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외운다면 외워!
“아직은 아무 일 없습니다. 잊으신 겁니까,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아직은 아무 일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집에서 말발 서는 사람이 되겠다니. 이 집안에서 누가 널 괴롭힌다고? 지금도 큰소리 떵떵 치지 않아?”
묵 이야는 아들에게 일이 생겼음을 확신했다. 그것도 아주 큰 일이.
“지금 말발 서는 건 오늘 뭘 먹을지, 뭘 살 건지, 이 꽃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이런 것들 아닙니까. 이런 건 안 됩니다!”
묵칠은 머리가 잘 굴러갈 땐 또 아주 잘 굴러갔다.
“계 탐화처럼 무슨 일에서든 큰소리 땅땅 치고 살 겁니다!”
묵칠은 주먹을 휘두르며 다시 탁자를 내리쳤다.
묵 이야는 즉시 깨닫고 살며시 아, 하더니 일어서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로 가서 두꺼운 책 두 권을 꺼내 왔다.
“너는 음서 출신이라 잡도(雜途)에 속한다. 성과를 이루려면 실무부터 시작해야 한다.”
(※잡도雜途: 관리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경로 중 하나. 과거 시험은 정도正途에 해당하며 그외에 조상의 공덕으로 벼슬을 얻거나 봉작을 이어받는 것은 잡도라고 했다.)
“성과를 이루려는 게 아니라 그저…….”
묵칠은 손사래 치며 얼른 해명했다. 공과 업적을 세우려는 게 아니라 그저…….
묵 이야가 묵칠의 뒤통수를 철썩 내리쳤다.
“고얀 놈! 성과 없이 어찌 승진하느냐? 앞으로 승진이니 높은 벼슬이니 입에 올릴 생각도 하지 말아라. 실제로 일을 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
묵칠은 팔을 들어 이마를 막았다.
“때리지 마세요. 알았습니다, 알아들었어요. 듣기 좋게 말씀하란 말이지요. 예, 예. 성과를 이룰 뜻을 품겠습니다. 계속하십시오.”
“실무부터 해야 한다. 실무를 하려면 우선 형법, 율법을 알아야 한다. 여기, 우리 황조의 형통(刑統: 율법 독본)이다. 일단 이것부터 외워라.”
묵 이야는 두껍고 무거운 책 두 권을 묵칠의 품에 안겨주었다. 묵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외, 외, 외우라니요. 이 책을요? 이렇게 두꺼운 책을 어떻게 외웁니까? 저는…….”
묵 이야가 매우 담담하게 소매를 털었다.
“외우고 말고는 네 자유다. 말했듯이 너는 음서 출신이다. 몇 년 동안 착실하게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위로 올라간단 말이냐. 전에 이야기했듯이, 우선 육부에서 각 부의 업무를 숙지하고 혼인한 후에 작은 현의 관리직을 맡아야 한다. 잘해 내면 조금 더 큰 현으로 가서 두어 임기 더 있으면서 실적을 착착 쌓으면 5품은 문제없다. 다시 육부로 돌아와서, 호부, 형부 어디든 들어가서 4, 5년 머물면서 큰 잘못 없이 잘 있다가 다시 지방에 가면 4품이 된다. 십여 년이면 될 일이다.”
“지금 공부에 있는데 이런 걸 외워서 무얼 합니까. 지방에 가도 형방, 전량 모두 사야가 있는데 제가 이런 걸 외울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묵칠은 제 부친이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관료 사회는 전쟁터나 마찬가지다. 형통도 모르면, 잡아 잡수라고 기다리겠다는 것이냐? 그럴 바에야 집에서 놀고먹어라. 적어도 목숨은 부지하겠지.”
묵 이야의 얼굴이 냉랭해졌다.
“외우기 싫으면 내려놓아라. 지금처럼 사는 것도 꽤 좋지 않으냐.”
묵 이야는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서안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외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 말은, 이 책이…… 너무 무겁습니다. 제 말은, 아버지, 그냥 여러 번 읽으면 안 되겠습니까? 내용만 알면 되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울 필요는 없지요, 그렇지요?”
묵칠은 책을 끌어안고 부친에게 바짝 다가가 조건을 내걸었다. 묵 이야는 벌떡 일어서서 묵칠 품에서 책 두 권을 빼앗아서 서가에 돌려놓으려고 돌아섰다. 묵칠이 얼른 달려가 다시 빼앗았다.
“예, 예, 예. 알았습니다. 외우지요, 외우면 되잖습니까! 책 두 권 아닙니까. 뭐가 대단하다고! 뭐가 무서워서요! 제가…….”
묵칠은 두껍고 무거울 뿐만 아니라 일반 서책보다 폭이 넓고 긴 책 두 권을 내려다보고는 반드시 외울 수 있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관리가 되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았느냐? 형통 두 권은 기본이다. 외워야 할 책이 얼마든지 있다.”
묵 이야는 울상이 된 아들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정진하겠다는 생각을 싹 없애주겠다고 작정한 듯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묵칠은 서리 맞은 채소처럼 풀이 푹 죽어서 책을 안은 채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묵 이야는 단정하게 앉아서 글을 쓰며 곁눈으로 지켜보다가 묵칠 등 뒤로 휘장이 내려오자 벌떡 일어나서 몇 걸음 만에 입구로 달려가서 휘장 사이로 틈을 열고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묵칠의 모습이 수화문 뒤로 사라진 후에 휘장을 내려놓고 들뜬 듯이 숨을 내쉬고는, 제자리를 빙빙 돌다가 사환을 불러 칠소야가 무엇을 하는지 몰래 지켜보라고 분부했다.
묵칠이 두꺼운 책 두 권을 안고 제 부친 거처에서 나가자 소우가 잰걸음으로 달려가 품에 안은 책을 받으려고 했다.
“내 책이니 내가 들고 갈 것이다!”
묵칠이 몸을 비틀며 하는 말에 소우는 어리둥절해졌다. 칠소야의 책을 언제는 사환들이 들지 않았나. 전에 그 책들은 칠소야의 책이 아니었나?
두꺼운 형통 두 권을 안고 거처로 돌아간 묵칠은 거의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서쪽 곁채,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다행히 게으름 피우지 않는 사환들이 서재를 깔끔히 정리해두었고, 묵칠은 서안 위에 책을 내려놓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돌아서서 자리에 앉았다.
“소우, 차 한 주전자 내려주고 방해하지 말고 다 나가라.”
소우가 더 어리둥절한 상태로 큰 주전자에 차를 내리고 잔을 준비해서 쟁반에 올려 서안으로 다가갔을 때 묵칠은 벌써 숨을 다 고르고 형통 상권을 펼쳤다.
“오형십악(五刑十惡: 다섯 가지 형벌, 열 가지 죄), 오형은…….”
방에서 나가기도 전에 묵칠이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에 소우는 놀라서 파르르 떨었다.
칠소야, 왜 이러실까? 미치셨나?
칠소야가 나가서 곧바로 자기 거처로 돌아가서 형통을 외우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묵 이야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심호흡했다.
침착하자. 예전처럼 반 시진 외우다가 책을 내던지고 제 할 일 하러 갈지도 모른다.
묵 이야는 진정하고 앉아서 이각마다 돌아와 보고하라고 두 사환을 함께 보냈다. 사환이 명을 받고 나간 뒤, 묵 이야는 상주서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글자를 틀리거나 아니면 먹을 종이에 흘려서 연달아 몇 장 구겨버리고는 아예 그만두고 일어나서 뒷짐 진 채 방 안을 서성거렸다.
두 사환이 번갈아 가면서 네댓 번 보고하러 왔을 때 문 이야는 더는 앉아 있지 못하고 묵칠의 거처로 달려갔다. 달려가서 수화문 아래 서서 뒷짐 지고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하며 책을 외우는 묵칠의 목소리를 들었다.
묵칠은 오시까지 줄곧 책을 외웠고 식사도 서재로 들였다. 그것도 고작 이각 만에 소우가 찬합을 들고나왔고, 서재 안에 다시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묵 이야도 더는 진정하지 못했다. 소칠이, 이번엔 정말로 정진하려는 건가?
점심 식사 후, 전 노부인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묵 육낭자를 데리고 묵칠의 거처로 달려와서 묵 이야와 함께 수화문 아래 서서 실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왜 저러는 것이냐?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것이야. 왜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이냐. 책을 벌써 두 시진 동안 외우고 있지 않으냐.”
“겨우 두 시진입니다. 길지도 않아요.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묵 이야는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아들이 정말로 이대로 정진한다면, 이게 다 며느리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아주 좋은 며느리다!
묵칠이 영원을 찾으러 주육에게 들렀을 때 원 형님을 만나면 말해달라고 당부했지만, 묵칠은 그 길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까지 기다려도 묵칠이 소식이 없자 주육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원 형님이 어딜 갔을까? 무슨 일이 생겼나? 재미있는 일이 생겼나?
재미있는 일이란 생각을 하자마자 주육은 안절부절못하고 일어나서 대충 핑계를 대고 관아에서 나갔다.
원 형님은 정북후부에 없었다. 아예 돌아가지도 않았다. 관아에도 없었다.
주육은 잠시 생각하다가 우선 큰 주루부터 샅샅이 찾아다녔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어딘가에서 밥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풍루에서 능운루, 번루를 거쳐서 하나씩 찾아다닌 주육은 정말로 반루에서 영원을 찾아냈다.
“원 형님, 왜 혼자 있지? 소칠은? 소칠을 만났소? 찾아다니던데?”
영원은 만났지만 소칠이 보이지 않자 주육이 물었다. 기분이 안 좋은 영원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로 형님을 찾는 거요? 지난번 우물 턱에 앉은 것으로 부족했나?”
주육은 제 말이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낄낄 웃었다.
“무슨 일은 무슨 일. 넌 관아에 죽치고나 있지, 여기엔 왜 온 거냐?”
영원은 묵칠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주육과 헛소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관아가 뭐가 좋다고 죽치고 있어. 형님, 어찌 언짢은 것 같은데? 하긴, 요즘 나도 무료해서 죽겠소. 우리 소칠 불러서 개 데리고 성 밖으로 휘이 다녀올까?”
제 건의를 영원이 상대도 하지 않자 주육은 바짝 더 다가갔다.
“형님, 기분 안 좋다고 꿍해 있으면 안 좋아. 꿍할수록 마음만 안 좋지. 아니면 술 한잔하러 가겠소? 한잔 술로 천만 근심을 푼다지 않아. 비연루에 갈까?”
영원은 계속해서 엉겨 붙는 주육이 성가셨다.
“묵칠이 뭐 하는지 보고 와라. 아침에 보니까 멍하니 정신이 나갔던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냐.”
“그놈이 무슨 일이 있겠소.”
주육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사환을 불러 분부했다.
“칠소야가 저택에 있는지 묵부에 가 보아라. 있으면 바로 여기로 모셔와라. 나와 원 형님이 여기에서 기다린다고 해라.”
사환이 조르르 나가자 주육은 기별이 오길 기다리면서 일꾼을 불러 다과를 시키고 차 내리는 기녀도 부르려는데 영원이 사람이 많으면 성가시다고 저지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사환이 쪼르르 달려와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표정으로 보고했다.
“아룁니다, 나리. 묵 칠소야는 저택에 계셨습니다. 그렇긴 한데 열심히 글공부하는 중이라서 나올 시간이 없답니다.”
“뭐라고?”
주육은 꽥 고함부터 치고는 어이없는 듯 허허 웃었다.
“그놈이? 글공부? 글자는 알고?”
영원은 찻잔을 쥔 채 멍하니 있었다. 글공부? 정진하려는 건가? 지금 시작해도 늦었지. 그럴 만한 놈도 아니고.
“정말로 글공부 중입니다. 문지기 말이, 묵부 어르신과 이야 모두 조용조용 다니라고 분부하셨답니다. 칠소야가 글공부하는 데 방해하지 말라고요. 문지기가 목소리까지 낮추고 이야기했습니다.”
사환이 고분고분 대답하는 말에 이번엔 영원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묵부 문간방이 묵칠 거처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목소리를 낮추긴.
“가자, 무슨 일인지 가 보자.”
영원이 일어서자 주육은 흥분해서 두 눈을 빛내며 연신 대답했다. 또 구경거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