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상견환(相見歡), 만나는 기쁨
이동은 어쩐지 정신이 딴 데 팔린 듯한 명 삼낭자를 살그머니 살폈다. 거의 한 몸인 듯 붙어 있는 묵 육낭자를 어떻게 따돌리고 명 삼낭자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탕 오낭자가 저 앞에 보이는 팔각유리전 쪽으로 고개를 빼고 바라보다가 이동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직이 물었다.
“언니, 언젠가 한 해에 저기에 불광(佛光)이 비친 적 있다면서요.”
“응?”
이동은 조금 망연해졌다. 그런 이야기는 다 잊어서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묵 육낭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들었어? 그때 나도 있었어. 오늘처럼 매우 맑은 날이었어. 불전의 보살들 머리 위에 휘광이 비쳤지. 오색찬란한 빛이 번쩍였어. 그때 이 문으로 들어오는 방향에 서 있어서 똑똑히 봤단다. 저쪽 문에 서 있던 초 삼낭자도 똑똑히 봤어. 사방에서 본 사람이 많아.”
탕 오낭자는 매우 놀라더니 엉덩이를 들썩였다.
“정말요? 우리 유리전 안에 들어가서 들을까요? 어쩌면 올해에도 불광이 비출지 모르잖아요.”
탕 오낭자는 기대하는 얼굴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묵 육낭자가 가장 먼저 일어섰고 명 삼낭자가 막 일어서려 하는데 이동이 살짝 잡아당겼다. 명 삼낭자는 일어서다가 허리를 살짝 숙이고 웃으며 물었다.
“밖에도 좋은데, 동동 언니는요?”
“두 사람은 들어가라고 하고 우린 여기에 앉아서 이야기하자. 여기 참 편안하잖아.”
이동이 웃으며 말했다. 탕 오낭자야 묵 육낭자와 함께 가면 되니 신경 쓰지 않았다. 묵 육낭자는 명 삼낭자를 힐끔 쳐다보다가 탕 오낭자의 손에 이끌려 팔각유리전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명 삼낭자가 살짝 고개를 돌려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머금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여기는 이야기하기 불편하니까 돌리지 않고 말할게. 계 공자가 혼담을 꺼낼 생각인 것 같은데 네 의중을 먼저 물어보고 싶어서.”
명 삼낭자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이동이 그녀를 잡아당기며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웃었다.
“너도 참, 귀신이라도 봤어? 왜 그렇게 놀라?”
“난 어릴 때부터 간이 작아서…….”
명 삼낭자는 가까스로 둘러대면서 이동을 빤히 바라봤다. 이동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내 잘못이다. 괜히 그런 이야기를 해서 놀라게 했네. 내가 점심 살게. 육낭자, 오낭자와 함께 반루에서 공양 먹는 게 어때?”
명 삼낭자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숨을 고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언니, 고마워요.”
두 사람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 시랑 부인 마씨가 초 승상 부인 고씨와 속닥거리고 있었다.
금지옥엽 조 구낭자와 같이 이신을 점찍은 마 부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매파로 사돈인 고 부인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여인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라 이런 일로 일부러 승상부에 찾아가는 건 너무 체면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있는 게 제일 좋다고 여겼다. 오늘 같은 날에 마침 고 부인을 만났을 때 이야기 나누는 김에 이가가 마음에 든다고 혼담을 넣어달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면 체면을 지킬 수 있지 않겠나.
“부인도 알다시피 난 아이가 우선입니다. 가문이니 앞날이니, 아이가 편안하게 지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앞으로 잘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 부인은 빙빙 말을 돌리며 마음에 든 혼담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그렇지요.”
딸 초 삼낭자와 달리 고 부인은 말수가 많지 않지만 성격은 매우 좋았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구저아의 혼처는 다른 건 아무런 상관없고 사람만 봤답니다. 시어머니가 좋은 사람인지, 시누이가 피곤하진 않은지.”
마 부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솔직한 사람이라 할 말은 속 시원하게 해야 합니다. 부인, 비웃지 마세요.”
“친척끼리 당연히 그래야지요.”
고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친척 앞에서나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하지요. 저기 장 태태 좀 보세요. 내가 보기에 이가는 좋은 혼처랍니다. 그렇지 않나요?”
마 부인은 고 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고 부인은 전 노부인, 백 노부인과 이야기 중인 장 태태를 바라보며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좋은 혼처지요. 식구도 적고, 장 태태는 선량한 사람이고 대랑도 매우 뛰어나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우리 생각이 같군요.”
마 부인은 손바닥을 비비며 감탄하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부인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얼른 말을 넣어보아야겠어요. 이가는 상인 가문 출신이라 감히 우릴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지 말고 이왕 말이 나온 거, 다른 사람을 찾느니 체면 불고하고 부인께 부탁 좀 드릴까요?”
고 부인은 주저하다가 승낙하지도 거절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이가와 친분이 없어서, 그런 말을 전하기가…….”
“아이고, 이가처럼 갑자기 나타난 집안과 친분 있는 가문이 우리 경성에서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무도 그런 친분은 없습니다! 장 태태도 영리한 사람이에요. 보세요, 다른 사람은 아예 상대하지 않고 두 분 노부인 곁에만 있잖습니까. 영리한 사람이 좋아요.”
고 부인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마 부인이 늘 안 좋은 쪽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서서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
“말을 전할 만한 사람이 있을는지 먼저 알아봐야겠습니다.”
고 부인은 마 부인의 부탁을 받아들이지도 거절하지도 않고 일단 미뤘다.
“그럴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지요!”
마 부인은 승낙으로 받아들이고 안도하고는 주변의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고 부인과 이 집은 이러쿵 저 집은 저러쿵 하며 한담을 나눴다.
종일 진행되는 법회라서 대상국사에서 공양을 제공하지만 어린 낭자들은 대부분 저택으로 돌아가거나 큰 주루에 가서 밥을 먹고 수다 떨며 잠시 쉬다가 다시 사찰로 돌아갔다.
묵 육낭자와 명 삼낭자도 전 노부인에게 인사만 하고는 탕 오낭자와 함께 이동을 따라 밖으로 나가서 반루로 향했다.
출발하면 된다는 소식을 들은 계소영은 관아에서 나와 이신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관아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영원을 마주쳤는데, 3품 시위복 차림인 걸 보니 궁에서 나온 듯했다. 영원은 계소영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고삐를 잡고 다가와서는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소계, 그 혼사, 어떻게 됐나?”
두 마리 말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매우 친밀한 듯 굴자 계소영은 제 말을 힘껏 잡아당기며 영원을 흘겨봤다.
“지금 물어보러 가는 길이네.”
“응? 물어봐? 누구에게? 설마 명……. 그, 뭐냐, 쓸 만하군! 배포가 있어!”
영원은 즉시 알아듣고는 계소영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사내라면 이래야지!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나? 아니, 됐네. 못 들은 셈 치게. 마음 푹 놓으라고. 내 안목은 매우 정확하네.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없어. 낭자는 벌써 자네에게 마음이 기울었네. 재능, 외모 모두 뛰어나고 확실한 신원에, 얼마나 좋은가!”
영원은 또 어깨를 탁탁 두드렸고, 계소영은 버티지 못해서 한쪽 어깨가 자꾸 아래로 기울었다.
“그만하게! 그 손 좀……. 이 촌사람 같으니!”
계소영이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그래, 이 형님이 좀 힘이 셌네. 됐네. 어서 가 보게. 가인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영원은 빙글 돌아서 말을 몰고 달리려다가 별안간 다시 말머리를 돌려 가까이 다가갔다.
“깜빡할 뻔했군. 가장 중요한 말이 있네. 잘 듣게. 자네 마음속의 그 생각 말이지. 응? 자네, 그때 그게 혹시 명……은 아니겠지?”
“아닐세!”
계소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미는 기분이었다. 언제까지 이러려고!
“아니군. 휴!”
영원은 이번엔 채찍으로 계소영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잘 듣게. 자네가 품은 그 생각, 잊게. 절대로 가인에게 말하면 안 되네. 절대로! 다른 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아. 정 답답하면 날 찾아오게. 말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가인이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하거든, 자네 그 시 어쩌고 있잖은가. 시라도 읊으면서 대충 얼버무리게. 명심하게. 절대로 인정하면 안 되네. 죽어도 안 돼. 들었나?”
“자네 지금…….”
계소영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영 칠야, 조금 정상적으로 굴면 안 되나?
“자네의 종신대사, 큰일을 위해서 이런 말도 하는 걸세!”
영원이 엄숙하게 말했다. 계소영은 영원이 또 쿡쿡 찌르는 채찍을 탁, 쳐냈다.
“무슨 헛소린가. 속마음은 무슨 속마음. 이왕, 이왕 승낙한 이상 당연히 잘해야지. 내가 만약…… 나, 계소영이 아무리 그래도 연약한 여인을 괴롭히진 않네!”
영원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좋다! 사내라면 이래야지. 됐네. 얼른 가게, 얼른. 서둘러!”
영원은 저쪽으로 말을 몰아 길을 피해 주면서 계소영의 말 궁둥이에 채찍을 내리쳤다. 말이 튀어 나가자 계소영이 서둘러 고삐를 잡으며 몸을 숙였다.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사람이 오가는 큰 거리에서 말이 놀라 사람이 다치면 어쩌려고?
계소영이 말 고삐를 제대로 잡았을 때는 벌써 이신과 약속한 장소에 가까워졌다. 영원이 채찍질로 제가 잡아먹은 시간을 돌려준 셈이었다.
막 도착한 이신은 얼굴이 살짝 붉어지고 이마에 눈에 띄게 땀이 맺힌 계소영을 보고 놀랐다가 이내 웃으며 물었다.
“계 형, 왜 이리 급하게 달려온 건가.”
“그게 아닐세!”
이신의 말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계소영에겐 남다르게 들렸다. 명가 낭자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달려온 거냐고 묻는 것으로 들렸다.
“조금 전에…….”
계소영은 해명하려다가 영원과 나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속마음 이야기도 나올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신은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이었다.
“조금 늦게 나와서 서두른 걸세.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않나.”
계소영은 해명을 삼키고 가인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는 영원의 말을 빌려 얼버무렸다. 이신은 길게 아, 하고 대꾸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머리를 돌려 계소영과 함께 반루로 향했다.
이신과 계소영이 앞뒤로 반루 대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자 장궤가 장삼 앞자락을 들고 조르륵 달려 나왔다.
“대야, 계 공자. 안으로 드시지요. 대낭자와 낭자 몇 분이 대상국사에서 공양 드시러 오셨습니다. 대야도 오신다고 하시기에 별실을 비워뒀습니다. 대야, 계 공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장궤가 더할 나위 없이 싹싹하게 두 사람을 이끌고 대당으로 들어갔다. 계단 앞에서 이신이 웃으며 물었다.
“어느 별실로 준비했는가? 나와 계 공자가 알아서 올라가겠네. 일 보게.”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야, 상견환(相見歡: 만나는 기쁨)입니다.”
장궤는 이신과 계소영이 계단을 올라가는 걸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일 보러 갔다.
계단 위로 올라서던 이신이 걸음을 멈췄다.
“자네 먼저 가게. 볼일 좀 보고 가겠네.”
계소영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별실 상견환으로 곧장 걸어갔다. 반루에 자주 와서 매우 익숙했다.
계소영이 별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을 등지고 창가에 서 있던 명 삼낭자가 재빨리 돌아보더니 계소영인 걸 보고 순간 당황했다.
“계 공자…….”
명 삼낭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조금 비틀거리며 무릎을 구부리고 또 구부렸다.
“내가…… 잘못 들어왔습니다.”
계소영 역시 잠시 당황하다가, 순간 예정된 우연한 만남임을 깨닫고는 허둥거리며 중얼거렸다.
“천선자라던데…….”
“상견환이에요.”
마찬가지로 허둥거리는 계소영을 보며, 막무가내로 뛰던 명 삼낭자의 가슴이 조금 차분해졌다. 계소영이 그러냐고 대답하면서도 아직 공수한 자세로 서 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