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12화 (412/463)

412화: 가장 어리석은 방법

묵 이야는 조마조마하면서 단걸음에 묵칠의 뜨락 문 앞으로 달려갔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으로 올라 막 문턱을 넘으려는 때 기운 없이 책 외우는 묵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이야는 순간 안도하며 비틀비틀 문가에 기댔다.

보아하니 이번엔 정말로 정진할 모양이로구나.

화가 나서 뛰쳐나온 영원은 묵칠의 뜨락에서 조금 멀어진 후 침착함을 찾았다. 그러나 침착함을 찾았어도 걸음은 멈추지 않고 여전히 다급하고 분노한 걸음으로 밖으로 달렸다.

고서강은 분명 장공주를 노리고 아들 짝으로 동동을 고른 것이다. 이신은 영리한 사람이고 장 태태도 비슷하다. 동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이 혼사는 성사되지 않는다. 누구에게 부탁해서든 소용없다. 그냥 우스운 소리다. 내가 뭘 다급해 하나.

좋은 규수는 많은 가문에서 바라지 않나. 고서강이 어느 점이 마음에 들었든 혼담을 넣는 사람이 있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내가 왜 화를 내나.

그랬다. 화를 낼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영원은 이를 갈았다.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고자의를 잘근잘근 밟아주고 싶을 뿐이다!

영원은 말에 올라 곧장 성 밖으로 말을 몰랐다. 묵부에서 그를 따라잡지 못한 주육이 대문 밖까지 나갔을 때 영원은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거느리고 온 성안을 뒤집었지만 아무 곳에도 없었다.

말을 몰고 성 밖을 나간 영원은 길을 크게 둘러서 남문으로 나가서 동문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한 바퀴 크게 돌고 오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 혼사에서 기회를 기다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일 듯했다. 직접 혼담을 넣으러 가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것 없이 직접.

영원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어 휘휘 저었다. 오늘은 안 된다. 내일 아침 일찍 가자.

영원은 결정으로 내리고 정북후부로 향하다가 별안간 말고삐를 당기고 대영에게 분부했다.

“이가에 가서, 능운루로 오시라고 문 이야를 모셔라.”

문 이야는 금세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영원이 힐끗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한 문 이야는 ‘응?’ 소리를 냈다.

“칠야, 안색이 별로군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 경성에서 누가 감히 칠야를 건드렸답니까?”

“이 경성에서 감히 날 건드리는 사람은 아주 많네. 앉게. 가르침 청할 일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칠야.”

문 이야는 영원 맞은편에 앉아서 스스로 찻잔을 꺼내와 차를 따르면서 목을 내밀어 탁자 위를 훑었다.

“능운루 다과, 어째 나날이 별로인 것 같습니다.”

“혼담을 넣으러 저택으로 찾아갈까 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영원은 문 이야의 푸념을 상대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문 이야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음? 누구에게 혼담을?”

“알면서 묻기는!”

영원이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축하합니다, 칠야.”

문 이야는 눈을 깜빡였고 영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데 축하는 왜 하는가.”

“저택으로 오신다니, 그럼, 이야기는 끝난 겁니까?”

문 이야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영원은 무슨 말인지 알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찾아가지 않고 이야기를 어찌 끝내나.”

“아!”

문 이야는 알아듣고 허허 웃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데, 상관없는 질문만 하는가?”

영원은 기분이 아주 엉망이었다. 문 이야도 이번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다른 어려움이라면 제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칠야의 어려움은 생각해 보고 싶어도 모르겠습니다. 칠야께서 제일 잘 아시겠지요.”

영원은 고민스러운 듯 한숨을 내뱉었다. 모르겠으니 찾아와 묻는 거 아니냔 말이다!

“그럼 말해 보게. 어떻게 해야 마음을…… 흔들 수 있겠나.”

영원이 말을 얼버무리자 문 이야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칠야, 분 냄새 폴폴 나는 여인들 사이에 파묻혀 살던 분이, 노총각한테 그런 걸 물으시다니요. 소경에게 길을 묻는 격 아닙니까.”

영원은 문 이야의 그 말에 기가 차서 웃음이 났다.

“그래, 그래. 사람 잘못 찾아온 셈 치세.”

영원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자 문 이야가 뒤에서 한마디 더 물었다.

“칠야, 언제 오실 생각입니까?”

“내일.”

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문 이야는 일어서서 창가로 가서 창문을 밀어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꿍얼거렸다.

“내일이라. 음. 내일이 좋은 날이지.”

묵칠에게 형통 두 권을 던져 준 후, 묵 이야는 오늘 다른 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지켜봤는데 묵칠은 여전히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목소리로 형통을 외우고 있었다. 묵 이야는 다시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면 금세 지칠 터인데…….

저택으로 돌아온 묵 승상이 가장 처음 들은 말이 바로 ‘칠소야가 종일 책을 외웠다’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묵 승상은 놀라서 펄쩍 뛰며 묵칠의 거처로 직행했다. 뜨락 문 안에 앉아 있던 묵 이야는 부친이 온 걸 보고 서둘러 다가가 맞이했다. 묵 승상은 아들을 향해 손을 들어주면서 뜨락 문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수화문 아래까지 들어가서 서쪽 곁채 창문에 묵칠이 책을 안고 서성거리는 그림자가 비치는 걸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

묵 승상은 잠시 들여다보다가 나지막이 아들에게 물었다.

“그게, 계 탐화가 명가 낭자와 혼인할 때 단 한마디 했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답니다.”

묵 이야의 나직한 대답에 묵 승상이 고개를 돌려 묵 이야를 바라봤다. 묵 이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깊이 묻지 못했습니다. 누구일지……. 혹시 양가 규수가 아닐까 걱정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묵 승상이 아주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게다. 소칠은 큰일에서 틀을 벗어나는 짓을 하지 않는다. 종일 외웠다고?”

“예, 목이 다 쉬었습니다.”

묵 이야의 마음 아파하는 듯한 모습에 묵 승상이 그를 흘겨봤다.

“책 읽다가 목이 쉬는 건 다반사다.”

“예.”

묵 이야는 고개 숙이고 잘못을 인정했다. 지나치게 걱정한 것이 맞았다.

“하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 글공부하더라도 진도를 지켜야지. 초반에 지나치면 몸 상한다. 이만 쉬고 내일 계속하라고 해라.”

묵 승상이 분부하자 묵 이야가 곧바로 서쪽 곁채로 가서 일단 문을 두드리고 한쪽 문을 열었다.

“소칠, 늦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어서 쉬어라. 내일…….”

“이제야 감을 좀 잡았습니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묵칠이 성가신 듯 대답하자 묵 이야가 한마디 더 하려는데 묵 승상이 뒤에서 돌아오라고 불렀다. 묵 이야는 고분고분 문을 닫고 물러났다. 두 사람이 뜨락 문밖으로 나간 뒤 묵 이야는 소우를 비롯한 사환들을 불러 한바탕 세세히 분부한 다음에 묵 승상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아버님, 소칠이 이번엔 오래갈까요?”

묵 이야는 기쁘기도 하고 걱정도 됐다.

“미리 걱정할 것 없다. 조금이라도 정진하면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묵 승상의 소칠에 대한 기대는 묵 이야보다 확실히 낮았다.

“휴, 그건 그렇습니다.”

한참 만에 묵 이야가 기운 없이 대답했다.

“형통 두 권만 다 외우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지요.”

“형통 두 권에? 흥! 안 된다! 열 권은 외워야지. 그 전엔 안 된다.”

묵 이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열 권이라니. 소칠이 열 권을 외우려면 언제까지 외워야 할까.

황상은 요즘 거의 닷새에 한 번씩 조회를 열었다.

다음 날 조회가 끝난 후 영원은 저택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비녀 하나를 품에 넣고 이가로 직행했다.

어제 문 이야는 집으로 돌아가서 영원이 혼담을 넣을 것이란 말을 이동에겐 하지 않고 장 태태와 이신에게만 전했다. 이신은 하루 청가하고 집에서 영원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영원은 이가 대문 앞에서 말에서 내려 매무새를 고치고 계단으로 올라가 이가 대야를 만나길 청했다. 문지기가 서둘러 들어가 보고하자 이신이 금세 마중 나왔다. 영벽을 돌아 영원을 보자마자 장읍하며 예를 갖췄다.

“칠야가 이리 찾아주시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이신은 영원이 찾아온 이유를 모른 척하며 그저 관료 사회와 경성의 손님 접대 법도를 따라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그를 맞이했다.

영원은 답례하고 이신을 따라 정당으로 들어갔다. 이신이 상석에 앉으라고 고집해도 단호하게 버티며 이신을 상석으로 모셨다. 두 사람은 상석을 양보하는 것에만 일각 정도를 허비하다가 결국 상석을 비우고 좌우로 마주하고 앉았다.

차를 내오자 이신은 직접 찻잔을 들고 영원에게 건네며 얼마나 귀한 차인지, 오늘 날씨는 또 얼마나 좋은지 주절주절 늘어놓을 뿐, 절대로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먼저 묻지 않았다.

“오늘 귀댁에 찾아온 것은, 청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영원이 본론으로 이야기를 유도했다.

“칠야, 무슨 그런 말씀을. 칠야 같은 분이 저 같은 사람에게 부탁할 것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농담도 참.”

이신은 뻔히 알면서 모른 척으로 응대했다.

“혼담을 넣으러 왔습니다.”

영원은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신이 얼떨떨해하는데 영원이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영매와의 혼인입니다.”

“그랬군요…….”

영원의 직접적인 두 마디에 이신도 더는 얼버무릴 수 없어졌다.

“혼담을 넣을 생각이시라면 매파를 보내셨어야지요. 직접 오시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원이 이신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런 건 예법이고요. 형님, 안심하십시오. 지켜야 할 예법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허락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허락을 얻으면 내일 바로 매파를 보내 정식으로 혼담을 넣겠습니다.”

이신이 공수하며 대답했다.

“주도면밀하시군요. 사매(舍妹)의 혼인은 모친이 결정하셔야 합니다. 칠야…….”

“영원, 백모(伯母: 큰어머니, 친구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를 만나 뵙길 청합니다.”

영원은 일어서서 이신을 향해 깊이 장읍했다. 이신은 따라 일어서서 잠시 주저하다가 어멈을 보내 기별을 전했다.

문 이야가 가능하면 두어 번은 거절하라고 했지만, 휴, 아무래도 한 번도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멈은 금세 다시 돌아와서 두 사람을 화청으로 모셨다.

이신은 영원 곁에서 장 태태를 기다렸다. 장 태태가 화청으로 들어오자 영원은 더 시원스럽게 장읍으로 예를 갖추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장 태태는 비록 이미 알고 있었고, 오늘 찾아올 것도 알고 있었지만, 영원이 이렇게 대놓고 말을 꺼내자 역시 얼떨떨해졌다. 이어서 영원을 위아래로 샅샅이 살펴보고는 이신을 힐끔 보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칠야, 우리 동저아는 재가입니다. 첫 혼인은 가족의 뜻을 따르고, 재가는 본인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일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 동저아는 고집 세고 주장이 강해서 누군가를 조심스럽게 시중들 만한 사람도 못 됩니다. 영 칠야, 숙고하시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격이 좋고 온화합니다. 대낭자를 서럽게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은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고 제 자랑을 했다. 영원이 이렇게 대답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장 태태는 말문이 막힐 뻔했다.

“허, 칠야, 혼인은 두 가문의 일입니다. 칠야가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을 영존과 영당은 아십니까? 그리고 칠야의 손위 형제는요.”

“부친과 모친께는 이미 서신으로 알렸습니다. 경성으로 오기 전에 좋은 인연이 생기면 누님과 상의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님과는 이미 상의를 끝냈고요. 누님도 좋다고 여기십니다.”

영원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