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04화 (404/463)

404화: 손 써야 할 일은 서둘러서

고서강은 중문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물었다.

“소오는? 서재로 오라고 해라.”

고자의는 잰걸음으로 부친의 서재로 달려갔다. 고서강이 매우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걸 보고 내심 안도하고 다가가 예를 갖추었고, 고서강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앉아라. 네 의중을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고자의는 단정하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아버지를 바라봤다.

“조금 전에, 네 상대로 적당한 혼처를 만났다.”

고서강의 흡족해 보이는 모습에 고자의는 자세를 더 바로잡고는 기대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비를 바라봤다.

“이신의 누이, 내 마음엔 들더구나. 만난 적 있느냐?”

고서강이 바라보며 묻는 말에 고자의는 얼떨떨해졌다.

“이 전려요? 어느 누이 말씀이십니까. 누이는 하나뿐인데……. 아버지, 강가에서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혼인했던 여인이요!”

“나도 안다. 목소리를 이리 높이다니, 아비와 싸울 생각이냐?”

고서강이 얼굴을 흐리며 훈계하자 고자의는 고개를 숙였다. 입을 떼려고 하는데 고서강이 손을 내밀어 그를 저지했다.

“나도 안다. 별일도 아니고. 친정으로 돌아온 신세라서 우리가 혼담을 넣으면 우리의 성의를 더욱 느낄 것이다.”

고자의는 아버지의 말에 이미 결정을 내린 것을 깨닫고 더 조바심이 났다.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벌리는데 고서강이 다시 저지했다.

“내 말부터 들어라. 우리 집안 상황을 지난번에 이야기했으니 똑똑히 알 것이다. 오가아, 이 혼처가 너에게는 좀 억울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큰일을 성사하려면 사소한 것은 버려야 해. 이가 세 식구, 이신은 전도 무량하고, 이가 대낭자는 장공주와 막역한 사이다. 전 노부인, 원 부인은 이신의 모친을 매우 친밀하게 대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가 낭자와 장공주의 친분만으로도 사돈 맺을 가치가 있다.”

“아버지!.”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이상 만회할 여지가 없음을 안 고자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재가하는 사람과 혼인하라니,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비트는 기분이었다.

“네 꼴 좀 보아라!”

고서강은 언짢아졌다. 평소에는 괜찮은 아이가, 큰일 앞에서는 왜 이리 정신없이 구는 것인지!

“들어라! 이가 낭자는 재능과 용모 모두 갖춘 낭자다. 성격, 성품 모두 훌륭하다더구나. 오라비는 앞날이 탄탄하고. 네 상대로 부족할 것이 무엇이야. 혼인 한 번 한 것이 무엇이길래? 아무것도 아니다! 강가가 잘못한 일이다!”

고서강의 낯빛과 목소리가 매서워졌다. 이가와 사돈을 맺으려는 것이지 원수가 되려는 게 아니다. 아들의 불평, 불만을 설득할 수 없으면 제압해서라도 굴복시켜야 했다.

“잘 들어라. 이 혼사는 가볍게 이야기하면 우리 고가의 미래가 걸렸고, 심각하게 이야기하면 온 고가 일족의 머리가 걸린 일이다. 네가 제멋대로 굴 일이 아니다!”

대상국사에서 돌아간 고 부인은 초 승상이 저택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마 부인이 부탁한 일을 말했다.

“장공주와 여 승상 모두 그 이 전려를 매우 중시한다고 당신이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라서요. 구저아가 자라는 걸 우리도 봐 왔지 않습니까. 나쁜 아이는 아니지만…….”

고 부인이 얼버무리며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서 승낙할 수가 없어서 일단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대답했어요.”

초 승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 시랑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지나치게 풍류하고 나태해서 집안일을 전혀 상관하지 않지. 부인이 참……. 휴. 조 시랑이 신경 쓰지 않으니 아이들이 모두 마씨 부인 밑에서 자라서, 정말이지…….”

초 승상은 쉴 새 없이 고개를 저었다.

“큰 며느리는 그래도 좋은 아이예요.”

고 부인이 큰 며느리 편을 들었다.

“휴. 조금 낫긴 하지만. 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신에게 해둘 말이 있소. 명심하시오, 대가아가 곧 만 한 살이 되지? 우리 곁에서 키웁시다. 앞으로 사내가 태어나면 다 그리합시다. 만 한 살이 되면 우리가 키웁시다.”

“그렇게 할 것까지야…….”

고 부인은 아연실색했고 초 승상은 손사래를 쳤다.

“우리 가문은 아직 안정되지 못했소. 백년 가문에서도 신중해야 할 일이오. 긴말할 것 없소. 그렇게 합시다.”

고 부인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가 일은요?”

“거절하시오. 앞으로 조가 자녀의 혼사엔 손대지 말아요. 그리고 이가 오누이의 혼사에도 손대지 말고. 손대지 않을뿐더러 멀리해야 하오. 골치 아픈 일이오.”

고 부인이 놀란 얼굴로 듣자 초 승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계속 말했다.

“당신도 알아두는 게 좋겠군. 그래야 알아서 행동하지. 이가 오누이 뒤엔 장공주가 있소. 장공주는 신랄한 성격에 속을 알 수 없어요. 자칫하면, 이가 오누이는 몰라도 장공주부터 거스를게요. 장공주를 거스르면…….”

초 승상이 쓴웃음 지었다.

“어찌 됐든 장공주를 거슬러선 안 되오. 또 하나는 이신은 장공주가 낙점한 사람이오. 지금 상황을 보니 장공주가 조정에 점점 깊이 관여하고 있고, 손을 뗄 생각이 없어 보이오. 이신은 몇 년 단련한 다음 아마도 장공주의 입이 될 거요. 그런 사람을 거슬러선 안 돼요. 멀리 피합시다.”

고 부인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어요. 안심하세요.”

고 부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나지막이 물었다.

“장공주가 이런 식으로 움직여도…… 문제없겠지요?”

“묵 승상, 여 승상과 논의한 적이 있소. 지금 형국은 장공주가 개입하는 것이 방관하는 것보다 낫소. 앞으로는…… 여 승상 말이, 장공주는 지혜롭고 큰 뜻을 품은 사람이니 앞으로 일은 걱정할 것 없다고 했소. 난 여 승상을 믿소.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초 승상이 괜찮다고 위로하는 말에 고 부인은 순간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당신이 괜찮다니 괜찮겠지요.”

결정을 내린 고 부인은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관사 어멈 둘을 조 시랑부로 보냈다. 강가와 싫든 좋든 사돈 아닌 사돈으로 얽힌 사이고 이가와 강가가 그 난리를 부린 이상 실로 나서기 어렵다고 중매를 거절했다.

확실하다고 생각한 일을 단칼에 거절당한 마 부인은 분노하고 또 매우 초조해졌다. 저택에 자주 드나드는 관매 몇 명에게 이미 물어봤는데, 혼담으로 드나드는 사람 때문에 이가 문턱이 해질 정도라고 했다. 이신의 나이도 있는데 정말 혼사가 정해지기라도 하면……. 서둘러야 한다!

고 부인을 제외하면 자주 왕래하는 사람 중에 신분이 되는 사람은 해 상서 부인 손씨뿐이었다.

계소영은 반루에서 관아로 돌아간 뒤에 정신없이 바빴다. 관아엔 일이 많아서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저녁에 저택으로 돌아가 혼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매우 어수선해졌다.

거처에서 나온 그는 별빛을 따라 어둑한 꽃길을 걸어 화원으로 들어가서 호숫가를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어수선하고 뒤죽박죽인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한 바퀴 돌수록 한 바퀴 어수선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목이 시큰하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에 난각으로 돌아 들어가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얼마나 지쳤는지,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대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금방 눈을 감은 것 같은데 누군가 흔들어서 눈을 떴더니 어느새 거처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있었다. 계소영은 눈이 부셔 시린 눈을 가늘게 뜨고 자기를 깨운 사환 사풍을 바라봤다.

“너희가 옮겨 온 것이냐?”

“예. 호숫가 난각에서 잠드셨는데 불러도 일어나지 않으시길래, 근골이 상할까 봐 들것을 찾아서 입우와 함께 모시고 왔습니다. 아무도 못 봤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계소영은 억지로 일어나서 소세하고 아침을 먹은 후에야 좀 나아진 듯했다.

“할머님이 뭐 하시는지, 가 보고 오너라.”

계소영은 관아에 가지 않고 입우에게 분부했고 입우는 금세 다녀와서 고했다.

“아룁니다. 어르신은 지금 막 아침을 드시고 쉬고 계십니다.”

계소영은 일어서서 백 노부인의 거처로 곧장 향했다.

백 노부인은 휘장을 열고 들어오는 계소영을 보다가 그렇게 심하진 않지만 알아볼 정도로 거뭇한 눈 밑을 빤히 바라봤다.

“어젯밤에 잘 못 잔 것이냐?”

“예.”

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모를 바라봤다.

“할머님,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백 노부인은 조금 놀라서 다급히 주위를 물리고 다시 계소영을 살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구나? 아니면 근심이라도 있는 것이냐?”

“할머님, 명가 삼낭자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계소영은 백 노부인 곁에 다가가서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자마자 지극히 명확하게 말했다. 백 노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가? 네가 어찌…… 그 삼낭자는…….”

백 노부인은 금세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명가 삼저아는 전 노부인이 보배 덩어리 손자를 위해 점찍은 손자 며느릿감이다. 모르느냐?”

“압니다.”

“마음에 든 것이냐? 명가 삼낭자는?”

계소영의 명백하고 시원스러운 대답에 백 노부인은 잠시 고민했다. 두피가 저릿해졌다.

“명가 삼낭자도 제가 마음에 든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시원스러운 계소영의 대답에 백 노부인은 멍하니 있다가 눈을 수십 번 깜빡였다. 드디어 깜빡임을 멈춘 노부인은 손자를 빤히 보며 물었다.

“반드시 그 아이여야만 하느냐? 반드시?”

계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명가 삼낭자는?”

백 노부인이 다시 묻자 계소영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백 노부인은 빤히 그를 바라보다가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가 다시 앞으로 숙이더니, 한참 만에 하, 하고 외쳤다.

“네가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다고 하더니, 이 점은 그야말로 똑 닮았구나.”

계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백 노부인은 한숨을 쉬고 또 쉬다가 손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일은 할미에게 맡기고 관아에 가거라. 비록…… 가거라, 가. 할미가 있다.”

계소영은 일어서서 몇 걸음 내딛다가 돌아서서 백 노부인을 바라봤다.

“할머님, 무슨 일이 있어도 할아버님이 할머님을 대했듯이 삼낭자를 대할 겁니다.”

“이런 녀석, 할미에게 할 말이 아니지. 마음 놓고 어서 가거라. 할미가 있잖으냐.”

백 노부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손자를 향해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계소영이 돌아선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계소영이 관아로 간 후 백 노부인은 차를 마시며 이 큰일을 가늠했다.

명가 삼저아는 전 노부인이 진작 점찍은 손자며느리였다. 명가 삼저아가 경성에 오기 전부터 전 노부인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소칠은 변변찮은 녀석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사리 밝고 영특하고 글공부를 많이 한, 한 집안을 지탱할 수 있는 손자며느리를 얻어야 한다고. 그런 손자며느리가 있으면 다음 대는 아무리 못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명가 삼저아는 전 노부인이 10년 가까이 멀리서 지켜보면서 고르고 고른 규수였다.

영가아가 안목은 참 좋구나…….

일단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백 노부인은 생각의 방향을 다시 틀었다. 그런 사람을 전 노부인에게서 빼앗으려면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 할까? 뺏어오면서도 가능한 한 전 노부인과 묵가와 틀어지지 않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좋은 방법이란 건 없었다. 백 노부인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곧 이 일에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전 노부인을 바로 찾아가서 얼굴을 보고 직접 털어놓고 이치로 깨닫게 하고 정으로 설득하는 것뿐이었다.

됐다. 이러나저러나 손자 며느릿감을 빼앗는 일이지. 원래 뛰어난 규수는 원하는 가문이 많고. 이 일은 명가의 뜻에 달린 셈이지.

하지만 모두 명가에 떠넘길 수는 없지. 장공주를 찾아가야겠구나. 나서려 하지 않겠지만……. 그럼 눈 질끈 감고 여 승상을 찾아가 중신 한 번 서달라고 해야겠다!

결정을 내린 백 노부인은 마차를 준비시켜 묵 승상부로 직행했다.

전 노부인과 백 노부인은 평소에 말이 잘 통하고 사이가 좋았지만, 매해 생일을 제외하곤 서로의 저택을 드나들며 친분을 나누는 일은 없었다.

백 노부인이 찾아왔다는 말에 전 노부인은 곧바로 일이 터졌음을, 게다가 작은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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