차에 오른 명 삼낭자는 이 전려의 저택에 가자고 어멈에게 분부했다. 이가 대낭자를 만나 제대로 이야기해야 했다.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 삼낭자는 생각을 바꿔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반루로 와달라고 이가 대낭자에게 전하라고 어멈을 보냈다.
이동이 막 보록궁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탑상에 누워서 어제부터 오늘까지 일어난 복잡한 일을 정리하려는데 어멈이 들어와서 명 삼낭자가 급한 일로 반루에서 기다린다는 기별을 전했다.
이동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반루로 직행했다.
지난번 명 삼낭자가 갔었던 별실에 이동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명 삼낭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실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동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명 삼낭자는 입술을 달싹일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묵부에서 나오자마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궁리했는데 지금까지 고민해 봐도, 뭐라고 말해도 적당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큰일은 아니고……. 그냥 해가에서 귀댁에 혼담을 넣었다면서요?”
명 삼낭자는 해가에서 혼담을 넣은 일부터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가가 벌써 승낙했다면, 그럼…….
“맞아.”
이동은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명 삼낭자를 빤히 보면서 대답했다.
“그럼 언니네는, 언니네는 승낙했어요?”
명 삼낭자는 무심결에 앞으로 다가오면서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 요 며칠 일이 좀 생겨서, 오라버니가 아직 어머니와 상의할 겨를이 없었어.”
이동은 이상한 느낌이 더 짙어지는 동시에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그럼 됐어요!”
명 삼낭자는 크게 안도했다.
“그럼 됐다니, 무슨 뜻인데?”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이동이 느릿느릿 묻는 말에 명 삼낭자는 순간 머쓱해져서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 말은…… 나는…….”
“삼저아, 본인이 궁금해서 묻는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 대신 물으러 온 거야?”
이동은 명 삼낭자가 머쓱해하는 모습에 자기가 다 어색해질 지경이라서 얼른 분위기를 풀었다.
“그게, 육저아 일로……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명 삼낭자는 이야기하고 싶어도 뭐라고 이야기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런 일을 털어놓고 말하면 육저아의 체면은 어째야 하나.
“묵가 육낭자?”
이동이 얼른 묻자 명 삼낭자는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은 잠시 멍해졌다. 연초에 영원이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벌써 낌새를 느낀 건가?
“해가에서 혼담을 넣었다는 걸, 육낭자가 들은 거야?”
이동은 명 삼낭자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명 삼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낭자 대신 물어보러 왔다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정해졌는지 아닌지 물으러 온 것이고?”
이동이 이어서 묻자 명 삼낭자가 고마운 눈빛으로 이동을 바라보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은 육낭자가 물어보라고 해서 왔는지가 아니라, 대신 물으러 왔냐고 물었다. 그 한마디에 그녀의 배려와 선의가 느껴졌다.
“묵가는 지체 높은 집안이고 육낭자가 너무 뛰어나서 어머니는 감히 탐을 내실 수가 없어.”
이동이 떠보는 듯 말했다. 명 삼낭자가 고개를 들고 이동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고 또 달싹였다.
“너무 스스로 비하하는 말이에요. 육낭자가, 묵가가 무슨 지체 높은 집안이냐고 했어요. 스스로 잘난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삼낭자가 하는 말, 알아들었어. 이 일은…….”
이동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오라버니는 손위 형제고, 위에 어머니도 계셔. 삼낭자, 걱정하지 마.”
이동은 조금 어수선하게 대답하면서 창밖을 돌아봤다.
“이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 반드시 답을 줄게.”
“좋아요. 언니, 고마워요.”
이동의 말을 알아들은 명 삼낭자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영 칠야가 이가에 혼담을 넣으러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다. 명 삼낭자 마음속에 지금 눈앞에 있는 이가 대낭자는 불가능이 없는 그 영 칠야와 그야말로 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 대낭자가 있으니, 혹은 영 칠야가 있으니, 마음이 너무 놓였다.
이동은 명 삼낭자를 배웅하고 잠시 앉아서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고 아래로 내려가 한림원으로 가자고 분부했다.
마차가 한림원 밖 거대하고 오래된 녹나무 아래 멈춰 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이신이 시녀와 함께 나와서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이동은 휘장을 살짝 젖히고 이신을 바라봤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오라버니, 묵가 육낭자 기억해요?”
이신은 가슴이 철렁해서 이동을 빤히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동은 그런 오라비의 표정을 빤히 살폈다.
“기억하는군요. 그럼 오라버니는 해가 삼낭자가 좋아요, 아니면 묵가 육낭자가 좋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이신은 믿을 수 없어 하며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묻는 걸 보면 무슨 말인지 아는 것 같네요. 그럼 대답해 봐요. 누가 좋아요? 오라버니 대답이 있어야 얼른 돌아가서 어머니와 상의하죠. 그리고 보록궁에 가서 그분에게 나서 달라고 부탁해야 하고요.”
“나는 그저 걱정이다. 묵가가…… 내 말은 육낭자가…….”
이신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알았어요. 그럼 나는 이만 가요. 오라버니, 해 상서에게 빨리 대답하는 게 좋겠어요. 빠를수록 좋아요.”
이동은 한마디 당부하고 휘장을 내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자고 대교에게 분부했다.
마차가 이가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동이 다시 나와 마차에 올라 보록궁으로 향했다.
이동의 청탁을 들은 복안 장공주는 잠시 놀라다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 이렇게 좋은 혼담을 왜 먼저 떠올리지 못했지? 마침 잘됐네. 빚을 갚을 수 있게 됐어.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기렴. 육낭자는 마음이 너무 섬세하고 예민한 것 말고는 다 좋아. 녹운, 가서 백 노부인을 모셔오렴. 급한 일이라고, 즉시 와달라고 해.”
이동은 복안 장공주의 빚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차 반 잔 마시고 일어서서 인사했다.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백 노부인이 또 찾아왔다는 기별을 들은 전 노부인은 문 앞까지 마중 나갔다. 소칠이 갑작스럽게 정진하고 있어서 백 노부인에 대한 분노가 훨씬 옅어진 상태였다.
전 노부인의 태도가 싹싹하자, 눈치 주는 걸 각오하고 왔던 백 노부인은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뭘 마중까지 나오고 그러나.”
백 노부인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감사 인사부터 했다. 전 노부인은 백 노부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며 코웃음 쳤다.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는지 궁금해서 그렇지.”
“찾아올 낯짝이 없을 게 뭐가 있다고.”
백 노부인도 가차 없이 이야기하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알아서 앉았다.
“이번엔 좋은 일일세.”
“좋은 일? 자네가 무슨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게 있어서?”
전 노부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육저아 혼사로 왔네. 이 전려, 어떤가?”
백 노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게 좋은 일이라고?”
전 노부인의 목소리가 훅 높아졌다. 그런데 뭐라고 더 하기 전에 백 노부인이 먼저 말했다.
“장공주의 뜻이네. 좋은 혼담이라며, 중매는 나더러 서라고 하시더군. 내게 사과할 기회를 주겠다고.”
백 노부인은 그렇게 말면서 정중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전 노부인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표정이었다. 잠시 후,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장공주께서 좋은 혼담이라고 하셨다면 분명 좋은 혼담이겠지.”
전 노부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삐딱하게 백 노부인을 바라봤다.
“확실히 좋은 혼담이긴 하네만, 이걸로 사과하려고? 염치없지 않은가?”
백 노부인이 빙긋 웃음 지었다.
“알겠네! 그럼 해 상서부에도 내가 가겠네. 손 노부인 쪽에 내가 이야기하면 되겠지?”
“흥, 이제야 좀 말이 되는군.”
전 노부인이 턱을 치켜들며 콧방귀 뀌자 백 노부인은 웃는 얼굴로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육저아의 사주를 주게. 이따 이 전려의 사주를 보내겠네.”
“이가 가아의 사주부터 보내야지. 지킬 예법은 지켜야 하지 않겠나.”
전 노부인의 말에 백 노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 쳤다.
“그러세, 그래. 아이고, 자네도 참. 난 일단 해 상서부부터 들렀다가 이가에 가야겠네. 이만 가네.”
“안 나가네.”
전 노부인은 탑상에 앉아서 백 노부인이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걸 바라보다가 한참 동안 멍하니 차를 홀짝이고는 시녀에게 분부했다.
“육저아를 불러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