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좋게 생각하다
주육은 멱살을 잡힌 것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부모를 잃은 것처럼 구는 고자의의 모습에 의아하고 궁금해서 화낼 겨를도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그걸 나한테 묻나? 네 원 형님과 죽고 못 살 정도로 사이가 좋으면서, 무슨 일인지 모른단 말이냐? 영원이 이가에 구혼하러 간 걸 모르는 척할 셈이냐?”
고자의는 얼굴을 거의 주육의 얼굴에 붙이고 버럭버럭 고함쳤다.
“뭐라고?”
주육이 꽥 고함치는 소리가 곧바로 고자의의 고함을 눌렀다.
“지금 뭐라고 했냐?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원 형님이 구혼해? 이가에?”
주육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괴성을 질러댔고, 그 괴성에 고자의가 오히려 담담해졌다.
“꼴을 보니 정말 몰랐던 모양이구나. 네 원 형님이 이가에 혼담을 넣으러 갔단다. 이 한림의 이가! 그 이가 낭자에게 구혼하러! 이번에 너 때문에 된통 당했구나. 날 죽이려는 게지, 네가!”
고자의는 바보처럼 넋이 나간 주육의 뺨을 한 대 치고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주육은 고자의가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숨을 들이쉬며 정신을 차리고는 말을 끌고 오라고 연신 고함치고 말에 올라서 묵부로 직행했다.
묵 이야는 요 며칠 관아를 비워도 되는 틈만 생기면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귀를 쫑긋 세우고 아들이 형통 하반부를 외우는 소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주육이 묵부에 대뜸 들어와서 소칠을 찾아왔다고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묵 이야는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며 뛰쳐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걸음을 내디디려다가 다시 돌아서고, 또 돌아서고, 연달아 몇 번 돌아서다가 눈이 빙빙 돌아갈 것 같은 사환을 불렀다.
“칠소야가 어쩌고 있는지 가 보아라. 몰래!”
사환은 묵 이야의 의중을 알아듣고 재빨리 사라졌다.
묵 이야는 뒷짐을 진 채 뜨락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사환이 돌아와서 보고하길 기다렸다.
소칠이 글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이제야 길이 좀 들었고 지금은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여기서 마음을 가다듬으면 앞으로 진정으로 정도를 걸을 수 있을지 모른다. 주가 소육 저 화근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져버리면 아마도 평생 다시는 정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칠은 지금 아비가 너무 참견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나이였다.
아이고! 묵 이야는 가슴을 부여잡고 쉴 새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묵칠의 서재에 쳐들어간 주육은 묵칠 손에 들린 형통을 빼앗아서 서안 위에 탁 내던졌다.
“큰일이 났다! 대체 무슨 일이냐? 뭐에 씌어서 이러는 것이야? 아직도 글공부 중이냐?”
“이야기하지 않았냐.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묵칠이 서책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자 주육이 휙 밀쳐냈다.
“큰일이 터졌다고! 원 형님 일이다!”
“칠 형님에게 무슨 일이 났기에?”
묵칠은 서책을 잡으려다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영원이 별안간 살기등등하게 뛰쳐나간 후로 내내 걱정이었다. 나중에 부친이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해서 조금 안심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부친이 괜찮다는 것과 자기가 괜찮다는 것은 항상 별개였다.
“난리 났다고! 원 형님이 이가에 혼담을 넣으러 갔단다!”
주육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 주먹으로 쿵쿵 서안을 내리쳤다. 묵칠은 넋이 나갔다.
“아? 누구? 칠 형님 이야기 맞나? 영 칠야? 형님이 구혼? 혼인한다고? 아이고, 세상에…….”
묵칠의 중점은 제 칠 형님이 혼인한다는 것이었고 주육의 중점과는 완벽히 달랐다.
“원 형님도 나이가 찼으니 혼인할 때가 되었지. 구혼한 상대가 이가 낭자다. 이신, 그 이 전려의 누이, 수녕백부 강가에서 버림받은 며느리!”
주육이 탁탁 서안을 내리치며 말했다.
“억!”
묵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한참 만에 돌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휙 젖히더니 양손으로 팔걸이를 내리치며 하하 웃었다.
“어쩐지! 칠 형님은 역시 칠 형님이군! 역시 남달라! 우리 칠 형님은 역시 보통 사람과 달라. 정말이지……. 이래야 내 칠 형님이지!”
주육은 묵칠의 웃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 웃어? 미쳤냐? 하긴, 원 형님이 남다르긴 하지……. 너 지금 이게 무슨 말이냐. 원 형님이 남다르긴 하지만 재가하는 여인과 혼인할 건 없지! 웃긴 왜 웃어? 웃지 마라! 닥쳐라!”
묵칠은 웃다가 눈물을 훔쳤다.
“기뻐서 웃는다. 칠 형님, 참 대단하군. 칠 형님과 비교하면 우린 역시 안 된다. 비교할 수가 없어. 칠 형님도 참……. 축하하러 가야겠다. 너도 갈 것이냐?”
“간다. 하지만 축하하러 가는 게 아니라 물어봐야겠다.”
주육은 일어서서 툴툴거리며 묵칠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사환이 조르르 묵 이야의 거처로 돌아가 몰래 들은 내용을 낱낱이 이야기했을 때, 묵 이야도 넋이 나갔다. 영원이 이 전려의 누이, 복안 장공주의 유일한 지기에게 구혼했다고?
묵 승상은 이날 평소보다 빨리 돌아왔다. 전 노부인이 서둘러 삼탕을 올리자 묵 승상은 천천히 몇 입 마시고는 그릇을 내려놓고 어멈, 시녀들을 물렸다.
“영원이 이 전려 집에 구혼하러 갔다고 하오.”
묵 승상이 부드럽게 하는 말에 전 노부인은 멈칫하다가 곧 놀라서 물었다.
“이가에요? 구혼이라니……. 이가 대낭자요?
아이고! 영 칠야, 겉으로 보기엔 허튼짓이나 하고 못난 것 같더니 계략이며 안목이며, 정말 대단하네요.”
“계략?”
묵 승상은 계략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이래서 두려웠던 것이지. 다만 듣자 하니 중매인으로 나서달라고 장공주에게 부탁했다더군. 장공주는 허락했고. 장공주가 허락한 걸 보면 그 계략이 온전히 계략만은 아닐 것이오. 게다가 영원은 영리한 사람이지. 계략을 이 일에 부리지 않았을 거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아.”
“처음에 그 이가 대낭자를 봤을 때부터 그 나이대 어린 낭자답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진중하고 너무 침착해요. 그 나이대 낭자는 둘째치고 서른, 마흔 먹은 사람도 그처럼 진중하고 침착하진 못할 겁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원. 단지 강가 일 때문일까요?”
이동 이야기가 나오자 전 노부인은 생각도 많고 의아하기도 했다.
“세상엔 태생부터 비범한 사람이 있지. 계 노승상은 스물 초반에 그 식견을 갖추고 서른, 마흔 된 것처럼 성숙했소. 학식 깊은 명사라 누구나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했지.”
묵 승상은 계 노승상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에 갈수록 계 노승상이 감탄스러웠다. 전 노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영칠이 이가에 구혼한 것은 꼭 계략이라고만 볼 순 없네요. 이가 대낭자는 확실히 보기 드문 좋은 낭자랍니다. 생각해 보면 영가, 참으로 단순하지 않군요. 영가 소칠이 영가에서 가장 변변찮은 자제라던데, 가장 변변찮은 사람이 이 정도라면 정북후와 출중하다는 영가 두 자제는 대체 어떻겠습니까.”
묵 승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영원보다 출중하리란 법도 없지. 영원 같은 녀석은 분명 어릴 때부터 남달랐을 거요. 지극히 개구쟁이였겠지. 그런 아이의 소문은 보통 변변찮다, 못 쓴다고 나지 않소. 꼭 진짜라고 볼 수 없소. 하지만 영가에서 쭉정이가 나지 않는다는 가풍은 우리 묵씨도 본받을 만하겠군.”
두 사람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묵 승상은 아들 묵 이야와 묵씨 가문, 그리고 조정 대사를 논의하러 서재로 향했다.
묵 승상이 서재로 향하기 전, 여 승상도 저택으로 돌아갔다.
한림원에서 돌아온 여염은 곧장 여 승상의 서재로 향해서 찻자리를 준비하고 조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찻자리를 막 준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 승상이 뒷짐 지고 매우 느긋해 보이는 모습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
여 승상은 상석에 앉아서 여염을 바라봤다.
“할아비가 간직해 온 묵은 백차를 내오너라. 할아비와 함께 청차 몇 잔 마시자꾸나.”
여염은 분부대로 백차를 꺼내고 차를 내려서 여 승상 앞에 올렸다.
“영원이 이가에 혼담을 넣으러 갔다는 일, 들었느냐?”
여 승상이 차를 반 잔쯤 마시고 묻는 말에 여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랑에게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조금 자세히 물었습니다.”
여염은 여 승상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여 승상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라.”
“예. 물어봤더니, 영 칠야가 그런 생각을 품은 지 조금 됐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봐서는 진심이고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겠냐고 이 대랑이 그러더군요. 인간은 관 뚜껑 덮기 전엔 결론 짓지 못한다고요. 그러니 현재만 볼 수밖에 없다고요.”
“음, 맞는 말이지.”
“할아버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염은 다시 차를 내려주고 고개를 들고 물었다.
“좋은 혼담이다.”
여 승상은 기지개를 켜고는 일어서서 매우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팔을 휘둘렀다.
“화원에 가서 좀 거닐어야겠다. 가서 일 보거라.”
여염이 서둘러 일어서서 조부를 따라 뜨락 문을 나선 다음 계속 따라가려고 하자 여 승상은 손사래 치고 느긋한 모습으로 뒷짐 지고 휘적휘적 멀어졌다.
여염은 조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원 부인의 거처에 문안 올리러 갔다.
이가와의 혼사가 사실 자신이 낮춰 가는 것이고 그리 훌륭한 혼처는 아니라고 느끼던 조 구낭자는 그 혼사를 해 상서부가 도중에 가로채 간 것을 안 후로는 갈수록 이가가 괜찮은 혼처라고 느껴졌다. 심지어 불을 켜고 찾아도 없는 좋은 혼사라고 생각되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해 상서부에서 돌아온 후로 손수건을 몇 개나 비틀어 망가뜨리고도 울분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더 왕성해졌다.
조 구낭자는 해 이낭자가 이번 일에 손을 썼다고 단정했다. 생각할수록 해 이낭자를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치가 만만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서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조 구낭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해 이낭자의 위선과 가면을 찢어발기기로 했다.
해 상서가 이신에게 해 삼낭자의 혼담을 넣었다는 말을 들은 묵 육낭자는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가슴이 깨지는 것 같아서 온몸이 굳고 심지어 표정까지 다 굳었다. 미소 지은 채 열심히 이야기 듣는 그녀의 표정은 조 구낭자의 일장 연설이 일단락될 때까지 한순간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한번은 이낭자가 널 보고 어리석다고 했어. 그때 그 일로 말이야. 그리고 또 한번은…….”
묵 육낭자는 조 구낭자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처음과 비교해서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 미소를 유지했지만 마음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것 같아서 안색은 갈수록 창백해졌다.
“육저아, 정말 성격도 좋지!”
조 구낭자는 자기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묵 육낭자가 미소 하나 변하지 않는 걸 보고 화가 나서 툴툴거렸다.
언제나 이렇지. 눈이 높아서 나 같은 건 안중에 없어! 묵 육낭자와 해 이낭자, 하나는 승상부 낭자, 하나는 상서부 낭자, 둘 다 시랑가 여식인 나는 무시하는 거지!
“난 이만 돌아갈게. 조금 전에 한 말, 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육저아, 신경 쓰지 마. 이낭자가 나쁘다고 하는 말이 아니야. 내가 이낭자와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 안 좋은 말을 하겠어. 그냥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야. 육저아는 사리 밝은 사람이니까 알겠지. 됐어. 이만 갈게.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푹 쉬어.”
조 구낭자는 갈수록 화가 나서 일어서서 그 말을 내뱉고는 묵 육낭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돌아섰다.
묵 육낭자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모든 게 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낭자?”
곡우는 조 구낭자가 돌아간 뒤에 자기네 낭자가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고 이상해져서 다가가 흔들었다. 묵 육낭자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