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우리, 해봅시다!
영원은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깐 이동을 바라봤다.
“난 어릴 때부터…… 아마 너무 똑똑해서인지 또래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내가 정북후부 소공자인 걸 다들 잘 알 때라, 잘 보이려고 들거나 아니면 두려워했어요. 다 보였습니다. 껄끄러웠죠. 그래서 상대하지 않았어요. 형님, 그리고 둘째 형님은 내가 조금만 두 사람과 다른 생각을 해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가르치려 들었죠. 그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영원의 목소리가 가라앉고 말하는 속도도 평소보다 느렸다. 어쩐지 침통한 느낌이 들었다.
“더 자란 후엔 말할 사람이 더 줄어들었습니다. 아니, 더 준 게 아니라 없어졌어요. 이 나이 되도록 줄곧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당신도 그럴 겁니다. 그렇지요? 난 알아요. 당신은 또래 낭자들과 다릅니다. 말이 안 통할 거예요. 상대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비슷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말이 통해요. 이런 우리가 짝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건 짝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동의 목소리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우리 두 사람에겐 짝을 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짝이 되려면 명분이 필요해요. 세상을 살면서 세간의 이목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이동은 마음이 혼란해졌다.
“다 헛소리일 뿐이에요. 당신은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가족이 있는데 무슨 고아처럼 이야기해요? 돌아가세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내 마음이 그랬습니다. 고아처럼 외로웠어요. 당신을 만난 후에야 짝이 있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어요. 작년에 정북후부를 떠나오면서 영씨 가문에서 제명하길 스스로 청했어요. 앞으로 당신과 나, 우리 둘,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영원은 앞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고 전에 그랬지요? 장사도 하고 경치도 구경하고 싶다고요. 내가 함께 가겠습니다. 이야기도 하고, 호위도 되어 줄 수 있잖습니까. 얼마나 좋아요. 장사하다가 재미없어지면 북삼로에 데리고 가줄게요. 산적 소탕하러 갑시다. 아니면 북부에 가서 마적이나 됩시다. 어떻습니까?”
이동이 벌떡 일어서자 영원도 따라 일어서서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난 안 갑니다. 안 된다니, 그럼 왜 안 되는지 이야기해 봐요.”
“난 내가 폭삭 늙은 할머니 같아요. 그래서 난…….”
이동이 매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설령 당신이 정말로 폭삭 늙은 할머니라고 해도 난 당신과 혼인할 겁니다. 우리 둘이, 짝이 되어 앞으로 나날을 보내는 겁니다. 당신이 정말 할머니가 되면 난 매우 슬플 겁니다. 우리가 함께 늙어가지 못해서, 당신이 떠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우리 둘, 모두 세간의 이목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영원이 나긋나긋 말했다. 그녀가 혼인했었던 일을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한번 해 봅시다. 어때요? 혼인한 후에도 당신은 지금처럼 살면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요. 그냥 거처를 여기서 정북후부로 옮긴 것뿐입니다. 다른 건 다 지금과 같아요. 나도 지금과 똑같을 겁니다. 한번 해 봐요. 좋으면 둘이 평생 그렇게 지내고, 싫으면 다시 옮겨요. 살고 싶은 곳으로 가서 살아요. 아니면 성 밖 그 장원, 자등 산장 맞지요? 자등 산장을 혼수로 가지고 와요. 자등 산장에 가서 살아요. 어떻습니까? 봐요, 우리 둘이 짝이 되어 지내다가 싫어지면 그냥 영가 소내내 명분을 지고 살면 됩니다. 그냥 명분만 지고 사는 겁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습니까. 난 한 말은 지킵니다. 해 보자고요. 괜찮으면, 앞으로 우리 둘, 다시는 외롭지 않을 겁니다.”
영원은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이동을 올려다보며 나긋나긋 상의하듯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
이동은 뒷걸음질 치고 또 뒷걸음질 쳤다.
“동동, 난 이 나이가 되어서 처음으로 이렇게 말 통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앞으로는 다시는 못 만날 겁니다. 예전엔 너무 외로워서 늘 혼잣말을 했어요. 멍청이처럼. 제발, 이런 내가 불쌍해서라도 허락해 줘요. 한번 해 봅시다. 응?”
영원은 아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동을 올려다봤다.
“일어나요!”
이동은 영원이 쭈그리고 앉은 걸 보고 온몸이 거북해졌다.
“싫습니다. 살고 싶지도 않은걸.”
영원은 일어나지 않고 눈물을 슥슥 훔쳤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당신 앞에서나 이러는 겁니다. 이건 억지가 아니에요. 정말로 살고 싶지 않아요.”
영원은 이제 양손을 같이 써서 눈물을 닦았다.
“일단 일어나서 돌아가요. 생각해 볼게요.”
“생각은 내가 다 했습니다. 더 생각할 게 뭐가 있어서요? 일단 내쫓을 생각으로 이러는 거면, 안 갑니다. 전에 당신이 없어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살 만했지만, 이제는 나더러 어찌 살라는 겁니까? 못 살아요, 못 살아. 죽느니 못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영원은 품 안을 더듬어 비녀를 꺼냈다.
“경성에 올 때 어머니가 주신 겁니다. 영가에 혼인해서 들어왔을 때 할머님이 어머니에게 준 겁니다. 할머님의 어머님이 할머님께 준거라더군요. 당신에게 주려고 가지고 왔어요.”
영원은 일어서서 비녀를 이동 앞으로 내밀었다.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움직이지도 않고 고개 숙인 채 비녀를 내려다봤다.
“동동, 한번 해 봅시다. 만일, 만일 당신이 나와 짝으로 사는 게 싫대도 영원 부인이라는 명분으로 사는 게 지금과 비교해도 나쁠 것 없잖습니까. 혹시 만에 구천구백구십구로 좋을 수도 있잖습니까. 우리 둘, 함께 이야기 나누고, 같이 먹고, 같이 놀고. 당신이 눈썹만 까딱해도 내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고,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당신이 내 생각을 알고, 서로 마음이 통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좋은 일인데, 어찌 됐든 시도는 해 봐야지요.”
영원은 살금살금 앞으로 반 발짝 다가가고 또 반 발짝 다가가서 이동의 손을 잡고 비녀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동은 가슴이 타는 듯해서 바로 던지려고 했는데 영원이 덥석 손을 잡았다.
“무서워할 것 없어요. 내가 있습니다. 마음 놓아요.”
이동은 비녀를 든 채 뻣뻣하게 굳었다. 영원은 그녀의 손과 비녀를 빤히 보면서 천천히 손을 놓고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이만 갑니다. 내일 매파를 보내 혼담을 넣겠습니다.”
“이것 봐요!”
이동이 고함치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영원은 어느새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동동,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저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문밖에서 들렸고, 저버리는 일 이야기할 때는 벌써 목소리가 수화문 밖까지 멀어졌다.
이동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손바닥에 놓인 비녀를 내려다보다가 서서히 뒷걸음질 쳐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했다. 이 비녀, 어쩌다가 내 손에 남았을까?
“낭자가 허락했다고 태태께 말씀드려.”
줄곧 귀를 쫑긋하고 듣던 수련이 마찬가지로 집중하던 청국에게 분부했다.
“어서!”
“아이고!”
청국은 그렇게 외치고 치맛자락을 들고 달려갔다. 녹매가 합장하고 빙빙 돌면서 아미타불을 외치자 수련이 철썩 손등을 때렸다.
“좀 진중해 봐. 시간이 늦었어. 낭자도 이만 쉬셔야 해.”
다음 날 이른 아침, 동화문이 안에서 서서히 열리면서 막 틈이 보였을 때 영원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쪼르르 보록궁으로 달려갔다.
복안 장공주는 조회가 시작되기 반 시진 전에 항상 일어났고, 영원이 만나길 청했을 때는 벌써 일어나서 느긋하게 회랑을 따라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원이 왔다는 말에 걸음을 멈칫했다가 이내 평소대로 돌아와서 성큼성큼 걸어가며 들이라고 분부했다.
뜨락 안으로 들어간 영원은 잰걸음으로 복안 장공주를 따라잡고 장읍했다.
“장공주 누님, 오늘 안색이 참으로 좋군요.”
“내 안색은 매일 좋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엇 때문에 온 거지?”
장공주는 상대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장공주 누님께 큰 중신 하나 서달라고 부탁하러 왔습니다.”
“응?”
영원이 다시 장읍하며 하는 말에 장공주가 걸음을 멈추고 영원을 돌아봤다.
“네 혼사?”
영원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동저아?”
장공주가 위아래로 훑어보며 묻는 말에 영원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장공주는 한참 만에 하, 소리를 냈다.
“어제 이가에 갔다더니, 단번에 승낙받았어?”
“아룁니다, 장공주 누님. 성심성의껏,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인 겁니다.”
영원의 말은 매우 간곡했지만, 장공주는 다시 코웃음 쳤다.
“일단 돌아가. 동저아에게 먼저 물어봐야 할 일이야.”
“여기 제 사주입니다. 사주첩이고요. 사주는 이미 맞춰봤습니다. 대길입니다.”
영원이 품에서 대홍 첩자를 꺼내 건네고는 또 하나를 꺼내고 하나를 더 꺼냈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어. 이런 건 아직 필요 없어. 일단 가져가.”
“필요합니다. 누님이 물어보고 나서 사주첩을 바로 보내면 됩니다. 번거롭게 두 번 할 필요 없습니다. 누님, 저도 나이가 찼습니다. 꽤 급하다고요. 이 일은…….”
“꺼져!”
영원이 첩자를 양손으로 바치자 복안 장공주가 걸음을 휙 멈추고 고함쳤다. 영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숙이면서 손에 든 사주첩과 이미 대길이라는 결과가 나온 점괘를 함께 난간에 올려놓고 돌아서서 쪼르르 달아났다.
복안 장공주는 난간 위에 쌓인 붉은 첩자를 삐딱하게 바라보다가 코웃음 치며 돌아서서 계속 앞으로 걸었다. 녹운이 첩자를 들고 서쪽 곁채 안에 들여다 놓았다.
복안 장공주는 잠시 더 걷다가 서쪽 곁채로 들어가 녹운에게 분부했다.
“동저아를 모셔와.”
이동은 거의 밤새 잠 못 들다가 해가 밝아서야 가물가물 잠들려고 하는데 보록궁에서 어멈이 오자 서둘러 일어나 소세하고 단장했다.
옷을 갈아입고, 탁자 위에 놓인 갑작스럽기 짝이 없는 비녀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상자에 잘 넣으라고 수련에게 분부했다.
서쪽 곁채, 복안 장공주 앞에 원래 있던 그리 작은 편이 아닌 화항 탁자는 탑상 길이와 비슷한, 족히 삼 자는 넘는 긴 서안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 서안 위에 서신 말고 푸른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댄 상주서도 놓여 있었다.
복안 장공주는 주사 붓을 들고 상주서를 재빨리 살펴보다가 이동이 들어오는 기척을 듣고 고개도 들지 않고 앉으라고 분부했다. 이동은 상자를 살며시 내려놓고 찻상 앞으로 다가가 자기가 가지고 온 차병을 꺼내 불에 그을리기 시작했다.
장공주는 상주서를 재빠르게 읽고 비준한 다음 녹운에게 지시했다.
“상 태감에게 가져다줘. 다 급한 내용이니 서둘러 전하라고 알리고.”
녹운은 쪽빛 비단으로 감싼 상주서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장공주는 목을 풀어주고는 탑상에서 내려와 이동 맞은편에 앉았다.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홀짝이고는 흡족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홀짝였다. 느긋하게 차 한잔을 다 비운 뒤 찻잔을 내려놓고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이동을 바라봤다.
“오늘 아침부터 영원 그놈이 왔더라.”
차 가루를 갈던 이동의 손이 멈칫하고 숟가락에 담긴 차 가루가 쏟아졌다.
“어제 조회가 끝나자마자 너희 저택으로 갔다며?”
복안 장공주는 찻상에 떨어진 차 가루와 고개를 숙이고 차 가루를 닦는 이동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절 만에 허락한 거야?”
복안 장공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젯밤에 비가 많이 와서…….”
이동은 복안 장공주의 물음에 겸연쩍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