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칼이 떨어진대도
“골랐다니……. 하긴, 영가는 모두 뛰어난 장수이니, 휴.”
이신이 눈살을 찌푸리자 문 이야가 툭툭 두드렸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닐세. 영 칠야가 이렇게 공을 들이는 걸 보면 진심인 걸세. 마음 놓게. 낭자가 한 번 재수 없었으면 됐지, 두 번이나 그런 일이 있겠나.”
이신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금세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기도 전에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걸 보고 이신은 일어서서 밖을 한 바퀴 돌고서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왔다.
“날씨가 춥기까지 합니다. 이러다가…….”
“진정하게, 진정해!”
문 이야가 퉁명스럽게 이신을 바라봤다.
“영 칠야는 영씨, 영가 사람이네. 이 정도 추위와 비를 무서워할 것 같나? 마음 푹 놓게. 기껏해야 작은 병이면 끝나네. 낭자가 거처에서 나와서 자네처럼 한 바퀴 돌기만 해도 될 텐데.”
효풍원 안, 이동은 회랑에 서서 갈수록 급하게 흩날리는 빗발을 올려다봤다. 조바심이 나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반나절이나 서 있었는데 비가 온다니 다행이었다. 비가 오면 돌아가겠지.
“대낭자, 아직 서 있어요. 굳은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아요. 꿈쩍도 안 해요.”
녹매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이동 곁에 가서 서며 나직이 고했다. 이동은 더 걱정스러워서 회랑을 따라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걷다가 녹매에게 분부했다.
“네가 후각문으로 나가서 대야, 아니면 문 이야를 만나고 와. 비가 온다고, 두 사람더러……. 어쩌면 몸이 굳어서 움직이고 싶어도 못 움직이는 걸 수도 있으니까 한 번 가 보라고 해. 사람을 불러 들것에 실어서 돌려보내라고 해.”
녹매는 후각문으로 나가서 한참 동안 찾아다니다가 겨우 이신과 문 이야를 만나서 이동의 분부를 전했다. 문 이야가 이신보다 먼저 대답했다.
“몸이 굳었는지 아닌지, 낭자가 직접 사람을 보내 알아보면 알 것 아니냐고 전해라. 다른 사람은 나서기 껄끄러운 일이고 이렇게 끌어서 될 일이 아니니 대낭자가 직접 얼굴 보고 확실히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전해라.”
녹매는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다시 쪼르르 돌아가서 말을 전했다. 이동은 더 어두워진 얼굴로 회랑 가장자리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비가 어느새 제법 거세졌다. 싸늘한 빗방울이 손바닥을 때리자 으스스 추워졌다.
잠깐 사이에 빗물에 손이 서늘해지자 이동은 손을 거두고 녹매에게 분부했다.
“수련을 보내서 전해. 비도 오는데 어서 돌아가라고 해. 내가 만나든 말든 결과가 같아서 만날 필요 없다고.”
이동은 분부를 마치고 돌아서서 상방 안으로 들어갔다. 녹매는 수련을 찾으러 도좌간으로 향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수련이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대낭자, 영 칠야께 말씀드렸는데 반드시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대요. 아니면 비가 아니라 칼이 떨어진대도 돌아가지 않겠대요.”
이동은 막 들어 올리던 붓을 필세에 탁 내던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칼이 내리는 것도 두렵지 않다니 그럼 비 맞으라고 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수련이 어머나, 하고 외치고는 허둥지둥 입구로 다가가 휘장을 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큰비가 올 것 같아요.”
이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살며시 숨을 내뱉었다. 조금 진정되자 붓걸이에서 붓을 꺼내 천천히 먹을 묻혀서 경을 베끼기 시작했다.
수련은 공손히 옆에 서서 갈수록 거세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동을 힐끔힐끔 봤다. 이동은 몇 글자 쓰고는 화난 얼굴로 종이를 구겨서 내버리다가 다시 붓을 필세에 내던지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분부했다.
“우산 하나 가져다줘.”
수련은 우산을 들고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이동은 탑상에 단정하게 앉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빤히 바라봤다. 하늘을 뒤덮을 듯한 빗소리가 심장을 쿵쿵 찌르는 것만 같았다.
수련이 금세 돌아왔다.
“대낭자, 우산 필요 없으시대요. 목숨도 필요 없는데 우산이 무슨 필요냐고요.”
이동은 화가 나서 탑상을 탁 두드렸다. 수련은 이동의 안색을 살피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흠뻑 젖었어요. 얼굴도 퍼렇게 질렸고요. 낭자, 한 번 만나보세요. 계속 이러다간…….”
이동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한참 침묵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모시고 들어와. 대야의 깨끗한 옷 하나 꺼내 오고.”
“예.”
수련은 내심 안도하며 숨을 죽인 채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청국에게 옷을 가지고 오라고 분부하고 자기는 급한 걸음으로 나가서 뜨락 문을 열고 우산을 받쳐 들고 영원에게 다가갔다.
“낭자가 들어오시래요.”
영원은 얼굴의 빗물을 닦고 다리를 움직였다. 몸이 기우뚱하자 수련이 놀라 고함치며 우산을 내던지고 달려가서 부축하려 했다. 영원이 서둘러 손사래 쳤다.
“괜찮다! 그냥 다리가 저려서 그런다. 괜찮다. 올 것 없다.”
수련은 흙탕물에 넘어진 영원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재빨리 돌아서서 사람을 불렀다.
“유 어멈, 어서 가서 사람 좀 불러와요. 어서 영 칠야를 부축해서 안으로 모셔요!”
허드렛일 하는 어멈들이 뜨락 문 안으로 몰려와서 비를 맞으며 영원 앞까지 달려와 허둥지둥 그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거의 끌 듯이 뜨락 문 아래로 데리고 가자 ‘아이고, 아이고’ 외치던 영원은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손사래 쳤다.
“됐다, 됐어. 놓아라. 잠깐 문지르면 된다. 괜찮다, 괜찮아.”
“소엽, 큰 부엌에 다녀오렴. 소유 언니에게 가서 뜨거운 탕을 마련해 달라고 해. 다 되면 얼른 가지고 오라고 하고.”
수련이 자기 판단으로 분부했다. 영 칠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어멈들이 의자를 내오고 영원을 부축해서 앉히고 두 어멈이 웅크리고 앉아서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영원은 아주 고통스러운 듯 끙끙거렸다.
수련은 뜨거운 물을 끓이고 화로를 내오라고 명령했다.
“우리 대야의 옷을 내오라고 낭자가 이미 분부하셨어요. 이따 우선…….”
수련은 난처한 듯 입을 다물었다. 마땅히 뜨거운 물로 목욕부터 하고 머리를 말린 후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지만, 어떻게 목욕을 여기서 하나.
“뜨거운 물은 필요 없다. 이따 옷을 가지고 오거든 갈아입을 곳만 마련해다오. 화로도 필요 없고 머리를 말릴 큰 수건만 있으면 된다. 괜찮다, 괜찮아. 북쪽에서 행군하고 전쟁하면서 종종 비를 맞는다. 잘 말리면 된다.”
수련은 이제 난처하진 않지만 매우 걱정되었다.
“한기가 들기라도 하면…….”
“괜찮다, 괜찮아. 이따 생강탕 몇 그릇 준비해다오.”
영원은 매우 사람 좋게 대답했다. 두 어멈이 잠시 다리를 주무른 후에 영원은 한 손으로 의자를 누르며 힘을 주어 일어섰다.
“이만하면 됐다. 얼른 들어가자. 너희 낭자가 기다리겠다.”
영원은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절면서 뛰면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꽤 빠르게 움직였다.
수련이 서둘러 걸어가 상방 입구에 서서 고하려는데 영원이 ‘쉿’ 소리를 냈다.
“지금 알리지 말아라. 깨끗한 옷 가지고 오고 갈아입은 다음에 고해라. 흠뻑 젖은 채 한기를 내뿜으면서 들어가면 안 되지.”
수련도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인 듯해, 살그머니 뒤로 물러나서 청국이 옷을 가지고 돌아오길 기다렸다.
이동은 탑상에 앉아서 밖의 기척을 똑똑히 듣고 있었다.
청국은 금세 옷가지를 가득 끌어안고 돌아와서 월동문을 지나 회랑으로 들어섰다. 수련이 허둥지둥 다가가 옷을 받자 영원도 뒤따라갔다.
“옷은 이리 주면 된다. 수고스럽지만 적당한 곳을 찾아다오.”
“여기에서 갈아입으세요.”
수련은 옆에 있는 다수방 문을 열어 주었다. 마침 다수방에 뜨거운 물이 끓고 화로도 있어서 열기가 후끈해서 매우 따듯했다.
영원은 들어갔다가 금세 나왔다. 이신의 깨끗한 옷으로 싹 갈아입고 머리카락도 수건으로 말린 다음 다시 말아 올린 상태였다. 아직 젖긴 했지만 물이 흐르진 않았다.
막 상방 입구에 도착했는데 이동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서쪽 곁채로 모시렴.”
서쪽 곁채로 들어간 영원은 조금 들뜬 느낌이었다. 겨우 보름 만에 다시 오는 것인데,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이 서재에 다시 들어오니 놀랍게도 참으로 오랜만인 듯 어렴풋이 새롭기만 했다.
이동은 늘 앉는 의자에 단정히 앉아서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영원을 바라봤다.
“얼굴 봤지요? 이제 돌아가세요.”
“할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겁니다.”
영원은 평소처럼 소탈한 모습이 아니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문 쪽에 서 있었다.
“말하세요.”
영원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이동은 묘하게 안도했다.
“앉아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까?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두 다리가…….”
영원은 큰 고통을 참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동은 누군가 가슴을 누르는 것 같아서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앉으세요.”
영원은 느릿느릿 다리를 움직여서 한 발짝씩 늘 앉는 의자 앞으로 다가갔다. 먼저 양손으로 팔걸이부터 잡고 천천히 앉았다. 끝까지 앉고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후, 이제 좀 낫군. 고맙습니다, 낭자.”
“할 말이 뭐예요. 하세요.”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재촉했다. 영원은 상반신을 수그려 이동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혼인할 생각 없는 거, 압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직시했다.
“낭자의 오라비가 금세 혼인하고 아이를 낳을 겁니다. 불과 4, 5년 안에 이 저택에 대내내 한 명, 소야, 소낭자 하나, 둘이 생기겠지요. 두어 해 지나면 소야, 소낭자가 더 많아질 수도 있고요. 어쩌면 낭자의 오라비가 첩을 몇 명 들일 수도 있고요. 여기는 당신과 상관없는 그들의 집입니다. 당신은 관여할 수 없어요. 관여해서도 안 되고요. 관여해서 안 될 뿐만 아니라 멀리 피해야 하지요. 이 좁은 저택에서 피해야 할 곳이 많을 겁니다.”
이동은 영원의 말을 반박하지도 동의하지도 않고 그저 침묵한 채 그를 바라봤다.
“낭자의 모친은 오라버니와 한 가족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분명 당신이 눈에 밟히겠지요. 당신도 신경 써야 하고 당신 오라버니 일가도 신경 써야 합니다.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휴. 내 큰형님은 나보다 여덟 살 많고 둘째 형님은 여섯 살 많습니다. 어릴 때 형제 셋이 매일 몰려다니며 장난을 쳤어요. 나는 자주 큰형님 거처, 아니면 둘째 형님 거처에서 잤고요. 나중에 큰형님이 혼인하고 아이가 생기고, 또 나중에 둘째 형님도 혼인하고 아이가 생겼지요. 두 형님 모두 예전처럼 나를 아끼지만, 아무리 나를 아낀다고 해도 예전처럼 나를 대할 수는 없어요. 가끔은 두 형님과 함께 예전처럼 밥 한 끼 먹고 싶어도 힘들답니다.”
영원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런 때가 오면, 낭자는 어쩌려고요.”
영원의 바라보는 시선에 이동이 입을 열려는데 영원이 먼저 말했다.
“우리 둘이 짝이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보세요. 우리 두 사람, 얼마나 말이 잘 통합니까. 거의 척하면 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한평생은 깁니다. 우리 둘이 짝이 되면 그 한평생을 얼마나 재미있게 보내겠습니까?”
“난 다시 혼인하고 싶지 않아요.”
이동이 시선을 돌리자 영원이 의자를 옮겨 바짝 다가갔다.
“혼인을 위한 혼인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보세요, 당신과 나, 우리 둘, 모두 외롭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