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가까운 곳에 서서 멀리 보다
장 태태는 이신을 바라봤고 이신도 그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잠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장 태태가 온화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동저아만 고개 끄덕이면 나와 신가아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만 어멈.”
장 태태는 고개를 돌려 만 어멈에게 분부했다.
“동저아에게 가서 이 일을 전하고 그 아이 생각을 물어보고 오게.”
만 어멈은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고는 눈길 한 번 팔지 않고 나갔다가 금세 돌아와서 고했다.
“아룁니다, 태태, 대야, 칠야. 낭자는 강가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로 평생 수행하며 살기로 마음먹었고 혼인하겠다는 생각은 버렸답니다. 이미 불문에 귀의한 몸이니 앞으로는 이런 일로 성가시게 하지 말랍니다.”
장 태태는 미안한 듯 영원을 바라보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동저아의 뜻이 이렇다고 하니…….”
“제가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영원은 미안해하는 장 태태의 말을 잘랐다. 예상한 대답이었다. 단번에 승낙할 거였으면…… 벌써 성혼했겠지. 지금까지 기다렸을까.
장 태태는 또 이신을 힐끔 보고는 매우 망설여지고 또 매우 난감한 듯 한참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만 어멈, 칠야를 모시고 같이 다녀오게.”
만 어멈이 영원을 데리고 화청에서 나간 후 장 태태는 상체를 세우고 영원이 멀어지는 걸 기다렸다가 다급하게 이신에게 물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동저아가 고개를 끄덕일지 말지, 짐작 가지 않았다.
이신도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야의 말로는, 빌기는 해야 할 것이고, 쉽지도 않겠지만, 결국은 허락을 얻어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됐다. 쉽게 받아주지 않은 건 괜찮다만…….”
장 태태는 매우 갈등하는 모습이었다.
“나 좀 보렴. 어제 그 이야기를 들은 이래 내내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럽구나. 동저아가 허락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고 또 허락할까 봐도 걱정이다. 칠야가 좋은 사람이긴 한데 문제는 너무 좋은 사람이다. 생김새 좀 보아라. 동저아보다 뛰어나다. 능력도 있고, 지체 높은 가문 출신에, 황후 마마의 친아우에, 흠잡을 것이 없다……. 흠잡을 것이 없는 건 아니지. 예전에 북삼로에서 홍루에 빠져서 살았다고 하더구나. 북삼로까지 말할 것도 없지, 경성에 있었던 1년 동안에도……. 휴. 그러면 안 된다는 건 아니고 동저아도 대범한 아이지만, 하지만…….”
장 태태는 이야기할수록 영 칠야가 그리 좋은 배필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신이 얼른 좋은 말을 했다.
“영 칠야는 허튼짓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북삼로에서도 그랬다는군요. 이야가 사람을 보내 자세히 수소문했었습니다. 열두어 살부터 그런 곳에 출입했지만, 누군가에게 빠졌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누구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소문조차 없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장 태태는 순간 마음이 많이 놓였지만, 다른 걱정이 들었다.
“북삼로는 추운 곳이다. 앞으로…….”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이야의 말로는 영 칠야가 경성에 평생 있진 않더라도 떠나려면 멀었다고 했습니다. 오황자가 아직 어린걸요.”
이신은 마지막 말을 매우 나직이 말했다. 오황자 이야기를 들은 장 태태는 눈살을 더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황자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 혼사가 두려운 것이다.”
“그건 이 혼사가 아니더라도 큰 차이 없습니다.”
이신이 담담하게 하는 말에 장 태태는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되어가는지 손 어멈을 보내려다가 직접 일어섰다.
“내가 가 보고 오마.”
이신이 뭐라고 하려고 하자 손을 저었다.
“안다. 몰래 보고 올 것이다.”
이신은 장 태태와 함께 화청에서 나갔다. 장 태태는 손 어멈, 진주 등과 함께 이동의 거처로 향했다. 이신은 장 태태가 멀어지는 걸 보고 문 이야를 찾아갔다.
영원은 만 어멈을 따라 이동의 뜨락 문 앞에 도착했다. 만 어멈이 계단을 오르자 영원도 따라 걸음을 내딛다가 돌아선 만 어멈에게 저지당했다.
“칠야, 물러서서 뜨락 문 앞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소인이 먼저 들어가 낭자께 기별하겠습니다.”
영원은 할 수 없이 걸음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만 어멈은 금세 다시 나왔다.
“돌아가시랍니다. 낭자는 머리를 깎진 않았지만, 이미 출가인이나 마찬가지라고요.”
“만나서 직접 물을 말이 있네. 어멈, 수고스럽지만 한 번 더 다녀와 주게. 꼭 직접 만나서 할 말이 있네.”
영원이 만 어멈을 향해 장읍하자 만 어멈은 허둥지둥 몸을 피하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더 기다리세요, 칠야.”
만 어멈은 이번엔 아까보다 더 빨리 돌아왔다.
“첫째, 남녀유별하고, 둘째, 만나든 말든 차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돌아가세요, 칠야.”
“만나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걸세.”
영원은 오기 전에 천만 가지로 고민했었고, 이번에 온 이상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무런 수확 없이 돌아간다면 이 혼사는 더는 희망이 없어질 것이다.
만 어멈은 얼떨떨해졌다. 억지를 부리려고요?
“칠야, 여기는 내택입니다. 여기에 서 계시다니, 법도에 어긋납니다.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겠네. 다른 건 대낭자가 나를 만난 후에 이야기하겠네.”
영원은 매우 단호했다. 만 어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원을 훑어봤다.
“그럼 소인이 다시 가서 낭자께 고하고 오겠습니다.”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만 어멈은 영원을 향해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고는 지나쳐서 휘적휘적 가버렸다.
영원은 슬쩍 다리를 옮기면서 자리를 잡았다.
화청으로 돌아간 만 어멈은 시녀를 불러 장 태태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고는 장 태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장 태태의 어깨너머로 영원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낭자가 화가 좀 났어요. 데리고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고요. 영 칠야는 원래 이런 무뢰배라서 내보내기 쉽지 않을 거라고요. 정말로 그러네요. 낭자가 만나주지 않으면 계속 서 있을 거랍니다. 낭자가 만나줄 때까지 기다릴 거랍니다. 하지만, 만나면 돌아간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만나서 하겠다고만 하고요. 낭자에게 영 칠야의 말을 전했더니 대야와 문 이야를 찾아가서 알리고 사람을 불러 끌어내라고 하네요.”
장 태태는 꼿꼿이 서 있는 영원을 바라봤다.
“끌어내라니, 어떻게? 몇 명으로는 끌어내지 못할 것이고, 사람을 많이 부르면…….”
큰 소란이 일어날 텐데.
“하지만, 저렇게 서 있는 건 안 될 일이지요.”
“서 있겠다니 서 있으라고 하게. 얼마나 서 있을 수 있겠나. 지치면 돌아가겠지.”
장 태태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속으로 매우 갈등 되고 마음이 복잡했다. 동저아가 고개를 끄덕이길 바라는지, 아니면 거절하길 바라는지 자신도 몰랐다. 이 혼사는 좋은 혼사였다.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일단 두고 보세.”
장 태태와 만 어멈, 손 어멈이 그곳에 서서 몰래 지켜볼 때 문 이야와 이신도 다른 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고육지책인 겁니까?”
이동이 만나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영원의 말에 이신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그렇지요, 바로 고육지책이지요. 칠야의 모습 좀 보세요. 자신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 저렇게 서 있는 게 쉽진 않을 텐데요.”
“그러니까요. 앉아서 기다릴 것이지.”
문 이야가 쥘부채를 흔들며 하는 말에 이신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앉아서 기다리면 고육지책이 아니게요. 마음 아프게 해야 하는 작전인데, 무릎 꿇고 기다려야지요.”
문 이야의 평가에 이신은 어이없는 듯 그를 흘겨봤다. 영원은 지금 3품 관리인데 무릎을 꿇고 기다려야 한다니. 이야의 기세가 갈수록 커지는군.
“환가아 있느냐. 부엌에 다녀오너라. 소유에게 나와 대야가 먹을 간식을 달라고 해라. 공들여 만든, 맛있고 배는 안 부를 만한 것으로 달라고 해라. 그리고 도수 낮은 술도 몇 병, 됐다, 아무리 도수가 낮아도 술은 안 되겠다. 다로와 다구를 내오너라. 아니다, 아니야. 역시 술로 가자. 두 근만 가지고 오면 된다. 어서 가라!”
이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문 이야가 헤헤 웃었다.
“오래 걸릴 걸세. 칠야야 서서 기다려야겠지만, 우리가 같이 고생할 것 있나. 먹고 마시면서 편안하게 지켜보면 되지.”
“문 이야, 구경 났습니까?”
이신은 불안도 하고, 조금 불퉁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지켜볼 수밖에 없잖은가. 안 그런가?”
문 이야는 쥘부채를 흔들며 이 의자에 앉아 보고 저 의자에 앉아 보다가 서가아를 불렀다.
“어째 편안한 의자가 하나도 없느냐. 내 방에 있는 대나무 의자를 내오너라.”
“이야…….”
이신은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말했잖나. 오래 걸린다고.”
문 이야는 또 어슬렁거리면서 목과 손목을 풀어줬다.
“대낭자의 심지는 자네보다 훨씬 굳건하네. 칠야, 아무래도 반나절은 서 있어야 할 걸세. 어쩌면 밤새, 이틀,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 아무도 모를 일이네. 어찌 됐든 오래 걸릴 걸세. 편안하게 앉아서 먹고 마시면서 기다려야지, 아니면 괜히 우리까지 고생하게?”
이신은 눈살을 찌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영원의 성격이 어떤지 유심히 유념했었다.
“이야, 이러다가 잘못되면……. 사돈은 안 되더라도 원수는 되지 말아야지요.”
이신은 슬쩍 걱정됐다.
“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칠야는 홍등가에서 구른 사람이라 여인의 마음을 잡는 건…… 대낭자를 존중하지 않아서 하는 말이 아니네. 그 이야기는 됐네. 영 칠야가 계속 서 있기만 하면 그 진심 때문에라도 대낭자가 한 번은 만나줘야 할 걸세. 얼굴을 보기만 하면…… 내 말은 얼굴 보고 터놓고 이야기만 하면 되는 걸세. 원수가 될지 말지는, 설령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영 칠야가 어떤 사람인가. 정정당당한 사내대장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인품이네. 이 정도 작은 일로 원수가 된다니, 그럴 소인배로 보이나? 우린 그냥 두고 보기만 하면 되네. 마음 편히 먹게.”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
이신도 살짝 안도하며 창가로 다가섰다.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영원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었다.
장 태태와 마찬가지로 몹시 갈등했다. 이 혼사를 가늠하고 또 가늠하고, 내려놓자니 아깝고, 받아들이자니 걱정되고. 그리고 이신은 장 태태보다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만일 영원이 장차 동저아를 저버리는 일이 생기면, 영원을 상대로 자신의 승산이 얼마나 될까.
환가아가 찬모 몇을 데리고 음식과 과일 절임을 한 상 가득 차리고 다로와 다구를 늘어놓고 술을 놓았을 때 서가아도 의자를 들고나왔다. 문 이야는 편안하게 앉아서 다리를 꼬고 차를 홀짝이며 아직 창가에 서 있는 이신을 힐끔 봤다.
“그만 보게. 멀었다니까. 와서 차 한잔하게. 이 잠두콩, 괜찮군. 능운루 것보다 훨씬 나아.”
이신은 잠시 더 바라보다가 미간을 단단히 찌푸리고 문 이야의 맞은편에 앉아서 신나게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 문 이야를 바라봤다.
“이야의 심성도 참…….”
“해바라기 씨도 잘 볶아졌군. 맛보게. 소유가 만든 걸세. 먼저 불리고 볶아서 맛있네.”
문 이야가 해바라기 씨를 내밀었지만, 이신은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혼사, 생각할수록……. 휴! 영원 저치가 심사가 너무 깊습니다. 속을 알 수 없어요. 동저아가 아직 강가 며느리일 때부터 마음을 품은 것 같습니다.”
“같은 게 아니라, 맞네. 쯧쯧.”
문 이야가 연신 혀를 찼다. 강남에 갈 때부터 눈치를 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