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03화 (403/463)

403화: 석창포

“계 공자…….”

명 삼낭자가 한데 모은 두 손을 가리키자 계소영은 다시 아, 하더니 순간 얼굴을 붉히며 얼른 손을 내리고 재빨리 돌아섰다. 반쯤 돌아서다가 오늘 온 목적을 떠올리고 몸을 반쯤 돌린 채로 그대로 굳었다.

계소영이 돌아서는 그 찰나, 붉었던 명 삼낭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바로 돌아서다니, 안 된다는 건가.

계소영은 잠시 굳어있다가 다시 돌아서서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리듯 재빨리 말했다.

“내가 혼담을 넣으러 가도…… 되겠습니까?”

‘되겠습니까?’만 들은 명 삼낭자는 애가 타서 바짝 다가갔다.

“되겠느냐니요, 뭐가요?”

그 한마디 뱉느라 거의 모든 용기와 담력을 쓴 계소영은 명 삼낭자가 무심결에 한 발짝 다가서서 초조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심장이 오그라들어서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긴장해서 감쳐문 바람에 볼록 튀어나온 명 삼낭자의 붉은 입술에 시선이 멈췄다가 금세 당황해서 얼굴이 훅 붉어져 달아나려고 돌아섰다.

“혼담을 넣을 거라는 말인가요?”

계소영이 달아나려는 순간, 명 삼낭자는 순간 무슨 말이었는지 깨닫고 다급하게 물었다.

계소영은 걸음을 멈칫하고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 삼낭자가 봤는지 못 봤는지 아랑곳할 겨를 없이 장삼 자락을 들고는 후다닥 밖으로 달아났다.

명 삼낭자는 무심결에 뒤쫓다가 문턱에 다리가 걸려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양손으로 얼굴을 꼭 감싸고 뒷걸음질 치고 또 뒷걸음질 치다가 한 다리가 의자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언니, 왜 그래?”

탕 오낭자가 안으로 들어오다가, 얼굴을 가리고 흥분해서 눈물을 흘리는 명 삼낭자를 보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아!”

명 삼낭자는 얼른 손을 내려놓고 대답하려다가 볼에 눈물이 흐르는 걸 느끼고 서둘러 손수건을 찾았다. 손수건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을 본 탕 오낭자가 다급히 자기 손수건을 건넸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야……. 조금 전에 의자에 부딪혀서.”

명 삼낭자는 가까스로 핑계를 생각해냈고, 탕 오낭자는 한시름 놓았다.

“어쩐지 울더라니. 아프죠? 전에 나도 그런 적 있었는데 엄지발톱이 반이나 깨졌더라고요. 며칠 동안 누워있었어요. 언니, 앉아서 신발 벗어 봐. 내가 좀 봐줄게. 가만히 두면 피가 묻을 거예요.”

탕 오낭자가 웅크리자 명 삼낭자가 다급하게 피하며 탕 오낭자를 일으켰다.

“괜찮아. 아프긴 한데 발톱이 깨질 정도는 아니야. 내가 알아. 볼 필요 없어. 이제 아프지 않아.”

“언니, 그럼 걸어 봐요. 서 있을 땐 괜찮아도 걸으면 아플 수도 있어.”

탕 오낭자가 다정하게 권하자 명 삼낭자는 정말로 몇 걸음 걸었다.

“괜찮아졌어. 아프지 않아.”

“그럼 됐어! 그럼 가요. 동저아가 언니 불러오랬어요. 후원을 마주 보는 별실이 비었대요. 그쪽으로 가요.”

명 삼낭자는 땅에 떨어진 자기 손수건을 주워서 탕 오낭자와 함께 모퉁이를 돌아 다른 별실로 들어갔다.

영원은 계소영과 헤어진 후 단숨에 동화문 밖으로 달려가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보록궁으로 들어갔다.

궁 안에서 말을 탈 수 없고 달리지도 못한다는 법도가 제일 싫었다.

보록궁에서 나온 영원은 다시 가능한 한 큰 보폭으로 동화문으로 나가서 말에 올라타고 반루로 달려갔다.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천천히 대상국사 쪽으로 향하는 마차 두 대를 발견했다.

이동의 마차를 알아본 영원은 말에 탄 채 툴툴거렸다.

이렇게 빨리 다 먹어? 이게 공양밥이야, 아님 행군 밥이야!

이동 일행이 대상국사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 삼낭자는 햇볕을 너무 오래 쬐어서 어지럽다는 핑계로 묵 육낭자와 함께 먼저 돌아갔다. 더 있다가 자칫하면 추태를 보일까 걱정이었다.

이동은 탕 오낭자와 이야기 나누면서 법회가 끝날 때까지 있다가 대상국사를 나섰다. 탕 오낭자와 인사하고 장 태태와 저택으로 돌아간 이동은 복안 장공주를 위해 얻은 평안 무사 매듭을 전하려고 곧바로 보록궁으로 향했다.

이 평안 무사 매듭은 팔각유리전 한복판에서 하루 종일 불광(佛光)을 받은 것이니, 법력이 매우 높다 할 만했다.

보록궁 궁문 앞에서 마차에서 내려 평안 매듭을 직접 들고 뜨락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경성 부자가 즐겨 입는 통 너른 장포를 입고 미소 가득한 온화한 얼굴로 안에서 나오는 고서강을 마주쳤다.

이동은 서둘러 옆으로 비켜서서 살짝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고서강은 이동을 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온화하고 겸손하게 공수하며 답례했다. 그러고는 이동과 이동 손에 들린 매듭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이동 쪽으로 시선을 돌려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이동이 서쪽 곁채로 들어가자 복안 장공주는 두툼해 보이는 서신을 읽고 있었다. 화항 탁자 위에도 서신이 반 자 높이로 두 더미 쌓여 있었다. 장공주는 기척을 듣고도 고개를 들지 않고 손만 까닥였다. 녹운이 뜻을 알아듣고 다가가 매듭을 받아들고 내시를 불렀다.

“상 태감에게 전하고 거슬리지 않는 곳을 골라서 문밖에 걸어두면 된다고 전하세요.”

평안 매듭을 전한 이동이 복안 장공주 맞은편에 가서 앉자, 녹운이 차를 내왔다. 이동이 그녀와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장공주가 손에 든 서신을 다 읽고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녹운, 일단 치워. 숨 좀 돌려야겠어. 법사는 어땠어? 특별한 일은 있었고?”

장공주가 차를 홀짝이며 묻는 말에 이동이 고개를 저었다.

“다 평안했어요.”

“휴, 평안하면 됐지.”

장공주는 가리키는 바가 있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고, 신경 쓸 일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마.”

“드릴 말씀이 있긴 한데, 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장공주께 좋은 일일지, 신경 쓸 일일지 모르겠네요.”

이동이 웃으며 말하자, 복안 장공주는 턱을 괴고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탁자를 내리쳤다.

“말해! 그래, 말해!”

“계 탐화가 명가 삼낭자에게 혼담을 넣으려고 해요. 명 삼낭자도 원하고요.”

“음? 명가 삼낭자는 전 노부인이 보배 덩어리 손자 짝으로 점찍은 낭자 아니야? 계가, 무슨 생각이래?”

복안 장공주는 조금 놀란 듯했다.

“집안에서는 아마 모를 거예요.”

“경사도 아니고 신경 쓸 일도 아니네. 신경 쓰더라도 전 노부인이 써야지. 어쩌면 백 노부인도 꽤 골치 아파할 거고.”

복안 장공주는 샐샐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두 분이 골머리 앓을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네.”

이동은 피식 웃었다. 묵 승상 아니면 계 천관이 골치를 보탠 모양이었다.

“그래서 넌 이 인연을 맺어줄 생각이지?”

구경거리가 생겨서인지 장공주의 어조가 명확하게 높아졌다. 이동은 그런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이미 했어요.”

“응? 나한테 이야기도 안 하고?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다른 댁 공자, 낭자 문제에 장공주 허락이 왜 필요해요.”

이동이 가차 없이 되받아치자 장공주가 눈을 부릅뜨다가 금세 말을 돌렸다.

“하긴 그래. 내가 월하노인도 아니고. 언제 혼담 넣는대? 와서 알려줘. 사람을 보내서 구경해야겠어. 수행하느라 심심하고 답답해. 심심풀이 삼아야겠어.”

이동은 녹운이 저쪽 서안으로 옮겨간 서신 더미를 돌아봤다.

“밀소(密疏: 관원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상주서를 올리는 것)야. 황상이 보낸 거지. 기운이 없어서 서신 하나를 다 읽기도 전에 눈이 흐릿해서 읽을 수가 없대. 휴.”

장공주는 이동의 시선을 따라 서신 더미를 바라보며 저조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평안 매듭을 가져오라고 한 거야.”

“평안 매듭으로는 마음의 평온을 얻는 거고, 태의원에서…….”

이동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황상이었다. 태의원에서는 이미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을 것이다. 황상이 전생과 다름없다면 몇 년 남지 않았다.

“성의지. 천하 지존인 그 자리에 앉아 있으려면…….”

장공주의 말투에서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느낌이 났다.

장공주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혹은 상석에 앉은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을 보는 눈이야. 적어도 누가 자기 편인지 적인지는 분간해야지. 휴.”

장공주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해요. 사람 마음은 알기 어려운 것이라 좋고 나쁨을 구별하기도 힘들고요. 오늘은 좋았다고 해도 내일은 내일의 형세가 있고, 내일 형세에선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장공주가 한참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하지만 황상은……. 휴, 됐다. 그만하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잖아요.”

이동이 위로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요즘 반년 동안 황상은 예전보단 믿음직하다고 문 이야가 말했다.

“내가 황상 때문에 신경 쓰는 줄 알아? 저것들 때문이야!”

이동이 한마디 위로했다고 장공주는 푸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 전에 본 저 밀소, 벌써 이십일 전에 도착한 거야. 절동(浙東)에서 보낸 상주서야. 날이 가문데 현지의 두 가문이 물 때문에 싸움이 나서 사람이 하나 죽었대. 올해 새용주(賽龍舟)를 열지 말자고 상관에게 건의했는데 시합에 도박을 건 상관이 단번에 반박했대. 그래서 밀소를 올렸고.”

(※새용주賽龍舟: 용선龍船 시합. 중국 민간놀이로, 용머리 모양을 장식한 배를 타고 경주하는 것으로 주로 단오절을 전후하여 거행한다.)

“늦었겠네요.”

이동이 안색이 살짝 변해서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장공주는 어두운 얼굴로 서신 더미를 가리켰다.

“저 안에 이런 비슷한 일이 또 얼마나 있을지 몰라.”

이동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절동 쪽…… 괜찮겠죠?”

절동의 가문 사이의 쟁투는 꽤 치열했고, 그녀도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장궤들이 그런 일을 옛날이야기처럼 하는 걸 듣고 자랐다. 때로는 원한이 깊어져, 눈이 시뻘게져서 죽이느라 가축 하나 남기지 않고 일가를 멸문할 정도라고 했다.

“나도 몰라. 곧 일이 터지겠지.”

장공주도 한숨을 내쉬고는 성가신 듯 손사래 쳤다.

“전에도 주 귀비와 함께 있으려고 하도 공사 관련 상주를 미룬 바람에 몇몇 현성에 물난리가 났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돌아가. 당분간은 시간 될 때마다 오렴. 이야기라도 해야지, 답답해서 죽거나 속 터져 죽을지 몰라.”

“알겠어요. 내일 일찍 올게요. 올해 신차도 가지고 올게요.”

이동이 일어서자 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새로운 거, 좋은 거 있으면 많이 가지고 와. 지난번에 백차, 혹시 있으면 넉넉히 가지고 오고.”

이동이 인사하고 물러간 지 일각 정도 지났을까, 영원이 뜨락 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서쪽 곁채에서 나오던 녹운이 바로 발견하고 목소리 높여 물었다.

“영 칠야?”

“그래 나다, 나야!”

영원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쉴 새 없이 굽실거렸다.

“장공주는 바쁘시냐?”

“네가 왜 왔어?”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가 서쪽 곁채 안에서 들려왔다.

“꽃시장을 지나다가 석창포를 봤는데 꽤 예쁘길래 장공주 누님 드리려고 사 왔습니다. 책 읽고 경서 베끼는 틈틈이 감상하시라고요.”

영원은 요술을 부리듯이 손바닥에 뾰족뾰족 자란 작은 석창포 화분을 내놓았다. 창포의 푸르름, 짙은 청록색 이끼, 고풍스러운 한전(漢磚) 화분이 어우러져 아주 보기 좋았다.

녹운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자 영원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예쁘지?”

녹운은 웃으며 뒤로 물러나 길을 열고 휘장을 젖혀주었다.

복안 장공주는 영원이 들고 온 석창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영원을 바라봤다. 장공주가 시선을 떼지도 않고 바라보기만 하자 영원이 거북해서 몸을 비틀었고, 장공주는 그제야 겨우 콧방귀를 뀌며 느릿느릿 물었다.

“일부러 창포 하나 주러 찾아온 것이냐?”

“그야 물론입니다!”

“문 앞에서 무릎 꿇어라!”

영원이 재빨리 대답하자 장공주는 얼굴을 흐리고 명령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밀소를 계속 읽었다. 영원은 입을 달싹이고 또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풀이 숙어서 밖으로 나가 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창포, 가지고 들어와.”

장공주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리자 녹운이 영원의 손에 들린 창포 화분을 장공주 앞으로 가지고 갔다.

“누님, 왜 공연히…….”

장공주가 화분을 받아주자, 영원도 용기가 생겨서 입을 떼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공주가 말을 잘랐다.

“공연히?”

영원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하려던 말도 같이 삼켰다. 됐다, 그냥 꿇기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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