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07화 (407/463)

407화: 몸소 나서다

묵가에서 난 난리를 시종일관 구경한 주육이 있으니 오전에 벌어진 그 일은 오후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사람 몰라야 할 사람 모두 알게 되었다. 묵 승상은 꽤 담담했다. 이번엔 일이 좀 컸을 뿐이지, 소칠이 웃음거리가 된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그는 명가와의 혼사 일을 전 노부인보다 내려놓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간은 저마다 복이 있는 법, 자손에게 아무리 신경 쓰고 공들여 봐도 보통은 역효과만 나기도 하고.

승상들은 업무가 바빠서 보통 점심은 집에서 보내온다. 여염이 한림원에 들어온 후로 여 승상 식사는 매일 여염이 들고 왔다. 식사를 마친 여 승상은 작은 차병을 들고 맞은편 묵 승상 방으로 찾아갔다.

묵 승상이 들어오라고 하자 여 승상이 묵 승상의 종복을 모두 물렀다.

“시중들 것 없다. 너희 승상 차는 내가 내리마.”

묵 승상은 종복을 내보내고 여 승상과 함께 움직여서 차를 내렸다. 묵 승상은 잔을 들고 붉은빛이 감도는 색이 예쁜 차탕을 내려다보며 향을 맡고는 편안한 듯 숨을 내쉬었다.

“이 백차, 삼십 년은 되어 보이는 게 귀한 것이로군.”

“삼십 년 넘은 걸세. 내가 경성에 춘시 보러 왔을 때 집에서 보낸 차니까. 지금까지 두었다가 두어 해 전에 개봉했지.”

여 승상은 착잡한 눈빛으로 잔에 든 차탕을 바라봤다. 묵 승상은 놀라서 그러냐고 한마디 하고는 다급하게 살짝 머금었다.

“좋은 차로군! 어쩐지 눈곱만큼 가지고 왔더라니.”

묵 승상은 조금 남은 차병을 가지고 와서 슬쩍 등 뒤에 있는 차통에 넣었다.

“집에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남의 차를 빼앗을 겨를이 있는가.”

“큰일은 무슨. 소칠 그놈이 난리를 부리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묵 승상이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자, 여 승상은 더 홀가분해졌다.

“백 노부인이 명가 낭자를 점찍었다네. 염가아 어미에게 중신 서달라고 찾아왔다는군. 정말이지……. 휴. 자네 의중에 달린 일이라서.”

“우리 낭자도 아닌걸. 명가의 의중에 달렸지.”

묵 승상은 백 노부인이 명 삼낭자를 손자며느리 삼으려는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계소영 그 아이, 전에 봤을 땐 너무 고집스럽고 집착이 강했는데 근래 찬찬히 지켜보니 심성이 갈수록 좋아지더군. 계 노승상의 젊을 때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어. 계가의 복일세. 계 노승상이 지은 공덕의 소치야.”

“그렇지. 그 아이 심성이 작년 섣달부터 달라졌더군.”

여 승상이 따듯하게 미소 지었다. 계소영은 작년 섣달 주 귀비가 죽기 전부터 확연히 달라졌다. 응어리가 풀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응어리를 이겨냈기 때문이리라. 전자는 운이고 후자는 성장이다.

묵 승상은 차탕을 홀짝이면서 맛을 만끽했다.

“음, 승상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또 하나 생겼지. 자네 염가아도 만만치 않아. 자네하고 비교해 보면 청출어람의 느낌이 드는군.”

“염가아는 나처럼 성격이 둥글둥글한 건 충분한데 박력이 부족하지. 생각해 보면 이번 과에 영재가 정말 많이 나왔지. 이신 그 녀석도 나는 꽤 잘 보고 있네. 자네나 나나, 나이 들었는데 뒤이을 사람이 있어야 말년을 편히 누리지.”

묵 승상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현명한 신하도 영명한 주군이 필요하지. 적어도 너무 고약한 주군은 아니어야 하고.

묵 승상의 생각을 읽은 듯이 여 승상이 느릿느릿 말했다.

“장공주가 계시지 않은가.”

“장공주가 계시지만 진왕이라서……. 그 이야기는 하지 마세. 이 차, 참 좋군. 이렇게 마시기엔 아까워. 십 년 백차와 섞어서 마시는 게 제일 좋겠군.”

“집에 삼십 근 있네. 나중에 차병 하나 통째로 보내겠네.”

여 승상이 껄껄 웃으면서 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원 부인은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명가로 달려가 중신을 섰다. 병풍을 붙들고 지켜보던 명 삼낭자는 어머니가 인사치레가 끝나기도 전에 흔쾌히 대답하는 걸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렇게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원 부인은 계소영의 사주를 던져 주고 명 삼낭자의 사주를 들고 곧장 계가로 달려갔다.

명 삼낭자는 그 후로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대상국사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대길이라는 점괘를 내놓고, 계가에서 본 점괘도 대길이라는 소식을 원 부인이 들고 와서 첫 관문을 무사히 넘은 후에야 두근두근하던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이 좋은 기분을 묵 육낭자와 나누려고 마차를 준비시키려다가 말을 꺼내기 전에 다시 삼켰다. 전 노부인이 몸져누웠는데 지금 찾아가기엔…….

그러나 터질 것 같은 이 기쁨을 혼자 억누르고 있자니 너무 괴로웠다. 후원을 거닐며 마음을 달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육낭자가 왔다고 시녀가 기별했다.

명 삼낭자는 후다닥 달려가 맞이했다.

“어쩐 일이야? 어르신은 괜찮으시지? 칠 오라버니도.”

“다 아무 일 없어. 숙부님이 태의를 모셔서 진맥했어. 어르신한테 울화증을 다스리는 처방을 내려주고 드시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어. 칠 오라버니에겐 안신탕을 처방했고. 하마터면 우물에 떨어질 뻔해서 놀랐잖아.”

묵 육낭자는 오라버니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르신 심장이 안 좋다면서?”

그녀와 모친이 묵 승상부에서 나올 때 전 노부인이 심장이 아프다고 외치고 있었다.

“칠 오라버니 때문에 자주 아프셔. 걱정하지 마, 괜찮아. 계가에서 혼담 넣었어?”

묵 육낭자가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묻는 말에 명 삼낭자의 볼이 붉어졌다.

“응. 납길(혼례에서 신랑 신부의 궁합을 보는 일)도 끝났어.”

“그렇게 빨리?”

묵 육낭자가 놀라서 고함쳤다.

“정말 잘 됐다. 언니, 축하해. 정말 축하해. 정말 잘 됐다!”

“난 느린 것 같은걸.”

명 삼낭자는 꿍얼거리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창피한 줄도 모른다고 웃지 마. 나도 참…….”

“아미타불. 납길이 끝났으면 다 정해진 거지. 이제 안심해도 돼. 정말 보살님이 보우하셨어.”

묵 육낭자는 합장하고 빙글빙글 돌면서 사방의 보살에게 감사했다.

“널 만나러 가려고 생각하다가……. 한동안은 너희 저택에 못 갈 것 같아.”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아서 명 삼낭자가 나지막이 하는 말에 묵 육낭자가 까르르 웃었다.

“별생각을 다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언니한테 미안하지. 오라버니가 그 난리를 부렸으니 언니랑 언니 어머니 체면이 뭐가 돼. 숙부님이 다 자식 잘못 가르친 탓이라고, 미안하다고 전해 달랐어. 그리고 칠 오라버니는 언니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머님은 연세도 많으시니까 이해해달라고 하셨어.”

묵 육낭자가 일어나서 명 삼낭자를 향해 예를 갖추자 명 삼낭자도 서둘러 일어나 답례했다.

“이를 어째. 이런 인사를 어찌 받아.”

“됐다! 숙부님 말 다 전했다!”

묵 육낭자는 홀가분한 얼굴로 웃으며 손뼉을 짝짝 쳤다.

“이를 어째. 이 일……. 어떻게 된 건지 너는 잘 알잖아.”

명 삼낭자가 나무랐다.

두 사람은 다시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가, 명 삼낭자가 생각이 많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육저아, 난 이제야 깨달았어.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뭐든 일단 쟁취해야 해. 최선을 다해서 쟁취해야 해. 그래야 어쩌면 조금이라도 얻는 게 있을지도 몰라. 참, 너는?”

명 삼낭자가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묵 육낭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얼굴을 붉혔다.

“칠 오라버니 혼사부터 정하고 내 혼사를 시작할 거라고 하셨었어. 급하게 해서 될 일도 아니야.”

“급하게 해서 될 일이 아니긴. 이가가 정혼하면 어떡해. 이 전려도 나이가 찼어. 아니면 어떻게든 상황을 떠볼까?”

명 삼낭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묵 육낭자는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을 천천히 돌리다가 한참 만에 나지막이 대답했다.

“역시, 기다려 보는 게 좋겠어. 상대가 무슨 생각인지 어떻게 알아. 칠 오라버니처럼 마음이 없는 거라면, 난…….”

“그건 그래.”

명 삼낭자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요즘 연회나 문회가 많이 열려.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우연히 만나볼까? 만나보면 바로 알게 될 거야.”

“응.”

묵 육낭자는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님이 점찍은 집안이 있는지 모르겠다. 점찍은 집안이 있더라도 이가는 분명 없을 것이다. 칠 오라버니는 부탁할 칠 형님이라도 있지만, 자신은 누구를 찾아가야 하나. 자기 집 칠 오라버니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데.

저녁, 해 상서는 어슬렁어슬렁 한림원으로 들어가서 우선 손 한림 방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손 한림과 나와서 고목이 하늘을 찌르는 한림원 정원 안을 한 바퀴 거닐고는 이신을 찾아갔다.

그날 조 시랑부의 마 부인이 일부러 해가에 찾아와 이가 혼담을 떠봐달라고 말했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병풍 뒤에 숨어서 듣던 해 이낭자는 도중에 속셈이 생겼다.

마 부인이 돌아간 뒤, 해 이낭자는 병풍 뒤에서 나가서 조모 손 노부인 옆에 앉아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마 부인 말을 듣고 보니 좋은 생각이 났어요. 할머니, 삼저아의 혼사로 걱정하셨잖아요. 좋은 혼처가 눈앞에 나타났네요.”

“이 전려 말이냐?”

손 노부인은 금세 손녀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해 이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는 성품이 나약하고 성격이 너무 좋아요. 동서가 많거나 시어머니가 무서운 집, 시누이가 까다로운 집에 들어가면, 그중 하나만 있어도 셋째는 못 견딜 거예요. 하지만 이가 보세요. 지체는 낮고 이 전려는 뛰어난 양자예요. 장 태태는 사리 밝은 사람이라 양자의 아내를 난감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하나 있는 시누이도 영리하죠. 게다가 어리잖아요. 분명 재가할 거예요. 이런 집안처럼 적당한 곳이 없어요.”

손 노부인이 생각해도 그럴싸했다.

“정말 그렇구나. 그럼 조가는 어쩌지?”

“할머님도 참, 너무 올곧으세요. 그쪽에서 먼저 생각했다고 다른 집은 생각하면 안 된대요? 할머님이 나서면 그러니까, 할아버님을 내세우세요. 나중에 할아버님이 혼담을 넣은 걸 할머님은 몰랐다고 마 부인에게 이야기하면 돼요.”

손 노부인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삼저아를 위한 일이지. 네 혼사는 걱정할 것 없다만, 삼저아의 혼사는……. 너무 좋은 집은 넘볼 수가 없고 조금만 낮춰도 우리가 친척을 박대한다고 할 것이다. 네 말이 맞다. 이가 같은 혼처는 불을 켜고 찾아도 없지. 이가에 혼담을 넣어 보라고 네 할아버지에게 말하마. 이가의 생각을 알아보자.”

“당연히 이야기 꺼내자마자 성사될 거예요. 참, 할아버님께는 마 부인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할아버님은 고지식한 분이라서 괜히 이야기했다가……. 그럴 필요 없어요. 게다가 큰일도 아니고요.”

해 이낭자의 귀띔에 손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손 노부인이 해 삼낭자의 상대로 이신을 꺼내자 해 상서는 매우 흡족해하며 승낙했다. 이신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아서 삼저아가 그와 혼인한다고 생각하니 그보다 더 흡족할 수 없을 정도로 흡족했다. 다음 날 곧장 한림원을 찾아 해 삼낭자 혼담을 넣자고 했다.

이가엔 어른이 장 태태 하나뿐이라서 혼담을 넣으려면 이신 본인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해 상서는 손 한림, 이신과 함께 한참 걸으며 이신의 신세를 자세히 묻고는 껄껄 웃으며 말을 꺼냈다.

“대랑의 혼사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니 내가 중신 하나 서지. 어떻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