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기회
이신은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거행해야 하는 행동파였고 점심때 바로 한림원과 그리 멀지 않은 주루로 계소영을 불렀다.
영원이 한 말을 간단히 이야기하자 계소영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이신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봤다.
“속사정이 있는 건가? 자네와 명가 낭자가 만난 적 있다고 영칠이 그러던데.”
“만났네.”
계소영은 한참 만에 나직이 인정했다. 영원이 이신을 통해 이런 말을 하다니, 상기시키려는 걸까, 경고하려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나?”
이신이 다시 물었다. 계소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닐세.”
계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손에 쥔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날 돌아간 이래 영원이 한 말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명가와 계가, 명가 낭자와 자신, 확실히 매우 어울렸다. 다음 날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했다.
“계 형, 영칠이 떠난 후 나도 이 혼사를 곰곰이 생각했네. 전 노부인, 그리고 아마도 묵 승상도, 이 두 분만 빼면 다른 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배필이네. 하지만 전 노부인과 묵 승상은 평범한 분이 아니니 반드시 신중해야 하네.”
“나도 아네.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고.”
이신이 진지하게 귀띔하는 말에 계소영이 대답했다. 정말 고민이 그것뿐이면 좋겠지만.
“하지만 영칠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묵 칠소야는 명가 낭자와 혼인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고, 명가 낭자는 서러워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라니. 그것참……. 영칠이 이런 일에 마음 쓸 줄은 몰랐네. 다만, 영칠이 어쩌다가 자네와 얽힌 건가?”
이신이 다른 쪽에 관심을 보이자 계소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우연한 만남에 영칠도 그 자리에 있었네. 명가 낭자가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 그런데 명가 낭자가 얼굴을 붉힌 게 나 때문이라고 우기지 않나. 휴. 어찌 됐든, 영칠이 어떤 사람인지 자네도 알지 않나. 명가 낭자가 나와 무슨 일이 있다고 물고 늘어지는 걸세.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나 말일세.”
“따지고 보면 남녀 사이의 일은 자네와 나에 비교하면 영칠이 확실히 식견이 넓겠지. 전문가가 맞네.”
이신은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문득 매우 거북한 느낌이 몰려들었다. 식견이 넓다라. 예전에 식견이 넓었다면, 그럼 앞으로는?
“이 형도 믿다니…….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군.”
계소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믿어서 자네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닐세.”
이신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음 지었다.
“내 누이가 한번은 이런 우스갯소리를 했네. 삼정갑(三鼎甲: 전시殿試에서 수석으로 뽑힌 세 명)과 나까지 해서 네 사람 중에 온 경성 낭자의 반이 계 탐화와 혼인하고 싶어 하고 절반의 절반이 여 장원, 그 나머지 중에 진 방안이 7할, 내가 3할이라고 했네. 누군가 계 탐화를 마음에 품었다고 해도 나는 전혀 의외로 여기지 않는다네.”
“영매가…….”
계소영은 흠칫한 듯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농담을 참 잘하는군.”
“참으로 거침없지. 하하하. 어찌 됐든 이 혼사가 문제 될 점이라고는 전 노부인과 묵 승상이 조금 껄끄러운 것뿐이네. 잘 생각해 보게, 계 형. 아니면, 명가 낭자를 한 번 만나보겠나? 영칠 그치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확인하고. 영칠 그치, 완전히 믿을 순 없는 사람이네.”
계소영은 고개를 숙인 채 넋을 잃은 듯 빈 찻잔을 빙빙 돌렸다. 무수한 생각이 마음속에 맴도는 것 같은데 머리가 텅 비었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정리되지도 않았다. 슬픈 것도 아니고, 허무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못 견딜 정도로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별일도 아닐세. 우리 사이에 평소에 못 하는 말도 없지 않나. 그래서 해 본 말일세.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못 들은 셈 치게.”
이신은 계소영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넋을 놓고 있는 걸 보고 얼른 말을 바꿨다.
“역시 한 번 만나보는 게 좋겠네.”
계소영이 별안간 대답하자 이신은 멈칫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겠네. 내가 준비하겠네. 우연한 만남을 한 번 마련하지. 계 형, 걱정하지 말게.”
이신은 계소영과 헤어진 다음 오후에 연경궁에서 한 시진 동안 오황자를 가르치고 한림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말에 탄 후에야 영원과 계소영의 일을 다시 떠올리고 고민했다.
영원이 찾아온 이유는 분명 어제 동저아가 그를 만나지 않은 일로 할 말이 있어서라고 여겼었다. 그 일은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원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저아가 만나주지 않은 것을 아예 안중에 두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인지.
집으로 돌아온 이신은 장 태태에게 문안을 올리고 나와서 문 이야 거처로 향하다가 걸음을 돌려 이동의 거처로 향했다. 일단 계소영과 명가 낭자가 만나는 일을 누이와 상의한 다음에 이야를 만나 영원 일을 상의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신이 계소영과 명가 낭자의 일을 입에 올리자 이동은 멈칫하다가 곧바로 물었다.
“오라버니 생각인가요, 아니면 누군가 이 일을 거론했나요.”
“영 칠야가 일부러 날 찾아왔더구나. 계 형의 의중을 한 번 물어봐 달라고. 나도 좋은 혼담이라고 생각한다.”
이신이 대답하고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됐네요. 모레 대상국사에서 대자비 법회가 열려요. 예전대로라면 묵가 여식솔들은 모두 참석할 거예요. 명가 낭자를 만나게 되면 기회 보고 이야기할게요. 명 삼낭자가 좋다고 하면 반루에서 만나요. 명가 낭자와 묵가 낭자를 데리고 공양 먹으러 갈게요. 우연히 만날 기회를 만들어 봐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겠구나! 그럼 그렇게 하자.”
볼일을 마친 이신은 공수하고 나오다가 다시 돌아섰다.
“그날 밤……. 됐다. 다른 일은 없다. 일찍 쉬어라.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구나.”
이동은 이신이 그날 밤 이야기를 꺼내자 가슴이 철렁했다가 됐다고 하자 다시 안도했다. 이신이 나간 후에야 오라버니가 그날 밤이라고 한 건 자기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떻게 된 걸까. 며칠 동안 마음이 평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점심 무렵 진왕부에서 돌아온 강환장은 며칠 동안 경성 주변 하도 일로 출타해야 하는 일을 곡 대내내에게 분부했다.
올해 겨울 하도 공사 일을 그가 맡았다. 이틀 내내 비가 줄곧 내렸고 흠천감에서 장마가 곧 시작된다고 하니 공부는 관례대로 장마 전에 수리하고 공사해야 할 하도를 순시하라고 명했다.
곡 대내내는 강환장이 최소 사나흘, 길면 열흘 넘게 출타한다는 말에 강환장의 짐을 챙기라고 서둘러 분부했고, 수녕백부 앞에 세워둔 공부의 공무 마차까지 강환장을 몸소 배웅했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활짝 미소 지었다. 기회가 왔다 싶었다.
곡 대내내는 치맛자락을 흔들면서 곡란원으로 가는 길에 벌써 왕 어멈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왕 어멈은 영광스럽게 수녕백부의 일등 관사 어멈으로 승진했으나 아직도 부엌의 대권은 손에 꼭 틀어쥐고 있었다. 이 저택을 통틀어서 돈이 나올 곳이라고는 부엌뿐이어서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왕 어멈이 잰걸음으로 곡란원으로 뛰어 들어가자 곡 대내내는 손가락을 까닥여서 춘연을 비롯한 모두를 물렸다.
“세자야가 적어도 사나흘은 걸려야 돌아오신다고 하시네. 마침 잘 되었지. 자네 어서 가서 모아야 할 사람을 모으고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해. 잘 들어, 혹시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흥!”
곡 대내내의 싸늘한 콧방귀에 왕 어멈은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장담한 후에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서 종복들이 묵는 각문까지 단숨에 달려가서 문틀을 부여잡고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욱신욱신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대내내가 분부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조마조마해서 매일 악몽을 꾸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이었다.
후각문에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왕 어멈은 오래 서 있지 못하고 문틀을 붙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굳은 얼굴로 자기 집으로 향했다.
요즘 아무런 움직임이 없길래……. 내 바람이었을 뿐이구나!
대내내가 그냥 해본 말이기만 바랐다. 그냥 해본 말이고 시간이 지나면 잊길 바랐다. 갈수록 그런 마음이 짙어졌는데 오늘 갑자기 또 움직일 줄이야.
왕 어멈은 마음이 혼란해서 얼굴이 갈수록 굳었다. 거처로 뛰쳐들어간 후에 문을 걸어 잠그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문에 기대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듯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가 간이 작아서 그런 거겠지, 무슨 일이 있겠어. 그냥 혼인 상대를 마련해주는 것뿐이잖아. 본인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좋지, 뭐. 나쁜 일은 아니야…….
왕 어멈은 뺨을 철썩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못난 것. 요즘 세상은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힐 뿐이야! 게다가 대내내의 명이야! 주인이라고, 주인! 주인의 명령인데 내가 뭘 어쩌겠어? 되먹지 못한 비열한 일이지만, 내가 무슨 상관이야!
이런 일로 고민하다니, 내가 미쳤지!
왕 어멈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주인의 명령이야! 나는 명령대로 하기만 하면 돼!”
왕 어멈은 이를 갈며 몇 번이고 반복하고는 드디어 진정했다. 자세를 바로 하고 귀밑머리를 쓸어넘기고 매무새를 바로잡고는 손수건을 탁탁 털고는 크흠,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곤 유재가 사는 옆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유재, 있나? 할 말이 있단다.”
“갑니다, 갑니다!”
안에서 거의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더니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문이 안에서 열리고 유재가 얼굴을 내밀었다.
유재의 얼굴은 처음 볼 땐 그래도 괜찮은데 볼수록 추하고 볼수록 흉악해 보였다. 정말이지 강부 종복 중에 누구나 고개를 돌릴 만한 걸작이었다.
“아이고! 왕 어멈, 어쩐 일로…….”
유재는 왕 어멈인 걸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숙이고, 온몸을 마구 비틀어댔다.
“쓸데없는 소리 할 것 없다. 어서 나와라. 안에서 널 부르신다.”
왕 어멈은 얼굴을 단단히 구긴 채 말했다. 대내내의 분부가 아니었다면 유재 같은 얼굴은 잠시도 쳐다보기 싫었다.
“아이고! 그 일 때문인가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옷 좀 갈아입고 단장해야지요…….”
유재의 쥐새끼 같은 두 눈이 빛났다.
“얼른 가! 행여 조금이라도 늦으면…… 넌 죽은 목숨이다!”
왕 어멈이 이를 갈 듯 외쳤다. 좋은 소식을 미리 귀띔해주지 말걸.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이 얼굴만 봐도 역겨워서 죽을 것 같은데!
“예, 예. 서두르라시면 서둘러야지요. 암요.”
유재는 성큼 밖으로 나와서 문도 닫지 않고 왕 어멈 쪽으로 몸을 기댔다.
“법도를 지켜야지!”
왕 어멈은 얼른 옆으로 피하면서 유재의 구부정한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내 뒤에서 따라와라. 저택엔 저택 법도가 있다!”
“예, 예, 예.”
타박받아가며 자라온 유재는 타박받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왕 어멈은 단 한 순간도 유재를 쳐다보기 싫은 듯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