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참 좋은 날
“근 1년 동안 차근차근 준비해 온 겁니다. 이야, 이런 사람이 동저아에게 잘할 때는 물론 잘하겠지만, 행여 그렇지 않을 땐, 동저아가 기댈 사람이라고는 나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신은 고민되는 듯 탁자를 내리쳤다. 문 이야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몸을 수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제 막 시작된 일을, 벌써 어떻게 대적할 건지부터 생각하는가? 이런, 이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이신은 어두운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고 문 이야는 해바라기씨를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이길 생각을 하기 전에 질 생각부터 한다니. 음, 보국(輔國) 승상의 재목이로군.”
이신은 문 이야를 힐끔 바라볼 뿐, 비아냥거리는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자네 말대로라면, 자네 누이는 혼인하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대와 혼인해야 한다는 말이군? 그런데 그런 완벽한 상대가 있나? 인간이란 관 뚜껑 닫기 전에 결론 낼 수 없네. 죽기 전에 한순간의 어리석음으로 평생 명성을 날리는 사람도 부지기수야. 잘 듣게, 완벽한 사람은 죽은 사람밖에 없네. 자네 좀 보게. 대체 무슨 생각까지 하는 건가. 지금 저 영 칠야를 보게, 안 좋은 점이 있나? 너무 좋은 점이 안 좋은 점이라고 하진 말게. 지금은 안 좋은 점이 없지만, 앞으로는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민하다니. 사람이 어찌 그래? 정말이지…….”
문 이야는 다시 해바라기씨를 집어 들어 깔짝깔짝 껍질을 깠다. 화가 난 듯했다.
이신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뭐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훨씬 좋아졌다.
이동의 효풍원 대문 옆 도좌간(倒座間: 정방 맞은편의 사랑채) 안, 수련이 의자를 밟고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네 칸짜리 도좌간을 모두 훑어봤는데 이곳이 시야가 가장 좋아서 제일 잘 보였다.
“갔어?”
청국은 의자를 붙잡고서, 까치발을 들어도 소용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까치발을 들고 물었다.
“쉿!”
수련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하자 청국은 입을 다물었다. 수련은 잠시 더 보다가 조심스럽게 내려와서 속닥였다.
“네가 올라가서 보고 있어. 난 낭자에게 고하고 올게.”
청국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의자 위로 올라가서 창문 틈으로 저 밖에 꼿꼿이 서 있는 영원을 바라봤다.
수련은 살금살금 도좌간에서 나가 회랑을 따라 급하게 들어가서 상방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크게 심호흡하고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고 옷깃을 쓰다듬고는 평소와 별다름 없는 모습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다음에야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은 남쪽 창 아래 탑상 위에 단정하게 앉아서 어두운 얼굴로 천천히 경서를 베껴 쓰고 있었다.
수련은 옆에 공손하게 서 있는 녹매부터 바라봤다. 녹매는 그녀와 눈빛을 주고받고는 거의 차 있는 쓰레기통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련은 쓰레기통과 단정히 앉아서 열심히 글자를 쓰는 것처럼 보이는 이동을 번갈아 보고 숨을 죽이고 다가가 고했다.
“대낭자, 아직 문 앞에 서 있어요.”
이동의 붓이 미끄러졌다. 절반을 채운 종이가 또 못 쓰게 되자 이동은 종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새 종이를 꺼내서 다시 글을 썼다.
수련은 쓰레기통을 힐끔 보고는 살금살금 다가가 쓰레기통을 종이 태우는 화로에 붓고 다시 살금살금 들어와 녹매 옆에 공손하게 섰다. 수련이 눈짓하자 녹매가 바로 알아듣고 살금살금 나가서 치맛자락을 들고 도좌간을 향해 조르르 달려갔다.
추미, 하섬과 동유 세 사람은 동시에 큰 부엌으로 달려갔다. 가장 빨리 달려온 추미가 문틀을 붙잡고 헐떡이는 동안 하섬과 동유도 달려오다가 앞뒤로 추미 등에 부딪혔다. 헉헉대던 추미는 숨이 턱 막혀서 힘껏 두 사람을 밀치고 크게 쿨럭거렸다.
“소유 언니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데 모여 하나같이 들뜬 얼굴로 두 눈을 빛내며 웅성거리던 어멈들은 추미의 물음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동쪽 곁채를 가리켰고 추미와 두 사람은 동쪽 곁채로 달려갔다.
소유는 동쪽 곁채에서 식자재를 잔뜩 골라놓고 있었고, 이번엔 하섬이 가장 먼저 달려가서 소유 앞으로 튀어갔다.
“소유 언니, 영 칠야가 혼담을 넣으러 왔어요! 지금 낭자 뜨락 앞에 서 있어요. 언니…….”
“나도 알아. 저녁에 끓일 탕거리 보고 있는 거 안 보이니?”
소유는 골라놓은 재료를 다시 하나씩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언니! 영 칠야가 혼담 넣으러 왔다니까, 무슨 저녁 탕거리 고민하고 있어. 혼담을 넣으러 왔지, 혼인하는 것도 아닌데…….”
추미는 말하다가 말고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어제부터 소금 항아리에 습기가 차더니 오늘 아침엔 항아리 밖에 물이 고이더라. 비가 올 것 같아. 비 맞고 밤새우려면 뜨거운 탕이라도 마셔야지. 낭자, 혹은 태태가 분부하기 전에 준비해두는 거야. 준비 잘해두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소유는 다시 한번 훑어보고 유쾌한 듯 손을 탈탈 털며 어멈들에게 분부했다.
“깨끗이 씻어요. 이 세 가지는 물만 넣고 찌고, 이 두 가지는 작은 불로 고아요. 이건 한 시진 반 고고, 이건 두 시진 고아요.”
분부를 마친 소유는 길게 숨을 내뱉고는 추미와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가자! 우리도 가 보자.”
추미, 하섬, 동유는 순간 두 눈을 빛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소유와 함께 큰 부엌에서 나가 효풍원으로 직행했다. 네 사람은 이 저택 구조를 훤히 꿰고 있으니 구경하기 좋은 곳이 어디인지 당연히 잘 알았고 앞장선 하섬을 따라 효풍원 근처 큰 석가산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석가산 뒤에 딱 달라붙어서 석가산의 구멍 틈을 통해 뜨락 문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영원의 뒷모습을 이글이글 빛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대? 꼿꼿하게 서 있네?”
소유가 추미 귓가에 속닥속닥 물었다.
“반 시진쯤 됐어요.”
추미가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하섬은 조금 더 똑똑히 보려는 듯 고개를 쭈욱 내밀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대요. 영 칠야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물건 가지고 온다는 핑계를 대고 지나갔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서 있더니 지금도 똑같이 서 있네요. 반 시진이 지났는데, 나였으면 비틀거리고 있을 거예요.”
“영 칠야가 얼마나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벌써 반 시진 지났잖아. 난 한 시진 정도 더 서 있을 것 같아.”
동유가 의견을 내자 소유가 식견 넓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더 있을 것 같아. 잊지 마, 영 칠야는 무술 수련한 사람이야. 문 이야에게 한 번 들은 적 있는데, 무술 수련한 사람은 기마자세로도 몇 시진은 서 있는데. 가만히 서 있는 건 기마자세보다 훨씬 덜 힘들잖아.”
“어렸을 때 자주 현 관아 앞에 사람들에게 공개된 죄인을 보러 갔었는데, 목에 칼을 쓰고 며칠 서 있던 사람도 있어. 가장 무거운 건 오십 근이나 하는걸. 영 칠야는 그냥 서 있기만 하잖아. 쉬워, 쉬워.”
식견 넓은 추미가 의견을 내자 소유는 추미의 말이 맞다는 듯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섬과 동유는 놀란 표정이었다.
“세상에!”
그러고는 금세 “그렇다면 앉아서 봐야겠네!”라고 했다.
네 사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석가산 뒤쪽에 있는 맞배지붕 형식의 두 칸짜리 집으로 들어갔다. 후원에 연회를 열 때 종복들이 쓰는 별채였다. 추미가 곧장 뒤로 달려가서 집채 뒤쪽 창문을 밀어젖히고 들뜬 얼굴로 손뼉을 쳤다.
“여기가 제일 좋아. 아주 잘 보여.”
네 사람이 막 창가로 달려가 비집고 서는데 문이 열리더니 장 태태 거처의 이등, 삼등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어서 어멈 몇 명과 시녀들이 쪼르르 들어왔다.
이 집채에서 제일 잘 보이니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칸 모두 사람이 꽉 찼다. 다행히 이가의 시녀, 어멈 모두 법도를 잘 지켰고 비록 한 방 가득 몰려 있고 하나같이 들떠있긴 해도 다들 조용조용해서 큰 소란은 일지 않았다.
“영 칠야, 정말 대단하다! 추미 언니, 대체 얼마나 오래 서 있을까? 말 좀 해 봐. 밤까지 서 있을 수 있을까?”
하섬이 감탄하며 묻자 추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영 칠야는 대단한 분이야. 분명 낭자가 문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난 낭자가 영 칠야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 낭자는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
동유는 낭자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열 거야!”
추미는 더 강하게 말했고 동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기해! 은자 한 냥!”
추미가 동유를 향해 손을 내밀자 하섬도 끼어들었다.
“나도! 난 영 칠야가 ‘못 버틴다’에 걸래.”
“나도 하자. 난 ‘낭자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에 건다. 은자 두 냥!”
소유도 얼른 기어들었다.
“또 걸 사람 있어? 아이고, 이렇게나 많이 걸어. 하섬, 종이 가지고 와. 네가 글씨 쓸 줄 아니까 적어서 정리하자.”
추미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흥분해서 눈썹을 휘날렸다. 소유가 뒤에서 한마디 더 했다.
“그럼 나는 영 칠야가 언제까지 서 있을지 내기 걸게. 오늘 밤인지 아니면 내일 아침인지.”
이제 두 칸짜리 맞배지붕 집의 창가로 몰리는 사람은 없고 모두 추미와 소유 곁에서 내기에 돈을 걸었다.
추미는 하섬과 동유가 이름과 돈 건 액수를 적는 걸 바라보면서 소유와 속닥거렸다.
“언니, 우리가 이렇게 내기하는 걸 낭자가 아시면…….”
“우리가 내기하는 걸 영 칠야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나 걱정하렴.”
소유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추미가 턱을 치켜들었다.
“그건 안 무서워. 우린 낭자 사람인걸.”
“하긴 그래. 참, 너 앞으로 뭐 할 건지 생각했니? 우리는 낭자 곁에 있는 게 제일 좋다고 이야가 그러셨는데 낭자가 혹시 정말로……. 넌 이번엔 배가 시녀로 가고 싶어도 못 가.”
소유는 추미를 옆으로 밀어내며 나직이 말했다.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여기서 이런 이야기하긴 좀 그렇고, 저녁에……. 영 칠야가 돌아간 다음에 언니랑 잘 이야기해 보려고 했는데, 말만 하는 사이에 코앞에 닥치고 말았네. 다 내 탓이야.”
“너무 급하게 생각하진 마. 정해지더라도 삼매육빙, 모든 예법을 다 끝내려면 반년은 걸려. 게다가 대야도 있는걸. 대야부터 혼인해야 하는데 대야는 아직 정혼하지도 않았는걸.”
“어쨌든 더 미룰 수는 없어. 오늘 안 되면 내일, 내가 자리를 마련할게. 이야도 모셔서 방법을 좀 내달라고 해야겠어.”
소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섬과 동유가 내기 내용을 다 정리하자 진작 주판을 들고 기다리던 시녀가 타닥타닥 계산했다. 추미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내밀고 쳐다봤다.
“잘 들어. 영 칠야는 분명 낭자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내가 이겼다고. 아이고, 꽤 많이 벌겠네.”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긴. 낭자는 절대로 문을 안 여실 거야.”
하섬이 추미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방 안 가득한 어멈, 시녀들이 신나게 내기 걸고는 다시 창 앞으로 모여서 절반은 ‘문 열어라!’, 또 절반은 ‘어서 가라!’고 중얼거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문 이야가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영원은 아직 효풍원 문 앞에 서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동쪽에서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머리를 내밀고 유심히 하늘을 살핀 문 이야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신은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는지, 서책을 들고서 문 이야 곁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곧 비가 오겠군요. 하필.”
“하필?”
문 이야가 되묻자 이신이 멈칫하다가 이내 헛웃음 쳤다.
“이야, 왜 그렇게 물으십니까?”
“고육지책인데 비가 오면 더 좋지. 영 칠야, 날을 참 잘도 골랐군.”
문 이야가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