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시비
“우리가 서로를 몰라?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해야겠어? 우리 어머니가 네 할머님에게 혼담을 부탁드리자마자 다음 날 네 할아버님이 이 혼사를 가로채서 삼저아 혼담을 넣었어. 그런데 네가 모른다고? 누가 믿을까? 너는 모든 일에서 네 할머님을 휘두르는데, 이 일이 네 뜻이 아니라고? 우리 사이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조 구낭자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우다다 내뱉다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눈물부터 흘렸다.
해 이낭자의 얼굴이 더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정말 어떻게 되었구나! 이런 말을 어떻게 입에 올려? 정말 창피하다! 첫째, 네 어머니가 우리 할머니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지 난 몰라. 내가 알아서도 안 될 일이고. 설령 부탁했더라도, 우리 할머님이 집안일을 나와 상의하긴 하지만 그건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 관해서야. 이런 일을 내게 말씀하시겠어? 우리 집안엔 법도와 기강이 있어! 둘째, 혼인 문제는 부모의 명과 중매인의 말로 이뤄지는 거야. 우리가 신경 쓸 일이야? 너 정말, 어떻게 됐구나!”
“너!”
대놓고 따지면 부끄러워서 반박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해 이낭자가 오히려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훈계하자, 조 구낭자는 화가 나서 손가락을 덜덜 떨며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넌 원래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하니까, 따지지 않을게.”
해 이낭자는 자신의 대범함을 담담하게 드러냈다. 조 구낭자는 화가 나서 기절할 것 같았다.
“나……. 그래, 이제 우리 끝이야. 앞으로 너랑 나, 길 가다가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말자!”
조 구낭자는 발을 구르며 가버렸고 해 이낭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코웃음 쳤다.
이렇게 뛰어와서 대놓고 따지다니. 이토록 어리석어야, 원. 그래, 다시 만날 일이 없겠다!
단숨에 중문까지 달려간 조 구낭자는 마차에 올라서 발을 구르며 어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마차가 해가 저택에서 나온 뒤, 조 구낭자는 양손을 꾹 쥐고 쿵쿵 마차를 내리쳤다. 올 때 뱃속 가득했던 분노와 억울함이 더 강렬해졌다. 화가 나서 해 이낭자를 제 손으로 갈가리 찢어놓고 싶어졌다.
“초 승상부로 가!”
조 구낭자가 마차를 걷어차며 분부했다. 초 삼낭자를 만나야 했다. 초 삼낭자에게 해 이낭자가 평소에 뒤에서 뭐라고 그녀 이야기를 하는지 알려야 했다.
초 삼낭자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잖아? 망쳐주겠어!
시름시름 기운 없이 침상에 누워있던 초 삼낭자는 조 구낭자가 왔다는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돌려보내려는데 시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주 중요한 일이래요.”
초 삼낭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일어서서 맞이하러 나갔다. 조 구낭자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초 삼낭자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 눈살을 찌푸렸다. 고민을 털어놓으러 온 거라면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계 공자가 명가 삼낭자와 정혼 한 일, 너도 들었지?”
조 구낭자가 입을 열자마자 대뜸 그 이야기를 하자 초 삼낭자의 안색이 변했다.
“계 공자가 누구와 정혼 했든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런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 거야?”
“계 공자가 왜 명가 삼낭자와 정혼 했는지 그 이유를 내가 아니까.”
조 구낭자는 오는 내내 초 삼낭자에게 어떻게 이 일을 알려야 할지 다 생각해 두었다.
초 삼낭자가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네가 계 공자를 좋아하는 거, 이 경성에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초 삼낭자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변했다.
“우린 인척이야. 이보다 가까울 수 없는 인척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없어.”
조 구낭자는 초 삼낭자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통쾌한 느낌이 들었다. 승상가 여식이면 뭐? 계가에서 싫다잖아!
“해 이낭자가 한 말이야. 나한테 했을 뿐만 아니라 누굴 봐도 우스갯소리처럼 그 이야기를 꺼냈어. 네가 계 공자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한다고. 네가 갑자기 백차를 좋아하게 된 것도 계 공자가 좋아해서라고. 그리고 계 공자가 꽃을 꺾어주는 꿈을 꾸었다고 네가 말했다고…….”
“그만해!”
초 삼낭자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고함쳤다. 구낭자의 말이 맞았다. 해 이낭자에게만 몰래 털어놓은 비밀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만 알아야 할 비밀 이야기였다.
“삼저아, 진작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런데 해 이낭자랑 너무 사이가 좋아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괜히 내가 이간질하는 것 같잖아. 계속 망설였는데, 어제 계가와 명가 낭자가 정혼 했다는 말을 듣고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래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내 잘못이지. 삼저아, 분명 계가에서 그 소문을 들은 거야…….”
“그만해. 너……. 나 생각 좀 해야겠어. 미안, 먼저 일어날게.”
초 삼낭자는 얼굴을 가리고 내실로 뛰쳐들어갔다.
계가와 명가의 혼담이 여지없이 확정된 후, 한시름 놓은 묵칠은 이틀 더 고분고분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어슬렁어슬렁 칠 형님을 만나러 갔다.
황상이 며칠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아 영원도 당직할 필요가 없어서 바로 정북후부로 찾아갔는데 허탕 치고 경부 관아로 향했다. 영원이 거기에도 없자 묵칠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 고민하다가 주육을 만나러 갔다. 주육이 있긴 했는데 주육도 영원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묵칠은 두서없이 온 경성을 헤매며 영원을 찾아다녔다.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동화문까지 당도해서 마침 문밖으로 나오는 영원을 저 멀리서 발견한 묵칠은 매우 기뻐하며 서둘러 말을 몰고 다가갔다.
“형님! 형님!”
영원은 묵칠을 흘겨봤다. 아는 척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묵 이야가 찾아와서 소칠은 어리석고 속셈이 없는 아이니 부디 봐주길 바란다, 그렇게 어쩌고저쩌고 에둘러 늘어놓은 것이 모두 묵칠이 우물 턱에서 그를 힐끔힐끔 쳐다봤기 때문이지 않나.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던 울분을 아직 풀지도 못했는걸.
“형님, 칠 형님!”
묵칠은 꽃보다 더 찬란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명가와 계가가 혼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게 다 칠 형님 덕분이다! 형님, 이제 우리 어쩌면 좋을까?”
“우리라니?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서?”
영원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 혼사 말이지! 내가 탕…… 그 뭐냐를……. 형님, 잘 알면서!”
묵칠은 영원의 퉁명스러운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눈치채고도 뻔뻔한 건지, 정말로 꼬박꼬박 대답했다.
“네 아내 구하는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기에? 우리? 아내 맞이하는 일에 우리?”
영원이 묵칠을 흘겨봤다.
“칠 형님, 누구 때문에 화가 난 거요? 소육의 말대로, 이 경성에서 누가 감히 형님 속을 긁는다고? 말해 보시오! 내가 소육을 불러서 방향 구별도 못 하게 흠씬 두들겨 패 주겠어!”
“너와 소육만 아니면 이 경성에서 내 속을 긁을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구나.”
영원이 대답하자 묵칠이 실실 웃었다.
“내가 어찌 감히요. 형님, 화내지 마라. 내가 한턱내겠어! 형님이 가자는 곳으로 가지. 칠 형님, 이제 시작이다. 얼른 어쩌면 좋은지 가르쳐 줘야지. 이제 어쩌지?”
“이제 어째? 네 생각엔 어째야 할 것 같으냐? 계 공자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니 집에 가서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랬더니 성사됐지. 너도 집에 가서 어느 댁 어느 낭자와 혼인하겠다고 한마디…….”
영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묵칠이 꽥 고함쳤다.
“될 리가 있나! 칠 형님, 제발 좋은 방도 좀 생각해 달란 말이다.”
영원은 고삐를 잡고 말을 세웠다.
“좋은 방도를 내지 않는 게 아니라, 방도가 없다. 계 공자는 그럴 만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 봐라, 당당한 한림이 되어 오늘은 여기서 강학하고 내일은 저기서 강학한다. 나날이 정진하고 있어. 언젠간 중서 문하에 들어가서 승상이 되겠지. 그럴 만한 바탕이 있으니 집에서 큰소리도 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한마디면 끝이고. 그런데 너는 뭐가 있어서?”
계소영이 무슨 일로 영원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영원의 말속에 은근히 시기가 느껴졌다.
영원의 훈계에 묵칠은 풀이 죽었다.
“형님, 형님 말이 다 맞소. 하지만 나는…….”
“나는, 나는 할 것 없다. 내 보기에 그냥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나이 먹도록 매일 먹고 놀고, 놀고먹고. 너와 혼인하는 낭자까지 생고생하겠다. 멀쩡한 낭자까지 해치지 말고, 치워라.”
“형님, 무슨 말을 그렇게……. 생고생이라니…….”
갈수록 심해지는 영원의 말에 묵칠은 너무나 서러웠다.
“생고생이 아니란 말이냐? 그럼 말해 보아라. 놀고먹는 거 말고 네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낭자를 지킬 수 있느냐? 네 집안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너와 혼인한 낭자가 네 집에서 뭐가 되겠어? 이래도 생고생이 아니냐? 그냥 치워라. 바빠서 너와 옥신각신할 시간 없다.”
영원이 채찍을 철썩 내리치며 말을 몰고 사라지자 묵칠은 넋을 잃고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영원의 말에 오장육부가 타올라서 영원이 사라진 것도 깨닫지 못했다.
묵칠이 말 위에 넋을 놓고 앉아서 한참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자 소우가 다가가서 살며시 잡아당겼다.
“칠소야, 칠야는 이미 가셨습니다.”
“아! 돌아가자.”
묵칠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타고 흔들흔들 돌아갔다. 어찌나 흔들거리는지, 말에서 떨어질까 봐 소우와 소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저택 앞에서 미끄러지듯 말에서 내린 묵칠은 다리를 질질 끌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중문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또 지척지척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꽃이 핀 석류나무를 돌아봤다.
아버지가 지난번에 뭐라고 하셨더라? 아무리 못해도, 아무리 못해도 4품 관리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고 하셨지. 더 노력하고 운이 좋으면 어쩌면 종3품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고. 정3품도 바라보지 못할 자리만은 아니라고 하셨던가…….
묵칠은 제 부친 거처로 달려갔다.
마침 저택에 있던 묵 이야는 묵칠이 대뜸 달려 들어오자 붓을 멈칫하고는 그를 노려보며 코웃음 치고는 상대하지 않고 계속 글을 썼다.
“아버지!”
묵칠은 제 부친 서안 앞으로 후다닥 달려가서 양손으로 서안을 짚다가 미처 멈추지 못하고 손이 미끄러졌고, 쓰던 상주서가 밀리자 붓까지 함께 밀려서 묵 이야의 가슴까지 밀려왔다.
“진중할 순 없느냐? 네가 아직 세 살짜리 어린애인 줄 알아? 이 고얀 놈, 나가라!”
묵 이야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아버지, 긴히 여쭐 말이 있습니다.”
묵칠은 제 부친이 화를 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게 긴한 일이 뭐가 있어! 웃기는 소리!”
묵 이야는 망친 선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고 새 선지를 꺼내 펼쳤다.
“아버지, 지난번에 제가 어떻게 하면 3품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해 보세요.”
묵칠은 부친이 펼치는 종이를 빼앗으며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묵 이야는 얼떨떨해졌다.
“뭐라고?”
“아버지도 참.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먼저 어떻게 하고 나중에 어떻게 하라고요? 다시 한번 말씀해 보세요.”
묵칠이 다시 말하자 묵 이야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묵칠을 바라봤다. 이건 또 무슨 염병인가.
“아버지도 잊으셨습니까?”
묵칠은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부친의 모습에 다급해졌다.
“그런 건 왜 물어?”
정신을 차린 묵 이야는 즉시 물었다.
“아버지도 참. 왜는 왜겠습니까. 당연히 진지하게 일해서 7품…… 아, 지금 이미 6품이지. 5품으로 승진하고 4품, 3품으로 올라갈 겁니다. 집에서 말발 서는 사람이 될 겁니다!”
묵칠은 말발 서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보이고자 탁자를 쾅 내리쳤다.
묵 이야는 무슨 일이 생겼음을 깨닫고 위아래로 묵칠을 살폈다.
“무슨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