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일제히 손 쓰다
이신이 얼떨떨해하는데 해 상서가 이어서 말했다.
“바로 내 손녀라네. 셋째. 내 친손녀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우리 저택에서 자랐고 내 친손녀와 다름없이 대했네. 삼저아는 학식 깊고 예절 바른 아이네. 성격은 유순하고. 이 나이 될 때까지 누구와 얼굴 붉히는 걸 한 번 못 봤네. 생김도 나쁘지 않아. 대랑, 어떤가?”
이신은 얼른 장읍하며 감사했다.
“후애에 감사합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만, 제 혼사는 모친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상서께서 말씀하신 이 일, 돌아가서 모친께 고하고 모친의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혹시 모친이 원하지 않더라도 널리 양해 바랍니다. 모친이 좋다고 하시면 이른 시일 내에 귀댁에 혼담을 넣으러 가겠습니다.”
손 한림이 칭찬했다.
“이 한림, 시원시원하군! 자네 모친은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걸세. 보아하니 술 마실 일만 남았군. 참으로 사리가 밝아!”
해 상서는 이신이 이렇게 대답하리라 예상했다. 이신이 이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였으면 오히려 마다했을 것이다. 모친을 안중에 두지 않는 사람이 누군들 안중에 두랴.
해 상서는 유쾌한 기분으로 좀 더 거닐다가 돌아갔다. 손 한림은 해 상서를 배웅하고 돌아와서 이신을 향해 공수하며 축하했다.
“해 상서부와 혼인을 맺다니, 이 한림, 정말 복 받은걸세. 해 상서는 평생 많은 사람을 도우면서 공덕을 쌓은 분이네. 정말 귀한 일이야. 실로 귀한 일이야.”
이신은 연신 장읍하며 손 한림의 호의에 감사하고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다시 붓을 들었는데 눈처럼 하얀 선지를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한 글자도 써 내려갈 수 없었다.
대문 앞에서 말에서 내린 이신은 몇 걸음 만에 계단을 올라 영벽을 돌아서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서서 심호흡 몇 번 한 후에야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이란 하나를 얻으면 둘을 바라고 둘을 얻으면 셋을 바라기 마련이라고,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고 정 어멈이 말했었다. 지금 그가 그랬다. 경성에 온 이래 지금까지, 그로서는 그야말로 하늘에 오른 것과 다름없었다. 하늘에 올라 보니 더 높은 곳이 보이고 망상이 생겼다.
그래, 망상이었다. 처음에 그녀를 봤을 때부터 깨달았다.
이신은 고개를 숙인 채 무늬가 수 놓인 쪽빛 신발코를 바라보며 걸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렇게 장 태태의 거처까지 들어갔을 때 마음이 어느새 평안해졌다.
마침 상방에서 장 태태와 한담을 나누던 이동은 이신이 돌아온 걸 보고 서둘러 일어나 예를 갖췄다. 장 태태는 탕과 간식을 내오라고 하고 이신이 탕과 간식을 조금 먹는 걸 지켜본 후에야 그를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안색이 조금 어둡구나.”
“일이 있긴 합니다.”
이신은 허리를 살짝 숙이고 해 상서가 혼담을 거론한 일을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장 태태는 이동을 바라봤다. 해 삼낭자를 두어 번 만났었다. 유순하고 말수 적은 낭자인데, 어떤 사람인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이동은 빤히 이신을 바라봤다. 전생 그때엔 오라버니와 그리 왕래하지 않았다. 해 삼낭자도 과묵한 사람이라서 이동과 친밀하지 않았을뿐더러 거의 왕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오라버니와 해 삼낭자는 아들, 딸 모두 낳고 서로 존경하며 지냈고 안 좋은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삼낭자에게 적당하지 않은 점이라도 있느냐?”
이동이 이신을 빤히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장 태태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오라버니, 해 삼낭자를 만난 적 있나요?”
이신이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와 누이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내가 만난들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동저아, 네 생각은?”
장 태태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며느리는 일단 영특하고 분별 있어야 했다. 그다음이 인품이었다. 삼낭자는 유순하다는 것 말고 다른 점은 어떤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오라버니의 아내를 맞는 일이에요. 어머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평생 같이 살 사람은 우리가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건 오라버니 마음에 들어야 해요.”
이동이 바라보며 하는 말에 이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펼쳤다.
“난 다 괜찮다. 인품, 성격은 어차피 내가 알아보지도 못해서 어머니와 누이가 알아서 해줘야 하고.”
이동은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래서 장 태태를 돌아봤다.
“삼낭자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서 저도 특별히 신경 쓴 적이 없어요.”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으니 말이다. 해 상서가 친히 거론한 혼담인 데다가 상대가 여인 쪽이니 좋든 아니든 얼른 답을 줘야 한다. 삼낭자가…….”
장 태태는 매우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일단 돌아가서 쉬어라. 이따 사람을 보내 삼낭자에 대해 좀 알아보마. 내일…… 내일은 안 되겠구나, 모레로 하자. 모레 해 상서부에 답하도록 하자꾸나.”
“예.”
이신은 물러가서 밥도 먹지 않고 홀로 달빛 아래서 술을 반 근 넘게 마시고 술에 취해 잠들었다.
집으로 돌아간 손 한림은 부인 명씨에게 해 상서가 이신에게 혼담을 넣은 이야기를 했다. 명 부인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해 상서요? 삼낭자 말입니까? 그것참…….”
“왜 그러시오?”
손 한림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에요. 얼마 전 대상국사 대자비 법회에서 내가 고 부인 뒤에 있었는데 조 시랑부 마 부인이 자기네 구저아 짝으로 이신을 점찍었다고, 말 좀 넣어달라고 초 승상부 고 부인에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고 부인 쪽에서 말을 넣었는지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이 그새 말을 넣었군요.”
“그런 일이 있었소?”
손 한림은 놀라다가 이내 웃음 지었다.
“하긴, 이 한림이 용모도 훌륭하고 성격도 좋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십이저아를 맺어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오. 올해 급제자 사위를 노리는 일은 매우 떠들썩하게 벌어지겠구려.”
“마 부인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할까요?”
명 부인은 그 생각을 하느라 손 한림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 하긴. 휴. 이럴 줄 알았으면 해 상서가 혼담을 넣을 때 멀찍이 달아나 있을 것을. 지금 상황이 참…… 음, 소식을 전하는 게 좋겠소. 잘 둘러서, 대놓고 말하진 말고.”
“걱정하지 말아요.”
명 부인은 심복 어멈을 불러서 해 상서가 해 삼낭자의 혼담을 이신에게 넣은 일을 말하고 이어서 분부했다.
“우리 집에 자주 오는 머리 만지는 어멈이 조 구낭자 머리도 자주 만지는 것으로 알고 있네. 그 어멈을 통해서 말을 전하게 해. 내일 아침 일찍 조 시랑부에 다녀오라고 하게.”
심복 어멈은 허둥지둥 준비하러 갔다.
해 상서가 한림원에서 예부로 돌아왔을 때, 고서강이 그의 방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다가 일어서며 그를 반겼다.
“해 상서,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 보니 참 부럽습니다.”
“고 사사는 천자의 중신이고 아직 이런 느긋함을 부러워할 나이가 아니지.”
해 상서는 웃으며 대답하고는 고서강의 어깨를 두드리며 앉으라고 눈짓했다.
“바쁜 사람이 오늘은 어인 일로 날 찾아왔는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오지 않았겠습니까.”
“무슨 큰일이기에?”
고서강이 일어서서 깊이 장읍하자 해 상서가 예를 갖출 것 없다고 손사래 쳤다.
“중신 한 번 서주십사 부탁드리고자 왔습니다.”
고서강은 자리에 앉아서 웃으며 허리를 숙였고 해 상서는 크게 웃었다.
“어느 댁 낭자인가? 어서 말해 보게. 소오의 짝인가? 소오는 참 괜찮은 아이지. 성격도 좋고 재능도 뛰어나고. 내 보기에 소오가 자네보다 낫네. 몇 년 안에 자네를 뛰어넘을 걸세.”
“예. 소오의 짝입니다. 해 상서, 웃지 마십시오. 이 전려의 누이, 이 대낭자가 마음에 듭니다.”
고서강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해 상서는 얼떨떨해졌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대낭자? 그…… 소오가 마음에 든 건가, 아니면 자네가…….”
“접니다.”
고서강이 해 상서의 말을 자르고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 상서는 사리 밝은 분이시지요. 이 혼사, 우리가 모자란 혼사입니다.”
해 상서는 수염을 쓰다듬다가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에 태자에게 간언한 일을 나는 또……. 휴, 그렇다면 중신은 가당치 않고 내가 말은 떠보겠네. 이 대낭자가 재가하는 거라고 해도 뒤에 장공주가 있지 않은가. 장공주의 성격이 어떤지 자네도 조금은 알 걸세. 이 대낭자의 일에 끼어들지 아닐지 어찌 알겠나. 행여 장공주가 상관할 뜻이 있다면, 장공주의 심사는 추측하기 어려워서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네. 이 일은 일단 분위기부터 좀 보세.”
“그럼요. 강하게 밀어붙일 일이 아니지요. 그저 분위기를 떠보려는 것입니다.”
고서강은 일어서서 다시 깊이 장읍했고 해 상서는 웃으며 손사래 쳤다.
“이럴 것 없네. 휴. 자네도 힘들겠군.”
힘들겠다는 말에 고서강은 눈시울을 살짝 붉히며 억지로 웃음 지어 보이고는 인사하고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해 상서가 이신에게 곧바로 혼담을 거론한 일을 알게 된 마 부인과 조 구낭자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마 부인은 발을 구르며 욕을 해댔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해 상서는 예부 상서였고 그녀의 지아비 조 시랑은 해 상서 아래였다. 해 상서는 사직을 청하기 직전이고 조 시랑은 그가 내려놓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조 시랑은 평소에 손 노부인, 해가 어린 낭자들과 잘 지내라고 잔소리 내지는 당부를 늘어놓곤 했다.
그러니 분해도 참아야 했다. 못 참겠어도 참아야 했다. 다행히 해 상서가 곧 사직할 것이고 지아비가 단번에 승진하면……. 흥!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조 구낭자는 어머니처럼 십 년을 기다릴 아량이 없었다. 거처로 돌아온 뒤로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생각할수록 서러웠다. 해 이낭자를 줄곧 자매로 여겼고 해 이낭자도 자기를 자매로 여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짓을. 알게 될까 봐 두렵지도 않았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을까 걱정하지도 않았나?
얼굴 보고 물어봐야겠어! 내 얼굴 볼 면목이 있는지 두고 봐야겠어!
조 구낭자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한 마음으로 마차를 준비시켰다. 해 상서부로 가서 해 이낭자 앞에서 따져봐야겠어!
해 이낭자는 상방 입구에 서서 화가 나서 터질 것 같은 조 구낭자의 모습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이 평소처럼 웃으며 맞이했다.
“마침 잘 왔어. 아침에 작약이 너무 예쁘게 피었길래 그림 한 폭 그렸는데 어떤지 봐줘.”
속이 깊다고 자부하는 조 구낭자는 뱃속 가득한 분노와 억울함을 억누르고 그림을 쳐다봤다. 사실은 그저 그런 그림을 힐끔 보고 다시 한번 힐끔 보고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네 할아버님이 이가에 혼담을 넣었다며?”
“이가에 혼담을 넣어? 어느 이가?”
해 이낭자의 얼굴에 매우 과장된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정말 잘도 시치미 떼는구나!”
조 구낭자는 코웃음 치고 싶은데 웃음이 나오지 않고 목소리부터 떨렸다.
“네 할아버님이 이 전려를 직접 찾아가서 혼담을 넣으셨어. 삼낭자와 혼인하라고. 모른 척할 거니?”
“이런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첫째, 할아버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알아. 둘째, 혼담 같은 일을 우리가 알아서 될 일이야? 오늘 대체 왜 이래. 옳지 않은 소리만 하잖아.”
해 이낭자가 얼굴을 굳히며 예법을 들고나서며 조 구낭자를 나무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