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400화 (400/463)

400화: 더럽혀진 우물

왕 어멈이 분부받고 밖으로 나간 뒤, 곡 대내내는 느긋하게 차를 마신 후 잔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꾹꾹 눌렀다. 그런 다음에야 춘연을 불러서 낭창낭창 일어서며 문안 올리러 진 부인에게 가자고 분부했다.

춘연의 두꺼운 쪽빛 솜옷, 솜바지는 이미 쪽빛 무명천 옷과 바지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은 두꺼운 솜옷에서 솜을 뺀 것뿐이었다. 대내내가 근검절약으로 집안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으니까.

춘연은 고분고분 곡 대내내 뒤를 따라 진 부인 거처에 들어갔다. 문지기 어멈은 저택에 침입한 밤 고양이를 보는 눈빛으로 수시로 곡 대내내를 힐끔거렸다.

올봄에 진 부인 거처의 삼등 시녀와 허드렛일하는 시녀 중에 나이 찬 아이들을 혼인시켜 내보낸 후로 사람을 더 들이지 않았다. 사람을 들여야 한다고 진 부인이 입만 열면 곡 대내내는 은자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곡 대내내가 은자 이야기만 하면 진 부인은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 쓸 곳도 없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내자 했다. 밥 먹일 입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람이 적으니 당직 설 사람도 줄어서, 봉운은 일단 진 부인의 기거를 신경 쓰고 문 앞에 서서 휘장을 지키고 기별 넣는 시녀는 모두 줄였다.

곡 대내내가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진 부인은 청서가 낳은 삼가아를 안고 싱글벙글 아이를 어르고 있었다. 청서는 삼가아 뒤에 지키고 서서 삼가아가 웃을 때마다 따라 웃었다. 강완과 강녕은 한 사람은 딸랑이를 들고 한 사람은 헝겊 인형을 들고 아이 앞에 바짝 다가가 어르고 있었다.

곡 대내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삼가아를 제외하고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술법에 걸린 듯이 겁에 질린 얼굴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곡 대내내를 바라봤다. 곡 대내내는 손수건을 꺼내 힘껏 흔들었다.

“어머나, 단란한 가족의 정을 즐기고 계셨네?”

“네가 여기엔 왜 온 것이냐?”

진 부인은 얼른 삼가아를 청서에게 안겨 주었고 청서는 삼가아를 안은 채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오늘 나오기 전에 황력을 보지 않았더니 이 액신과 마주치고 삼가아를 보이고 말았다. 혹시라도 눈에 거슬리면…….

“돌아와. 왜? 내가 오니까 나가려고 해? 지금 날 타박하는 건가?”

곡 대내내가 눈이 찢어져라 청서를 노려봤다. 오늘 하려는 일은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금 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돌아갈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대내내,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청서는 삼가아를 품에 꼭 안고 어느새 눈물을 흘렸다. 곡 대내내는 그녀를 흘겨봤다. 오늘은 큰일이 있어서 온 것이었고 큰일이 중요했다. 곡 대내내는 화를 억누르며 앞으로 다가가 삼가아를 바라봤다.

“어머나, 통통한 것 좀 봐. 귀여워라.”

곡 대내내가 안으려고 손을 내밀기도 전에 청서가 삼가아를 안은 채 털썩 무릎을 꿇고 쿵쿵쿵 머리를 조아렸다.

“대내내, 제가 잘못했어요. 죽여 주세요. 삼가아는 봐주세요. 삼가아는 정말로 살이 찐 게 아니에요. 제발요, 대내내. 제발요, 제발요.”

“일어나라! 내가 여기 있는데 이것이 감히 널 어찌할 수 있겠느냐?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망할 것! 이 재수 옴 붙은 것! 이 망할……. 강가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업장을 집에 들였을까.”

진 부인은 화항 탁자를 내리치며 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이번엔 정말로 너무 상심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대내내, 별일 없으면 이만 돌아가세요. 별일 없으면 부인 거처에 오지 말라고 세자야도 그러셨잖아요.”

봉운은 마음 아픈 듯 진 부인의 등을 쓸어주며 가차 없이 곡 대내내를 밖으로 내몰았다. 곡 대내내는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 봉운을 노려보며 손수건을 휘둘렀다. 그때 곡 대내내 뒤에 서 있던 춘연이 다급하게 다가가 청서를 몰래 일으켜 세우고는 어서 달아나라고 눈짓했다. 그런데 삼가아가 입을 벌리고 울어대고 있어서 몰래 달아날 수가 없었다. 청서가 한 걸음 내딛자마자 곡 대내내가 다시 불러 세웠다.

“멈춰! 내 말 못 들었어? 다들 꼼짝 말고 여기 있어!”

청서는 삼가아를 품에 꼭 안고 문틀에 기댄 채 겁에 질려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곡 대내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느긋하게 앉아서 저쪽에 웅크린 반월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했다. 반월은 얼른 봉운을 바라봤다. 봉운은 곡 대내내를 노려보느라 반월의 시선을 깨닫지 못했다. 반월은 지체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른 자리를 옮겨 곡 대내내의 차를 내렸다.

차를 막 내렸을 때 왕 어멈의 목소리가 밖에서 울렸다.

“대내내 여기 계세요? 급하게 고할 일이 있습니다.”

“들어와서 이야기하게.”

곡 대내내는 반월이 건넨 차를 받지도 않고 단정하게 앉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봉운을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온 왕 어멈은 공손하게 서서 아무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룁니다, 대내내. 가노인 유재가 대내내와 부인을 뵙길 청합니다. 봉운 낭자와 예전부터 마음이 통한 사이이니, 봉운을 달라고 청을 올리러 왔답니다.”

“뭐라고요?”

봉운이 날카롭게 고함쳤다. 이게 무슨 헛소리람? 유재가 뭔데? 그런 인간과 정을 통할 바에 차라리 머리 박고 죽고 말지!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불러들여서 물어볼까요?”

곡 대내내가 빙그레 웃으며 지극히 유순한 말투로 진 부인에게 물었다. 진 부인이 얼이 빠져서 미처 반응하기 전에 강완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봉운을 위아래로 살폈다. 강녕은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청서는 이제 겁이 나지 않았다. 삼가아가 아직 울어 대자 얼른 옷깃을 들어 삼가아의 입에 쑤셔 넣어 울음소리를 막았다. 보아하니 오늘 벌어질 일은 그녀하고 삼가아와는 상관없는 듯했다. 훌쩍이며 울음을 그치는 삼가아의 모습에 청서는 크게 안도했다.

춘연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봉운을 바라봤다.

“어머니, 불러서 물어봐요!”

진 부인이 아직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자 강완이 나섰다. 딸이 입을 열자 진 부인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해라.”

“들이렴.”

곡 대내내가 분부하자 유재를 안으로 들인 왕 어멈은 모두를 향해 빙 돌며 예를 올리고는 곡 대내내 뒤로 물러섰다. 춘연과 나란히 서서는 눈 감고 귀 닫은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잡념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유재는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조아렸다가 머리를 들 때마다 힐끔거리는 그 눈빛이 강완을 향했을 때, 강완은 두꺼비가 제 몸을 핥는 듯이 역겨워서 부르르 진저리쳤다.

“네가 유재냐?”

곡 대내내는 샛눈을 뜨고 유재를 바라보다가 봉운을 가리켰다.

“봉운과 혼인하고 싶다고? 봉운 낭자는 부인이 아끼는 사람이라는 걸 몰라? 왜 봉운과 혼인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것인지 말해 보아라.”

봉운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게 사람을 들이라고 했을 때 이미 살짝 안도했다. 불러서 확실히 물으면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될 테니까.

유재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봉운을 바라보다가 목구멍을 그릉거리며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아룁니다, 대내내. 소인 봉운과 진작 마음이 통했고 이미 부부가 되었습니다. 대내내와 부인께 정식으로 명분을 내려주십사 빌러 온 것입니다.”

봉운은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뭐라고? 허튼소리…….”

“허튼소리라니. 우리가 좋아지낸 지 벌써 1년이다. 밤에 사흘돌이로 내 집에 왔으면서. 내가 없으면 잠도 오지 않는다고 했잖냐.”

유재는 침을 흘릴 것 같은 눈빛으로 봉운을 바라봤다.

“너! 허……, 허……, 허튼…….”

봉운은 기가 차고 수치스러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허튼소리 하지 마! 부인과 대내내도 계셔! 봉운이 네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반월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곡 대내내가 싸늘하게 바라봤고 그 시선에 반월은 더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제 물건이 크고 일을 잘한다고 했습니다. 침상에 오를 때마다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유재는 정말로 대답했고, 곡 대내내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봉운을 위아래로 훑다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아이고머니나’ 하고 외쳤다.

왕 어멈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춘연도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봉운을 위해 기도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강녕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강완의 소맷자락을 당겼다.

“언니, 물건이 크고 일을 잘하는 게 뭐야?”

“염치없는 것!”

진 부인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이 강녕의 머리 위로 손수건을 휘두르고는, 닥치는 대로 찻잔을 들어 올려 봉운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수치심을 모르는 천것! 염치없는 것! 염치도 없이!”

아이를 꼭 안고 유재와 봉운을 번갈아 보는 청서의 눈에 고소한 기색이 스쳤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운을 겪는데, 이제 봉운 차례구나!

“부인,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부인, 저는…….”

찻물을 흠뻑 뒤집어쓴 봉운은 진 부인 앞에 무릎 꿇고 강물을 이룰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그런 적 없어요. 부인. 부인, 저는 부인을 10년 동안 시중들었어요. 절 아시잖아요. 그런 적 없어요. 없어요…….”

“알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지난번에 안 그래도 부인께 네가 나이 찼으니 더 미루다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다. 역시나, 발정이 나도 보통 난 게 아니구나.”

곡 대내내의 말에 진 부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서 헐떡거리면서 봉운을 가리켰다.

“평소에 내가 널……. 내 체면까지 다 먹칠했구나! 이 천한 것! 개돼지 같은 것!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개돼지처럼 발정이 나서! 천것! 여봐라! 저것을 끌어내라. 끌어…….”

“부인, 큰일도 아니랍니다. 서로 마음이 맞았다는데, 그냥 맺어주세요.”

곡 대내내가 말을 자르자 누구를 향해 혀를 차려는 건지, 진 부인이 크게 혀를 찼다.

“맺어줘? 저런 천것을 맺어주면, 저택의 기강은 어쩌고? 밤마다 즐기라고 맺어줘? 여봐라…….”

“부인, 공덕을 쌓으시는 분이잖아요. 그냥 맺어주세요. 게다가 둘 다 가노라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 돈 몇 푼은 받고 팔 수도 있어요.”

곡 대내내의 악독한 말에 춘연과 왕 어멈은 진저리쳤다.

“어머니, 새언니 말이 맞아요.”

강완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떠는 어머니를 보면서, 이제 자기가 나서서 상황을 주지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꺼져라!”

진 부인은 던질 것이 없자 손수건을 봉운을 향해 내던졌다.

“어서 부인께 감사 인사 올리고 네 처를 데리고 돌아가라.”

곡 대내내가 즐거운 목소리로 분부하자 유재는 그야말로 미칠 듯이 기뻐하며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쿵쿵 고개를 찧었다. 양손, 양발을 다 써서 기어 일어나서는 기절할 듯이 우는 봉운에게 달려가 봉운 가슴팍의 보드라운 살집 두 개를 꽉 쥐듯이 안고서는 침을 질질 흘리며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상방 문 앞까지 끌려 나간 후에야 정신을 차린 봉운은 유재를 힘껏 걷어차고는 더 해명하려고 진 부인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유재가 양팔을 뻗고 두 눈을 빛내며 앞을 가로막자 옆으로 피하다가 기둥을 들이박은 봉운은 방향을 틀어 후원의 월동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월동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수방 옆 우물을 발견한 그녀는 다리를 들고 올라가더니 우물 안으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시 건져냈을 때, 봉운은 이미 숨이 끊어졌다.

부인은 머리끝까지 화를 냈다.

멀쩡한 우물을 이 천것이 더럽히다니! 누가 천것 아니랄까 봐, 죽어서도 속을 뒤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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