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17화 (417/463)

417화: 타박

“어젯밤 비가 뭐가 많이 와? 큰비면 또 뭐? 그놈은 영씨야. 영씨 가문 사람은 사내는 말할 것도 없고 여인도 대여섯 살부터 군영에서 훈련받고 진을 짜. 폭우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칼이 떨어진다고 해도 꿈쩍하지 말고 서 있어야 한다고. 전쟁터엔 화살이 비처럼 떨어지는데, 하늘에서 칼이 떨어지는 거랑 뭐가 달라? 영원이 전쟁을 몇 번이나 겪었게? 북삼로 도적은 그놈 이름을 외우며 복수하겠다고 맹세하고 저주를 해. 어제 그 정도 비에, 마음이 약해졌어?”

이동은 줄줄이 이어지는 복안 장공주의 물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휴! 여인은 나이가 들면 혼인해야 한다더니! 어쩔 수가 없네!”

“그럼 장공주는요?”

이동은 부끄럽고 화가 났다.

“내가 너랑 같아?”

복안 장공주가 못마땅하다는 듯 이동을 흘겨봤다.

“난 너처럼 이렇게 못나지 않아. 잠깐 서 있고 비 조금 맞았다고 마음이 약해져서는. 나였다면 아무리 못해도……. 됐다, 됐어. 일이 다 이렇게 됐는데 더 말해 뭐 하겠어. 아이고, 정말 못났다!”

복안 장공주가 연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자 이동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이고, 아이고. 됐다, 됐어. 혼인하면 하는 거지. 그놈이 티 내기 시작한 후로 계속 이리저리 생각해 봤는데, 네가 나랑은 다르지. 영원 그놈이 황당하고 억지 쓰긴 해도…… 그래도 괜찮은 편이야. 적어도 똑똑하잖아.”

이동은 얼떨떨해졌다. 장공주의 말에 속뜻이 있는 듯했다.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흘겨봤다.

“넌 어째 내 앞에서는 꽤 영리하게 굴면서…….”

복안 장공주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이동은 순간 얼굴을 붉히며 화가 난 듯 얼굴을 다시 돌렸다.

“네 이야기는 그만하자. 오가아가 막 경성에 왔을 때 영원이 곁에 있는 위봉낭이라는 호위를 오가아 곁으로 보냈어. 얼마 전에 유월이라는 종복을 오가아에게 보냈고.”

복안 장공주는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얼굴로 이동을 바라봤다.

“영원 곁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 유월이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너도 잘 알겠지.”

유월과 최신은 자기 눈과 귀라고 영원이 말했었다. 눈과 귀를 오가아에게 보낸 건가?

“듣자 하니 유월이 오가아의 사환 중 몇을 골라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더라. 며칠 전에 오가아가 나이 어리고 바탕이 탄탄한 사환 몇을 더 골라서 유월 밑에서 무술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던걸? 영원 좀 봐, 얼마나 영리해. 물고기를 잡아줄 뿐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려 하잖아.”

복안 장공주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영리한 사람이니, 혼인하겠다면 하렴.”

이동은 대답하지 않았고 복안 장공주는 의자에 기대고 천붕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갸웃해서 이동을 바라봤다.

“혼인하면 하는 거지, 깊게 생각할 것 없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어.”

이동은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이번엔 분명 잘 지낼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나도 다 보이는데.”

복안 장공주는 몇 년 동안 쉴 한숨을 오늘 하루에 다 쉬는 듯했다.

“그런데 왜 한숨을 쉬세요.”

이동은 복안 장공주의 한숨 소리에 씁쓸하면서도 포근했다.

“그냥 한숨이 나오니까. 그리고 또 하나, 난 이 중매쟁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거든.”

복안 장공주는 싫은 얼굴로 탁상 위의 붉은 첩자를 바라봤다.

“그럼 하지 마세요.”

이동도 첩자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이 중신 서는 건 더 싫어.”

복안 장공주는 한숨을 폭폭 쉬었고 이동은 잔을 들어 살짝 머금고 잠시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놓고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한숨 쉬지 마세요. 나중에 장공주가 손 떼도 되는 날이 오면 제가 함께 동서남북으로 떠날게요. 영 칠야가 함께 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그냥 호위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세요.”

“영칠이 한 말이지?”

복안 장공주가 삐딱하게 보며 묻자, 이동은 머쓱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복안 장공주가 코웃음 쳤다.

“이런 능글맞은 말을 하는 것도 그 녀석뿐이지. 호위 같은 소리 하네. 그놈이 내 호위가 될 필요가 있고?”

이동은 복안 장공주를 흘겨보고는 다시 차를 머금었다.

“됐다, 됐어. 호위, 하라고 해. 딱히 재주는 없어도 적어도 잘생겼잖아.”

복안 장공주는 영원 이야기가 나오면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며칠 바빠서 기분도 별로고 몸도 별로야. 조금 괜찮아지면 혼담 넣으러 갈게.”

“오라버니 혼사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제 혼사는 오라버니 혼사가 결정된 다음에 이야기해요.”

이동의 말에 복안 장공주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었다.

“들어와서 지금까지 한 말 중에 드디어 똑똑한 소리 하는구나. 완전히 정신이 나간 건 아닌가 봐.”

이동은 복안 장공주가 놀리는 걸 못 들은 척하고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이야기해 봐. 왜 갑자기 생각이 깨인 건데?”

복안 장공주가 차를 반쯤 비우고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이 깨인 것까지는 아니에요.”

이동은 눈을 내리깐 채 찻잔을 천천히 돌렸다.

“살면서 말 통하는 짝 하나 있으면 좋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그런 사람 하나 있는 것도 귀하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복안 장공주는 이동을 흘겨봤다.

“네가 그놈이랑 말이 통한다고? 네가? 그놈이랑? 세상에 이런……. 아니야, 아무런 말도 안 할게.”

이동이 노려보자 복안 장공주는 허허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됐다. 영칠이 장점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니까. 적어도 잘생겼잖아. 잘생긴 거 말고…….”

복안 장공주는 말꼬리를 늘이면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다른 장점은 천천히 잘 생각해 봐야겠네.”

이동은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해 상서는 고서강의 부탁을 받고 다시 한림원으로 향했다.

이신은 해 상서를 보고 서둘러 맞이하며 깊이 장읍하고는 먼저 사죄했다.

“마침 찾아뵈려던 길인데, 요 며칠 집에 일이 생겨서 가모의 심신이 불안정하여…….”

“대답을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닐세. 다른 경사로 왔네.”

해 상서가 껄껄 웃으며 하는 말에 이신이 멈칫했다.

“이번에도 중매 서려 왔네만, 이번엔 자네 누이 일이네…….”

이신은 해 상서가 숨을 돌리는 틈에 얼른 대답했다.

“요 며칠 집안에 생긴 일이 바로 누이의 혼사입니다. 어제 정북후부 영 칠야가 혼담을 넣으러 찾아왔습니다. 휴, 모르시겠지만, 이 일로 가모가 근심이 너무 큽니다.”

해 상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 영 칠야? 영원? 혼담이라……. 허허, 좋은 혼담이군.”

아무래도 관료 사회에 평생 몸담은 몸이라 해 상서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공수하며 축하했다.

“영칠, 그자가 안목이 역시 비범하군. 축하하네, 축하해.”

“과찬이십니다. 제 누이가 확실히 특별하긴 합니다. 휴, 가모가 누이를 매우 아낍니다. 영 칠야의 구혼이 실로 너무 갑작스러워서 가모가 너무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제 일로 걱정을 보탤 수가 없어서…….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신이 장읍하며 하는 말에 해 상서는 매우 기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큰일이지, 암. 영칠이 허튼짓하는 것 같아도 사리에 밝은 사람이네. 좋은 혼처야. 그나저나, 영칠이 중매인도 없이 직접 찾아가 구혼한 것인가?”

“일단 가모의 허락부터 받고, 중매인은 그다음에……. 아마도 장공주께 부탁한 것 같습니다.”

이신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웃는 얼굴로 하는 말에 해 상서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장공주, 그렇지. 영칠이 혼담을 넣으려면 장공주께 부탁하는 게 가장 적당하지.”

고서강은 해 상서의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손발이 서늘해졌다.

“휴,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영칠 같은 자가 그…… 이가 낭자를 마음에 뒀다니.”

해 상서는 ‘혼인했었던 여인’이라는 말은 얼버무렸다. 이가 낭자의 지난 혼사는 실로 가련하고, 무고했다.

“다행히 누가 구혼하는 건지는 이야기 꺼내지 않았네. 이 한림도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말을 자르더군. 잘 되었지. 참 잘 되었지. 휴. 이가는 괜찮다지만, 영칠 그치는……. 다행일세, 다행이야.”

해 상서는 모호하게 말했지만 의미는 똑똑히 전달됐다.

“감사합니다, 상서 어른.”

고서강은 장읍하고 감사 인사하면서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영원이 구혼한 시기가 너무 묘했다. 정말로 우연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고서강이 당황하고 혼란해하는 걸 해 상서는 매우 이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우 동정했다. 고서강의 요즘 운이 참으로 보통 안 좋은 게 아니었다.

고서강의 당황하고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해 상서는 대충 몇 마디 하고는 돌아갔다. 고서강도 공무를 볼 기분이 아니라서 다급한 걸음으로 나와서 오야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기별하라고 종복에게 전하고 자기는 관아에서 나가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다급하게 집으로 돌아간 고자의는 부친의 서재로 직행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초조, 불안한 듯 서성이는 부친을 발견했다.

“왜 이리 늦었느냐.”

고자의가 들어가자 고서강은 초조한 듯 질타부터 했다.

“이가 낭자에게 혼담을 넣을 예정이었다는 말, 다른 사람에게 했느냐? 누구에게 했어?”

고서강은 늦었다고 질타하고는 아들을 빤히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고자의도 부친의 초조, 불안한 모습에 덩달아 불안해졌다.

“그게…… 형국공 세자에게 살짝 언급했을 뿐입니다.”

고자의는 술김에 푸념한 건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물쩍 얼버무렸다. 고서강은 비틀비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가 소육……. 주가 소육에게 이야기했으니 영원에게 이야기한 것과 다름이 없지. 역시 그랬군. 영원 그놈이 진작 생각이 있었던 거다.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아이고! 고서강은 한숨을 푹푹 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영원이 이가 낭자를 마음에 뒀을 줄은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고서강은 이마를 툭툭 쳤다. 후회가 아니라 상심이었다. 이건 하늘의 뜻이리라.

영원이 이가 낭자를 마음에 뒀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소식이 퍼지면 경성 대부분 사람이 놀라서 턱이 빠질 일이다. 이런 일을 어찌 미리 짐작하겠나. 이건 하늘의 뜻이다. 하늘의 뜻!

고서강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추웠다 더웠다 했다. 일어서려고 힘껏 팔걸이를 잡았는데 몸이 흔들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고자의가 다급하게 다가가 부친을 부축했다.

“아버지,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여봐라, 태의를 모셔라!”

고서강은 이번엔 정말로 병이 나서 쓰러졌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병이 났다.

고자의는 태의를 배웅하고 멍하니 부친 거처 앞에 서서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말을 준비시켜 다급하게 주육을 만나러 갔다.

주육은, 영원은 찾을 수 없고, 글공부하느라 반쯤 넋이 나간 묵칠은 불러도 나오지 않고, 무료하게 관아에 틀어박혀 있었다. 적어도 관아엔 이야기할 사람이라도 있었다.

고자의는 주육을 불러내 다짜고짜 물었다.

“지난번에 우리 아버지가 내 짝으로 이가 낭자를 점찍었다고 내가 이야기한 것, 영칠 그치에게 말했나?”

“아? 뭐라고? 아! 생각 좀 해 보자.”

주육은 이마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보자……. 그래, 그래. 원 형님에게 이야기했다. 다 묵칠 때문에…….”

“뭐라고 말했는데?”

고자의의 실낱같은 희망이 툭 끊어졌다. 희망이 갈가리 찢어지자 두려움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서 주육의 옷깃을 덥석 잡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뭐라고 한 것이냐? 내가 한 말을 다 했나? 어서 말해라, 어서!”

“아이고! 왜 이러는 것이냐. 그게 뭐 대수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야! 별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그 이가 낭자가 재가한다고 타박한다고, 그게 뭐 대수라고?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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